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한 상고사 주요 개정내용 (1)- 고구려 연호의 변동

역사회복 2025. 2. 14. 10:46

13. 고구려 연호의 변동

 

중국 공산당 정권 수립 후 북경부터 요양까지 고구려 유물 유적이 대규모로 발굴되었다. 모택동 등 공산당 지도부도 요하 동쪽부터는 조선이라 생각했으나, 그러한 생각과 달리 본고의 주장처럼 북경부터 고구려 영토인 증거들이 속속 드러났다. 그래서 중국은 1980년부터 본격적으로 역사 날조를 시작했다. 북경부터 요양까지의 지역에서 발견된 고구려 분묘를 서진이나 삼연(전연, 후연, 북연)의 묘로 날조했다. 서진과 삼연은 영정하 이남에 있었으므로 영정하 이북의 고구려 영토에 이들의 분묘가 있을 이유는 전혀 없다. 그들은 조양의 분묘는 도굴범이 벽화를 불태웠다고 사기 친다. 벽화가 고구려 벽화와 완전히 같거나 벽화에 있는 글자가 고구려의 것임을 증명하였을 것이기 때문에 벽화를 태웠을 것이다.

서진이나 삼연의 것으로 날조한 분묘에서 발견된 연호 자료를 활용할 수 있다면 고구려의 연호를 거의 완벽하게 알 수 있을 것이지만, 중제유사사학이 이들 자료를 은폐하거나 날조하여 이용할 수 없으므로, 본고에서는 평안도와 황해도의 분묘에서 발견된 기년명 벽돌을 중심 자료로 하여 고구려의 연호를 추정한다.

 

(1) 강단유사사학의 기년명 벽돌 연대 날조

 

강단유사사학과 강단유사고고학은 평안도와 황해도를 낙랑군과 대방군 지역으로 보아 이 지역에서 발견되는 유적과 유물의 주체를 중국인이나 중국계 이주민이라 주장하며, 벽돌에 쓰인 연호를 중국 왕조의 것으로 보고 벽돌이 출토된 고분의 연대를 추정한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엔 일제·중제유사사학의 소설을 향한 무한한 충성심 외에는 근거가 전혀 없다. 강단의 연대 추정 내용은 다음과 같다.

 

광화5년명 전, 황해도 봉산군, 182(후한 靈帝 光和 5)

흥평2년명 전, 평안도 대동군, 195(후한 獻帝 興平 2)

정시9년명 전, 황해도 신천군, 248(조위 齊王 正始 9)

가평2년명 전, 황해도 신천군, 250(조위 齊王 嘉平 2)

감로명 전, 황해도 신천군, 256~259(조위 高貴鄕公 甘露 연간)

경원원년명 전, 황해도 신천군, 260(조위 元帝 景元 원년)

경원3년명 전, 황해도 봉산군, 262(조위 元帝 景元 3)

태시4년명 전, 황해도 신천군, 268(晉 武帝 泰始 4)

태시7년명 전(2), 황해도 봉산군, 271(晉 武帝 泰始 7)

태시10년명 전(2), 황해도 봉산군과 평안도 평원군, 274(晉 武帝 泰始 10)

태시11년명 전, 황해도 봉산군, 275(晉 武帝 泰始 11)

함녕원년명 전(2), 황해도 신천군, 275(晉 武帝 咸寧 원년)

함녕5년명 전, 황해도 신천군, 279(晉 武帝 咸寧 5)

태강원년명 전(2), 황해도 신천군과 봉산군, 280(晉 武帝 太康 원년)

태강3년명 전, 황해도 봉산군, 282(晉 武帝 太康 3)

태강4년명 전(5), 황해도 신천군 봉산군 등, 283(晉 武帝 太康 4)

태강7년명 전(2), 황해도 신천군, 286(晉 武帝 太康 7)

태강9년명 전, 황해도 안악군, 288(晉 武帝 太康 9)

원강원년명 전, 황해도, 291(晉 惠帝 元康 원년)

원강3년명 전, 황해도, 293(晉 惠帝 元康 3)

