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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고사 주요 보완 내용 (9) - 강단·일제유사사학의 열도와 한반도 남부 고대사 창작 (3)

역사회복 2025. 4. 14. 15:23

3. 무슨 이유에선가 가야=임나

 

음상사 서번트 증후군

강단유사사학과 비슷한 재야유사사학이 있다. 재야유사사학의 특징은 역사적 맥락과 무관하게 지명의 동일성을 기준으로 역사를 기술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왕건의 고려와 이성계의 조선이 섬서성 산서성 하북성 심지어는 양자강 이남까지 차지하고 있다. 강단유사사학도 재야유사사학처럼 역사적 맥락을 무시하고 오직 지명의 동일성만을 따진다. 그들이 주장하는 유일한 실증은 지명의 음상사이다. 그들은 신라7국, 임나10국, 임나4현 등 「일본서기」에 나오는 거의 모든 지역을 한반도의 지명과 유사하다고 하여 한반도에 비정한다. 이들은 임나의 지명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지역이 열도에 수십 개씩 발견되며, 한반도의 지명은 정확하게 임나의 지명과 일치하지 않음에도, 쉬운 길을 버리고 어려운 길을 택하여 고도의 음상사 기법으로 음상사 아닌 것을 음상사화 시키는 놀라운 능력을 발휘한다. 음상사에 꽂힌 서번트 증후군 환자가 있다면 강단유사사학과 비슷한 행태를 보일 것이다. 재야유사사학은 지명이 동일한 경우만을 대상으로 하는데, 강단유사사학은 동일하지 않은 것을 고도의 음상사 기법으로 동일화시킨다는 점에서 재야유사사학이 결코 범접할 수 없는 탁월한 유사성을 실현한다. 그들은 진정한 천재 유사역사학자들이다.

강단유사사학이 제조한 모든 글이 다 그렇지만, 강단유사사학이 가야에 관해 제조한 글들은 특히 더 해독하기 어렵다. 음상사를 통한 무의미한 위치 비정과 내용의 앞뒤 불일치가 기본이다. 그들의 글은 오로지 「일본서기」를 한반도의 역사로 만들어 일제유사사학에 충성하겠다는 일념으로 만든 이해 불가능한 횡설수설이다. 그러나 아무리 억지와 횡설수설을 남발해도, 가야가 임나여야 그들의 임나 지명의 한반도 남부 비정이 가능하다. 그런데 가야가 임나라는 근거는 절대로 찾을 수 없다. 그들은 「일본서기」를 한반도에 적용시키는데 있어 가장 중요하고 가장 먼저 해결되어야 할 문제에 대해선 침묵하고 있다.

 

 

 

김태식의 용감무쌍

김태식은 이 문제에 대해서 침묵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교적 신빙성이 인정되는 다수 용례를 중심으로 볼 때, 임나는 6세기 한반도 남부 경상남도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신라나 백제에 복속되어 있지 않은 소국들의 총칭을 가리킨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는 당시의 가야 소국들이 신라나 백제와 구분되는 하나의 세력권을 이루고 있었던 사실의 반영이며, 그 임나를 왜측에서 친근하게 여긴 것은 이들과의 빈번한 교역 경험과 관련된 것이다. 요컨대 대가야를 중심으로 파악되는 5~6세기의 가야연맹을, 왜에서는 무슨 이유에선가 임나라는 명칭으로 불렀다.

 

김태식의 앞 문장은 6세기 후반 이후 나타나는 「일본서기」 임나의 다수 용례를 중심으로 볼 때, 임나를 한반도의 가야로 볼 수 없으므로 근거가 될 수 없다. 따라서 김태식도 임나가 한반도의 가야인 이유에 대해서는 말한 바가 없다. 겨우 한다는 소리가 ‘무슨 이유에선가’이다.

