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 대로 게재불가 답변이 왔습니다. 강단유사 쓰레기들의 수준을 감상하시기 바랍니다. 억지 부리는 것을 학문으로 강변하는 쓰레기들이 역사비평사의 심사자들입니다. 이 심사문으로 역사비평의 모든 행위는 쓰레기로 전환될 것입니다
관심 없는 분은 그들의 현란한 거짓말에 현혹 당할수도 있다 생각되어 괄호 속에 저의 반론을 기재합니다.
투고글은 이 블로그에 있습니다.https://taxecolaw.tistory.com/174
논문 심사 평가서
■ 논문 제목 : 우리 사회의 유사역사학 검토
역사비평」 게재 관련
최종 종합 평가 |
1. 게재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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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수정후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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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게재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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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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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견 1>
일단 투고자의 글은 ‘논문’이라 표현하기 어려운 글이라 판단한다. 사료에 대한 분석, 기존 연구 내용에 대한 치밀한 검토를 결여한 채 자신의 생각을 나열하고 있다. 일례로 일부 연구자가 간단히 정리해 둔 사료 역주서의 주석 내용을 학계의 연구 결과로 인용하고 있는 수준이다. 관련 연구를 모두 섭렵하는 수준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최소한 주석에 언급된 연구 성과들을 직접 확인하는 정도의 검토조차 진행하지 않았다. ‘논문’으로서 평가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상태라 판단하지만, 향후 개선된 연구가 이루어질 수 있기를 기대하며 몇 가지 문제를 좀 더 구체적으로 지적하고자 한다.
1. 각자성석 표기에 관한 문제제기에 대해
‘漢城’ 소속 관인이 관여한 내용이 담긴 각자성석이 확인되었다면, 그곳이 한성인가? 기본적으로 각자성석, 역역동원과 관련한 연구, 혹은 다른 각자성석의 사례를 찾아본다면 투고자의 판단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스스로 판단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역역동원과 관련한 신라의 금석문이 적지 않다. 하다못해 조선시대 한양도성의 각자성석만이라도 한번 보라.
[물론 필자는 현 평양을 한성이라 생각하지만 투고 글에서는 고구려 평양을 현 평양으로 보는 것은 개연성이 없고 요양으로 보는 것이 더 개연적이라 썼다. 한성이라는 각자성석으로 현 평양을 한성이라 단정한 적도 없다. 개연성이 이문영이가 유사사학의 기준으로 인용하여 그 기준에 의해 썼다. 필자도 역역동원 가능성 고려하였다. 심사자1은 필자의 주장을 곡해해야만 찍소리라도 내면서 그 자신의 사기꾼성에 변명할 수 있었을 것이다.]
2. 고려의 서경에 대한 문제제기
김부식의 서경 진압군이 왜 평양보다 더 북쪽으로 갔다는 강단의 논리는 상식적이지 않다고 한다. 매우 당혹스럽다. 김부식의 진압군이 서경 북쪽으로 간 이유가 투고자 확인한 사료의 바로 앞 내용에 나오지 않는가? 진압군은 서경의 반란군이 양계 지역의 세력들과 연계되었을 것을 우려하고 있었고, 서경 반란군의 ‘배후’를 차단하기 위한 작전으로 평양 북쪽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 아닌가? 바로 앞 내용은 확인도 안한 것인가? 아니면, 보고도 일부러 무시한 것인가?
[고려사 고려사절요 관련부분이 다 번역되어 있다. 배후를 차단하기 위해 전 진압군이 배후로 간다는 개소리를 하는 그의 양심은 얼마나 괴로울까]
3. 낙랑군은 원래 漢의 영토에 설치?
원래 漢의 영토에 설치되었다면, 다른 郡을 낙랑군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는 이야기인가? 다른 군의 일부를 떼어서 낙랑군을 만들었다는 것인가? 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지역에 낙랑군을 설치했다는 사실은 어떠 사료를 보아도 분명하지 않은가? 가장 기본적이고 분명한 사실을 투고자는 부정하는가?
[낙랑군이 조선에 설치되어 있다는 사료를 제시하기를 바란다. 아무 사료도 없다. 필자가 제시한 사료가 가장 직접적인 제1차사료이다. 아마 그는 환상 속의 사료를 보면서 살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자신이 사기치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자괴감에 진즉 자살했을 것이다]
4. 같은 내용이 여러 사료에서 자구가 조금 다른 사례들이 많이 있다. 판본마다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지, 각 자료의 선후 관계는 어떠한지, 저본은 무엇이었을지 비교하며 검토하길 권한다.