원강5년명 전, 황해도 안악군, 295(晉 惠帝 元康 5)

태안2년명 전, 황해도 신천군, 303(晉 惠帝 太安 2)

영흥3년명 전, 황해도 신천군, 306(晉 惠帝 永興 3)

영가명 전, 황해도 신천군, 307~312(회제 永嘉 연간)

영가7년명 전, 황해도 신원군, 313(회제 永嘉 7)

건흥4년명 전, 황해도, 316(민제 建興 4)

태녕5년명 전, 황해도 신천군, 323~325(동진 明帝 泰寧 연간)

함화10년명 전, 황해도 신천군, 335(동진 成帝 咸和 10)

건무9년명 전, 황해도, 343(후조 石虎 建武 9)

건원3년명 전, 황해도 신천군, 345(동진 康帝 建元 3)

장무이명 전, 황해도 봉산군, 348(동진 穆帝 永和 4)

건무16년명 전, 황해도 신천군, 350(후조 石虎 建武 16)

영화8년명 전, 황해도 신천군, 352(동진 穆帝 永和 8)

영화9년명 전, 평양시, 353(동진 穆帝 永和 9)

건시원년명 전, 황해도 신천군, 407(후연 모용수 建始 원년)

 

(2) 강단유사사학 연대 추정의 사기성

 

중국 연호의 불가능성

평안도와 황해도가 낙랑군과 대방군 지역이 아니었다는 것은 논외로 한다. 강단이 계속 억지를 부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주장엔 근거가 전혀 없기 때문에, 낙랑군과 대방군이 중역수 남쪽 지역이었다는 가장 중요한 증거 없이도 그들 주장은 사기임이 명백히 드러난다.

晉 武帝의 태시는 10년까지 있다. 그러나 태시는 11년이 있으므로 진 무제의 연호일 수가 없다. 동진 明帝泰寧4(326) 226일까지 있다. 그러나 태녕은 5년이 있으므로 동진 명제의 연호일 수 없다. 동진 成帝咸和9년까지 있다. 그러나 함화는 10년이 있으므로 동진 성제의 연호일 수 없다. 동진 康帝建元2년까지 있다. 그러나 건원은 3년이 있으므로 동진 강제의 연호일 수 없다. 후조 石虎建武14년까지 있다. 그러나 건무는 16년이 있으므로 후조 석호의 연호일 수 없다. 동진 穆帝永和12년까지 있다. 그러나 동수묘에 영화 13년이 나오므로 영화는 동진 목제의 연호일 수 없다.

그리고 태시 11, 태녕 5, 영화 13년은 중국의 어떤 왕조에도 없는 연호이다. 해의 간지가 을미로서 함화 10년은 중국 어느 왕조에도 없는 연호이다. 건무 16년은 후한 유수를 제외하고는 중국 어느 왕조에도 없는 연호이다. 해의 간지에 가 있는 해로서 건원 3년은 중국 어느 왕조에도 없는 연호이다.

또한 원강5년명 벽돌엔 元康五年八月十八日乙酉造라 쓰여 있는데, 그들이 주장하는 295818일은 丙子일이어서 원강이 晉 惠帝의 연호가 아님이 입증된다. 晉 惠帝 이외에는 전한의 유순이 BCE 65년부터 5년간 원강을 사용하였으므로 평안도와 황해도 벽돌의 원강은 중국의 연호일 수 없다. 함녕5년명 벽돌엔 咸寧五年三月六日己丑造라 쓰여 있는데, 그들이 주장하는 27936일은 己巳일이어서 함녕이 晉 武帝의 연호가 아님이 입증된다. 진 무제의 함녕 5년 이외에 중국의 함녕 5년은 없다. 태강원년명 벽돌들엔 각각 太康元年三月六日太康元年三月八日王氏造라 쓰여 있는데, 태강 원년은 개원 시기가 429일이므로 태강이 晉 武帝의 연호가 아님이 입증된다. 진 무제 이외에는 요나라에서 태강이 사용되었으므로 평안도와 황해도 벽돌의 태강은 중국의 연호일 수 없다. 한편 손환일이 2008년 한국고대사학회 103회 정기발표회에서 소개한 대방군 벽돌 신자료에 의하면 황해도 신천군에서 발견된 永嘉六年三月十四日辛未造라 적힌 벽돌이 있는데, 그들이 주장하는 312314일은 乙未일이어서, 영가가 의 연호가 될 수 없다. 진 회제의 영가 6년 이외에 중국의 영가 6년은 없다. 따라서 원강, 함녕, 태강, 영가도 고구려의 연호임이 입증된다. 강단유사사학은 正台正始로 우기면서 중국 왕조의 것이라 하나, 직접 본 사람이 正台라 하므로 正台로 보아야 하고 正台는 중국 왕조에는 없는 연호이다.