「일본서기」의 임나 용례를 보면 임나가 한반도의 가야인지 아닌지를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일본서기」 임나가 나오는 부분에 강단유사사학이 붙여놓은 제목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 BCE 33년: 임나국(任那國)이 소나갈질지(蘇那曷叱知)를 파견함

- BCE 28년: 임나국(任那國)이 소나갈질지(蘇那曷叱知)의 귀환을 청함/임나와 신라 갈등의 시작

- 193년: 고구려, 백제, 신라, 임나가 사신을 보내옴 / 투화(投化)한 자들을 국군에 안치하고 호적을 작성함

- 276년: 고구려, 백제, 임나, 신라인이 함께 옴

- 463년: 천황이 길비상도신전협(吉備上道臣田狹)의 처를 총애하여 신전협을 임나국사로 삼음

- 487년: 아폐신사대(阿閇臣事代)를 임나의 사신으로 보냄

- 487년: 임나에 있는 기생반숙녜(紀生磐宿禰)가 고구려와 내통하고 백제와 맞섬

- 512년: 임나 4현을 백제에게 줌

- 527년: 근강모야신(近江毛野臣)이 남가라와 탁기탄을 일으켜 임나에 합치고자 하나 반정(磐井)이 방해함

- 529년: 임나의 기능말다간기(己能末多干岐)가 옴

- 529년: 임나의 기능말다간기(己能末多干岐)를 전송하고 임나에 있는 근강모야신은 신라왕과 백제왕을 소집함

- 537년: 신라가 임나를 침략하자 돕게 함

- 541년: 안라, 가라, 다라, 임나가 백제에 가서 임나 재건에 대해 논의함

- 541년: 백제 성명왕이 임나를 꾸짖고 경계시킴

- 542년: 백제가 미마사(彌麻沙) 등을 보내 임나 부흥을 알림

- 543년: 백제가 임나와 일본부의 집사를 소집했으나 이루어지지 않음

- 543년: 백제가 임나의 부흥에 대해 논의함

- 543년: 백제에게 임나에서 백제의 군령과 성주를 내보낼 것을 명함

- 543년: 백제의 표: 임나 부흥에 대한 신라의 방해와 적신의 허위보고

- 543년: 백제의 표: 백제가 임나의 정무와 관련된 그간의 일을 알리며 이나사와 마도의 본국 송환을 요청함

- 544년: 백제가 임나와 일본부에 임나의 정무를 의논할 것을 종용함

- 544년: 백제가 임나와 일본부의 소집을 강조하자, 일본부가 이에 응함

- 544년: 백제에 안라, 가라, 다라, 일본부에서 사람을 보내 임나 부흥에 대해 논의함

- 544년: 백제가 다시 임나와 일본부의 집사를 소집했으나 이루어지지 않음

- 545년: 백제가 임나에 사신을 보냄

- 562년: 신라가 임나를 멸망시킴

- 562년: 신라가 임나를 멸망시킨 것에 대해 분개함

- 562년: 신라가 임나를 공격한 것에 대해 문책하고자 백제와 군사를 일으킴

- 571년: 신라에 사신을 보내 임나를 멸망시킨 이유를 물음

- 575년: 신라, 임나, 백제에 사신을 보냄

- 583년: 임나를 다시 부흥하고자 기국조압승(紀國造押勝)을 보내 백제에 있는 일라(日羅)를 불러들임

- 584년: 난파길사목련자(難波吉士木蓮子)를 신라에 보내 임나에 다다름

- 591년: 임나를 세울 것을 명함

- 591년: 군대를 모아 축자에 머무르고, 신라와 임나에 사신을 보냄

- 600년: 신라와 임나가 서로 싸워 군대를 보내 신라를 침

- 601년: 고구려에 사신을 파견하여 임나를 구하라 함

- 610년: 신라와 임나의 사신을 불러들임

- 610년: 신라와 임나의 사신이 축자에 도착함

- 610년: 신라와 임나의 사신이 왕경에 도착함

- 611년: 신라와 임나가 사신을 파견함

- 623년: 길사반금(吉士磐金)을 신라에 보내고 길사창하(吉士倉下)를 임나에 보내 상황을 알아봄

- 623년: 신라가 임나를 토벌하니, 천황이 신라의 토벌을 논의함

- 623년: 신라의 지세이(智洗爾)와 임나의 지(智)가 사신으로 옴

- 623년: 반금 등이 신라로 갈 때 신라와 임나의 영접선이 옴

- 638년: 백제, 신라, 임나가 사신을 보내옴

- 642년: 고구려와 백제의 사신을 난파에서 향응하고, 고구려, 백제, 신라, 임나에 사신을 파견함

- 646년: 고구려, 백제, 신라, 임나가 사신을 보냄

 

