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

문화혁명이 필요하다

역사회복 2011. 8. 25. 14:21

1. 우리는 문화가 있는 침팬지이다


우리는 침팬지이다. 유전자의 지배를 받는 생물체이다. 우리가 모르는 것을 침팬지가 알 수도 있을 것이고 우리가 아는 것을 침팬지가 모르는 경우도 있다. 우리가 알고 침팬지가 모르는 것이 많다고 해도 그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많이 아는 사람은 많이 알수록 모르는 것이 더 많이 늘어난다고 고백한다. 우리의 무지를 생각하지 않고 우리가 생물체 내에서 별종인 것처럼 말하는 침팬지들은 우리의 생존을 위협할 것이다. 생존은 사실을 그대로 인지할 때 그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침팬지보다 조금 더 사고할 수 있고 예측할 수 있다. 이 사소한 특징으로 인해 과학이나 사상 등 문화를 유지하고 있다. 도킨스는 유전자 외에 문화의 진화를 이해해야만 우리 인류를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문화가 우리를 별종의 생물체로 구별짓게 하는 마법의 약은 아니고 문화도 결국은 유전자의 지배 아래서 활동하고 있을 것이지만 인류의 적응은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즉 생물학적으로 유의미한 변이가 생기기 전까지는 문화로 표현되므로 문화의 진화를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경제에 관해 인류의 탄생부터 지금까지 일관적인 문화현상은 일해야 먹을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이 문화는 산업혁명 이후에도 변화 없이 인류를 지배하고 있다. 산업혁명 이후 자유를 중시하는 보수와 노동권을 중시하는 진보라는 양 사상이 나타났지만, 보수 진보 모두 이 생각을 버리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 문화는 산업혁명이라는 인류가 만들어 낸 문화환경 아래서는 인류를 파멸의 길로 몰아가고 있다. 우리는 산업혁명 이후 인류가 만들어 낸 생산력의 급속한 발전이라는 문화환경에 적응하여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야 한다. 그것은 일하지 않아도 먹을 수 있다는 생각이다.    



2. 생산력, 인구, 일해야 먹을 수 있다는 생각


산업혁명 이전까지 인구는 생산력에 의해 제한되었다. 다른 동물과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산업혁명 이후 여성의 지위가 높아지면서 생산력과 인구는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여성이 교육을 받고 임신과 출산을 스스로 결정하면서 출산율이 낮아졌다. 여성의 지위가 높아진 인류는 최대의 번식이 아니라 행복한 인생을 원하게 되었다. 그에 반해 생산력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맬더스는 완전히 오류임이 드러났다. 생산에 필요한 인력은 지속적으로 줄어든다. 생산과정에서 로봇이 점점 인류를 대체하고 있다. 


일해야 먹을 수 있다는 생각은 맬더스의 세계를 전제하고 있다. 맬더스의 세계에서는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굶어 죽어야 하는 사람이 발생하므로 놀고 먹겠다는 생각은 있을 수가 없다. 물론 산업혁명과 여권신장이 나타나기 이전의 세계에서는 맬더스가 타당하다. 생산력이 인구를 제한하므로 모두 열심히 일해야만 굶어 죽는 사람이 최소화된다. 문화적인 면을 떠나 유전자 측면에서 보더라도 먹기 위해선 열심히 일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유전자가 살아남았을 것이므로 맬더스가 암시하는 일해야 먹을 수 있다는 문화는 우리에게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인류는 과학적 사고를 통해 생산력의 증가를 가져왔고 행복한 인생을 목표로 하여 최대의 번식을 포기했다. 산업혁명과 인구증가의 자발적 억제라는 문화는 인류가 경험하지 못했던 것이고 진화적으로도 안정되어 되돌릴 수도 없는 것이다. 모든 상부구조를 뒤흔들어 무너뜨릴 엄청난 변화이지만 우리는 결핍시대를 살아오면서 살아남은 유전자에 각인된 일해야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대해선 검토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는 문화가 있는 침팬지이다. 유전자에 각인된 최대번식이라는 생물적 욕구도 인구의 자발적 억제라는 문화로 극복했다. 많이 낳게 되는 경우 자신에게 닥칠 생활의 질과 아이들이 겪게 될 생존경쟁을 예측하고 의학의 지식과 기술을 활용하여 단시간에 인구증가를 스스로 억제했다. 일해야 먹는다는 생각이 유전자에 각인되어 있더라도 그것이 우리 자신의 생존에 유리한 문화인지를 검토할 능력이 있다. 이제 우리는 인구와 생산력이 역전 된 이후 충분한 시간을 보냈다. 일해야 먹을 수 있다는 생각이 파괴적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충분한 자료와 증거들을 확보했다. 