무려 11개의 연호가 결코 중국의 연호가 될 수 없음이 입증되는데 강단은 이들 연호가 중국의 연호라고 우긴다. 고구려가 연호를 사용하였음이 입증되고, 발견된 연호 20개 중 결코 중국의 연호가 될 수 없는 것이 11개나 되며, 각 왕조는 같은 연호를 사용한 경우가 많으므로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발견된 연호는 고구려의 연호로 보는 것이 정상적임에도, 강단유사사학은 동북공정에 대한 충성심을 표현하기 위해 중국 왕조의 연호라고 억지를 쓴다.

 

강단유사사학 주장의 억지성

그들의 주된 억지는 연호 변경을 모르고 구 연호를 사용하였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흥평 2, 가평 2, 경원 원년, 경원 3, 함녕 원년, 태강 원년, 태강 3, 원강 원년, 원강 3, 태안 2, 건원 3, 영흥 3, 건시 원년 등의 연호는 어떻게 연호 변경을 알고 바뀐 연호를 사용하였는지 이해할 수 없게 된다. 필자가 원년 이외에 2년과 3년을 포함하는 이유는 동수묘의 영화 13년을 그들이 연호변경을 모르고 영화 13년이라 썼다고 억지 쓰기 때문이다. 동수는 영화 13년에 전사하였는데, 당시의 3년상 관습상 영화 15년에 무덤을 닫는다. 즉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영화 15년은 승평 3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벽돌로 대규모의 무덤을 만들 정도의 지배층이라면 연호나 날자의 착오를 용인하지 않는다. 연호 변경을 알 수 없었다면 연호를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조선총독부의 소설에 대한 무한한 충성심을 표현하기 위해 그들은 말도 안 되는 억지를 쓰면서 조선총독부의 소설을 지키고 있다. 억지의 백미는 태강 원년에서 드러난다. 그들은 3년이 지나도 연호 변경을 모른다고 했다가, 태강은 연호가 바뀌지도 않았는데(개원 시기가 429) 3월에 태강이라는 연호를 썼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애절한 충성심에 눈물이 앞을 가린다.

김미경과 안정준은 건시원년명 벽돌의 건시를 혜제 시 司馬倫이 찬탈하여 19일부터 49일까지 사용한 연호로 보아 301년이라 주장한다. 연호 변경을 모르고 기존 연호를 사용한다고 끈질기게 주장하다가, 갑자기 3개월 반란자의 연호를 사용했다는 그들의 자기모순은 그 탁월성이 유사사학계의 으뜸이라 아니할 수 없다.

 

강단의 소설에서 평안도와 황해도가 고구려의 영토가 된 후

그들은 평안도와 황해도가 고구려의 영토가 된 후인 313년 이후의 벽돌이라 주장하면서도,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고구려의 왕은 허수아비라고 주장한다. 벽돌을 만드는 것이 비밀스럽게 이루어질 수 없다. 고구려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고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여 무덤을 만들었다면 그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을 것이다.

