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전라도 천년사의 날조 - 열도 고대사 날조

역사회복 2023. 4. 29. 20:32

1. 「전라도 천년사」 관련 부분

 

ㅇ 「전라도 천년사」 고대사 부분 전체

열도에 야마토왜(왜, 대왜, 대화, 왜국)라는 고대국가가 있었고 한반도에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함

 

ㅇ 선사·고대 4권 40~60쪽, 76쪽

백제가 망하자, 왜국이 백제를 구원하기 위해 구원병을 파견했다고 함. 백제가 무너진 후 신라와 당의 다음 목표는 왜국이었기 때문에 백제 구원을 결정했고, 왜국은 신라와 당의 침략에 대비하여 산성을 쌓았다고 함.

 

ㅇ 선사·고대 4권 66쪽

6세기 이래 왜와 백제는 왜가 군사력을 지원하고, 백제는 그에 대한 대가로 선진문물을 전수하는 관계였다고 함

 

2. 실증에 근거한 「전라도 천년사」의 내용 검토

 

(1) 소설도 되지 않는 논리의 전개

 

가. 선진문물과 군사력의 대가성

 

ㅇ 백제가 군사력이 없어서 빌빌거리는 나라이면 백제를 정벌하고 백제의 선진문물을 자기 것으로 하면 됨. 선진문물을 위해 용병이 된 국가는 유사 이래 없음.

ㅇ 「전라도 천년사」는 왜국의 왜5왕이 중국과 교섭했다고 하며(선사·고대 3권 148쪽), 항로를 관리하기 위해 전라도에 관리도 파견했다고 함(선사·고대 3권 139쪽). 그러하다면, 왜국이 선진문물을 위해선 중국과 직접 교섭하면 되지, 굳이 백제에게 용병을 바치고 선진문물을 받아갈 필요는 없었을 것임.

 

나. 백제 반격 시 열도군대의 지휘권

 

① 사료상의 백강 전투의 상대방과 전투결과


당나라의 전투 상대
전투 결과
삼국사기
遇倭人白江口
王扶餘豐脫身而走
王子扶餘忠勝·忠志等, 帥其衆與倭人並降
구당서 동이백제조
遇扶餘豐之衆於白江之口
扶餘豐脫身而走
僞王子扶餘忠勝·忠志等率士女及倭衆並降
신당서 동이백제조
豐衆屯白江口
豐走
僞王子扶餘忠勝·忠志率殘衆及倭人請命
구당서 유인궤열전
遇倭兵於白江之口
餘豐脫身而走, 偽王子扶餘忠勝、忠志等率士女及倭眾并耽羅國使,一時並降
신당서 유인궤열전
遇倭人白江口
扶餘豐脫身走,
偽王子扶餘忠勝、忠志等率其眾與倭人降
자치통감
遇倭兵於白江口
百濟王豐脫身奔高麗
王子忠勝、忠志等帥眾降

 

ㅇ 왜국이 구원병을 파견했다면, 전투 상대방이나 결과에 왜국군 장수 이름이 나와야 하나 전혀 나오지 않음

ㅇ 가장 직접적인 사료로 볼 수 있는 『구당서』 『신당서』의 백제조는 유인궤의 전투 상대를 풍의 군대(豐之衆, 豐衆)라 명시하고 있음.

ㅇ 항복의 주체는 왕자 부여충승과 충지임. 『구당서』 『신당서』는 왜인을 백제왕자가 거느리는 무리에 포함시킴. 『자치통감』은 왜인을 명시하지도 않음. 『삼국사기』는 왜인이 왕자와 함께 항복하였다고 해석할 소지가 있는데, 이는 『삼국사기』 작성 시 왜국이 있었던 것으로 오해하였기 때문임.

ㅇ 심지어 『구당서』 「유인궤열전」은 탐라국사까지 항복의 주체로 명시하나 왜장의 이름은 없음.

 

② 「일본서기」 검토

 

ㅇ 660년 12월 24일: 천황이 난파궁으로 행차하였다. 천황은 복신이 요청한대로 축자에 행차하여 원군을 파견할 것을 생각하여 우선 이곳으로 와서 여러 가지 무기를 준비하였다

- 천황은 백제왕 풍을 말함. 풍왕이 복신의 건의를 받고 전쟁물자를 준비한 사실을 기술한 부분임.

