역사

한 상고사 주요 보완 내용 (2) - 4세기 전반 고구려의 중국 영토 탈취설

역사회복 2025. 2. 15. 16:01

(5) 4세기 전반 고구려의 중국 영토 탈취설

 

중제·일제·강단유사사학이 사기 쳐야만 하는 이유

강단유사사학은 4세기 전반기에, 평양에 있던 낙랑군과 황해도에 있던 대방군을 고구려가 차지하였고, 낙랑군과 대방군은 한반도에서 요서 지역으로 이동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이를 낙랑군과 대방군의 교치라 한다. 강단유사사학이 한국인이라면 ‘고구려의 영토 확장’이라 할 것이다. ‘낙랑군 교치’라는 말은 중국 역사학자가 하는 말이다. 강단유사사학은 그들의 사기질을 숨기기 위해 ‘낙랑군 교치’라는 어려운 중국말을 한다. 소위 낙랑군 교치설은 낙랑군 평양설을 지키기 위한, 더욱 치졸한 거짓말이다.

조선총독부는 낙랑군과 대방군을 대동강 남쪽과 황해도에 가져다 놓았는데, 그것이 계속 유지되는 경우 뒤의 역사와 이어지지 않기 때문에 없애야 했다. 그래서 찾다찾다 찾은 근거가 삼국사기 313년 10월 미천왕의 낙랑군 공격 기사, 314년 9월의 대방군 공격 기사, 313년 4월 이전 어느 시점이라 기술된 자치통감 장통의 모용외로의 귀부 기사이다. 그러나 이들이 제시한 사료는 전혀 낙랑군의 이동을 입증하지 못한다.

 

억지 쓰기만 반복하는 강단유사사학

고구려의 313년 10월 낙랑군 침략 기사와 314년 9월 대방군 침략 기사는 말 그대로 침략 기사이지 영토 획득 기사가 아니다. 영가의 난으로 서진이 혼란스럽자 고구려가 요동고새 부근의 낙랑 대방군을 침략하였지만 영토화하지는 못하였다. 고구려가 낙랑군을 영토화한 시기는 후연을 멸한 407년이다. 고구려가 407년에 하북성 중부에 있었던 서진의 유주와 평주를 영토화하여 초대 유주자사로 진을 파견하였음이 덕흥리고분 묵서명과 광개토대왕릉비문 407년조에 의해 입증된다. 위는 장수왕을 도독요해제군사(都督遼海諸軍事)로 인정하는데, 요해는 요하(중역수) 주변의 땅인 요하 북쪽의 유주와 남쪽의 평주를 의미하므로, 이는 위가 이 지역을 고구려의 영토로 인정하였음을 의미한다.

『자치통감』에서 장통이 모용외에 귀부한 시기는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아무리 늦어도 313년 4월 이전이다. 『자치통감』의 본기사는 왕준과 단질육권 모용외에 관한 기사이다. 初 이하는 본기사와 관련된 사실을 설명하는 부분으로 313년 4월 이전에 일어났던 사건에 관한 이야기인데, 고구려의 낙랑군 공격은 313년 10월이다. 장통과 그를 따르는 세력이 도망갔다면 고구려는 낙랑군을 점령하면 되는데, 포로를 잡아 귀환했다. 이는 모용외의 세력이 강하여 낙랑군을 영토로 할 수 없었다고 보아야 개연성이 있다. 또 『삼국사』에 319년 서진의 평주자사 최비가 고구려, 단씨, 우문씨와 연합하여 모용외를 공격하려 하였으나 모용외가 연합을 와해시키고 최비를 몰아내어 요동을 장악하였다고 기록되어 있고, 모용외가 320년에 동진으로부터 안북장군·평주자사(安北將軍平州刺史)를, 321년에는 도독유평이주동이제군사를 제수받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모용외가 낙랑군 대방군의 점유자가 됨을 알 수 있다.

『자치통감』은 고구려와 장통은 계속 싸웠으나 어느 한 쪽이 결정적 승리를 하지 못했다고 한다. 결정적 패배를 하지 않았는데 자신의 근거지를 내준다는 것은 지극히 예외적인 일이다. 장통이 고구려에 결정적인 패배를 당할까봐 모용외에게 의탁하여 모용외의 보호 아래 들어갔다고 보는 것이 개연적이다. 또한 사람이 국가의 중요자원으로 취급되어 전쟁에서 승리하면 사람을 약취하는 것이 관례인 당시 상황에서, 장통이 1천여 가를 이끌고 대동강 남쪽에서 대동강 북쪽의 고구려를 지나 요서로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당시 사람은 국가의 중요자원으로 전쟁에서 승리하면 사람을 끌고 오는 것이 주요 전과인데, 고구려가 1천여 호라는 국가자원이 없어지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는 것은 강단유사사학과 같은 유사사학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강단유사사학은 이러한 반박이 두려웠는지, 낙랑이 해상으로 요동 산동지역과 왕래하였다는 허위사실을 제시하며 해상을 통한 도주 가능성을 주장하고 있다. 이는 유사사학이 항상 하는 근거 없는 억지의 반복에 불과하다.