 

연호의 추종 왕조 설정과 그 수시 변동

연호의 추종 왕조도 소설이다. 그들은 313년 이후 진과 동진의 연호를 쓰다가, 343년에는 후조의 연호를 쓰다가, 345년에는 다시 동진의 연호를 쓰다가, 350년에는 다시 후조의 연호를 쓰다가, 352년에는 다시 동진의 연호를 쓰다가, 407년에는 다시 후연의 연호를 쓴다고 한다. 동진은 북조를 통제하기 위한 외교적 고려의 대상이 될 뿐이지 고구려가 복종하는 체 할 대상은 될 수 없으므로 고구려가 동진의 연호를 사용한다는 것은 개연성이 거의 없다. 왜 후조의 연호를 썼는가에 대해 여호규는 한편 340년대에 後趙의 연호가 많이 나오는데, 이를 후조 방면의 망명객이나 후조와 교섭하던 재지세력과 연관된다고 해석하기도 한다.”라고 하면서 주석이나 근거는 전혀 제시하지 않는다. 이는 그의 주장에 아무런 근거가 없음을 나타내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고구려의, 강단의 거짓말에 의하면 중국계 망명인들의, 연호 추종이 수시 변동인 이유는 그 누구도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여호규는 건시 원년을 ‘407(동진)’이라 표시한다. 후조의 연호를 사용한다는 것도 겨우 거짓말 하면서 넘어갔는데, 건시 원년(후연의 연호에 의해서 407) 관련하여 후연의 연호를 사용한 이유를 또 조작하는 것은 모양이 안 난다고 그는 생각한 것 같다. 그가 학자로서의 기본적 윤리성을 지키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이미 언급하였듯이 김미경과 안정준은 건시원년명 벽돌의 건시를 혜제 시 司馬倫이 찬탈하여 19일부터 49일까지 사용한 연호로 보아 301년이라 주장하는데, 이는 추종 연호의 수시 변동을 조금이라도 완하하여 후연이라도 추종 대상에서 제외하려는 발상으로 생각된다. 거짓말과 자기모순을 활용하는 그들의 살신성인은 공맹의 뺨도 여지없이 칠 수준이다.

 

(3) 고구려 연호 추정

 

김부식이 신라 중심으로 삼국사를 쓰면서 고구려의 연호를 기술하지 않았다. 따라서 고구려의 연호는 유적과 유물에 남겨진 연호를 토대로 추정할 수밖에 없다. 고구려의 연호로 광개토대왕릉비에 의해 영락, 서봉총 은합에 의해 연수, 금동불상 광배에 의해 건흥 연가 영강, 위 전축분의 벽돌에 의해 광화 흥평 정대 가평 감로 경원 태시 함녕 태강 원강 태안 영흥 영가 건흥 태녕 함화 건무 건원 영화 건시, 태백일사에 의해 건흥 명치 대덕 홍무 개화가 확인된다. 본고에서는 고구려의 연호로 확인되는 위의 연호들을 중심으로 그 연대를 추정하려 한다. 한정된 정보 하의 추정이므로 새로운 정보가 발견되면 당연히 필자의 추정은 변경되어야 할 것이다. 본고의 작업이 고구려의 연호를 완전히 입증할 수는 없을 것이지만, 본고의 작업은 고구려 연호를 찾는, 최초의 과학적 연구로서 의의가 있을 것이다.

고구려도 북조의 나라들이 연호를 사용하는 4세기 초에는 연호를 사용하였을 것으로 보아 미천왕 시부터 연호를 사용하였다고 가정하여 추정한다. 태백일사에는 추모왕이 평락, 다물을 태조왕이 융무를 연호로 사용했다고 하나, 믿기 어렵다. 고구려는 여율왕이 으로부터 독립하기 전까지 한나라의 부용세력인 요동오환이었으므로 추모왕 시에 연호를 사용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태조왕은 무력으로 정권을 잡은 왕으로 해씨 세력을 죽이는데 바빠 연호 사용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었을 것이고, 국가 운영에 귀동냥도 할 수 없었던 미천한 신분의 사람으로 연호가 뭣인지도 몰랐을 가능성이 크다.

 

태시와 감로

미천왕(재위 300-331) 시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태시를 사용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태시 이후 감로를 사용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태강 (고국원왕 331-341)

고국원왕은 국강상왕이라고도 하였다. 태강명 벽돌은 太康七年三月 癸丑作’ ‘太康七年三月二十八日王作의 둘이 있는데, 태강 연호를 331년 고국원왕 즉위 시부터 사용된 연호로 보면, ‘太康七年三月癸丑337327일이 되어, 두 벽돌의 제작일이 하루 차이가 나고, 두 벽돌을 동일고분의 벽돌로 볼 수 있다. 따라서 태강을 고국원왕 즉위 시부터 사용된 연호로 추정할 수 있다.

