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에는 두 개의 부여가 등장한다. 하나는 추모가 도망쳐오고 유화부인이 있던 동부여이다. 동부여는 유화가 사망하자 태후의 예로 장례를 치르고 추모는 감사를 표한다. 『三國史』 「髙句麗本紀」 東明聖王 十四年, 冬十月, 遣使扶餘饋方物, 以報其徳.
고구려 초기 등장하는 부여는 동부여이다. 그 왕 대소가 금와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대소가 죽고 일부는 갈사국을 세우고 나머지는 고구려에 투항한다. 『三國史』 「髙句麗本紀」 大武神王 22년 秋七月, 扶餘王從弟謂國人曰, “我先王身亡, 國滅民無所依, 王弟逃竄, 都扵曷思. 吾亦不肖, 無以㒷復.” 乃與萬餘人来投, 王封爲王, 安置掾那部. 以其背有絡文, 賜姓絡氏.
이는 광개토대왕릉비문의, 동부여가 속민이었다는 기술과 일치한다. 갈사국도 68년 고구려에 복속한다. 『三國史』 「髙句麗本紀」 太祖大王 十六年秋八月, 曷思王孫都頭, 以國來降. 以都頭爲于台.
111년 漢의 낙랑군을 공격하고, 『후한서』 「동이열전」 부여, 至安帝 永初五年, 夫餘王始將步騎七八千人寇鈔樂浪, 殺傷吏民, 後復歸附.
121년과 122년 고구려가 현도와 요동성을 공격할 때 漢을 구원하고, 『三國史』 「髙句麗本紀」 太祖大王 六十九年 十二月, 王率馬韓·穢貊一萬餘騎, 進圍玄莬城. 扶餘王遣子尉仇台, 領兵二萬, 與漢兵并力拒戰, 我軍大敗. 七十年, 王與馬韓·穢貊侵遼東, 扶餘王遣兵救破之
167년에 현도군을 공격하는 『후한서』 「동이열전」 부여, 永康元年, 王夫台將二萬餘人寇玄菟, 玄菟太守公孫域擊破之, 斬首千餘級.
부여는 韓 지역 북쪽의 부여이다. 본고에서는 이 부여를 예부여(=왜부여=비류백제)라 명명한다.
위의 전투 사실에서 예부여의 위치는 낙랑군 현도군 요동군과 가까운 지역임을 알 수 있다. 동부여는 이들 군들과는 고구려로 분리되어 있다. 121년 10월 태조왕은 동부여에 가서 태후의 사당에 제사 지내는데, 121년 12월 현도성 전투에서 동부여가 적국이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강단유사사학은 이러한 상식적 의문에 대한 답변 없이 모두 같은 부여라고 주장한다. 중국의 사서들이 부여에 동부여와 예부여를 뒤섞어 기술하고 있는 것은 중국인들이 탈취한 우리 사서에 기술된 부여와 그들과 실제로 접촉했던 부여가 같은 줄 알았기 때문이다.
예부여가 본래 현토군에 속해 있었고 漢 말 공손씨에 복속했다는 것과 『삼국지』 「위서 동이전」 부여, 夫餘本屬玄菟 漢末 公孫度雄張海東 威服外夷 夫餘王尉仇台更屬遼東 時句麗鮮卑彊 度以夫餘在二虜之間 妻以宗女 [夫餘는 본래 玄菟郡에 속하였다. 漢나라 말년에 公孫度가 海東에서 세력을 확장하여 外夷들을 威力으로 복속시키자, 부여왕 尉仇台는 遼東郡에 복속하였다. 이 때에 高句麗와 鮮卑가 강성해지자, 公孫度는 부여가 두 오랑캐의 틈에 끼여 있는 것을 기화로 一族의 딸을 그 王에게 시집보내었다.]
夫餘王의 장례에 옥갑을 사용하였는데, 언제나 옥갑을 현토군에 미리 갖다두었다가 王이 죽으면 그것을 가져다 장사지냈다는 것은 『삼국지』 「위서 동이전」 부여, 漢時, 夫餘王葬用玉匣, 常豫以付玄菟郡, 王死則迎取以葬. 公孫淵伏誅, 玄菟庫猶有玉匣一具.
예부여가 현도군과 접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부여왕의 도장에 ‘濊王之印’이란 글귀가 있고 나라 가운데에 濊城이란 이름의 옛 성이 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부여, 其印文言「濊王之印」, 國有故城名濊城, 蓋本濊貊之地,
후한에서 현도군은 구 낙랑군 동부도위 지역으로 이동했으므로, 이로부터 예부여가 황하 하류 예(왜)를 기반으로 형성되었고 그 부근이 예부여의 영역임을 알 수 있다. 국호를 부여라 한 데서 지배층이 북쪽에서 남하한 것임을 알 수 있는데, 황하 하류 예집단 지역으로 남하한 세력은 비류와 온조이다.
