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

생산력 변화, 복지제도, 자선

역사회복 2010. 2. 23. 05:39

돈을 벌면 자선을 해야 존경받는 사람이다. 자선하면서 남이 모르게 하면 최상이다. 자선하지 않는 부자는 나쁜 사람이다. 자선을 통해 많은 사회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 돈을 많이 벌지 못한 사람도 분수껏 자선에 동참해야 한다. 과연 그럴까? 현재의 변화된 생산력을 전제해도 과거의 자선이데올로기는 타당할까?

사람을 살리는 것이 먼저이므로 부자는 굶어죽는 사람이 있다면 도와야 한다. 생산력은 계속 증가했다. 그러나 과거에는 생산력이 인구증가율 이상으로 증가한 적은 없었다. 생산력이 인간 생존을 위한 기본 수요 이하라면 즉 생산력의 증가가 인구증가율 이하라면 자선은 중요하다.

생산력의 증가가 인구증가율 이하라면 국가는 자선을 미덕으로 만들 수밖에 없다. 국가가 국민의 생존을 책임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산업혁명으로 생산력이 증가하면서부터 국가의 역할변화 가능성이 생겼다. 전면적 계획경제론(공산주의)과 국가의 제한적 개입론이 등장했다. 서유럽은 노동조합과 사회보험을 수단으로 하는 제한적 개입론을 채용하였다.

생산력은 산업혁명 이후로도 계속 발전하였다. 공산주의는 생산력의 증가속도에서 뒤처져서 사라졌다. 지금의 복지국가론은 국가의 제한적 개입론에 근거하고 있다. 생산력은 자본주의 초기보다 훨씬 발전하였지만 복지에 관한 한 그때의 제한적 개입론은 변화되지 않고 있다.

국가의 제한적 개입론은 생산력 증가에 대한 불신에 기초하고 있다. 국가가 모든 사람의 생존을 보장하면 생산력 증가가 적어져 인구증가를 상쇄할 수 없다는 가정에 기초하고 있다. 당시 생산력에서 보면 이러한 가정은 타당하였다. 그러한 가정이 맞았으므로 제한적 개입론은 공산주의를 이길 수 있었다.

국가가 생존을 보장할 수는 없다. 왠지 자신이 없다. 그렇다고 가난뱅이들 못 본 체 하는 것은 아니다. 노동조합 보장해줄테니 부자한테서 어느 정도는 뺏어라. 보험 만들고 기업주도 부담하게 하여 니네들끼리 알아서 잘 살아보아라. 국가의 제한적 개입론의 논리이다. 제한적 개입론에서는 여전히 자선은 중요하다. 노동조합과 사회보험이 모든 사람의 생존을 보장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현재도 이런 논리가 타당할까? 제한적 개입론이 복지와 생산력의 증가에 가장 타당한 방법일까? 아직도 자선은 중요한 사회적 기능을 하는 것일까?

아니다. 노동조합과 사회보험을 통한 복지비용이 국가의 직접적 생존보장비용보다 더 적다고 할 수 없다. 무엇보다 제한적 개입으로는 복지혜택에서 제외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자선이 이들을 모두 구제할 수는 없다. 인구는 감소를 걱정해야 하고 생산력은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국가가 보호를 필요로 하는 자들의 생존을 직접 보장하는 것이 간단하고 비용이 적고 완전하다.

노인 장애자 등 요보호자들의 수용시설을 만들어 이들을 직접 보호하고, 근로능력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주택을 주고, 일자리가 없을 경우 기본생활비를 지급하면 된다. 복지는 간접적이고 복잡한 제도에 의존할 필요가 없고 국가가 직접 책임지면 된다.

국가가 복지를 직접 책임지는 경우 노동조합의 특권을 보장할 필요가 없고 기업에 대한 과도한 부담을 줄일 수 있다. 연금이나 사회보험의 집행비용은 막대하다. 부담은 크나 집행비용이 커서 실제 복지에 돌아가는 부분은 적다. 집행과정에서의 사회적 갈등도 무시할 수 없는 비용이다.

현재의 생산력 하에선 복지를 위해 자유를 희생할 필요가 없다. 시장경제 유지하면서 아니 지금보다 더 강하게 보장하면서 국가가 충분히 복지를 직접 책임질 수 있다. 국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국가의 수용시설이나 국가주택에 들어와서 필요한 보호를 받다가 돈을 벌면 자립하도록 하면 된다. 물론 국가의 도움을 받는만큼 통제도 강하게 하여 자립의지를 유도해야 할 것이다. 최후에는 국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고 내 정신만 온전하다면 다시 재기할 기회를 가질 수 있다고 누구나 생각한다면 거의 모든 사회문제가 해결된다.