3. 일해야 먹을 수 있다는 생각의 파괴성


1) 케인즈와 미국


케인즈는 사람들에게 아무 효용이 없는 피라미드라도 만들어야 할 때가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비합리적인 주장의 근저엔 일해야 먹을 수 있다는 생각이 있다. 실업자를 그냥 먹여 주면 안되므로 쓸데없는 피라미드라도 만들면서 무의미한 노동이라도 하게 하여야 한다는 생각이 케인즈와 동시대인들의 머릿속에 들어 있었다. 케인즈는 더 나아가 민주국가의 정치인들이 완전고용을 실현하기에 충분히 합리적인 지출을 할 수 있게 만드는 유일한 방법은 전쟁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일은 먹고 살기 위해 하는 것인데, 일자리가 없다고 사람을 죽이는 전쟁을 하자는 것이다. 케인즈의 주장 때문에 전쟁이 일어난 것은 아니겠지만 어떻든 발전된 생산력으로 인한 실업 때문에 전쟁은 시작되었고 케인즈는 위대한 경제학자가 되었다. 


인구와 생산력이 뒤바뀐 뒤에 실업은 당연한 현상이다. 생산력이 증가할수록 노동에 대한 수요는 줄어든다. 시장은 최저생계비 이상의 임금수준에서 완전고용균형에 도달되는 것을 보장하지 않는다. 실업자를 그냥 먹여 살리는 것 대신에, 일하는 자만이 먹을 수 있다는 우리들의 유전자는 전쟁을 통해서라도 노동수요를 늘려 최저생계비 이상의 임금수준에서 노동시장의 균형을 도모하고자 했다. 현재도 미국과 유럽의 일부국가는 전쟁과 전쟁준비를 통해 완전고용을 달성하고자 한다. 


2) 복지국가 


일해야 먹을 수 있다는 생각의 파괴성은 과거에만 나타났는가? 그것은 전쟁광 국가에만 나타나는 현상인가? 현대의 복지국가는 이 파괴성으로부터 자유로운가?


복지국가도 일해야 먹을 수 있다는 생각을 기반으로 한다. 복지국가의 원칙적 수혜자는 일하고자 하는 사람이다. 복지국가의 기본형태는 일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노동권을 보장하여 기업에게서 뜯어내게 하고, 일하면서 소득이 있을 때 공적 연금 등 사회보험에 강제 가입시켜 복지수요에 대비하도록 하는 것이다. 


복지국가의 노동권 보호는 노동시장의 효율성을 제한한다. 공적 연금은 대부분 미래세대로 부담을 이전시킨다. 그 동안 복지국가가 이상적인 사회로 보였던 것은 이들이 원래 잘사는 나라들로서 세계시장에서 독과점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어서 노동권 보호와 복지지출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고 복지를 생산하기 위한 공공부문의 고용이 증가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공적 연금을 통해 현세대의 부담을 미래로 이연한 것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복지국가는 선진국에서 일시적으로만 작동 가능한 체제다. 이제 남유럽을 시작으로 복지국가의 한계가 드러나고 있다. 미래로 떠넘겼던 공적 연금의 부담이 재정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공공부문의 고용증가도 한계에 이르렀다. 새로 노동시장에 진입하는 젊은 층에게는 일자리가 없다. 일자리가 없으면 노동권 보호도 아무 효과가 없고 일자리를 기초로 한 사회보험도 무의미해진다. 유럽의 청년들은 시위를 하고 폭동을 일으켰다. 폭동은 내전이다. 폭동이 증가하면 지배층은 드디어 피라미드를 건설할 것이다. 그것은 얼토당토않은 명분을 내건 전쟁일 것이다. 