서기전 6년 온조의 찬탈로 온조가 백제를 차지하였고, 온조 정권에서 버림 받은 비류계 세력이 비류 후손을 중심으로, 대방고지(후에 대방군이 되는 지역)가 황하의 수류변동으로 황하에 의해 온조백제와 격리되자 예부여로 독립하였다.
『삼국사』는 “동명(東明)의 후손 중에 구태(仇台)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어질고 신의가 있었다. 처음에 대방(帶方)의 옛 땅에서 나라를 세웠는데, 한(漢)의 요동태수 공손도(公孫度)가 자기의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으며, 마침내 동이(東夷)의 강국이 되었다”라고 『북사(北史)』와 『수서(隋書)』를 인용하여 백제의 시조 구태설을 소개하는데, 『三國史』 「百濟本紀」 溫祚王, 北史及隋書皆云, “東明之後有仇台, 篤於仁信. 初立國于帶方故地, 漢遼東大守公孫度, 以女妻之, 遂爲東夷強國.
이는 예부여와 백제가 뒤섞인 이야기이다. 『삼국지』에 예부여의 왕과 공손도 일족 딸의 혼인이 기술되어 있다. 예부여는 동이의 강국이라 할 수는 없고 그 부분은 백제에 관한 이야기이다. 대방고지에서 나라를 세운 것은 예부여와 백제 모두에 타당한 이야기이다. 백제와 예부여의 건국자는 소서노인데, 후세에 여자를 건국자로 하지 않기 위해 백제와 예부여 모두 비류와 온조의 아버지를 우태(优台 優台)라 하였다. 우태의 뜻은 웃어른을 의미하며 시조를 의미하는 동명과 같은 뜻의 말이다. 강진원, 「백제 仇台廟의 성격과 부상 배경」, 『동서인문학, 56』. 2019. 127쪽.
『북사(北史)』와 『수서(隋書)』 등 중국 사서는 해마다 백제가 네 차례 시조 구태의 묘(廟)에 제사 지낸다고 하며, 『북사』 「백제전」 立其始祖仇台之廟於國城, 歲四祠之
『삼국사』는 백제왕들이 동명왕묘에 배알한다고 하며, 『삼국사』에 인용된 『해동고기』도 백제의 시조는 동명 또는 우태라 한다. 『삼국사』 「잡지-제사」 按海東古記, 或云始祖東明, 或云始祖優台.
구태(仇台)는 우태가 와전된 표현이다. 강진원, 「백제 仇台廟의 성격과 부상 배경」, 『동서인문학, 56』. 2019. 127쪽.
중국인들이 우리 민족의 시조를 비하하는 한자를 사용하여 仇자로 전해지게 되었다. 『북사(北史)』와 『수서(隋書)』는 백제가 대방고지를 탈환하자 예부여(비류백제)와 공손씨의 혼인동맹을 백제의 이야기로 착각하여 기술한 것으로 추측된다. 우태는 소서노를 지우기 위해 등장시킨 보통명사이므로 비류와 온조 아버지의 본명은 아니다. 사실 비류와 온조는 부여의 왕통과는 무관하다고 보아야 한다. 비류시조설에 기술된 우태는 시조를 의미하는 보통명사이고, 우태가 해부루의 서손이라는 말은 비류와 온조를 辰國(북부여나 동부여)의 왕통에 연결시키기 위한 것이다. 연타발 소서노의 상업세력이 정통성을 얻기 위해 비류세력은 국호와 왕성(王姓)을 부여라 하였고, 백제는 왕성만을 부여라 하였다.
예부여의 변화
『후한서』는 49년에 부여가 조공한 후 해마다 사절이 왕래하였다고 하는데, 『후한서』 「동이열전」 부여, 建武中,東夷諸國皆來獻見。二十五年,夫餘王遣使奉貢,光武厚荅報之,於是使命歲通。
이 기사의 부여는 당시 고구려의 속국인 동부여가 아니고 예부여이다. 예부여는 111년 낙랑군을 공격한 후 바로 귀부하고, 167년 현도군을 공격한 후에도 174년 바로 귀부하는데, 『후한서』 「동이열전」 부여, 至靈帝 熹平三年, 復奉章貢獻
이는 예부여의 위치상 漢에 귀부하지 않으면, 漢은 물론 고구려나 백제 선비 등 다른 세력에 의해 바로 점령당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漢이 소국인 예부여를 놓아 두었던 이유는 다른 세력들을 통제하는데 이용하기 위해서이다.