노동시장의 유연성은 노동조합의 특권을 없애야 가능하다. 해고의 자유를 보장하여야 한다. 정규직의 과도한 특권이 비정규직 문제를 만들어내었다.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만든다고 노동자의 복지가 보장되지 않는다. 해고의 자유가 없어 고용이 감소되고 간접고용(파견근로자)시장이 과도하게 확대되는 부작용만 발생한다. 노동조합의 특권은 조합노동자들이 일 적게 하고 많이 벌게 하기 위해 인정된 것이 아니다. 노동자의 인간 이하의 생활을 정부가 떠맡아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에 노동자가 단결하여 기업가로부터 뺏는 권리를 인정한 것이다. 정부가 인간다운 생활을 직접 보장하면 노동조합의 특권은 있을 필요가 없다. 노동자도 인간다운 생활이 보장되면 기업가와 싸울 필요가 없다. 기업은 효율적으로 고용하여 이윤을 극대화하고 정부는 이윤에서 세금을 받아 정부의 보호가 필요한 사람을 도우면 된다. 노동자는 해고당해도 생존에 대한 위험은 없다.

고학력 실업도 저학력자들의 노동조합 특권에 기인한다. 자본주의 초기와 달리 자본도 국제적으로 이동한다. 운송비는 제품가의 극히 일부분이 되었다. 고학력자들이 많으면 고학력자 임금이 낮게 되어 자본이 우리나라로 올 수 있으나 저학력자들의 과도한 특권으로 인해 오지 않는다. 저학력자들의 특권은 결국 자신들의 시장가치도 저하시키고 있다. 단체행동권으로 임금이 상승하는 것은 극히 제한적이다. 노동에 대한 시장수요가 늘어나는 것이 최고의 임금인상 수단이다.

교육문제도 결국은 장래의 불안에 근거한다. 자식의 장래가 불안하기 때문에 과도한 교육열이 생긴다. 많은 사람의 불안을 없애기 위해 학생들간 차이를 없애는 방법이 등장한다. 한편에서는 영재교육의 필요성이 주장되지만 많은 사람들은 평준화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교육제도만 생각해서는 절대 해답이 나올 수 없다. 평준화를 없애면 많은 사람이 불안해지고 평준화를 유지하면 교육제도의 본질에 반하게 된다. 내 자식 공부 못해도 정신만 똑바로 박히게 가정교육시키면 지 하고 싶은 일 하고 편히 살다가 갈 수 있다고 생각하면 누가 교육제도에 그렇게 관심을 갖겠는가? 부모의 불안을 최소화하는 교육제도, 그렇지만 누구의 불안도 해소시키지 못하는 교육제도는 결국 복지제도의 불안에 근거하고 있다.

정부가 생활을 보장하면 대부분의 범죄는 사라진다. 생계형 범죄가 사라지고 범죄피해의 확률도 적어진다. 불안이 범죄를 낳는다. 막연한 불안이 돈 있어도 더 벌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게 하고 한 탕 크게 하자는 범죄심리를 갖게 한다. 불안이 사람에 대한 생명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감도 상실시킨다. 정부가 직접 생계를 보장하지 않으면 생산력 증가로 재산은 많아져도 행복해지는 사람은 적어진다.


생산력 증가는 축복이다. 우리의 선택여지는 그만큼 커진다. 그러나 그 축복을 활용하지 못하고 그에 부합하지 않은 복지제도를 유지하면 우리는 불안에서 해방되지도 못하면서 생산력증가에도 족쇄를 채우게 된다. 국민연금이나 공무원연금이 결국은 고갈될 것을 모두 알고 있다. 고용보험은 상당 부분 사기꾼들이 가져간다. 국민연금과 고용보험의 수혜자는 누구인가? 살만한 사람들은 혜택을 보고 못사는 사람들은 사기꾼이 아니면 혜택이 없다. 막대한 운영비용만 추가로 부담한다.

자선에 대한 우상화는 결국은 우리 복지제도의 결함을 시인하는 것이다. 복지제도가 있으나마나이므로 자선을 우상화한다. 자선이 어떻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 자선에 문제는 없는가? 양노원이나 고아원이 수익사업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 수익사업, 대부분 구역질나는 그 수익사업들에 자선하고 대가로 명예를 얻어 가고 그 명예는 대부분 더러운 목적을 위한 생산요소가 된다.