 

원강 (고국원왕 342-355)

고국원왕은 3422월 환도성을 보수하고 국내성을 축조하였다. 앞서 기술하였듯이 환도성은 당산시 옥전현이고 국내성은 천안시(遷安市)이다. 고국원왕은 원 수도였던 환도성에서 요양으로의 천도를 후퇴로 여겼을 것이고, 고구려가 전연과의 대결에서 물러서지 않고 더 서남쪽으로 진출하기 위해 원래의 수도였던 환도성으로 천도하였을 것이다. 이는 중요한 정책의 변화이므로 이 때 연호도 변경했을 가능성이 크다. 원강5년명 벽돌에 元康五年八月十八日乙酉造(원강오년팔월십팔일을유조)”라 쓰여 있는데, 346818일은 을유일이다. 이는 고국원왕이 변경한 연호가 원강임을 추정할 수 있게 한다.

 

건무 (고국원왕 356-371)

고구려는 35512월 전연과 조공관계를 맺는다. 이는 고구려가 한의 부용세력에서 독립한 이래 가장 치욕적인 순간이다. 고구려가 의 중요성을 체감하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356년 건무로 연호를 바꾼 것으로 추정한다.

 

건시 (소수림왕 371-373)

소수림왕이 즉위하면서 고국원왕 시의 고구려의 쇠퇴를 극복하고 새로운 다짐을 한다는 의미에서 건시를 연호로 정하였을 수 있다. 북한학계도 건시를 소수림왕의 즉위 시 연호라 주장한다.

 

태녕 (소수림왕 374-379)

태녕은 집안의 태녕(太寧)4년명 기와 두 점과 위에서 언급한 황해도 신천군의 태녕(泰寧)5년명 벽돌에서 발견된다. 집안은 343년 처음으로 고구려의 수도가 된다. 태녕명과 같은 권운문 기와가 집안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되는 것은 집안이 343년에 처음으로 고구려의 수도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와 한 점의 명문이 太寧四年太歲□□閏月六日己巳造吉保子宜孫로 확인되어 연대를 추정할 수 있다. 윤달의 6일이 기사일이 되는 점을 고려하면 태녕 4년은 377년이다. 즉 태녕은 소수림왕이 374년부터 사용한 연호라 보아야 타당하다.

중제·강단유사사학은 태녕이 동진의 연호라 하면서 태녕 4년을 325년이나 326년이라고 사기를 친다. 동진의 태녕 연호는 3233월부터 3261월까지 사용되었다. 윤달이 있는 해로서 6일이 기사일이 되는 시기는 325년 윤8월이다. 즉 동진의 태녕 연호는 태녕 3년에만 윤달이 있다. 그러자 그들은 우기기를 시전한다. 태녕 3년을 고구려 기술자들이 무식하고 부주의해서 태녕 4년으로 썼다고 우긴다. 일의 간지까지 따져서 표기하였는데 해를 잘못 쓴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소리다. 다른 유사학자들은 326년이라 우긴다. 이들은 윤달과 6일이 기사일이라는 정보는 그냥 무시한다. 이들은 우기기의 다양한 형태를 보여주면서 조선총독부와 동북공정에 대한 충성방법에는 다양성이 있음을 과시한다.

태녕이 소수림왕의 연호이므로, 태녕 5년명 벽돌이 출토된 황해도 신천군의 복우리 2호분도 고구려인의 고분이며 중국계 이주민의 무덤이 아니다. 평안도와 황해도의 무덤들은 중국계 이주민과는 전혀 무관하다.

 

함녕 (소수림왕 380-384)

함녕은 황해도 신천군에서 출토된 함녕 원년과 5년명 벽돌에서 발견된다. 함녕5년명 벽돌에 咸寧五年三月六日己丑造라 쓰여 있는데, 38436일이 기축일이다. 따라서 함녕은 소수림왕이 380년부터 384년까지 사용한 연호로 추정할 수 있다.

