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고려와 백제유민
왕건의 집안은 백제유민
왕건의 증조부는 753년 패강(浿江)의 서쪽 나루터에 와서, 배 안에서 돈을 꺼내어 뿌리고 상륙하였다. 그는 왕건의 증조모에게 자신이 당나라의 귀인이라 말하고 떠나갔다. 당귀인이 당나라에서 왔으며 배에 돈을 싣고 다녔다는 것은 그가 중국 동해안에 근거지를 둔 백제유민 무역상임을 의미한다. 『고려사』가 인용한 『편년통감』과 『편년강목』은 왕실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왕건의 증조부를 당 숙종이나 선종이라고 말하고 있다. 왕건의 조부가 唐父를 만나러 상선(商船)에 의탁하여 바다로 갔으며, 왕건 집안의 근거지가 예성강변의 개성이었고, 왕건은 903년 수군으로 나주를 점령하였고, 909년에는 견훤이 오월국으로 보내는 배를 사로잡았고, 909년 진도를 점령하였고, 912년 덕진포에서 대승하였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왕건은 중국 동해안의 백제유민을 조상으로 하는 해상세력이었다고 추단할 수 있다.
후당은 왕건이 장회무족이고 창해웅번이라 한다. 장회무족은 ‘양자강과 회수의 훌륭한 가문’ 즉 백제유민을 의미한다. 창해웅번은 ‘큰 바다의 뛰어난 (중국의) 주변지역 사람’ 즉 해상무역세력을 말하므로 역시 백제유민을 의미하는 말이다. 북송도 성종 책봉 시 “늘 백제(百濟)의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길이 장회(長淮)의 겨레를 무성하게 하라.”라고 한다. 북송이 고려의 국호를 모르거나 고려가 후백제와 싸웠던 것을 모르고, 백제의 백성을 편안하게 하라고 할 리는 없다. 당시의 관점에서 백제유민인 왕건이 한반도와 만주의 왕이 되었으므로 왕건과 그 후손이 다스리는 사람은 백제의 백성이 된 것이고 장회의 겨레가 된 것이다. 고려왕의 혈통이 백제유민에서 비롯된 것임을 당시에는 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외교문서에 백제의 백성이라 표현하였다.
강단유사사학은 후당의 조서를 “그대는 동방[長淮]의 대족(大族)으로 큰 바다 너머 웅대한 번국[雄蕃]에서”라고 번역한다. 長淮를 동방으로 해석할 수도 없고, ‘큰 바다 너머’의 ‘너머’란 말도 원문에는 없다. 중국 동해안 백제를 부정하면, 백제 유민을 부정해야 하고, 고려도 중국인이 만든 왕조가 되어 버린다. 강단유사사학은 장회무족이 한족(漢族)이라는 주장에 꼼짝도 못하고 있으며, 내국인을 상대로만 오역을 통해 사기나 치고 있다. 낙랑군이 평양이라 하면서 중국의 동북공정을 주도하는 유사학자들이므로 속으로는 고려도 중국인의 왕조라 생각하고 있을지 모른다.
왕건은 구체적으로 대만 맞은편 민(閩) 지역 천주(泉州)의 실력자였던 왕봉규와 동일한 인물이다. 왕봉규는 고려의 왕으로 즉위한 이후, 중국 동해안의 천주도 영유하면서 후량으로부터 천주의 지배권을 인정받은 것으로 보인다. 즉 고려는 백제처럼 중국과 한반도에 영토를 가지려고 하였다. 그러나 한반도 확보에 집중하느나, 민 지역의 영토는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
왕봉규는 후량으로부터 천주절도사로 인정받았다. 그가 924년 신라의 천주절도사로서 후당에 조공하기 때문이다. 물론 왕봉규는 신라와는 무관하지만 중국인들은 백제유민들을 신라인으로 부르고 있어서 신라의 천주절도사라 기록했다. 강단유사사학은 현재의 경남 의령군 부림면 지역의 성주·장군인 왕봉규가 당시 당나라에서 유행한 관직인 절도사를 가칭(假稱)하였다고 주장하나, 백제 유민을 부정하기 위한 소설에 불과하다. 당시 신라인들은 절도사가 뭔지도 모르는데 절도사를 가칭할 이유가 없다.
