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전라도 천년사」의 백제·위 전쟁 부인

역사회복 2023. 5. 5. 14:40

1. 「전라도 천년사」 관련 부분

 

ㅇ 선사·고대 3권 49~51쪽

“동성왕은 490년과 495년 두 차례 남제에 사신을 파견하여 작호 수작 요청을 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태수에게 부여된 광양·대방·조선·광릉·청하·낙랑·성양 등의 중국지명인데 이것을 근거로 백제가 한때 요서지방을 점령했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 동성왕 대 백제가 요서지방을 점령하고 있었다면, 영산강유역 사회가 독자적인 세력을 펼칠 수가 있었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 지명이 관칭된 까닭은 백제가 이 지역을 통치하고 있었다기보다 중국에서 이주해 온 중국계 백제인을 사신단으로 이용했던 것으로 이해하는 편이 합리적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보다도 더 궁금한 것은 왕·후에 관칭된 면중·도한·팔중·아착·매로·불사·매라·벽중·불중 등의 명칭이다. 이것은 지명으로 파악되고 있는데 이 지명을 어디로 비정하는가의 문제는 학자마다 차이가 크다. 가장 대표적인 견해를 소개하면 <표 2>와 같다.

고증의 가장 중요한 근거는 음상사다. 음상사 이외의 뾰족한 방법이 없기에 달리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어렵다. 그런데 두 사람의 견해에는 엄청 차이가 난다. 말송보화는 광주·나주·신안·군산·전주·김제로 전라도 일대를 포괄하고 있다. 그에 비해 천관우는 논산·공주·완주·군산·당진·김제로 비정하고 있다.”

 

 

2. 「전라도 천년사」의 사기성

 

(1) 소설도 되지 않는 논리의 전개

 

① 광양·대방·조선·광릉·청하·낙랑·성양 등의 태수를 임명하였다는 것은 그 곳이 백제의 영토이기 때문임. 외교문서에서 남의 나라 땅에 대한 태수를 임명한다고 인정해달라는 것이 말이 되지 않음.

② 「전라도 천년사」는 중국지명이 중국에서 이주해 온 중국계 백제인을 사신단으로 이용했던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기술하는데, 논리적 연결이 안 되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먹을 수가 없음.

③ 왕·후에 관칭된 면중·도한·팔중·아착·매로·불사·매라·벽중·불중 등의 명칭이 지명인 근거가 전혀 없음에도 「전라도 천년사」는 지명으로 간주하고 있음.

④ 「전라도 천년사」는 지명 비정에서 음상사가 가장 중요한 근거라 하는데, 지명의 음이 전혀 다르게 변하는 경우도 많으므로 음상사에 의한 지명 비정은 지명 변천에 대한 입증이 필요함. 특히 백제 영역은 신라 대진 당에게 분할 점령되었으므로, 백제의 지명이라 하더라도 그 지명을 한반도에 비정하려면, 신라가 점령한 지역으로 확인된 후에만 가능하며, 신라가 지명을 바꾸지 않았다는 것도 입증되어야 하고, 그 이후로도 지명이 바뀌지 않았다는 것이 입증되어야 함. 음상사에 의한 지명 비정의 선결조건을 모두 무시하고 마음대로 지명을 비정하는 것은 유사역사학에 불과함.

 

(2) 백제와 위의 전쟁 부인

 

① 전라도 천년사는 백제의 대륙 지명의 태수 임명 즉 백제가 그 지역을 통치하였다는 것을 부인하는데, 중국 사서에는 3차례의 백제와 위의 전쟁이 기록되어 있으므로, 백제의 대륙 지배는 의심할 수 없는 사실임.

 

② 백제와 위는 484년, 488년, 490년 전쟁을 하였음. 백제와 위의 전쟁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음.

 

(ㄱ) 484년

- 『건강실록』: 영명 2년(484년) 북위가 백제를 정벌하여 백제왕 변도(弁都)를 크게 깨트렸다.

- 『태평환우기』: 효문제가 군사를 보내 백제를 정벌했다.

- 『통전』: 효문제가 군사를 보내어 백제를 정벌했다

 

(ㄴ) 488년

- 『삼국사기』: 동성왕 10년에 위(魏)가 침공하였으나 우리 군사가 그들을 물리쳤다.