앵벌이가 껌을 팔고 있다. 그를 도우는 것이 껌을 사주는 것인가? 정말 그를 생각한다면 왜 그가 그렇게 되어야 했는지 이유를 알고 싶지 않을까? 정말 그를 생각한다면 껌 한통 사주는 것으로 그를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구걸할 힘도 없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거지에 대한 동정심으로는 결코 도울 수 없다.

디킨스 시대에 살지도 않으면서 디킨스의 윤리를 강요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디킨스 의 자선논리는 공산주의 반대논리일 뿐이다. 공산주의에 반대하기 위해 자선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처럼 선전한 것이 크리스마스캐롤이다. 지금은 반대할 공산주의가 없다. 거지에 대한 자선은 방어기제일 뿐이다. 자기는 그렇게 이기적이지 않고 이웃을 생각한다는 것을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결국은 이기적 행동일 뿐이다. 자기는 그렇게 불쌍한 사람을 보고는 참지 못하여 동전이라든가 천원짜리 한 장 정도는 기꺼이 희사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이기 위한 행동일 뿐이다. 사람에 대해 진정으로 존경심을 가지고 있다면 천원짜리 한 장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할까?

생산력이 충분히 직접 복지를 가능하게 하는데 왜 구식의 비효율적이고 책임회피적인 간접복지제도를 유지해야 하는가? 비효율적이란 것은 생산력 증가도 방해한다는 것이다. 기업은 노동이라는 생산요소를 비싼 값에 고용해야만 하여 노동고용량을 줄이게 되어 실업을 증가시킨다. 노동의 고용량을 신축적으로 조정하지 못하게 되어 비효율적 고용량이 장기간 유지된다.

생산력은 계속 증가한다. 기업의 고용량은 결국은 0이 될 것이다. 로봇이 생산하기 때문이다. 재래시장은 없어질 수밖에 없고 실업은 증가할 수밖에 없다. 그것을 고통이 아닌 축복으로 만들려면 정부의 직접복지가 필요하다. 사람은 생산의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다. 해방을 앞당기기 위해선 적어도 해방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 정부의 직접복지가 필요하다.

세계화는 생산력의 변화에 따른 필연적 현상이다. 생산력의 변화에 대항하는 것은 생산력에 굴레를 씌우는 것이다. 우리는 생산력의 증가에 대항하는 것이 얼마나 아픈 것인가를 경험했다. 조선 초기에 이미 상업발전이 필요할 정도로 생산력은 변화하였다. 왕조권력의 공고화를 위해 생산을 농업에 묶어둔 것이 결국은 그 후의 모든 쇠락의 이유가 되었고 동족상잔과 이산의 아픔으로 지금도 남아 있다. 역사의 주체는 승자이다. 생산력이 승자를 결정한다. 자선을 주장하며 세계화를 반대하고 초기자본주의의 간접적 방임적 복지논리를 주장하는 것은 패자가 되는 길일뿐이다.

생산력 변화에 순응하는 제도가 필요하다. 노조의 강화와 사회보험을 중심으로 한 유럽식 복지제도를 주장하는 이들은 19세기 관점에서 진보일지는 몰라도 21세기 관점에서는 수구파일뿐이다. 정부가 직접 복지를 책임질 수 있고 그것이 생산력의 증가를 촉진하는데 왜 19세기 논리를 가져와 진보를 방해하는가? 물론 그들이 빈자의 생존에 전혀 관심없이 위선적인 자선만 떠벌이는 한나라로 대표되는 집단들보다 낫다는 점은 인정된다. 그러나 변화된 생산력을 고려하면 그들도 그들이 반대하는 보수도 모두 보수꼴통이라는 점에서 똑같다는 점도 인정되어야 한다.

변화된 생산력 아래서는 정부가 국민의 생존을 직접 책임질 수 있다. 그것을 할 수 없었던 시대의 복지논리는 현재의 생산력 증가를 왜곡시키고 잘해야 차선의 복지만을 제공할 수 있을 뿐이다. 당장 예산이 단기적으로 부족하다면 전국민의 노력봉사라도 동원해야 한다. TV의 자선 프로그램에 눈물 빼는 동안 그보다 더한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을지 모른다. 그렇게 선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데도 왜 안하는가? 19세기를 주장하는 수구파들이 잘못된 해결책만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도에 정답은 없다. 그러나 생산력의 변화에 순응하는 제도가 그 부작용이 가장 적다는 점에는 누구나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이 과격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제 정부가 자유에 대한 추가적 구속 없이 아니 자유의 범위를 확대하면서도 모든 사람의 인간다운 생존을 책임져야 하고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해 논의는 시작해야 될 단계가 되었다는 점은 인정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