일해야 먹을 수 있다는 생각을 기반으로 하는 복지국가를 평화국가라 본다면 복지국가는 진화과정에서 안정적일 수 없다. 복지국가는 복지비용이 과다하고 노동시장을 왜곡하여 비효율적이며 생산력의 변화에 따른 실업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복지국가의 종말은 케인즈가 말한 전쟁이다. 일해야 먹을 수 있다는 생각은 복지국가에서도 결국은 파괴적일 수밖에 없다. 


3) 개발도상국


여성의 지위가 낮아 인구증가율이 높은 국가에서는 일해야 먹을 수 있다는 생각이 타당하다. 그러나 많은 개도국에서 여성이 문맹을 벗어나고 남성과 대등한 인간으로서 대접받게 되었다. 여성의 지위만 높아지면 어느 나라도 인구증가율 이상의 생산성 증가는 가능할 것이다. 생산력이 인구를 넘어선 개도국에서 일해야 먹을 수 있다는 생각은 역시 위험하다. 


개도국에서도 실업은 불가피한 현상이다. 일해야 먹을 수 있다면 개도국의 실업자들은 범죄자가 될 수밖에 없다. 실제 생계형 범죄나 인신매매 등의 흉악한 범죄가 횡행하고 있다. 개도국이 복지국가 모델을 좇아도 문제는 악화될 뿐이다. 노동권 보호와 각종 사회보험은 기업가의 노동수요를 축소시켜 실업문제를 더 심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한국은 높은 교육열 덕분에 인구와 생산력이 급격히 역전되었다. 경제가 어느 정도 성장하자 한국은 복지국가를 모방하여 노동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하고 사회보험을 정비해가고 있다. 그러나 실업은 계속 증가하고 있다. 젊은이들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다. 일자리가 없어 젊은이들은 결혼할 수 없고 자연히 인구가 감소한다. 아이들이 실업자가 되지 않도록 한국의 부모들은 아이들을 공부로 고문한다. 고문 받은 아이들은 학교에서 친구를 괴롭힌다. 실업으로 인해 한국의 자살률은 세계최고이고 범죄는 심각하다. 개도국이 서구의 복지제도를 아주 모범적으로 모방해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한국이 잘 보여주고 있다. 



4. 일 안해도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1) 변화의 불가피성


우리의 생산력 수준에서 일해야 먹을 수 있다는 생각의 궁극적 도달점은 전쟁이다. 노동권은 실업을 해결할 수 없다. 아무리 노동권이 강대해도 결국은 로봇이 생산을 전담할 것이다. 노동권은 사실 공산화를 방지하면서도 노동자의 생존문제에서 정부가 발을 빼기 위해 만든 것에 불과하다. 맬더스의 세계에서 생산력보다 인구가 더 빨리 증가하여 국가나 기업이 모든 국민의 생존을 직접 책임질 수는 없으므로 단결된 노동자가 기업가로부터 뺏어서 최대한 생존하라는 것이 국가가 노동권을 인정한 이유이다. 