그 외 여러 문제들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관련 사료, 연구 성과를 직접 분석하는 과정이 사실상 거의 없다는 것이 현재로서는 가장 큰 문제이다. 개선되길 바란다. 기존 ‘강단’ 및 ‘재야’의 주장은 분명하게 정답일 수는 없다. 합리적 근거를 바탕으로 비판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고, 또 필요하다. 다만, 적어도 투고자의 글은 충분한 논거와 논리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비판이라고 평가하기 어렵다.
[자신이 학자인 척 꼴값을 떨고 있다. 그렇게 필자의 주장이 말이 안 되면 뭐가 말이 안 되는지를 말해야 하는데 할 말이 없으니 꼴값을 떠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의견 2> [심사자2는 자신이 그럴 듯한 학자인 척 하기만 한다. 할 말이 없으니 최선의 대안이 이 방법밖에 없을 것이다.]
1. 연구논문의 형식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였습니다. 특히 서론이 문제입니다. 서론에서는 연구의 중요성, 선행 연구 성과, 선행 연구의 한계, 연구의 방법과 논의의 순서 등을 제시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이 논문이 어떠한 연구사적 의미를 갖고 있는지, 독창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지 가늠할 수 있습니다.
2. 논문의 주제가 방만합니다. 하나의 주제에 집중해서 논의의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습니다.
3. 선행 연구를 강단과 재야로 칭하며 논의를 전개하였는데, 구체적인 저서와 논문을 제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현재 역사학계의 일반적인 이해라고 하면, 그와 같은 견해를 처음으로 제시한 연구자를 소개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른바 재야도 누구의 주장인지 명시해야 합니다.
4. 평양성 각자성석: 5개 자료를 모두 제시해서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內部 百頭 上位使 등도 보이기 때문입니다. 관련 연구도 제시해야 함은 물론입니다.
http://contents.nahf.or.kr/item/level.do?levelId=ispy.d_0003_0010_0010#noteispy.d_0003_0005 참조.
경주 남산신성비 등 비교자료도 검토해야 합니다.
http://db.history.go.kr/id/gskh_003_0010_0020_0010_0010
5. 김부식 안북도호부_ http://db.history.go.kr/id/kr_098r_0010_0010_0120
전문을 검토해 보기 바랍니다.
https://news.zum.com/articles/63411732 과 같은 칼럼도 참고할 수 있습니다.
6. 사기 조선열전
한국사DB의 주석 참조.
https://db.history.go.kr/id/jo_001r_0010_0010_0010
7. 낙랑
http://db.history.go.kr/id/mg_023_0020_0010 및 윤용구의 논문 참조.
http://db.history.go.kr/id/gskh_009_0010_0010_0020
http://db.history.go.kr/id/gskh_009_0070_0010_0010 및 주석 참조.
8. 백제 요서경략설 및 북위/백제: 선행 연구가 상당히 많습니다. 모두 검토해야 합니다.
9. 옥저-숙신
六年, 復征之, 宮遂奔買溝. 儉遣玄菟太守王頎追之, 過沃沮千有餘里, 至肅愼氏南界.
관구검은 현도태수 왕기를 파견해 동천왕을 추격하였습니다.
<의견 3>
이 글은 막연히 기존의 연구 성향을 ‘강단’과 ‘재야’로 구분한 다음 자신은 그 어느 쪽에서 속하지 않는 중간 평가자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학술논저에서는 보통 비판의 대상이 되는 논자와 그 논리를 상세하고 정확하게 소개하면서 이를 비판하는 형태를 취하는데, 이 글은 전혀 그런 요건을 갖추지 않고 있다. 이 글의 논증 수준은 기본적으로 사료를 읽고 글을 쓰는 훈련이 부족해보이며, 현재 공개된 여러 사료들을 참고하지 않은 상태라는 점이 큰 문제라고 판단된다.