단석괴가 그 영토를 3부로 나누어서 그 중 동부가 우북평에서 요동까지인데, 부여와 예맥과 접한다. 『후한서』 「오환선비전」 乃自分其地爲三部, 從右北平以東至遼東, 接夫餘·濊貊二十餘邑爲東部, 從右北平以西至 上谷十餘邑爲中部, 從上谷以西至敦煌·烏孫二十餘邑爲西部, 各置大人主領之, 皆屬檀石槐.
여기서 부여는 예부여이고, 예맥은 고구려이다. 단석괴는 영토 내 호수에 물고기가 많아서, 이를 식량으로 활용하기 위해 왜인 천여가를 강제 이주시켜 물고기를 잡도록 하였다. 『후한서』 「오환선비전」 種眾日多,田畜射獵不足給食, 檀石槐 乃自徇行,見烏侯秦水廣從數百里,水停不流,其中有魚,不能得之。聞倭人善網捕,於是東擊倭人國,得千餘家,徙置秦水上,令捕魚以助糧食。
단석괴가 왜인들을 잡아간 곳이 예부여이다.
전술하였듯이 공손씨가 고구려와 선비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예부여와 혼인동맹을 맺었다. 예부여는 조위가 공손씨를 멸한 후 245년 고구려를 공격할 때 조위에 군량을 제공하여 적극적으로 조위에 협조한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부여, 正始(240~248)中, 幽州刺史毌丘儉討句麗, 遣玄菟太守王頎詣夫餘, 位居遣大加郊迎, 供軍糧.
단석괴 사후 모용씨가 낙랑군 북쪽을 차지하였는데, 모용외가 285년 예부여를 공격하여 의려왕은 자살하고 왕족들은 옥저로 낙랑군 동부도위의 관할이었던 남옥저이다.
도망가는 등 거의 망했으나 『진서』 「동이전」 부여, 武帝時,頻來朝貢,至太康六年,為慕容廆所襲破,其王依慮自殺,子弟走保沃沮。
진의 도움으로 나라를 재건하였다. 『진서』 「동이전」 부여, 明年,夫餘後王依羅遣詣龕,求率見人還復舊國,仍請援。龕上列,遣督郵賈沈以兵送之。廆又要之於路,沈與戰,大敗之,廆眾退,羅得復國。
『자치통감』은 346년 1월 하충의 사망을 기술하면서 하충과 관련된 사실을 기술한다. 『자치통감』은 하충이 모용황이 337년 10월 『晉書』 「帝紀」 咸康三年 冬十月丁卯,慕容皝自立為燕王
연왕을 칭하는 것을 허용하는데 관련되었다는 것과, 모용황이 예부여를 복속시킨 과정을 기술하면서, 예부여가 취약해진 원인이 백제의 공격으로 연(모용황) 쪽으로 밀려난 것이라 한다. 『자치통감』 권97 진기39 현종성황제 하 영화 2년 --- 初,夫餘居於鹿山,為百濟所侵,部落衰散,西徙近燕,而不設備。燕王皝遣世子俊帥慕容軍、慕容恪、慕輿根三將軍、萬七千騎襲夫餘。俊居中指授,軍事皆以任恪。遂拔夫餘,虜其王玄及部落五萬餘口而還。皝以玄為鎮軍將軍,妻以女。
『자치통감』에 의하면 337년 이전 비류왕 때 백제는 예부여를 공격한 것이 되는데, 『진서』 「모용황재기」에 의하면 모용황 3년 즉 336년 묘용황이 예부여를 정복하였다. 『진서』 「모용황재기」 三年, 遣其世子儁與恪率騎萬七千東襲夫餘,克之,虜其王及部眾五萬餘口以還。
따라서 백제는 모용황이 예부여를 공격하는 336년 이전 어느 시점에 예부여에게 본거지를 이동시킬 정도의 타격을 주었다. [강단유사사학에서는 백제가 예부여를 공격한 것을 결코 설명할 수 없다. 그들은 이러한 부분이 나오면 묵언수행한다]
모용외는 서진이 복국시킨 예부여를 점령하려 하지 않았지만, 모용황은 진은 남쪽으로 갔고, 다른 세력이 예부여를 정복할 수도 있다 생각하여 바로 점령하였다. 강단유사사학은 336년 이전 어느 시점의 백제의 예부여 공격을 346년 있었다고 날조하며 백제가 아니라 백제로 표현된 세력이라고 하여 그들의 문학에 부합하지 않는 사서의 내용은 가차없이 부인한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 『삼국사』 백제건국기사에 대한 주석은 다음과 같다. (2022.4.4. 현재)
『자치통감(資治通鑑)』 권97 진기(晉紀)19 효종목황제(孝宗穆皇帝) 上之上에 따르면 부여는 346년 백제로 표현된 세력에 의해 서쪽으로 수도를 옮겼다.
