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조시조설]
백제(百濟)의 시조 온조왕(溫祚王)은 그 아버지가 추모(鄒牟)인데 혹은 주몽(朱蒙)이라고도 한다. 〔주몽은〕 북부여(北扶餘)에서 난을 피하여 졸본부여(卒本扶餘)에 이르렀다. 부여왕은 아들이 없고 딸만 셋이 있었는데, 주몽을 보고는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고 둘째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여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 〔주몽은〕 두 아들을 낳았는데 맏아들은 비류(沸流), 둘째 아들은 온조(溫祚)라고 하였다. 혹은 주몽이 졸본에 이르러서 월군(越郡)의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여 두 아들을 낳았다고도 한다.
추모가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이 와서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마침내 오간(烏干)·마려(馬黎) 등 10명의 신하와 더불어 남쪽으로 갔는데 백성들이 따르는 자가 많았다. 〔그들은〕 드디어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에 올라가 살 만한 곳을 바라보았다. 비류가 해빈에 살고자 하니 10명의 신하가 간언하기를, “생각건대 이곳 강 남쪽의 땅은 북쪽으로는 한수(漢水)를 띠처럼 두르고 있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을 의지하였으며, 남쪽으로는 물댈 수 있는 못을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대해로 막혀 있습니다. 이렇게 하늘이 내려 준 험준함과 지세의 이점은 얻기 어려운 형세이니, 이곳에 도읍을 세우는 것이 〔또한〕 좋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러나〕 비류는 듣지 않고 그 백성들을 나누어 미추홀(彌鄒忽)로 돌아가 살았다. 온조는 강 남쪽의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10명의 신하를 보좌로 삼아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라 하였다. 이때가 전한(前漢) 성제(成帝) 홍가(鴻嘉) 3년(서기전 18년)이었다.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차서 편안히 살 수가 없었다. 위례성으로 돌아와서 보니, 도읍은 안정되고 백성들은 편안하고 태평하므로 마침내 부끄러워하고 후회하다가 죽었다. 그의 신하와 백성들은 모두 위례에 귀부(歸附)하였다. 그 후 올 때 백성(百姓)들이 즐거이 따랐다고 하여 국호를 백제(百濟)로 고쳤다. 그 계통은 고구려(高句麗)와 더불어 부여(扶餘)에서 함께 나왔기 때문에 부여를 씨(氏)로 삼았다.
[비류시조설]
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시조 비류왕(沸流王)은 그 아버지가 우태(優台)이니 북부여왕(北扶餘王) `해부루(解扶婁)의 서손(庶孫)이다. 어머니는 소서노(召西奴)이니 홀본(卒本) 사람 연타발(延陀勃)의 딸이다. 〔소서노가〕 처음 우태에게 시집가서 두 아들을 낳았으니, 맏이는 비류라 하고, 둘째는 온조라 하였다. 우태가 죽자 홀본에서 과부로 지냈다. 그 후 추모가 부여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자 전한(前漢) 건소(建昭) 2년(서기전 37년) 봄 2월에 남쪽으로 도망하여 홀본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국호를 고구려(高句麗)라고 하였으며, 소서노를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 나라의 기틀을 다지고 왕업을 세우는 데 자못 내조가 있었기 때문에 추모는 소서노를 총애하고 대접하는 것이 특히 후하였고, 비류 등을 자기 자식처럼 대하였다. 추모가 부여에 있을 때 예씨(禮氏)에게서 낳은 아들 유류(孺留)가 오자 그를 태자로 삼았고, 왕위를 잇기에 이르렀다. 이에 비류가 동생 온조에게 말하기를, ‘처음 대왕께서 부여의 난을 피해서 이곳으로 도망하여 왔을 때, 우리 어머니가 가산을 쏟아 나라의 위업을 세우는 것을 도와 애쓰고 노력함이 많았다. 〔그런데〕 대왕께서 돌아가시자, 나라가 유류에게 돌아가게 되었으니 우리가 공연히 여기에 있으면서 쓸모없는 사람같이 답답하고 우울하게 지내는 것보다는, 차라리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살만한 곳을 택하여 따로 나라의 도읍을 세우는 것이 낫겠다.’라고 하고, 마침내 그의 동생과 함께 무리를 거느리고 패수(浿水)와 대수(帶水)를 건너 미추홀에 와서 살았다.”
온조 시조설에 의하면 서기전 5년의 천도가 설명되지 않는다. 온조 시조설에서 기술하는 도읍지는 한산 부근 한수 남쪽이다. 그런데 온조가 천도한 도읍지도 한산 부근 한수 남쪽이다.