그러나 노동권을 인정한 정부의 가정은 틀렸다. 더 이상 우리의 세계는 맬더스의 세계가 아니다. 여성지위가 향상된 후에는 인구보다 생산력이 더 빨리 증가하고 있다. 우리의 문제는 먹을 것이 부족하다는 것이 아니다. 실업자가 있어도 즉 일부만 일해도 먹을 것이 남아돌지만 일해야 먹을 수 있다고 전제하면 남아도는 먹을 것을 실업자에게 줄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해결책은 분명하다. 정부가 실업자를 그냥 먹여 살리면 된다. 노동권이 실업을 막을 수는 없다. 실업을 해소하기 위해 전쟁까지 할 필요는 없다. 노동권도 생존권을 인정하기 위해 인정된 것이다. 맬더스의 세계를 가정하면 일하는 사람의 생존권만 인정해야 했기 때문에 노동권을 인정했을 뿐이다. 인구와 생산력이 역전된 상황에서는 그냥 바로 모든 사람의 생존권을 인정하면 된다. 이제는 노동이라는 여과장치가 불필요하고 유해하게 되었다. 노동권을 폐지하고 정부가 시장에서 스스로 생존하기 어려운 모든 사람의 생존을 직접 책임져야 한다. 그것은 불가피하고 유일한 해결책이다.


2) 놀고 먹게 해도 생산성에는 문제가 없는가?


일은 지금도 고통스럽고 힘든 면이 있다. 생산력이 인구를 제압했다 하더라도 노는 사람을 정부가 먹여 살리면 도대체 그 힘든 일을 누가 할 것인가? 놀고 먹을 수 있어도 과연 우리 사회의 생산력은 유지될 것인가? 


놀고 먹을 수 있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한다. 사람들은 많은 경우 일을 즐거워한다. 생존만을 위해 일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대부분은 일이 좋아서 또는 성공하고 싶어서 일한다. 사람들은 놀면서 그저 생존하기보다는 일을 통해 뭔가 의미 있는 것을 성취하고 싶어한다. 


물론 힘들고 어렵고 보람도 없는 일을 하려는 사람은 줄어들 것이다. 그렇다고 사회의 생산력 수준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일들이 남아 있는 이유는 생존을 위해 낮은 보수에도 불구하고 불가피하게 그런 일들을 해야만 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일들을 하려는 사람이 줄어들면 임금이 높아질 것이다. 임금이 높아지면 그런 일들도 좋은 일이 된다. 


놀고 먹게 한다는 것은 정부가 스스로 생존을 책임질 수 없는 사람들의 기본생활만을 보장한다는 것이다. 놀고 먹는다는 것은 최소한의 문화적 생활만 가능하게 하는 주거와 기본생활비를 정부가 지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물질적 풍요를 원하기 때문에 정부가 기본생활을 보장하더라도 시장에 참여하여 돈을 벌고 싶어할 것이다. 또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부의 간섭이나 보조 없이 스스로 살아나가길 원한다. 


단순히 열심히 일하는 것이 생산력을 높이는 시대에는 사람들을 굶주림의 불안으로 협박하여 일하게 강요해야 생산력이 높아진다. 그러나 지금은 창조성이 생산력 증가의 원천이다. 단순한 노동은 로봇이 전담하게 된다. 불안과 강요로 창조성은 높아지지 않는다. 불안과 강요를 생산력 증가의 수단으로 유지하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아이들이 안정감이 있어야 탐구심을 발휘할 수 있는 것처럼, 어른들도 기본생활이 안정되어야 탐구심을 발휘하고 세계를 바꾸어나갈 것이다. 


정부가 생존을 직접 보장하고 노동권을 폐지하면 노동시장 유연화로 효율적 경영이 가능해지고, 공적 연금 등의 복지 관련 부담이 없어져서 시장이 활성화된다. 노동자는 노동하지 않아도 기본생활이 보장되므로 존엄성을 유지하면서 노동시장에 참여할 수 있다. 정부가 기본생활을 보장하면, 범법행위를 통해 돈을 벌려는 유인이 감소되어 범죄행위 억제에 투입되는 사회적 자원을 절약할 수 있고 투자에 실패해도 생존이 보장되기 때문에 과감한 투자가 활성화될 수 있다. 또한 종사자의 생존권 때문에 지연되고 있는 산업구조의 조정도 신속히 진행시킬 수 있다. 