 

영흥과 흥평 (고국양왕 384-390)

고국원왕 시의 침체기와 소수림왕 시의 안정화기 이후 다시 강대한 고구려로 돌아가려는 열망이 있었을 것이므로 고국양왕은 흥()자간 들어간 永興興平을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연수 (고국양왕 391)

전술한 바와 같이 고국양왕은 3913월에 불교를 숭상하여 복을 구하고 國社를 세우고 宗廟를 보수하라 명하는데, 이 때의 제사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은합이 서봉총에서 발견되었다. 이 은합에는 延壽元年太歲在辛 延壽元年太歲在卯라 쓰여 있고, 391년이 신묘년이다. 고국양왕은 3915월 사망하므로, 391년 불사와 제사는 고국양왕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따라서 延壽391년 사용된 연호로 추정할 수 있다.

 

영락 (광개토대왕 391-412)

광개토대왕릉비에 의해 광개토대왕 시 영락을 연호로 사용하였음은 명백하다.

 

건흥 (장수왕 412-426)

강단유사사학은 건흥 5(丙辰)명 금동광배의 건흥은 고구려의 연호로 보면서 596(영양왕 7)이나 536(안원왕 6)이라 한다. 그러나 건흥 4년명 벽돌의 건흥과 금동광배의 건흥은 모두 고구려의 연호이다. 건흥 5년명 금동광배가 연가 영강 신묘명의 금동광배보다 고식이며, 408년 만들어진 덕흥리고분에서 고구려의 유주자사 진이 釋迦文佛弟子임을 자처하고 있는데, 금동광배 명문에도 釋迦文像을 만든다고 하여 釋迦文이란 말을 쓰고 있고, 장수왕 5년과 건흥 5년이 일치하므로, 건흥은 장수왕이 412년 즉위하면서 사용한 연호로 볼 수 있다.

 

건원 (장수왕 427-429)

장수왕이 427년 산골짝인 집안에서 요양으로 천도하면서 연호를 바꿨다고 추정할 수 있다. 건원3년명 벽돌에 해의 간지의 한 글자가 로 기재되어 있는데, 429년은 기사년이므로 해의 간지에 가 포함된다.

 

영가 (장수왕 430- 436)

영가명 벽돌에는 永嘉六年三月十四日辛未造라 쓰여 있는데, 435314일이 신미일이다.

 

정대 (장수왕 437-445)

435년부터 북연의 분할과 관련하여 위와 대립하였다. 고구려는 영토는 위에게 양보하였지만, 436년 풍홍 등 사람은 고구려로 데려왔다. 위는 436년 고구려를 침략할 것을 고려하다가 중단하였다. 고구려는 위와 병립관계를 확립하였다고 생각하고, 437正台로 연호를 변경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함화 (장수왕 446-461)

함화 10년명 벽돌에 咸和十年大歲乙未孫氏造라 쓰여 있다. 함화 10년이 을미년이므로 함화 10년을 455년으로 추정할 수 있다. 삼국사에 장수왕의 요양 천도 이후 기록이 소략하여 고구려 내부 갈등이 추정되는데, 내부 갈등을 봉합하자는 취지에서 연호를 함화로 하였을 수 있다.

 

가평 (장수왕 462 -468)

삼국사에 의하면 고구려는 439년 이후 23년 만인 462년에 위에 사신을 파견했다. 그 사이 송에 사신을 파견하여 위를 통제하였다. 송을 수단으로 위를 억제한 후, 위와 관계를 정상화 하면서 가평으로 연호를 바꾸었을 수 있다.