- 『자치통감』: 위나라가 군사를 보내 백제를 공격했는데 백제에게 패하였다.

- 『남제서』: 삭제된 324자 대부분이 위나라의 치욕적 패배를 기록한 부분임. 고구려에 대해 建武 3년(496년)의 일을 기록하는 부분에서 원문이 사라짐. 고구려에 관작을 주었다는 부분부터 삭제된 것으로 추측되는데, 남제가 502년 망하므로, 삭제된 부분에서 고구려 관련 부분은 극히 일부에 불과함. 삭제된 부분에 이어서 나오는 내용은 백제의 공로자에게 관작 수여를 요청하는 것이므로 바로 앞에는 그들의 공로가 나와야 하는데, 그 공로가 중국인들에게 치욕적이어서 누군가가 삭제했음. 『남제서』를 쓴 소자현은 남제를 건국한 소도성의 손자로, 남제는 소자현 할아버지의 나라임. 『남제서』는 위를 위로(魏虜)라 하여 오랑캐로 간주하고, 『남제서』 「동남이열전」 고구려조에서 위가 중국 왕조인 남제와 오랑캐인 고구려의 사신을 나란히 앉게 한 일을 기록하고 있음. 백제가, 남제를 소자현이 오랑캐라고 생각하는 고구려와 동일하게 취급한 위를, 격퇴한 것은 소자현에게 유쾌한 사건이었음. 소자현에게 백제와 위의 전쟁은 춘추필법이 적용되는 사건이 아니었고 오히려 신나는 사건이었으므로 자세히 기록하였을 것임. 중원을 차지했던 위가 백제에게 무참히 패배했다는 기록을 본 후세의 중국인들은 이를 참을 수 없었고, 역사서가 써진 이후에도 춘추필법을 적용하여 이 부분을 삭제했음.

(ㄷ) 490년

- 『남제서』: 이 해에 [北]魏 오랑캐가 또다시 騎兵 수십만을 동원하여 百濟를 공격하여 그 地境에 들어가니, 牟大가 장군 사법명(沙法名) 찬수류(賛首流) 해례곤(解禮昆) 목간나(木干那)를 파견하여 무리를 거느리고 [北魏] 오랑캐군을 기습 공격하여 그들을 크게 무찔렀다.

- 『남제서』: 建武 2년(495년)에 牟大가 사신을 보내어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 “(중략) 지난 庚午年에는 獫狁이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 깊숙히 쳐들어 왔습니다. 臣이 沙法名 등을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역습케 하여 밤에 번개처럼 기습 공격하니, 匈梨가 당황하여 마치 바닷물이 들끓듯 붕괴되었습니다. 이 기회를 타서 쫓아가 베니 시체가 들을 붉게 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 銳氣가 꺾이어 고래처럼 사납던 것이 그 흉포함을 감추었습니다. (후략)”

 

 

3. 소결

 

ㅇ 「전라도 천년사」는 『남제서』에 기재된 백제가 광양·대방·조선·광릉·청하·낙랑·성양의 태수를 임명한 사실을 부정하면서 이들 지명이 중국계 백제인 사신단과 관련 있다는 이해 불가능한 거짓말을 하고 있음.

 

ㅇ 「전라도 천년사」는 『삼국사기』는 물론 중국 사서인 『건강실록』 『태평환우기』 『통전』 『자치통감』 『남제서』에 기재된 백제와 위의 3차례에 걸친 전쟁을 부인하고 있음.

 

ㅇ 「전라도 천년사」가 백제의 대륙 영토와 백제와 위의 전쟁을 부인하는 이유는 「전라도 천년사」가 자인하였듯이 백제가 대륙을 지배하였다면 영산강유역 사회가 독자적인 세력을 펼칠 수 있었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 되기 때문임.

 

ㅇ 「전라도 천년사」는 백제는 야마토왜의 군사적 지원을 받아 겨우 전라도를 점령했다는 조선총독부의 소설을 역사로 만들기 위해서 『삼국사기』와 중국의 권위 있는 사서 다섯 개에 나오는 역사적 사실을 부인하고 있으므로 폐기해야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