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전라도 천년사, 조선총독부 제작 소설 유포

역사회복 2023. 4. 26. 19:29

강단유사사학자들이 전라도 공무원들을 사기치고 수십억원의 돈을 뜯어내면서 전라도 천년사를 제작하였다. 이들은 조선총독부 소설을 역사로 주장하면서 고조선을 부정하고, 마한이 전라도이고 야마토왜의 영향하에 있었다고 사기치고 있다. 다음은 고조선과 마한에 대한 그들의 사기성을 표시한 글이다.

1. 총설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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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사서 『삼국지』 동이전에 따르면 고조선 준왕이 정변으로 남하, 한의 왕이 되어 마한을 다스렸으며, 이후 진한 변한이 생겼다고 한다. 준왕이 이동한 지역에 대해 『제왕운기』, 『고려사』, 『세종실록지리지』 등은 전북 익산 지역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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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준왕이 고조선의 왕이라는 주장은 날조

 

준왕은 예맥조선의 왕이고 고조선의 왕이 아님. 예맥조선을 고조선이라 하는 것은 일제의 가장 대표적인 날조. 일제는 예맥조선을 고조선이라 하면서 예맥조선 이전의 2천여년을 우리 역사에서 제외시킴

 

가. 『사기』 「흉노열전」에 준왕의 조선은 예맥조선이라 함

是時漢東拔穢貉朝鮮以為郡 [이때 한은 동쪽으로 예맥조선을 정벌하여 군으로 만들었다]

 

나. 『삼국유사』 「기이」

- 『삼국유사』는 고조선과 위만조선을 문단을 나누어 다른 나라로 기술하고 있음. 고려시대 때의 사람인 일연은, 위만조선 이전의 조선이라는 의미로 고조선이라 하였으므로 위만조선은 고조선이 아님.

- 古朝鮮

王倹朝鮮, 魏書云, “乃徃二千載有壇君王倹立都阿斯逹. 経云無葉山亦云白岳, 在白州地. 或云在開城東, 今白岳宮是.開國號朝鮮, 與髙同時.” [『위서(魏書)』가 “지금으로부터 2천여 년 전에 단군왕검(壇君王儉)이 있어 아사달(阿斯達)에 도읍을 정하였다. 나라를 개창하여 조선(朝鮮)이라 했으니 요임금과 같은 시대이다”라고 기술했다]

- 魏滿朝鮮

前漢朝鮮傳云, “自始燕時常畧得真畨·朝鮮 師古曰, “戦國時燕因始畧得此地也.”爲置吏築障. 秦滅燕屬遼東外徼. 漢興爲逺難守, 復修遼東故塞至浿水爲界 師古曰 “浿在樂浪郡.”屬燕. 燕王盧綰反入凶奴, 燕人衛滿亡命聚黨千餘人, 東走出塞渡浿水居秦故空地上下障. 稍伇屬真畨·朝鮮蠻夷及故燕·齊亡命者, 王之都王儉 李曰地名, 臣讃曰 “王倹城在樂浪郡浿水之東.”. 以兵威侵降其旁小邑, 真畨·臨屯皆来服屬方數千里 --- [연의 진번조선 정복과 위만의 건국]

 

다. 『제왕운기』

- 『제왕운기』는 단군조선, 기자의 후조선(後朝鮮), 위만(衛滿)의 후조선찬탈 순으로 기술하여 단군조선과 위만조선을 구분하고 있으므로, 고조선은 단군조선이지 위만조선이 될 수 없음

- 初誰開國啓風雲, 釋帝之孫名檀君.本紀曰, ‘上帝桓因, 有庶子, 曰雄云云. 謂曰, “下至三危太白, 弘益人間歟.” 故雄, 受天符印三箇, 率鬼三千, 而降太白山頂神檀樹下, 是謂檀雄天王也云云.’ 令孫女飮藥, 成人身, 與檀樹神婚而生男, 名檀君. 據朝鮮之域, 爲王. 故尸羅, 高禮, 南北沃沮, 東北扶餘, 穢與貊, 皆檀君之壽也. 理一千三十八年, [환웅의 아들 단군이 -2333년 조선 건국, 1038년간 다스렸다.]

- 後朝鮮祖是箕子, --- 四十一代孫名準, 被人侵奪聊去民. 九百二十八年理, 遺風餘烈傳熙淳. 準乃移居金馬郡, 立都又復能君人. [후조선 시조는 기자이고, 41대 준왕이 침탈당했다, 928년간 다스렸다. 준왕이 금마군으로 이주하였다]

- 漢將衛滿生自燕, 高帝十二丙午年. 來攻逐準乃奪國, 至孫右渠盈厥愆. 漢虎元封三癸酉, 命將出師來討焉.國人殺右渠迎師. 三世幷爲八十八, 背漢逐準殃宜然. [위만의 기자조선 찬탈]

 

(2) 전라도는 마한이 아니다.