 

영화 (장수왕 469-483)

영화는 동수묘 묵서명과 황해도 신천군의 영화 8년명 벽돌, 평양시 평양역 구내묘의 영화 9년명 벽돌에서 발견된다. 동수묘 묵서명에 永和十三年十月戊子朔이라 되어 있고, 481101일이 戊子일이므로 영화 13년은 481년이다. 따라서 영화는 장수왕이 469년부터 사용한 연호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동수묘와 영화명 벽돌이 발견된 무덤들은 모두 5세기의 무덤이다. 강단유사사학과 강단유사고고학은 아무런 근거도 없이 영화가 동진의 연호라고 우기면서 4세기의 무덤이라 사기 치고 있다. 그들은 이들 묘의 묘주들이 역임한 관직이 허구라고 주장하는데, 자기들이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므로 선조들도 그러한 줄 착각한다. 요즘에도 죽음 앞에서는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 하는데 과거의 사람들은 더 그러했다. 이들은 407년 광개토대왕이 후연을 멸하고 획득한 고구려 유주의 관료를 역임했고, 그러한 자랑스러운 사실을 죽음과 함께 영원히 기록하려고 했다.

 

광화 (장수왕 484-491)

광화는 광화 5년명 벽돌과 신포시 오매리 절터 금동판의 3년에서 발견된다. 함경남도 신포시 절터에서 19886월 탑지(塔誌)로 추정되는 금동판 명문이 발견되었다. 강단은 유적이 고구려 문화층과 발해 문화층으로 나누어지는데 금동판이 발해 문화층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지역은 발해가 점령한 적이 없기 때문에 고구려 문화층과 남북국시대의 신라 문화층으로 구분하여야 한다. 이 절터는 고구려 가람배치의 전형인 ‘13금당의 형식이 확인된다고 한다. 따라서 금동판은 고구려에서 작성된 것이다. 금동판의 명문 和三年 歲次丙寅二月廿六日 戌朔의 시기에 대해, 강단유사사학에서 다수설은 546년설을 취하고 소수설은 606년설을 취한다.

그런데 다수의 연구자는 영강7년명 금동광배의 영강7년을 551(양원왕 7)이라 추정하고 있다. 양원왕은 545년 즉위하였으므로, 551년이 양원왕 7년이어서 영강을 양원왕의 연호로 추정할 수 있다. 546년이 3년이라면 안원왕이 사망 직전 해인 안원왕 14년에 연호를 변경하였고 그 연호를 양원왕이 계속 사용해야 하는 상황이 된다. 따라서 546년설은 타당하다고 하기 어렵다.

606년 당시 함흥은 고구려의 영토가 아니므로 606년설은 성립할 수 없다. 신라는 550년부터 북진하여 551년 고구려의 10군을 빼앗았다. 진흥왕은 568년 함흥을 순시하고 마운령비와 황초령비를 세웠다. 진흥왕이 확보한 함흥을 606년 이전에 고구려가 회복한 증거는 전혀 없다. 따라서 606년설도 타당할 수 없다.

동수묘에 의하면 481년은 영화 13년이다. 동수는 고구려 유주(서진의 유주 평주) 지역을 483년 이전에 백제에 빼앗겼다. 위가 백제를 484년 공격하기 때문이다. 동수는 백제와의 전쟁 중 481년 사망했다. 고구려는 백제에 패한 후 분위기 쇄신을 위해 484년 연호를 변경하였을 수 있다. 그 경우 변경된 연호의 3년은 병인년이 된다. 따라서 금동판의 병인년은 486년으로 봄이 타당하다.

함화10년명 벽돌에는 咸和十年大歲乙未孫氏造라 쓰여 있어, 함화는 484년에 변경된 연호가 아니다. 일부는 금동판의 和三年을 태화3년으로 추정하나, 고구려는 484년에 태화라고 연호를 변경할 수 없다. 위가 태화라는 연호를 477년부터 500년까지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금동판의 和三年은 광화3년으로 추정할 수 있다. 484년부터 광화가 사용되었다면, 장수왕이 491년 사망하므로 광화는 491년까지 사용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명치 (문자명왕 492-507)