역사학의 학술 논문은 여러 주제에 대한 연구들을 대략적으로 총평하는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세부화된 주제별로 사료의 해석과 논리를 비판한 뒤에 자기 자신의 새로운 대안을 내놓는 형식을 요구한다. 그런 점에서 이 글은 자신이 불만을 갖는 몇몇 주제들의 해석에 대해서 ‘유사’라고 지칭하는 가운데 아주 간략한 비판을 제시하는 수준에 그친 것은 학술지에 싣기 어려운 수준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 글은 비판의 대상이 누구이며, 그 논리가 무엇인지를 상세히 제시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오히려 몇 가지 주제에서의 자신이 해온 거친 해석들을 내놓으며 이에 대해 ‘저’들이 어떤 대답을 내놓는지 보자는 식의 의도로 글을 투고한 것으로 보인다. 심사서는 학계의 의견을 일일이 찾아서 반론해주는 글이 아니다. 또한 기본 요건과 의도의 측면에서 자격을 갖추지 못한 상태라면 굳이 학술지에 논문을 투고하지 말 것을 권한다. 이하 몇 가지 지적들을 참고하기 바란다.
● 平壤城石刻에서 “漢城下後卩小兄文達節自此西北行涉之”라는 명문이 나온 것은 글쓴이가 인정한대로 평양성의 일부 구간 축조를 책임진 인물로 보고 있다. 漢城이라는 판독을 인정하는 연구자가 많다. 그러니 이는 한성의 下後卩(행정구역) 소속 小兄 관등의 文達(인명)이라는 인물로 해석된다.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는데, 글쓴이는 평양 출신이나 평양의 관리가 아닌 ‘漢城의 관리’가 평양 지역의 축성을 관리․감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그런데 평양성과 같은 큰 규모의 축성 작업은 해당 지역의 주민만을 동원해서는 작업이 어려우므로 국가에 의해 다른 지역민들까지 동원되는 경우가 많다. 이 과정에서 타지역의 관리들이 주민들을 징발하여 축성 현장으로 데리고 와서 작업을 감독․관리하는 경우들이 다수 보인다.
신라의 경주 남산신성비에는 다른 지역의 村을 관할하는 지방관인 道使들 이외에도 郡上村主의 지위를 가지고 있거나, 外位를 가진 지방 출신 인물들이 축성 관리자로 다수 등장한다. 제9비에는 아예 “급벌군(伋伐郡) 소속의 이동성(伊同城)의 무리[徒]가 6보(步)를 할당받았다.”고 적혀있다. 경주 지역의 축성에 타지역 주민과 그 지방관, 촌주들이 참여한 것이다. 관련해서는 이미 널리 알려진 것이기에 구체적으로 설명할 필요가 없으며, 구체적으로 남산신성비 가운데 제1,제2,제3,제9비를 참조하기 바란다(한국사 데이터베이스 참조). 남산신성비로도 부족하다면 「명활산성비」의 사례도 참고하라. 축성 이외에 지방에서 저수지를 만들 때 다른 지역의 촌주와 주민들이 참여하는 경우도 있다. 이는 「대구 무술명 오작비(大邱 戊戌銘 塢作碑)」를 읽어보기 바란다.
[심사자 3도 심사자 1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필자는 한성이라는 각자성석이 있으니 그곳이 한성이라 말한 적이 없다. 각자성석과 함께 김부식의 진압군이 간 위치와 함께 고려하면, 현 평양은 고구려의 평양이 될 개연성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각자성석의 지명은 다 동원된 것이라는 전제 하에서 필자의 주장이 틀렸다고 한다. 할 말이 이 것 하나니 이것 하나 써먹기 위해서 필자의 주장을 곡해하여 공격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의 양심은 얼마나 고통 받고 있을까]
●『자치통감』 권88 진기10 효민황제(孝愍皇帝) 기록에서 ‘初’자가 “遼東張統據樂浪․帶方二郡...” 부분까지 걸린다고 보는 것은 꽤나 흥미로운 해석이다. 다만 이 경우 ‘初’자가 정확히 어디까지 걸리는지 앞의 생략한 문장들과 더불어 명확하게 제시해야 뒤에 ‘五月’로 이어지는 기록의 맥락을 이해할 수가 있다. 왕준과 장통이 백성1000여가와 모용외에 귀부한 시점과 낙랑 교군의 설치 시점을 313년 이전으로 볼 수는 있는데, 그게 도대체 언제인가. 어쨌든 미천왕(을불리)의 재위가 300년부터이니 300~313년의 일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는가. 삼국사기의 미천왕 12년조(311)에 낙랑군으로의 통로인 서안평(西安平)을 공격하여 차지하였고, 14년(313) 겨울 10월에 낙랑군을 침략하여 남녀 2천여 명을 사로잡았다는 기사가 있다. 두 기록을 자치통감과 연계한 기존 해석이 무리하다고 판단한다면 그걸 자세히 짚어가면서 비판할 일이다. 설령 장통, 왕준이 모용씨로 항복한 것이 300~313년의 어느 시점이 된다고 한들, 그것이 모용씨의 낙랑군(교군) 설치를 부정하는 근거가 되는가?