이상은 내용에 임나가 있는 경우는 제외한 것이다. 제목에 있는 임나만 보더라도 임나는 562년에 망했다가 591년에 다시 살아나서 신라와 싸우기도 하고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기도 하고 일본이 임나에 사신을 보내기도 한다. 강단유사사학이 「일본서기」를 근거로 임나가 한반도의 가야라 한다면, 6세기 후반 이후 「일본서기」에 임나가 나타나는 무수한 문장에 대해 해명해야 한다. 그들은 해명할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은 말도 안 되는 억지를 쓰면서, 소설에 부합하지 않는 「일본서기」 부분은 단호히 부정한다. 그래서 그들은 일제의 교시를 충실히 이행하는 유사사학에 불과하다. 임나를 한반도의 가야로 보는 근거는, 그들의 일제유사사학에 대한 충성심에 있으며, 문학서인 「일본서기」에서조차 찾을 수 없다. 강단유사사학의 제조품은 일제 군국주의 소설문학에 불과하다. 이야기 전개의 필연성이 결여된, 음상사나 휘두르는 유치한 수준의 삼류소설에 불과하다.

「일본서기」는 열도 소국의 이야기를 주된 소재로 하고, 한반도의 역사적 사실도 삽입하거나 덧붙여 가공의 일본천황과 연결시킨 문학서이다. 「일본서기」는 『삼국사』 『삼국유사』 등 신뢰성 있는 사서에 배치되지 않는 범위에서만 사료로서 기능할 가능성이 있는데, 강단유사사학은 그것을 거꾸로 판단하고, 일본을 야마토왜로 날조하면서 일제유사사학을 떠받들고 있다. 「일본서기」에 한반도의 역사적 사실이 일부 발견된다고 「일본서기」의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를 모두 한반도의 나라로 볼 수는 없다. 「일본서기」에 의해서조차 날조임이 입증되는 강단유사사학은 일제 참모본부의 교시에 불과하다.

 

날조가 장애를 만날 때, 강단유사사학의 상투적 수단

그들의 비학문성과 교시 추종성은 그들의 한문해석에서 동시에 드러난다. 「일본서기」는 명확히 임나가 한반도 남부가 아니라 명시하고 있다. 그들은 고의로 오역하여 일제의 날조역사에 충성한다.

 

「일본서기」 BCE 33년: 任那者去筑紫國, 二千餘里. 北阻海以在鷄林之西南.

동북아역사재단: 임나는 축자국을 떠나 2천여 리, 북으로 바다를 사이에 두고 계림의 서남에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任那는 筑紫國에서 2,000여 里 떨어져 있고, 북쪽은 바다로 막혀 있으며(임나의 북쪽이 바다로 막혀 있다는 것은 『日本書紀』 찬자의 잘못인 듯하다.) 鷄林의 서남쪽에 있다.

 

올바른 해석은 ‘임나는 축자국에서 2천여리 가는데, 북쪽은 바다로 막혀 있고 계림의 서남쪽에 있다’이다. 「일본서기」의 이 문언이 묘사한 임나는, 축자국을 구주 북쪽으로 보면 대마도는 이천리라 하기에 가까우므로 조희승이 논증한 오카야마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러나 가야인의 이동에 따라 대마도, 오카야마 등 임나가 여러 개이므로 임나가 사용된 문맥에 따라 임나의 위치를 비정해야 한다. 「일본서기」는 가공의 일본국 중심지를 나라로 보고 이야기를 전개하므로 「일본서기」의 임나는 대부분 오카야마로 생각된다. 어떻든 ‘북쪽이 바다에 막혀 있다’는 해석 이외의 다른 해석은 불가능함에도 동북아역사재단은 임나를 한반도에 위치시키기 위해 바다를 사이에 두고로 날조해석하고, 국사편찬위원회는 유사사학이 맘에 안 드는 글자 나오면 항상 그러하듯이 오류라고 한다. 이들은 학문을 하지 않고 일제 참모본부의 날조 역사를 수호하고 그들의 교시에 따라 행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