『자치통감』과 『진서』까지 날조사서로 만드는 그들의 용감무쌍함을 우리는 자랑스러워해야 한다.
『진서』 「모용황재기」 345년 기사에, 봉유가 모용황에게 고구려 백제 우문부 단부의 사람들은 포로로 잡혀 온 사람이라고 하면서 이주정책의 필요성을 말하는 부분이 있는데, 『진서』 「모용황재기」 皝記室參軍封裕練日 --- 句麗百濟及宇文段部之人 皆兵勢所徙 非如中國慕義而至 咸有思歸之心
이는 전연과 백제가 전쟁을 하였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백제가 예부여를 이겼지만 당시 모용황의 세력이 강하여 낙랑군은 차지하지 못하였으리라 추정된다. 강단유사사학은 이 기사의 백제를 부여의 오기라고 근거 없이 주장한다. 그들의 창작소설에 부합하지 않으면 전부 오기고 오류라 주장하여 비학문성을 드높인다.
전연은, 인질로서 전연의 수도인 업에 머물던 예부여 왕자 여울이 성문을 열어주어 전진에게 망한다. 『자치통감』 권100, 진기22 戊寅 燕散騎侍郎餘蔚帥扶餘·高句麗及上黨質子五百餘人 (--- 燕蓋遣兵 戍上黨 取其子弟 留於鄴以爲質 餘蔚扶餘王子 故陰率諸質子 開門以納秦兵) 夜開鄴北門 納秦兵 燕主暐與上庸王評·樂安王臧·定襄王淵·左衛將軍孟高·殿中將軍艾朗等犇龍城.”
즉 예부여는 모용황에게 정복된 뒤에도 속국으로 나라를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예부여는 494년 고구려에 투항한다. 『三國史』 「髙句麗本紀」 文咨王 三年春二月 扶餘王及妻孥, 以國來降.
당시 고구려와 백제가 다투는 중간에 있어 독자적으로 생존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강단유사사학은 이때 투항한 부여도 동부여라고 하나, 동부여는 광개토대왕릉비문에 의하면, 「광개토대왕릉비문」 廿年庚戌 東夫餘舊是鄒牟王屬民 中叛不貢. 王躬率往討.
서기 22년 투항하였다가 중간에 조공하지 않았다 하여 410년 다시 토벌되므로, 494년에 다시 투항할 수는 없다.
『태백일사』 「대진국본기」는 예부여의 일부 세력이 열도로 이주하였다고 한다. 『태백일사』 「대진국본기」 定州依慮國所都...依羅 率衆數千 越海 遂定倭人 爲王
3세기말에서 4세기초 예부여의 상황이 모용씨와 백제에 의해 양쪽에서 공격 받는 상황이고 예부여인들은 어업과 항해에 능한 왜인들이 다수이므로 신빙성 있는 기사로 생각된다. 현재 의라신사가 오사카 강어귀에 있는데, 강어귀는 왜인들이 선호하는 정착지이다. 예부여 즉 비류백제가 일본 천황가가 된다는 견해가 있으나, 열도는 초기 가야 지배, 3세기 말 이후 백제 담로 지배, 5세기 고구려 백제의 분할 지배, 6세기 이후 백제 지배 시기를 거치므로 예부여가 열도의 지배세력이 되었던 시기는 없다고 할 수 있다. 예부여가 열도에서 안라국이 되었다면 5세기 고구려 백제 분할 지배기에 고구려의 대리인으로서 열도 북부를 지배하였을 가능성은 있다.
예부여를 필자와 같이 정립하지 않는 한 우리 역사는 제대로 설명될 수 없다. 자치통감 등 수많은 신뢰성 있는 중국사서에 등장하는 예부여를 동부여라 우기면서, 그들의 소설로 설명할 수 없는 사서의 기사에 대해선 묵언수행과 오역 억지 등 갖가지 '가공할 실증적 방법'을 사용하는 강단유사사학은 세계역사학계의 보물로서 우주 멸망 시까지 그들의 위대한 이름을 떨칠 것이다.
[한 상고사 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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