왕봉규는 927년 3월 후당으로부터 강주의 지배자로 인정 받고 회화대장군에 봉해지는데, 다음 달 왕봉규는 임언을 후당에 사신으로 파견한다. 그런데 고려도 927년 임언을 후당에 파견하였다고 한다. 즉 왕봉규는 왕건이다. 왕봉규는 고려의 통치를 위해 3건(三建)의 때 왕이 된다는 설화를 만들면서 왕건으로 개명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가 자유무역을 한 이유
고려는 백제유민 무역상에게 항구를 개방하여 자유무역을 하였다. 현종 원년(1010년)에 거란의 침공으로 궁궐과 왕실문적이 소실됨에 따라 100년간의 기록이 망실되었는데, 그 이후인 현종 3년(1012)부터 충렬왕 4년(1278년)까지 약 260년 동안 송상(宋商)들이 125 차례 고려를 왕래하였다. 송상은 백제유민이다. 125회의 내왕 건수 중 초기의 20회 가량에 대하여는 이들의 출신지가 기입되어 있는데, 복건인(福建人) 10회, 절강인(浙江人)이 6회, 광동인(廣東人)이 3회, 강소인(江蘇人)이 1회이다. 이들 지역은 모두 과거 백제 영토였고, 당시 백제유민의 활동 영역이다. 『송회요집고(宋會要輯稿)』 제197책 번이 정화 8년(1118년) 5월 15일조에 “명주태수(知明州) 누이(樓异)가 조칙에 따라 고려좌선(高麗坐船) 100척을 건조토록 조치하여 방금 공정을 필하였으며, 고려인 강수(綱首: 선장)와 소공(梳工: 키잡이)에게 매월 곡식 1석 2두를 지급토록 계약을 체결하였다.”라고 기재되어 있는데, 명주가 주산군도 건너편이고, 배를 고려좌선이라 하였고, 선장과 키잡이를 모두 고려인이라 하고 있어, 백제유민의 해상활동이 북송 시에도 계속 유지된 것이 확인된다. 중국인은 백제유민을, 한반도가 신라였을 때는 신라인, 고려였을 때는 고려인이라고 불렀다. 이는 중국인들이 백제유민이 우리나라 사람임을 명확히 알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고려는 이들 백제유민 무역상을 위해 객관을 설치하였고 1034년부터는 팔관회에도 참석시켰다. 고려의 팔관회는 국토신앙이 관련된 의식으로, 백제유민의 참석은 고려왕에 대한 신하로서의 배알이었다. 이들은 고려로 이주하기도 하였다. 『송사』는 “명주 정해현(定海縣)에서 고려로 달아났던 백성 약 80명이 환국을 원한다고 보고하였다. 도착하는 날을 기다려 고려선장 탁영 등에게 헤아려 보상하라고 하였다”라고 한다. 고려로 왔던 극히 일부가 돌아갔을 것인데, 그 숫자가 80명이라는 것은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고려로 왔음을 의미한다. 고려는 유능한 백제유민을 정책적으로 이주시키기도 하였다. 이는 『송사』의 “王城에는 중국 사람이 수백 명 있었는데, 장사하기 위해 배타고 간 민(閩, 복건성 지역) 지방 사람들이 많았다. 高麗는 비밀리에 그들의 재능을 시험해 보고 벼슬을 주어 유혹하거나 강제로 체류시켜 일생을 마치도록 하기도 하였다. 朝廷에서 사신이 갔을 적에 첩(牒)을 올려 하소연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귀국시켰다.”라는 기사로 확인된다. 얼마나 많은 백제유민들이 이주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한국인의 족보」(1981)와 중앙일보사가 간행한 「성씨의 고향」(1989)에 수록된 260 성씨 800여 본관 중 59 성씨 90 본관의 시조가 고려 때 중국에서 이주해 와서 고려 조정으로부터 관직을 받았다고 하며, 고려 때부터 중국 성씨제와 족보제가 보편화되었다 하므로, 대규모의 이주가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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