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ㄱ) 『송서(宋書)』 「동이열전」
『송서』 「동이열전」 百濟國,本與高驪俱在遼東之東千餘里,其後高驪略有遼東,百濟略有遼西。百濟所治,謂之晉平郡晉平縣。
百濟國은 본래 고려와 더불어 遼東의 동쪽 1천여리 밖에 있었다. 그후 고려는 요동을, 백제는 遼西를 점령하여 소유하였다. 백제가 통치한 곳을 晋平郡 晋平縣이라 한다.
(ㄴ) 『남제서(南齊書)』: 긁어서 지움.
(ㄷ) 『양서(梁書)』 「동이열전」
『양서』 「동이열전」 百濟者,其先東夷有三韓國,一曰馬韓,二曰辰韓,三曰弁韓。弁韓、辰韓各十二國,馬韓有五十四國。大國萬餘家,小國數千家,總十餘萬戶,百濟即其一也。後漸強大,兼諸小國。其國本與句驪在遼東之東,晉世句驪既略有遼東,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地矣,自置百濟郡。
百濟는 그 시초가 東夷의 三韓國인데 하나는 馬韓이요, 다른 하나는 辰韓이요, 또 하나는 弁韓이었다. --- 그 나라는 본래 句驪와 더불어 遼東의 동쪽에 있었다. 晋나라 때에 이르러 句驪가 이미 遼東을 점령하여 소유하자, 百濟 역시 遼西·晋平 2郡의 땅을 점거하여 소유하고 스스로 百濟郡을 설치하였다.
(ㄹ) 『양직공도』
『양직공도』 百濟 舊來夷馬韓之屬, 晉末駒麗畧有遼東樂浪 亦有遼西晉平縣. 自晉已來常修蕃貢. 義熙中, 其王餘腆, 宋元嘉中, 其王餘毗, 齊永明中, 其王餘太, 皆受中國官爵. 梁初以太爲征東將軍. 尋爲高句驪所破. 普通二年, 其王餘隆遣使奉表云, 累破高麗. 所治城曰固麻, 謂邑曰檐魯, 如中國郡縣. 有二十二檐魯, 分子弟宗族爲之. 旁小國有 叛波·卓·多羅·前羅·斯羅·止迷·麻連·上巳文·下枕羅等附之. 言語衣服畧同高麗. 行不張拱, 拜不申足. 以帽爲冠, 襦曰複衫, 袴曰褌. 其言參諸夏, 亦秦韓之遺俗.
백제는 옛날에 래이 마한에 속하였다. 西晉 말 구려가 요동 낙랑을 점령하여 소유하자, 백제도 요서 진평현을 소유하였다. 東晉 이후로 조공을 했는데, 의희 중에 여전이, 송 원가 중에 여비가, 남제 영명 중에 여태가 중국 관작을 받았다. 양 초기 여태를 정동장군으로 삼았다. 얼마 뒤 고구려에 격파되었다. 보통 2년 여륭이 사신을 보내 여러 번 고려를 무찔렀다고 표를 올렸다. 도성을 고마라 하고, 읍을 담로라 하는데 중국의 군현과 같은 것이다. 22담로가 있는데, 왕족들에게 나누어 주어 다스렸다. 주변 소국인, 반파·탁·다라·전라·사라·지미·마련·상사문·하침라 등이 백제에 부속되어 있다. 말과 옷은 대체로 고구려와 같고, 걸을 때 두 팔을 벌리지 않고, 절 할 때 다리를 펴지 않는다. 모자를 冠(관)이라 부르고, 저고리를 複衫(복삼), 바지를 褌(곤)이라 한다. 그 나라 말에는 중국의 말이 뒤섞여 있으니, 이것 또한 秦과 韓의 유속이라 한다.
(ㅁ) 『위서(魏書)』 「백제전」
『위서』 「백제전」 百濟國,其先出自夫餘。其國北去高句麗千餘里,處小海之南。
百濟國은 그 선조가 夫餘로부터 나왔다. 그 나라는 북쪽으로 高句麗와 천여리가 떨어져 있고, 小海의 남쪽에 위치하였다.