생산력이 인구를 제한하는 시대에는 일해야 먹을 수 있다는 생각이 생산력을 높였다. 인구와 생산력이 역전된 상황에서는 일해야 먹을 수 있다는 생각은 창조성에 의한 생산력 증가를 억압하고 시장의 효율성을 제한한다. 노동권을 폐지하고 정부가 시장에서 스스로 생존하기 어려운 모든 사람의 생존을 직접 책임지면 시장의 효율이 극대화되고 창조적 혁신이 일어나서 생산력이 높아진다.


3) 놀고 먹는 사람이 있어도 공정한가?


놀고 먹는 사람이 있어도 공정한가? 특히 정부가 생활을 책임지면 처음부터 일하지 않겠다는 사람이 생길텐데 그들까지 보살펴주는 것은 너무 불공정하지 않은가?


인구와 생산력이 역전된 상황에서는 누군가는 일하지 않아야 한다. 실업은 불가피한 현상이기 때문에 일하고자 하는 사람이 많은 것이 문제이다. 일하지 않고 기본적인 생존만 유지하겠다는 사람이 많아도 생산에 큰 문제가 없다. 이들이 있어 일하고자 하는 사람의 임금이 높아지므로 모두가 좋다. 일하지 않는 사람이 있어 불공정하다고 느끼는 어리석은 사람이 있다면 그가 일하지 않으면 될 것이다. 


롤스의 기준으로 복지국가와 놀고 먹어도 되는 사회의 공정성을 비교해보자. 복지국가에선 기업의 자유를 노동권과 각종 사회보험으로 제한한다. 놀고 먹어도 되는 사회에선 이런 제한이 적어진다. 놀고 먹게 하는 경우 기업의 자유가 커진다. 노동자도 복지국가에선 결국은 일을 해야 한다. 놀고 먹어도 되는 사회에선 일하지 않을 수도 있다. 노동자의 자유도 커진다. 복지국가보다 놀고 먹어도 되는 사회의 자유가 크다. 복지국가에선 실업자가 존재한다. 실업자는 생존의 위협을 받게 된다. 놀고 먹어도 되는 사회에선 실업자도 언제나 기본생존은 보장된다. 평등의 기준에서도 놀고 먹을 수 있는 사회가 우월하다. 


모든 사람은 존엄하다. 특히 여성이 아이를 적게 낳는 지금은 더욱 그렇다. 상당한 우연과 불공정성이 개입되어 실업자와 취업자가 구별된다. 존엄한 인간이 실업자라 하여 생존이 위협받는다면 그것이 가장 불공정할 것이다. 노는 사람이 있어야 일하는 사람도 생존할 수 있다. 로봇이 생산하여 극소수만 취업자가 되고 대다수의 실업자가 죽는다면 생존한 취업자들도 환경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유전적 다양성이 없어 결국은 모두 죽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공정성도 우리 인류의 생존을 위한 감정이다. 노는 사람도 생존할 권리가 있는 것이 우리 모두의 생존 가능성을 높이므로 공정한 것이다. 



5. 놀고 먹게 하는 구체적 방법


시장에서 생존이 어려운 사람의 생존은 정부가 보장해야 한다. 자선에 의해서는 해결할 수 없다. 자선으로 충분한 재원이 모이기 어렵다. 자선을 주장하는 이들은 실업자들에게 더 찾아보면 일자리가 있는데 왜 일하지 않고 있느냐 하면서 실업자들을 돕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선하는 이들이 대상자 선정을 적절하게 수행할지도 의문이다. 무엇보다 생존을 타인에 구걸하게 하는 것은 사람의 존엄성에 반한다. 부자라 하여 빈자의 생존을 결정할 권한을 갖는 것은 불공정하다. 생존은 존엄한 인간의 당연한 권리로서 인정되어야 하므로 정부가 책임져야 한다. 


정부가 모든 사람에게 기본소득을 제공한다는 기본소득제는 행정비용이 크므로 선택할 수 없다. 대부분의 사람은 스스로 생존 가능한데 이들에게도 기본소득을 지급하기 위해선 이들로부터 세금을 징수해야 한다. 기본소득제는 대상선정의 비용은 줄이지만 징세비용을 크게 늘린다. 뺏었다가 주는 무의미한 노력이 필요하다. 또 기본소득제는 주거 수준을 정부가 결정할 수 없는 단점이 있다. 