 

가. 『삼국사기』 최치원의 말

 

- 최치원은 당의 태사[당나라에서 최고위 관리를 우대하기 위하여 설치한 삼사(三師) 즉 정1품의 태사, 태부(太傅), 태보(太保)의 하나이다] 시중에게 신라 사신에 대한 당나라 내에서의 편의 보장을 요구하는 외교문서를 보냈는데, 거기에서 “엎드려 듣건대 동해 밖에 삼국이 있었으니 그 이름은 마한·변한·진한이었습니다. 마한은 곧 고구려, 변한은 곧 백제, 진한은 곧 신라입니다. 고구려와 백제는 전성기에 강한 군사가 백만이나 되어, 남으로는 오(吳) 월(越)을 침공하였고, 북으로는 유(幽), 연(燕), 제(齊), 노(魯)를 어지럽혀 중국의 커다란 해충이 되었습니다”라고 말한다.

『삼국사기』 「최치원 열전」 伏聞東海之外有三國, 其名馬韓·卞韓·辰韓. 馬韓則髙麗, 卞韓則百濟, 辰韓則新羅也. 髙麗·百濟全盛之時, 強兵百萬. 南侵吳·越, 北撓幽·燕·齊·魯, 爲中國巨蠹.

 

- 신라가 당에게 외교문서에서 허튼 소리를 할 수가 없고, 당대 최고의 학자인 최치원이 근거 없는 말을 할 수 없으며, 고구려 백제가 망한 지 불과 200년이 지난 시점의 말이므로, 최치원의 말은 사료가치가 높음. 최치원의 말을 부인하기 위해선 최치원의 말보다 사료가치가 더 높거나 같은 정도의 사료를 근거로 제시해야 함. 천년사 필진은 『제왕운기』 등 사서의 금마가 익산이라고 하지만, 백제는 대륙과 한반도에 영토를 두어 같은 지명이 많이 있었음. 익산이 금마였다 하더라도 준왕이 이주한 금마가 한반도의 금마는 아닐 수 있음.

 

나. 소위 강단사학자들 주장의 모순

 

ㄱ. 소위 강단사학자들의 주장

소위 강단사학자들은 마한은 전라도 진한과 변한은 경상도였고, 마한 소국의 한 나라인 백제가 마한을 점점 점령하여 4세기 후반에나 한반도 남서부를 차지한 백제가 되었고, 진한 소국의 한 나라인 신라가 경상도 지역을 점령하여 4세기 후반에나 경상도를 차지하여 신라가 되었고, 변한 소국들은 야마토왜의 영향력 아래 연맹체로 있다가 백제와 신라에 분할점령되었다고 주장함. 편찬위도 이 견해에 근거하는 것으로 보임.

 

​ㄴ. 객과적 사료와 배치됨

 

a. 변한은 서기전 39년에 신라와 병합하여 사라짐.

[『삼국사기』 「新羅本紀」 赫居世 居西干 十九年, 春正月, 卞韓以國來降.]

 

b. 마한은 서기 9년 백제에 병합되어 사라짐.

- 온조왕 26년(서기 8년) 『삼국사기』 「백제본기」 溫祚王 二十六年, 冬十月, 王出師, 陽言田獵, 潛襲馬韓. 遂并其國邑. 唯圎山·錦峴二城, 固守不下. [〔26년〕 겨울 10월에 왕이 군사를 내어 겉으로는 사냥을 간다고 말하면서 몰래 마한을 습격하여 마침내 그 국읍(國邑)을 병합하였다. 오직 원산성(圓山城)과 금현성(錦峴城) 두 성만은 굳게 지켜 항복하지 않았다.]

- 온조왕 27년(서기 9년) 『삼국사기』 「백제본기」 溫祚王 二十七年, 夏四月, 二城降. 移其民於漢山之北, 馬韓遂滅. [27년 여름 4월에 두 성{원산성(圓山城)과 금현성(錦峴城)}]이 항복하였다. 그 백성들을 한산(漢山) 북쪽으로 옮기니, 마한이 드디어 멸망하였다.]