태백일사에 의하면 문자명왕은 명치를 연호로 사용했다. 태백일사를 참조하는 이유는 태백일사가 삼한조선, 박혁거세의 출신이 고두막국이라는 사실, 소서노가 진한과 번한 사이 바닷가에서 백제를 건국했다는 사실, 광개토대왕의 열도 정복, 예부여 일부 세력의 열도 이주, 온달의 북주 격퇴 등 매우 신뢰성 있는 역사적 사실들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 초 역사서 폐기와 일제의 역사서 박멸로 현재의 태백일사는 목숨을 걸고 역사를 지키려 했었던 선조들이 겨우 지켜낸 내용이다. 역사서 수호의 과정에서 변형된 오류를 제외하면 태백일사의 내용은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담고 있다. 따라서 명백한 반증 없이 태백일사의 내용을 부인할 수 없다. 태백일사일본서기의 사료 가치를 비교하면 태백일사는 역사서이고, 일본서기는 문학서이다. 일본서기에도 없는 사실을 조작하여 조선총독부 소설과 동북공정에 봉사하는 강단유사사학이 태백일사의 사료 가치를 부인하는 것은 적반하장에 불과하다.

 

경원 (문자명왕 508-519)

경원은 경원 원년과 3년명의 벽돌에서 확인된다. 4년 신묘명삼존불의 경은 경원의 약칭으로 추정된다. 허선영은 신묘명삼존불에 등장하는 글자체의 구조는 太和(477~499景明(500~503孝昌(525~527) 연간의 造像碑墓碑에 나타나는 자형과 매우 유사하고, 量詞 軀가 사용된 것으로 보아 571년보다 511년에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따라서 경원을 문자명왕이 508년부터 사용한 연호로 추정할 수 있다.

 

태안 (안장왕 519-531, 안원왕 531-533)

안장왕의 이름이 흥안(興安) 또는 안()이었고 묘호가 안장왕임을 고려하여 태안(太安)을 안장왕 시의 연호로 추정한다.

 

연가 (안원왕 533-545)

연가7년명 금동여래입상 광배에 延嘉七年己未라 쓰여 있어 533년에 연가를 연호로 정하였다고 추정할 수 있다. 안원왕은 531년 즉위 했으나, 내분으로 533년에야 연호를 정하였다고 추정된다. 불상의 조상 양식과 불의가 6세기 초반에 유행하던 양식이므로 己未년을 539년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영강 (양원왕 545-559)

영강7년명 금동광배에 간지 부분이 마멸되었으나, 북한의 손영종은 첫 글자가 이라고 한다. 이렇게 보는 경우 간지는 辛未가 되고 551년이 되어 양원왕 7년과 영강7년이 일치한다. 다수설도 광배의 양식을 6세기 중엽으로 본다. 따라서 영강을 양원왕의 연호로 추정한다.

 

대덕 (평원왕 559-590)

태백일사에는 평원왕이 연호를 대덕이라 하였고, 대덕 18(576) 온달을 거느리고 갈석산과 배찰산에 가서 북주를 토벌하였다고 한다.

 

홍무 (영양왕 590-618)

태백일사는 영양왕 시의 사건을 기록하면서, 홍무(洪武) 9, 홍무 23, 홍무 25년을 언급하고 있다.

 

함통 (영류왕 618-642)

한 인터넷 사이트에 의하면, 러시아 모처에 소장된 요나라의 제천행사를 기록한 요천제고려황제품위(高麗皇帝品位)와 청나라의 제천행사를 기록한 만주대제고려대제의예(高麗大祭儀禮)라는 책에 태백일사에 나오는 고구려의 연호가 동일하게 제시되며, 태백일사에 언급되지 않은 고국원왕의 연수(延壽), 안원왕의 연가(延嘉), 양원왕의 영강(永康), 영류왕의 함통(咸通) 4명의 고구려 태왕들의 연호가 언급되어 있다고 한다. 이를 근거로 영류왕의 연호를 함통으로 추정한다.

 

개화 (보장왕 642-668)

태백일사는 보장왕 시의 사건을 기록하면서, 개화(開化) 4, 개화 27년을 언급하고 있다.

 

필자의 추정은 한정된 정보 하의 추정이다. 전술하였듯이 북경에서 요양까지에 걸친 고구려의 유물 유적에 대한 정보가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고구려의 고토를 회복하는 날에야 비로소 우리는 고구려의 연호에 더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