[초에 이어지는 문장을 잘 알고 싶으면 원문을 보면 되는데, 생략한 문장을 제시하란다. 할 말이 그렇게도 없는 것이다. 이동설의 근거가 없다고 필자는 주장하고 있는데, 이동설을 부정하는 근거를 대라고 우긴다. 이동이 예외적인 현상이므로 이동을 주장하는 쪽에서 근거를 대야 하는데 도둑놈이 몽둥이를 든다.]
● 사서에 “遼東張統”처럼 郡名+人名으로 표기되는 경우 보통 해당 군 출신의 누구라는 의미로 쓰이는 것이 보통이다. 자치통감에도 “譙郡嵇康, 文辭壯麗, 好言老․莊而尙奇任俠, 與陳留阮籍․籍兄子鹹․河內山濤․河南向秀․琅邪王戎․沛人劉伶特相友善, 號竹林七賢.“, “康嘗詣隱者汲郡孫登”[자치통감10 魏紀10 위원제 景元3년(262)] 사례가 있으니 참고하라.
[인물 앞의 지명이 그의 출신지의 의미로 사용된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모용외에 귀부한 세력의 지명이라 보는 것이 문맥상 타당하다. 모용외가 요동 지역의 낙랑군까지 세력권으로 하였음을 기술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요동출신으로 해석하더라도 낙랑군이 평양이었다가 이동했다는 증거는 되지 않는다. 찍소리라도 할 수 있는 것이 이것 밖에는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논거인 장통이 고구려에 결정적으로 패배하지 않아 자신의 기반을 버리고 도망갈 이유가 없었다는 가장 핵심적인 근거에 대해서는 말이 없다. ]
● 진서(晉書) 지리지의 기록을 근거로 “낙랑군이 후한말 공손도 이래 위치 변화가 없다”고 하였는데 무슨 의도로 쓴 문장인지 알 수 없다. 한중일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진서(晉書) 지리지 기록이 쓰여진 것이 晉武帝 太康 元年(280)의 상황을 토대로 했다고 본다. 평양의 낙랑군이 소멸한 것은 서진말인 313년이며, 그때 일부 주민이 모용씨의 세력으로 건너가서 그 지역에 낙랑교군이 만들어졌다는 논리인데 진서(晉書) 지리지의 기록과 무슨 모순이 있는가. 누군가를 ‘유사’라고 지칭하기 전에 글쓴이가 스스로 착각한 것이 아닌지 되짚어볼 일이다.
[진서의 편찬이 이세민이가 했는데 280년의 상황이라 단정할 수 있는가? 이동이 없다는 견해에 의하면 진서 지리지의 기준 시점은 무의미하다. 이동이 없으므로 기준시점은 무의미하다. 이세민이가 편찬했다면 교치를 기록하였을 개연성이 더 클 것이다. 이세민이의 편찬 시점에서도 서진 낙랑군은 이동한 적이 없다고 보아야 한다. 필자는 진서 지리지 증거로 쓰지 않아도 된다. 필자의 주장은 반증이다. 진서 지리지 증거로 사용하지 않아도 충분하게 그들의 사기 이동설에 대해서는 충분히 반증했다. 이동하지 않았다는 근거를 대라고? 필자는 낙랑군의 원 위치에 대해 필자는 충분한 증거를 제시하여 말하고 있으므로 이동설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도 없지만, 그들의 사기치기에 대해 이것이 사기이다 말하고 있을 뿐이다. ]
● 글쓴이는 덕흥리고분의 ‘태수래조도’에 쓰인 묵서 자료에 의하면 ‘연국’이 낙양에서 2300리라고 하였으므로(州治廣薊今治燕國去洛陽二千三百里), 후한시대 유주 산하의 군들은 낙양에서 ±2300리 정도로 보아야 타당하다고 보았다. 그런데 후한서 군국지의 주석에 의하면 樂浪郡은 “한 무제때 두어졌으며 낙양으로부터 東北쪽으로 五千里에 달한다.”라고 쓰여있다. 2300리 정도로 추정하기에는 너무 차이가 크지 않은가. 설령 무조건 낙양에서 낙랑까지의 거리가 2300리 정도라고 가정하더라도 그 위치가 꼭 보정시 일대라야 한다는 근거가 너무 박약하다.