자치통감의 기사를 올바로 해석하면, 낙랑군과 대방군에서 계속 전쟁이 일어나 인구가 감소하여 당시 1천여호밖에 남아 있지 않았고, 장통이 독자 세력이어서 고구려의 침략을 받는다고 생각한 낙랑 주민 왕준이, 이러다가는 고구려에 망할 것 같으니, 당시 평판이 좋았던 모용외 밑으로 들어가자고 장통을 설득하여 낙랑군과 대방군이 모용외의 것이 되고, 장통은 독자세력에서 모용외의 지방관리 즉 낙랑태수로 신분이 변동되었다는 것이지, 사람을 끌고 이동하였다는 것은 아니다. 또 이 기사 자체가 낙랑군 평양설을 부정하고 있다. ‘요동의 장통’이라 하여 낙랑군과 대방군이 요동에 있음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강단유사사학은 위 『자치통감』의 기사를 ‘요동 출신의 장통’이라 날조하여 해석한다. 사서의 기록을 근거없이 마음대로 편집 왜곡하는 것은 유사학자들이 하는 바로 그 행태이다.

 

고구려가 중국의 영토를 탈취할 수 없는 당시 상황

4세기 전반은 고구려가 중국으로부터 영토를 탈취하여 유지할 수 있는 상황이 절대 아니다. 미천왕이 313년부터 315년까지 낙랑 대방 현도군을 공격하였지만, 319년에는 모용외가 공격하자 고구려가 화해를 청하였고, 320년에는 고구려가 요동군을 공격하였으나 패배하였고, 331년 이후 고국원왕 시에는 일방적으로 전연에게 당하고 있다. 339년 모용황이 신성을 침공하자 화해를 요청하였고, 342년에는 수도인 환도성이 함락되어 미천왕의 위패를 탈취 당했으며 왕비 및 왕모 주씨, 그 외 5만여 명이 인질로 잡혀갔고, 343년 왕의 동생을 보내 사죄하고 미천왕의 위패를 돌려 받았다. 343년에는 전연이 두려워 수도를 옮겼다. 345년에는 남소성을 뺏기고, 349년에는 고구려로 망명한 송황을 전연이 무서워 전연으로 다시 보냈고, 결국 355년 전연에 굴복하며 조공관계를 맺고 왕비와 왕모를 귀국시켰다.

4세기 전반 이전까지, 강단유사사학에 의하면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의 산간에 있는 소국이다. 따라서 고구려가 전연에 핍박 당하는 4세기 전반에 갑자기 대동강 남쪽과 황해도 평야지대를 중국으로부터 탈취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서진말 혼란기를 틈타 그렇게 하였더라도 전연이 자기들 땅이었다고 바로 뺏어갔을 상황이다. 중국의 혼란기에도 중국 왕조가 유지하고, 서진이 유지한 낙랑군이었다면, 전연은 漢 조위 서진보다 낙랑군과 훨씬 가까운 위치에 세워진 나라였으므로 낙랑군을 지키지 못할 가능성이 없다. 설사 강단유사사학의 주장대로 미천왕 때 뺏겼더라도 고국원왕 때 바로 찾아갔을 것이다. 서진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 겨우 고구려가 정복한 땅이라면 고구려를 거의 속국화한 전연이라면 바로 되찾아가야 정상이다. 강단유사사학의, 400여년간 중국의 영토인 땅을 고구려가 가장 약한 시점에서 중국으로부터 탈취한다는 주장은 개나 돼지도 속지 않을 거짓말에 불과하다.

 

『진서』 「지리지」는 313년 낙랑군의 이동을 부정하고 있다

『진서(晉書)』 「지리지」는 낙랑 대방 현토 요동 창려를 평주라 하며 후한말 공손도 이래 평주의 위치가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서진이 316년에 망하고 동진이 418년까지 존속하였으므로 낙랑군이 이동하였다면 당연히 『진서』에 기록되어야 하나, 낙랑군이나 대방군의 이동은 전혀 기술되어 있지 않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낙랑군이 4세기 전반에 대동강 남쪽으로부터 요서로 이동하였다는 주장은 전혀 개연성이 없는 유사사학에 불과하다. 4세기 전반 고구려의 중국 영토 탈취설은 낙랑군 평양설이라는 사기를 유지하기 위한 또 다른 더 심각한 사기일 뿐이다. 낙랑군이 본래 중국 왕조의 영토로서 4세기 전반까지 계속 보정시에 있었다고 보아야 위에서 인용한 사료들이 개연성 있게 설명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