 

ㅇ 663년 8월 28일: 일본의 장군들과 백제왕이 기상을 살피지 않고, “우리가 선수를 친다면 저쪽은 스스로 물러갈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대오가 흔들린 일본 중군(中軍)의 병졸을 이끌고 다시 나아가 진열을 굳건히 하고 있는 대당의 군사를 공격하였다. 그러자 대당이 곧 좌우에서 배를 둘러싸고 싸웠다. 눈 깜짝할 사이에 관군(官軍)이 패배하였다. 이때 물속으로 떨어져 익사한 자가 많았다. 또한 뱃머리와 고물을 돌릴 수가 없었다. 박시전래진은 하늘을 우러러 맹세하고 이를 갈며 분노하면서 수십 인을 죽이고 마침내 전사하였다. 이때 백제왕 풍장은 몇 사람과 함께 배를 타고 고구려로 도망갔다」

- 왜국이 있었다면 원정군의 대장에 대해 말해야 하나 백제왕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음.

- 유일하게 언급하는 박시전래진은 「일본서기」 661년 8월 기사에 나오는 백제 구원군의 장수로 기재된 진조전래진과 동일인물인데 풍왕이 주유성에서 피성으로 천도할 당시 천도 불가론을 풍왕에게 간한 백제왕의 신하라고 「일본서기」 662년 12월 1일자에 기술됨.

 

③ 이상의 검토를 통해 유추할 수 있는 사실

ㅇ 열도 군대의 지휘권은 백제왕 풍에게 있었고, 풍은 외국군이 아니라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전장으로 온 것이며, 열도는 백제의 지방임을 의미.

ㅇ 풍이 왜국의 인질이었다면 복신도 왕족이므로 복신이 왕이 되었을 것이나, 풍은 열도를 다스리는 왜왕으로 복신보다 선순위의 왕위 계승권이 있어 백제왕이 됨.

ㅇ 복신은 열도에 있는 백제왕 풍에게 신하로서 열도에서의 전쟁 준비와, 왕의 한반도백제에서의 전쟁 지휘를 건의하여 661년 9월 풍이 전장으로 이동.

ㅇ 백제가 백강전투 패배 이후 열도에서 산성을 쌓으면서 전쟁에 대비한 것은 열도가 백제이기 때문임. 열도가 백제가 아닌 야마토정권이라는 독립국이었다면 당과의 전쟁 시 당이나 신라와 별도의 교섭이 있었을 것이나, 이러한 교섭은 없었음.

 

④ 「전라도 천년사」는 사료상 당시의 열도군대가 백제의 군대임이 명확함에도 불구하고, 열도백제인들이 일본으로 독립하면서 정권의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 만든 문학작품인 「일본서기」를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 열도고대사를 날조하고 있음.

 

(2) 야마토왜의 가공성

 

가. 「일본서기」의 야마토왜

 

① 「일본서기」 어디에도 야마토왜 왕조는 기재되어 있지 않음.

② 「일본서기」에 왜나 대왜(대화)는 일본(백제의 별칭)의 속국이었음이 일관성 있게 기록되어 있음. 「일본서기」의 천황은 일본의 왕으로 왜를 지배하고 있음.

③ 大倭(大和)는 ‘다이와’ 정도로 읽을 수는 있으나 야마토라고 읽을 수는 없는데, 일제는 가야계의 야마대국을 왜계의 국가로 날조하기 위해 大倭(大和)를 야마토라 읽고 있음

④ 야마토정권이 있었다면 야마토시대로 분류하여야 하나, 일제는 고대사를 고분시대 아스카시대 나라시대로 구분함. 야마토정권을 주장하였다가, 그것이 실체가 없고 열도는 백제의 영토였음이 알려질까 두려워하기 때문임.

 

나.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고백

 

①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는 「일본서기」가 장기간 여러 사람에 의해 여러 방법으로 수없이 윤색되었다고 하면서, 백제가 야마토왜를 지배했다는 기사를 바꾸지 못한 것이 한탄스럽다고 말함

② 스즈키 다케쥬(鈴木武樹)는 「일본서기」는 감추려고 하는 것이 하나도 감추어지지 않았다고 말함.