(ㅂ) 『주서(周書)』 「백제전」
『주서(周書)』 「백제전」 百濟 者,其先蓋馬韓之屬國,夫餘之別種。有仇台者,始國於帶方。
百濟는 그 先代가 대체로 馬韓의 속국이며 夫餘의 별종이다. 仇台란 사람이 처음으로 帶方에 나라를 세웠다.
(ㅅ) 『남사(南史)』 「동이전」
『남사(南史)』 「동이전」 百濟 者,其先東夷有三韓國:一曰馬韓,二曰辰韓,三曰弁韓。弁韓、辰韓各十二國,馬韓有五十四國。大國萬餘家,小國數千家,總十餘萬戶, 百濟 即其一也。後漸強大,兼諸小國。其國本與句麗俱在遼東之東千餘里,晉世句麗既略有遼東, 百濟 亦據有遼西、晉平二郡地矣,自置 百濟 郡。
: 『양서』와 동일
(ㅇ) 『북사(北史)』 「백제전」
『북사(北史)』 「백제전」 東明之後有仇台,篤於仁信,始立國于帶方故地。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遂為東夷強國。
東明의 후손에 仇台가 있으니, 어질고 信義가 두터웠다. 처음으로 帶方의 옛 땅에 나라를 세웠다. 漢의 遼東太守 公孫度는 딸을 시집보냈는데, 마침내 東夷 중에서 强國이 되었다.
(ㅈ) 『수서(隋書)』 「동이전」
『수서(隋書)』 「동이전」 백제조, 東明之後,有仇台者,篤於仁信,始立其國于帶方故地。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漸以昌盛,為東夷強國。
: 『북사』와 동일
(ㅊ) 『구당서』 「동이전」
『구당서』 「동이전」 百濟 國,本亦扶餘之別種,嘗為馬韓故地,在京師東六千二百里,處大海之北,小海之南。東北至新羅,西渡海至越州,南渡海至倭國,北渡海至高麗。其王所居有東西兩城。
百濟國도 본래는 扶餘의 別種이다. 일찍이 馬韓의 옛 땅에 있었다. 京師에서 동으로 6,200리 밖에 있으며, 大海의 북쪽, 小海의 남쪽에 위치한다. 동북으로는 新羅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越州에 이르며, 남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倭國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高麗에 이른다. 또 王이 사는 곳에는 동·서로 두 城이 있다.
(ㅋ) 『신당서』 「동이전」
『신당서』 「동이전」 百濟,扶餘別種也。直京師東六千里而贏濱海之陽,西界越州,南倭,北高麗,皆踰海乃至,其東,新羅也。王居東、西二城,
百濟는 扶餘의 別種이다. 京師에서 동쪽으로 6천리이고 영빈해(贏濱海)의 북쪽에 위치해 있다. 서쪽은 越州, 남쪽은 倭, 북쪽은 高麗와 경계를 이루고 있으니, 모두 바다를 건너야 간다. 그 나라의 동쪽은 新羅이다. 王은 東·西의 2城에 산다.
(ㅌ) 『통전』 변방 百濟
『통전』 邊防一 東夷上 百濟, 晋時句麗既略有遼東 百濟亦據有遼西․晋平二郡 今柳城․北平之間 自晋以後 吞并諸國 據有馬韓故地 其國東西四百里,南北九百里,南接新羅,北拒高麗千餘里,西限大海,處小海之南。
晋代에 고구려가 遼東을 점령하여 소유하자, 百濟 역시 遼西와 晋平 2군을 占據하여 소유하였다. 지금의 柳城과 北平 사이이다. 晋代 이후로 諸國을 병탄하였으며 馬韓故地를 점령하여 소유하였다. 그 나라는 동서로 4백리요, 남북으로 9백리이며, 남쪽으로 신라와 접하고, 북쪽으로 고구려와 천여리 대치한다. 서쪽으로 대해까지이고, 소해의 남쪽에 위치한다.