[사기와 한서를 근거로 낙랑군의 위치를 말하고 있는데, 무슨 개소리야? 그들이 제시할 수 있는 근거는 후한서 군국지인데 후한서 군국지는 필자가 위서인 증거를 충분히 제시하였다. https://blog.naver.com/bbondd0/223010557343]
● 낙랑군 25현의 명칭이 기록된 「초원4년호구부」(기원전45년)가 평양 정백동에서 나온 것은 어떻게 해명할 것인가. 이미 학계에서 각종 출토자료 등 가운데 문자자료들을 통해 낙랑군과 관련한 수많은 근거들을 제시한 바 있다. 학계 연구자들이 주로 기반을 두고 있는 자료들에 대한 해석을 전혀 제시하지 않는다면 그들을 설득하는 것도 무리요, 그들을 ‘유사’라고 지칭하는 것도 납득하기 어렵다.
[그들이 존경하는 이병도가 쉽게 움직일 수 있는 유물은 지명 비정의 근거로 될 수 없음을 밝혔다. ]
● 남제서 百濟傳에 보이는 ‘魏虜’는 고구려를 칭한 것으로 보는 의견도 있으나, 북위를 의미한다고 보는 의견들도 있다. 글쓴이는 이들이 북위의 백제 침공 사료를 어떻게 설명하는지에 대한 파악이 전혀 안 되어 있는 것 같다. 이를 먼저 파악한 뒤에 논리를 비판하는 글을 투고를 하는 것이 순서이다.
[필자는 강단유사 사기꾼들 다수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사기의 태양을 달리하는 사기꾼들에 대해서까지 말하기에는 논문 글자 제한이 있다. 백위 전쟁을 인정하면서 중국 동해안 백제를 인정하지 않고 함안 마을국가에서 백제의 사신이 푸대접 당했다고 말한다면 더 웃기는 사기꾼일 것이다]
● 남제서 백제전에 백제왕이 “신이 사신으로 보낸 行龍驤將軍 樂浪太守 兼 長史 臣 慕遺와 行建武將軍 城陽太守 兼 司馬 臣 王茂와 兼 參軍 行振武將軍 朝鮮太守 臣 張塞와 行揚武將軍 陳明은 관직에 있어 사사로운 것을 잊어버리고 오로지 공무에만 힘써, 나라가 위태로운 것을 보면 목숨을 내던지고 어려운 일을 당해서는 자기 몸을 돌보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들의 성씨(王․張․陳)가 모두 백제계가 아닌, 漢族계통의 성씨이므로 중국에서 백제로 이주해 온 한인으로 본다.
백제가 중국 지명의 태수직을 임의로 임명하여 중국측에 요청한 것은 송서에 보이는 450년 西河太守 馮野夫의 사례가 있다. 그것 가운데는 중국 내륙 깊숙이 들어간 것도 있으며, 실질적으로 백제의 중국 내 영토를 의미한다고 보기 어렵다는 점은 누차 지적되었다. 왜 백제가 그러한 태수직을 두었는지에 대해서는 관련 연구들이 다수 있으니 글쓴이가 직접 찾아보고 그 논리를 자신의 해석과 논리로 정연하게 비판을 해야 학술요건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앞으로 더욱 깊이 있는 연구를 기대한다.
[뭔 개소리인지 이해할 수 없다. 그냥 소설가 하시길. 중국 동해안 백제는 중국 풍에 따라 성씨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소설을 전제하고 이야기한다. 물론 근거는 없다. 왜 태수를 임명했는데 백제의 영토가 아닌가? 그들은 백제 영토를 부정하고, 영토가 아닌 것이라고 동어반복한다. 영토가 아닌 곳에 태수를 임명하는 것이 개연성이 있는가, 영토에 태수를 임명하는 것이 더 개연성이 있는가. 그들은 개연성이 없는 것만을 골라가면서 말하므로 유사사학이다. 심사글에서도 그들의 유사사학성을 유감없이 드러내는 그들은 참 유사사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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