 

c. 70여 국가는 서기전 24세기의 상황

- 신라는 조선의 유민이 산골짜기 사이에 나누어 살면서 6촌(六村)을 이루고 있었다고 하므로 진한 12국이 신라가 되는 것이 아님. [『삼국사기』 「新羅本紀」 赫居世 居西干 元年 始祖姓朴氏, 諱赫居世. 前漢孝宣帝五鳳元年甲子, 四月丙辰 一曰正月十五日. 即位, 號居西干. 時年十三, 囯號徐那伐. 先是, 朝鮮遺民分居山谷之間, 爲六村,]

- 9년에 백제에 점령된 마한도 한 나라임. 마지막까지 백제에 저항했던 원산성 금현성은 성이지 나라가 아님. 진서에 마한이 등장한다고 하여 소위 강단사학자들은 『삼국사기』 마한 점령기사를 부인하지만, 중국인들이 말갈을 마한으로 표기한 것임. 이세민이 고구려에 개망신 당한 것을 기술하지 않기 위해 동이열전에서 고구려 백제를 빼고 마한 진한을 넣었고, 조공 기사 외에는 관련 기사가 없어 날조한 나라일 가능성이 높음. 날조가 아니라면 고구려의 속국인 마한(말갈) 중 한 나라가 조공했을 가능성이 있고, 진한은 황하의 이동으로 조위의 영토가 된 황하 서쪽의 한인들을 진한이라 하였을 가능성이 큼.

- 변한은 서기전 39년에 신라와 합쳐지므로 변한 12국이 있을 여지가 없음. 삼국지와 후한서는 변진이 나오는데, 변진은 신라의 다른 이름.

 

​d. 국가들간 위치관계 설명 불가

​​- 소위 강단사학자들은 마한을 전라도에 위치시키기 위해 춘천에 맥국이 있었고, 이들이 낙랑을 참칭해서 온조왕이 백제 동쪽에 낙랑이 있다고 하였으며,

- 신라를 침략하는 신라 북쪽의 낙랑(실제는 낙랑 동부도위이나, 그들은 낙랑군 동부도위는 함경도에 위치시킨다)에 대해선 날조기사설(그들은 설명이 불가능하면 날조라고 한다. 침략당한 것을 날조하는 나라는 없을 것이다), 상인집단설, 북진한설, 시기 혼동설, 낙랑 참칭 옥저설(옥저가 경주까지 가는 기동력을 발휘한다고 한다), 최리 낙랑국설, 편찬자 실수설 등을 주장하며.

- 백제 북쪽의 말갈에 대해선 동예설, 고구려 내 말갈설, 영서예설, 마한의 소국인 신분고국설 등을 주장한다. [백제 북쪽은 대방군 낙랑군이므로, 그들의 주장대로 예나 말갈이 백제 북쪽에 있는 것은 불가능]

-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백제와 신라의 주변국이 중국과 우리의 사서의 기록과 맞는 것이 하나도 없게 됨. 그들은 이 모순을 방비하기 위해 전혀 근거도 없이, 동해안의 동예가 백제 북쪽으로 출장을 간다느니, 낙랑이 아닌 세력이 낙랑을 참칭한다는니, 온조왕은 참칭한 것도 모르고 낙랑이라 한다느니 등 말이 안 되는 소리를 함. 학문이 아님.

 

e. 『삼국지』 「위서 동이전」 韓조와 배치

- 공손강은 군대를 일으켜 倭와 韓을 공격하여 帶方에 복속시켰다 하므로 왜와 한이 함께 있어야 하고 대방군과 이웃하는 곳이어야 함 [桓·靈之末, 韓濊彊盛, 郡縣不能制, 民多流入韓國. 建安中, 公孫康分屯有縣以南荒地爲帶方郡 遣公孫模·張敞等收集遺民, 興兵伐韓濊, 舊民稍出, 是後倭韓遂屬帶方.]

- 245년경 조위는 공손씨를 멸하고, 공손씨에게 복속되어 있었던 辰韓 팔국을 낙랑군에 귀속시키려 하였는데 거부하자, 진한 팔국을 멸하였으므로 진한 팔국은 낙랑군과 이웃하여야 함 [部從事吳林以樂浪本統韓國, 分割辰韓八國以與樂浪, 吏譯轉有異同, 臣智激韓忿, 攻帶方郡崎離營. 時太守弓遵·樂浪太守劉茂興兵伐之, 遵戰死, 二郡遂滅韓.]

- 이들 기사에 의하면 왜와 진한은 낙랑 대방군과 이웃한 곳이어야 하므로 진한이 경상도라는 강단사학계의 주장과 배치되고, 왜는 경상도에 있지도 않음.

 

다. 사서 기록에 따른 (후)삼한의 위치와 낙랑군의 위치

 

- ​마한, 백제, 신라(변진), 낙랑군, 낙랑군 동부도위, 왜, 말갈이 좁은 지역에서 같이 있을 수 있는 곳은 황하 하류지역 밖에 없음. 황하 동쪽 제수 북쪽이 한이라 불리었고, (후)삼한은 한에 있었음. 한은 우리 민족의 강역에서 보면 매우 협소한 지역이지만, 이 지역에서 백제와 신라가 기원하였고, 바로 북쪽에서 고구려가 건국되었고, 중국과의 국경 부근이기 때문에, 사서에 이 지역에 관한 사실들이 주로 쓰여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