------ 백제의 요서
『송서』 요서, 『양서』와 『남사』의 요서, 『양직공도』 요서, 『통전』의 요서, 『주서』 대방, 『북사』와 『수서』의 대방고지, 『신당서』 영빈해의 북쪽, 『구당서』와 『통전』의 마한고지는 모두 같은 곳을 가리키고 있다. 백제는 마한의 동북쪽에서 건국했는데, 백제 건국 시에는 황하가 대방고지의 서쪽으로 흘러 이 지역도 황하 동쪽으로 韓 지역이었다. 1세기 초 황하가 동쪽으로 옮겨 가면서 이 지역은 황하의 서북쪽이 되었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황하 하류를 요수라 하고 그 서쪽을 요서 그 동쪽을 요동이라 하는 경우도 있다. 『수경주』는 갈석산이 요서 임유현 남쪽 물 속에 있다고 하며, 『수경주』 「禹貢」 恒山爲北嶽,在中山上曲陽縣西北,碣石山在遼西臨渝縣南水中也,
장수절도 영주가 요서와 요동이라고 하여 『사기』 「하본기」 海岱維青州(바다와 태산 사이가 청주이다), 【正義】按:舜分青州為營州、遼西及遼東(살펴보니 순이 청주를 나누어 영주를 만들었다. 영주는 요서와 요동이다)
황하 하류를 요서와 요동으로 지칭한다.
서진 말 중국의 혼란기 고구려가 요동을 점령하자, 백제도 황하 서쪽을 점령하였는데 중국인은 이를 요서라 하였다. 고구려 요동의 요는 중역수를 말하고, 백제 요서의 요는 황하 하류를 말한다. 『신당서』가 영빈해(贏濱海)의 북쪽이라 하는데 『우적도』에서 瀛과 濱 지역이 황하 하류에 표시되어 있다. 영빈해의 해는 황하를 말하는 것으로 영빈해는 영과 빈 지역에 위치한 황하 하류를 의미한다. 즉 영빈해의 서북쪽은 요서이다.
[그림 23: 우적도에서 瀛과 濱의 위치]

『위서』 소해의 남쪽, 『구당서』 대해의 북쪽 소해의 남쪽은, 韓 지역을 포함한 황하 하류 지역을 의미한다. 韓 지역이 소해의 남쪽인 것은 발해를 소해라 하였기 때문이다. 『讀史方輿紀要』 海。海在山東東北境者皆謂之勃海。〈亦曰渤澥。〉 蘇秦曰:「齊北有勃海。」 田肯曰:「西有濁河之限,北有勃海之利。」 又謂之少海。《韓非子》:「齊景公遊於少海。」 少海猶云小海也。《書疏》:「青州之境,越海而有遼東。」 又云:「青州東北據海。」蓋跨有此小海也。
『구당서』가 대해의 북쪽이라 하는데, 이 때 대해는 황해이고, 대해의 북쪽은 산동성과 韓 지역을 포함한 황하 하류 지역을 의미한다. 백제가 강성했을 때는 산동성을 차지하였으므로 백제의 영토를 대해의 북쪽이라 할 수 있다. 강단·일제유사사학은 소해를 아산만이나 경기만 일대라 하고, 대해는 제주해협이나 서해라고 한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 『구당서』 백제 위치 관련 기사 주석은 다음과 같다. (2022.6.10.현재)
處大海之北 小海之南 : 이 句節과 관련하여 『魏書』 百濟傳에는 ‘其國 …… 處小海之南’으로, 『周書』 百濟傳에도 ‘西南俱限大海’로 되어 있으며, 『北史』 百濟傳에서는 ‘西南俱限大海 處小海南’이라 하였다. 여기서의 小海는 牙山灣 一帶를 가리킨 듯 하나, 坂元義種은 本文의 譯註에서 大海는 濟州海峽을, 小海는 京畿灣을 가리키는 듯 하다고 하였다(「譯註中國史書百濟傳」p.293). 그리고 여기에서 首都 長安으로부터 거리를 환산하여 기록한 것은 일면 唐帝國의 天下觀을 反映한 것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高柄翊, 「中國正史의 外國列傳」pp.33~36).