정부가 기본생활을 보장할 때 전부를 생활비로 주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주거는 현물로 지급해야 한다. 주거는 건강하고 문화적인 생활의 핵심요소이므로 정부가 그 최저수준을 보장해야 하고 정부주택 주변의 생활환경도 깨끗하게 관리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시장에서 기본생활이 어려운 실업자나 저소득자는 부양의무자의 존재 여부나 근로능력 유무에 상관없이 원하면 정부의 주택단지에서 살게 하고 정부 주택 거주자만을 대상으로 기본생할비 등 필요한 혜택을 부여해야 한다. 주택과 주택 주변의 환경이 문화적인 생존에 가장 중요하므로 정부가 좋은 주거를 제공하는 것만으로도 국민의 생존 불안은 대부분 해소된다. 가족이 함께 거주할 공간만 있으면 가족 해체 방지 가능하고 가족 해체로 인한 추가적 부담도 회피할 수 있다. 정부 주택 거주자만을 생존 보장의 대상으로 하는 것은, 정부 주택단지 거주자의 실생활은 정부가 쉽게 파악할 수 있어 부정수급을 방지할 수 있고, 규모의 경제와 집적의 이익을 활용하여 최소의 재정부담으로 놀고 먹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생존을 보장하면 노동권 보호, 노령연금, 실업보험이 불필요해진다. 시장의 효율성을 제한하고 정부의 재정부담이 크면서도 결국은 실업이라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이들 복지제도를 폐지하면 놀고 먹게 할 수 있는 충분한 재원확보가 가능할 것이다. 한국의 경우 2008년 공공복지 지출 수준은 국내총생산 대비 8.3%에 불과하여 경제협력개발기구 평균(20.6%)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놀고 먹게 하는 경우 4인 가구 생계비를 18백만원으로 잡고 800만명을 놀고 먹게 해도 소요되는 재원은 36조원에 불과하여 국내총생산 대비 5%도 되지 않는다. 



6. 새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놀고 먹게 하는 것이 노동권에 기초한 복지국가 모델을 따르는 것보다 훨씬 비용이 적게 든다. 놀고 먹을 수 있게 하면 복지국가가 해결할 수 없는 생존에 대한 불안도 없앨 수 있다. 노동권이 아닌 생존권을 직접 보장해야 한다. 노동권은 맬더스의 세계에서만 생존권의 수단으로 타당하다. 


시장에는 자유를 주고 필요한 자에게는 주택과 생활비를 주면 된다. 정부가 기본생활을 책임지면 모두가 생존의 부담으로부터 해방되어 생존을 위해 스스로 굴복해야만 했던 상황에서 벗어나게 되므로 진정한 민주주의가 가능해진다. 시장은 두려운 것이 아닌 한 번 도전하고 싶은 유쾌한 놀이터가 되고 삶은 생존을 이어가야 하는 험로가 아니라 즐거움으로 가득찬 여행길이 된다.


생존에 대한 불안이 없어져야 아이들이 놀면서 우애와 창조성을 키울 수 있다. 공부고문으로는 모두가 파괴된다. 한국에는 공부가 괴로워 친구를 괴롭히는 아이들과 취업이 어려워 자살하는 젊은이들이 많다. 전쟁으로 실업을 해소하지 못한다면 미국과 서유럽도 같은 길을 걸을 것이다. 물론 그들은 전쟁으로 많이 해결하고 있다. 평화를 원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경험에서 일해야 먹을 수 있다는 생각이 우리를 파괴했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일해야 먹을 수 있다는 생각은 이제 사라져야 하고 노동권도 사라져야 한다. 대신 우리는 정부가 모든 사람의 생존을 책임져야 한다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우리의 유전자가 거부하더라도 우리는 문화적인 동물이므로 새 문화를 만들 수 있다. 그래야 우리 모두는 생존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