온조왕 13년 5월 (서기전 6년 05월 (음)) 〔13년〕 여름 5월에 왕이 신하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나라의 동쪽에는 낙랑(樂浪)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靺鞨)이 있어 번갈아 우리 강역을 침공하므로 편안한 날이 적다. 하물며 요사이 요망한 징조가 자주 나타나고, 국모(國母)께서 돌아가셨다. 형세가 스스로 편안치가 않으니, 장차 반드시 도읍을 옮겨야겠다. 내가 어제 순행을 나가 한수의 남쪽을 보니, 땅이 기름지므로 마땅히 그곳에 도읍을 정하여 오래도록 편안한 계책을 도모해야 하겠다.”
따라서 비류 시조설의 미추홀이 첫 도읍지(위례성)이고 온조의 한수 남쪽 위례성은 두 번째 도읍지(위례성)라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런데 소서노로 추정되는 국모가 죽은 후에 온조가 한수 남쪽으로 천도하기로 한다는 것은, 소서노의 죽음 당시 소서노 비류 온조 모두 미추홀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로부터, 비류는 소서노의 결정으로 왕위에 올랐는데, 소서노가 죽자 온조가 정변을 일으켜 왕위를 찬탈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비류시조설의 패수와 대수는 낙랑군의 패수와 대수이다.즉 비류시조설은 초기백제가 낙랑군 부근에 위치한 것도 정확히 기술하고 있다.
서기전 6년 이전의 기록은 소서노왕 시의 일이다. 『태백일사』는 백제의 초대왕은 소서노라 명시한다. 『태백일사』는 소서노가 추모왕에 내속했다고 기술하나,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추모가 유리를 태자로 하겠다고 하자 소서노가) 경인년(서기전 42년) 3월에 패대의 땅이 기름지고 물자가 풍부하다는 말을 듣고 남으로 도망갔다. 신한과 번한 사이 바다가 가까운 벽지에 10년 동안 살며 밭을 사서 장원을 두어 수만 석에 이르는 부를 쌓자 멀고 가까운 곳에서 소문을 듣고 찾아와 의탁하는 자가 많았다. 남으로는 대수에 닿고 동으로는 대해에 이르니 반천리의 땅이 모두 그의 소유였다. 주몽제에게 편지를 보내 섬기기를 원한다고 하니 주몽열제가 매우 기뻐 격려하면서 어하라라는 호를 내려 책봉했다. 13년(서기전 19년)에 소서노가 세상을 떠나자 태자 비류가 즉위하였으나 따르는 자가 없었다.
백제가 건국한 韓 지역의 위례성과 고구려 사이에 漢이 있어 漢人과 漢에 귀부한 오환인(말갈인)이 살고 있으며, 당시 고구려는 漢에 예속된 상태로 소서노가 고구려에 내부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태백일사』의 기술은 고구려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한 거짓이라 볼 수 있다.
『태백일사』가 신한과 번한 사이 바닷가 땅에서 백제가 기원한다고 기술하는데, 이는 『태백일사』가 위서가 아닌 결정적 증거이고 韓(후삼한)이 한반도가 아닌 본고의 주장과 같이 발해만에 있었음을 밝히는 명백한 증거가 된다. 본고가 韓 지역의 위치를 입증하고 후삼한을 규명하기 전까지, 신한과 번한 사이 바닷가 땅에서 백제가 건국했다는 기술은 백제가 경상도 김해 부근에서 건국했다는 말과 같았으므로 말도 안 되는 헛소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온조시조설이 정설로 된 이유는 온조와 백제의 정통성 확보를 위해서이다. 비류와 온조가 나누어서 도읍했는데 비류 세력은 좋지 않은 곳에 도읍해서 망했다고 하는 것이 부담이 적다. 건국 초기에서 소서노와 비류를 지우기 위해 첫 도읍지를 한수 남쪽 위례성으로 기술한 것이다.
따라서 비류시조설 즉 소서노 시조설이 타당하고, 비류와 온조도 비류시조설이 기술하듯이 우태의 아들로 보아야 한다. 고구려와 가야는 물론 신라도 시조의 건국 설화가 있는데, 백제에는 없는 것은 연타발-소서노가 상업 세력이어서 현실적이었고, 한편으로는 건국 초기의 정변 때문이라 추측할 수 있다.