小海
『三國史記』 「百濟本紀」 始祖 溫祚王 13年 8月條에 ‘遣使馬韓告遷都 遂書定疆埸 北至浿河 南限熊川 西窮大海 東極走壤’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에 대해 李丙燾는 溫祚時代의 사실이 아니고 古爾王 27·8年 頃의 일이라고 그 年代를 否定하고 있으며, (『譯註 三國史記』p.357의 註 3) 이 기사는 百濟의 彊域을 考察하는데 要한 史料이며 여기서의 西窮大海는 西海라고 하였다.(李丙燾,『韓國古代史硏究』p.258)
한편 千寬宇는 長壽王 때의 彊域을 推定하면서『魏書』高句麗傳에 나오는 平壤遷都 후 北魏의 使臣 李敖가 平壤에 왔다가 돌아가서 남긴 現地報告書格인 글 중 ‘ …… 平壤城 …… 遼東南一千餘里 東至柵城 南之小海 北至舊夫餘 …… ’라는 기사를 인용하였다. 그리하여 이 기사의 小海는 本文 속의 小海와 같은 것으로서 ‘牙山彎 일대의 海域’이라고 하였다(『人物로 본 韓國古代史』p.141) 그리고『舊唐書』 「東夷列傳」 百濟條에 ‘百濟國 本亦扶餘之別種 嘗爲馬韓故地 在京師東六千二百里 處大海之北 小海之南’이라 되어 있었는데, 위의 『三國史記』의 기록과 『魏書』의 기록이 서로 부합하는 듯 하다.
아산만이 소해이면 서울 백제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제주해협이 큰 바다이면 황해는 큰큰바다가 되어야 하는가? 중국인이 무슨 볼 일이 많다고 제주해협을 대해라고 명명하였겠는가? 이들 강단·일제유사사학은 한반도를 미리 상정하고, 소해나 대해를 어떤 근거도 없이 자의적으로 규정하여, 백제를 한반도에 가두려고만 한다. 그들의 중제유사사학에 대한 충성과 우정은 관포지교를 능가할 것이다.
백제가 황하 서북쪽을 항상 확보하려 했던 것은 백제의 고토이고 백제가 무역세력이기 때문이다. 황하를 거슬러 올라가야 사치품의 최대 소비시장이 있으므로 황하 어귀는 백제에게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황하 동남쪽은 韓 지역으로 항상 확보하고 있었지만 항해의 안전을 위해선 서북쪽도 확보해야 했을 것이다. 중국 사서들이 백제의 황하 서쪽 영토를 주로 언급하는 것은 황하 동쪽 영토 즉 韓 지역은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섬과 같이 격리되어 중국인의 사고에서 제외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오죽했으면 남려가 漢에 속하겠다고 해도 漢이 받아줄 수 없는 지역이었다. 광개토대왕이 韓 지역을 수군으로 점령하기 전까지 韓은 천혜의 요새였다.
『구당서』는 백제가 京師에서 6200리 떨어져 있다 하고, 『신당서』는 6000리 떨어져 있다 하고, 『통전』은 백제의 서쪽이 대해이고 백제는 동서 4백리 남북 9백리라 하나, 이러한 말들은 韓이 아닌, 한반도 백제에 관한 기술이다.
-------------- 백제의 진평(晉平)
『송서』, 『양서』, 『양직공도』, 『남사』, 『통전』의 진평과 『구당서』와 『신당서』의 백제 서쪽 지역인 월주는 광서성(廣西省) 장족자치구이다. 『송서』에 의하면, 광주(廣州) 울림군(鬱林郡)에 진평현이 있었으며, 『宋書』 卷38 志28 州郡4 廣州, 鬱林太守 --- 晉平令,吳立曰長平,晉武帝太康元年更名。
『中國地圖集』(1995년판)에는 宋나라가 설치했던 진평현 경내에 지금까지 ‘백제향’이라는 지명이 살아 남아 있다고 한다. 소진철, 『백제 무령왕의 세계』, 주류성, 2008. 182쪽은 황유복의 논문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고 있다.
“黃有福 교수는 제5차 朝鮮學國際學術심포지엄(大阪, 1997. 7)에서 발표한 논문(「백제의 中國…진출과 晉平郡의 위치에 대하여」)에서, 백제가 晉平縣을 설치했던 시기는 南朝의 宋나라 때라고 주장한다 (『中國 古今地名大辭典』, 晉平縣條-「南朝宋置 南齊因之 今當 在廣西境」).