③ 한국사와 한·일 고대관계사를 가장 많이 왜곡한 스에마쓰 야스가즈(末松保和)는 「일본서기」에 대해 과학적 태도를 가지고 연구하면 뿔을 바로잡으려다 소를 죽이게 된다고 함. 이 말은 「일본서기」를 제대로 연구하면 날조된 일본 고대사는 사라지고 야마토왜가 백제의 한 지방으로 확인된다는 것을 의미.

 

다. 대화왜의 기원

 

① 왜=예

ㅇ 한민족은 한맥예로 이루어졌는데, 예는 왜와 같은 말임

- 『삼국지』 「위서 동이전」 韓조는 漢 말에 공손씨가 낙랑군을 차지하고 韓濊를 공격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데, 韓과 濊를 공격하여 倭와 韓이 대방에 속하였다고 함. 즉 예와 왜가 혼용되어 사용되었음.

- 1527년 간행된 『훈몽자회』도 倭자를 설명하며 뜻은 ‘예’이고 음은 와라고 설명.

- 1617년 간행된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서는 倭를 ‘예’로 해석함.

ㅇ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倭의 음은 왜가 아닌 와였고 뜻은 ‘예’집단 즉 지금 우리가 말하는 왜집단의 의미로 사용하였음.

ㅇ 영산강 유역엔 왜집단이 정착하였고 이들은 백제의 주민이었음.

 

② 백제가 고구려와의 전쟁으로 영산강왜에 대한 징발을 강화하자 399년 이들이 집단적으로 신라로 도주함. 이 사실이 『삼국사기』와 광개토대왕릉비에 기재됨

ㅇ 『삼국사기』 「백제본기」 아신왕 8년 가을 8월, 왕이 고구려를 공격하려고 군사와 말을 크게 징발하였다. 백성들이 전역(戰役)에 시달려 많은 사람들이 신라로 도망치니 호구(戶口)가 줄어들었다.

ㅇ 광개토대왕릉비 기해년조

九年己亥 百殘違誓 與倭和通 王巡下平穰 而新羅遣使白王云 “倭人滿其國境 潰于城池 以奴客爲民 歸王請命” 太王(喜後) (稱)其忠□ □遣使還告以□計

「영락 9년 기해년에 백잔이 맹세를 어기고 왜와 내통하였다. 왕이 평양으로 순시하자 신라가 사신을 보내 왕께 아뢰기를 “왜인이 그 국경에 가득 차 있다가 성지(城池)에서 도주하여, 신이(노객은 항복한 나라의 왕 의미) 백성으로 삼았습니다. 왕께 보고하여 명을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태왕은 (기뻐한 후) 그 충성심을 (칭찬하고), 신라 사신을 돌려보내어 지시사항을 알리게 하였다.」

 

③ 광개토대왕은 신라에 항복한 왜를 열도의 고구려계 국가로 보냈고 이들이 나라로 보내져 저수지와 농경지 등을 만드는데 사역됨.

ㅇ 광개토대왕릉비 경자년조 기사는 광개토대왕이 열도 북부를 점령하였다는 내용인데 조선총독부가 대부분의 글자를 삭제함.

ㅇ 신라에 있던 영산강왜는 403년부터 405년 사이에 열도로 보내지는데, 「일본서기」에는 이 일이 윤색을 가미하여 기록되어 있으며, 「일본서기」에 이주하였다고 기재된 120현민은 당시 전라도에 거주하던 왜인의 상당부분임.

 

3. 소결

 

ㅇ 열도에 야마토정권이 성립된 적이 없음에도 야마토정권이 있었다는 전제에서 우리의 열도역사를 삭제하고, 한반도에 대한 야마토정권의 영향을 기술하는 「전라도 천년사」는 우리 고대사 날조임.

ㅇ 열도가 백제의 영토였음에도 열도군대 동원을 야마토정권의 군대로 기술하는 「전라도 천년사」는 조선총독부 소설의 복사판에 불과함.

ㅇ 야마토 정권에 선진문물을 주고 백제가 용병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전라도 천년사」는 한국인 전체를 망신시키는 코미디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