온조시조설 중 비류와 온조가 추모왕의 아들이라는 것은 사실 고구려 정통론을 위한 거짓이다. 중국인들이 주변 모든 나라를 그들이 생각하는 중국인의 후손이라 하는 것처럼, 고구려 정통론도 백제가 고구려로부터 나온 나라라 한 것이다. 어머니가 왕 옆에 있는 왕자와 어머니가 없는 왕자가 있는 경우 어머니가 있는 왕자가 태자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 겨레의 나라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소서노같은 유능한 어머니가 자기 아들을 다음 왕으로 만들지 못했다는 것은 비류와 온조가 추모왕의 아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강단유사사학은 漢水를 한강이라 하나, 낙랑군 남쪽에도 한수가 있었고 이 한수가 백제의 한수이다. 『산해경』 「해내서경」은 “맥국이 漢水 동북에 있었다. 燕에 가까워 연이 멸했다”고 『산해경』 「해내서경」 貊國在漢水東北, 地近燕, 滅之
하는데, 여기서 맥국은 진번조선이다. 『산해경』이 말하는 한수가 백제가 도읍한 한수이다. 강단유사사학은 ‘북쪽으로는 패하(浿河)에 이르고, 남쪽은 웅천(熊川)을 경계로 삼으며, 서쪽으로는 대해에 닿고, 동쪽으로는 주양(走壤)에 이르렀다’는 서기전 6년의 기사 중, ‘서쪽으로는 대해에 닿고’를 이유삼아 지금의 서울이나 하남을 백제의 첫 도읍지로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마한왕이 백제에게 동북쪽 백리의 땅을 주었다는 말과 모순된다. 백리를 주었다는 말은 사실은 백리가 안된다는 말이다. 설사 백리라고 하더라도, 송파구에서 인천 해안까지 직선거리가 44km이고 하남에서는 53km이므로 100리의 땅과는 맞지 않다.
대해는 지금의 백양정이나 당시의 황하를 의미한다. 당시 발해만은 육지로 더 들어간 상태였고, 당시의 황하는 발해만으로 들어오면서 넓게 퍼져 바다 같았다. 거기에 백양정까지 고려하면 백제의 서쪽을 대해라 표현했더라도 틀린 말이 아니다. 『사기집해』는 서광(徐廣)이 海는 河의 뜻도 있다 말하였다고 기술한다. 【集解】徐廣曰:「海,一作『河』
河는 보통명사이기도 하고 황하라는 고유명사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의 강단유사사학 종사자들을 제외하고 모든 사람들은 자기 나라의 역사를 그럴듯하고 멋있게 기술한다. 대해라는 표현은 그러한 표현이다. 강단유사사학이 말하는 주양은 춘천인데 송파구에서 춘천까지 직선거리로 약 68km이다. 강단유사사학은 패수가 예성강이고 대수는 임진강이라 하는데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 『삼국사』 비류 시조설에 나오는 패수와 대수에 대한 주석은 다음과 같다. (2022.2.16.현재)
패수(浿水) : 패하(浿河)·패강(浿江)이라고도 하는데, 그 위치는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다. 고조선 시기의 패수에 대해서는 ① 청천강(淸川江)으로 보는 견해(李丙燾, 1976), ② 압록강(鴨綠江)으로 보는 견해(丁若鏞, 「浿水考」, 『我邦疆域考』), ③ 요서지방의 다링허[大凌河]로 보는 견해(리지린, 1963) 등이 있다. 한편 삼국시대의 패수도 여러 기록에 등장하는데, 본서 권23 백제본기1 온조왕 13년(서기전 6년)조의 영역 획정 기사에 나오는 ‘북지패하(北至浿河)’와 온조왕 38년(20)에 왕이 순무했던 북쪽의 경계로 나오는 패하에 대해서도 대동강설, 재령강설, 예성강설이 있지만 대체로 예성강설이 받아들여진다(임기환, 38쪽).
대수(帶水) : 임진강으로 추정된다. 온조 집단이 고구려를 떠나 서해안 항로를 타고 남하했거나, 평안도 지역을 관통하여 (패수와 대수를 건너) 한강 유역에 정착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李丙燾, 1976,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470~471쪽).
예성강가의 금천군에서 송파구까지 직선거리로 90km이다. 강단유사사학은 웅천이 안성천이라 주장하는데 안성천에서 송파구까지 직선거리로 58km이다. 마한왕이 주었다는 백제 땅 백리와 강단유사사학의 위치비정은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이때 그들의 특기가 등장한다. 그들은 어떠한 근거도 없이 김부식이 온조왕 시 백제의 영토를 거짓으로 기술했다고 사기를 치면서 이병도는 북쪽으로 예성강, 동쪽으로 춘천, 남쪽으로 공주까지 닿았던 영토가 온조왕 때의 사실이 아닌 서기 3세기에 백제가 군소 국가들을 통합하여 통일 고대 국가로 출범하던 고이왕 때의 영토라고 설명하고 있다.(李丙燾, 1996, 『國譯三國史記 下』, 을유문화사, 14쪽)
韓백제는 없고 백제는 한강 유역의 소국이라고 창작한다. 물론 이는 임나 선생님의 강림을 위한 필수적 배경이다.
[한 상고사 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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