지금도 장족자치구의 현지인들은 백제향의 중심지인 백제허를 대백제(大百濟)라고 읽으며, 소진철, 위 책, 182-183쪽.
전라도에서 사용되었던 외다리방아와 맷돌을 사용하고 있다. 소진철, 위 책, 249쪽.
『中國古今地名大辭典』도 진평현이 광서성에 있다고 한다. 『中國古今地名大辭典』 【晉平縣】 南朝宋置。南齊因之。今闕。當在廣西境。
진평이 북조의 사서에서 언급되지 않는 것은 진평이 중국 남쪽 즉 남조 영역의 남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흑치상지 묘지명에 ‘그 조상은 부여씨로부터 나왔는데 흑치지역에 봉해지면서 흑치를 성으로 삼았다’라고 「흑치상지 묘지명」 其先出自扶餘氏 封於黒齒 子孫因以為氏焉
기록되어 있는데, 양자강 하류 이남의 지역에서는 사람들이 빈랑(檳榔)이라는 나무 열매를 항상 씹어 이가 검게 된다고 한다. 如宋·周去非, 『嶺外代答 권6』, 上海 遠東出版社, 1996. 「食檳榔」 “自福建 下四川 與廣東 西路皆 檳榔 … 每逢人測 黑齒朱辱」, 소진철, 위 책, 259쪽에서 재인용.
『삼국사』, 『구당서』, 『신당서』 모두 “黑齒常之 百濟西部人(흑치상지는 백제의 서부인이다)”이라 하는데, 『구당서』와 『신당서』는 월주가 백제의 서쪽 지역이라고 한다. 『구당서』와 『신당서』의 월주는 전술하였듯이 진평을 의미한다. 『중국장수전전(中國將帥全傳)』도 흑치상지의 출신지인 백제 서부가 지금의 광동성 흠현 서북이라고 하는데, 鄭福田 可永雪 楊效春 主編, 『中國將帥全傳 卷中』, 北京 工商出版社, 1997. 933쪽. “黑齒常之 唐高宗李治 武則天后時 名將, 百濟(今廣東欽縣 西北) 西部人”
흠현이 흠현은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광동성이 되는 시기도 있고 광서성이 되는 시기도 있다.
광서성 남령시(南寧市) 동남쪽이므로 흠현 서북은 백제향 즉 진평이다. 진평=흑치는 백제의 동남아 무역을 위한 전진기지 역할을 했을 것이다. 백제가 광서성까지 진출하였다는 사실에서, 백제가 타밀인들로부터 동남아와 중국 사이의 무역권을 빼앗은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중제유사사학은 광서성의 백제향을 지우기 위해 ‘백제’가 쟁기 주둥이와 같은 지형에서 유래한 지명이라 하는데, 百濟墟의 유래에 대한 『廣西壯族自治區 行政區劃資料匯編』(1988)과 『廣西壯語地名選
集』(廣西民族出版社)의 풀이는 다음과 같다. (소진철, 위 책, 265쪽에서 재인용)
ㅇ 표준어 발음 – Baijxu(빠이지허)
ㅇ 壯族의 발음 – Daejbakcae(대백제)
ㅇ 자료의 설명 : 1. Daej(大)-壯語로 haw(墟)의 方言
2. Bak(百)-壯語의 해음(諧音)이며 口의 뜻
3. Cae(濟)-壯語의 해음이며 이두(犁頭)를 지칭
故로 「百濟」는 그곳의 지형이 '쟁기의 머리끝' 과 같다해서 생긴 지명이다.
이러한 해석은 壯族이 백제허의 墟자나 대백제의 大자의 뜻을 모를 가능성이 없으므로 억지에 불과하다. 소진철, 위 책, 265쪽.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연나라의 위치 (0) | 2023.02.17 |
---|---|
안악3호분 동수묘 (0) | 2023.02.16 |
비류백제=예(왜)부여 (0) | 2023.02.14 |
백제의 시조와 건국 시 도읍지 (4) | 2023.02.14 |
강단유사사학의 실증성 (한국 고대사를 규정하는 쓰다의 '古朝鮮의 北境'이 근거가 있는가) (0) | 2023.02.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