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안악3호분 동수묘

역사회복 2023. 2. 16. 11:29
 

고구려가 유주(서진의 유주 평주 지역과 韓지역 북부)를 480년대 초까지 유지하였다는 것은 안악3호분 묵서명에 의해서 증명된다. 김일권의 판독문과 그 해석을 김일권, 「고구려 5세기 금석문에 나타난 干支曆日 자료와 曆法 연구」, 『동북아역사논총 36』, 2012. 65쪽. 참고하고 일부를 수정하면 묵서명은 다음과 같다.

판독문: 永和十三年十月戊子朔卄六日癸丑, 使持節 都督諸軍事 平東將軍 護撫夷校尉 樂浪, 韓, 昌黎, 玄菟, 帶方太守 都鄕侯, 幽州 遼東 平郭 都鄕 敬上里, 冬壽, 字□安, 年六十九薨官.

해석: 永和 13년 10월 무자삭월 26일 계축일에, 使持節 都督諸軍事 平東將軍 護撫夷校尉이자, 樂浪, 韓, 昌黎, 玄菟, 帶方太守이자 都鄕侯이며, 幽州 遼東郡 平郭縣 都鄕 敬上里 출신인 冬壽는 字가 □安으로, 나이 69세에 관직 수행 중 사망하였다.

樂浪과 昌黎 사이 한 글자는 舊, 相으로 보았으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 안악 3호분 묵서명 판독문 (2022.3.16. 현재)

필자는 韓으로 본다. 낙랑군에 태수와 다른 관제를 설치했다는 근거는 없고, 후술하는 평양역 구내 무덤에서 韓태수가 명확히 기록되어 있으므로, 한 글자의 군은 韓으로 보아야 한다.

강단유사사학은 안악3호분 묵서명의 동수(冬壽)가 『資治通鑑』에서 336년 前燕의 慕容皝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실패하여 고구려로 망명했다고 한 佟壽라고 한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 안악 3호분 묵서명 해설은 다음과 같다. (2022.3.16. 현재)

289~357년. 『晉書』109 慕容皝載記 및 『資治通鑑』95 晉紀17 成帝 咸康 2년조에 보이는 佟壽와 동일 인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① 冬壽도 중국 출신이며, ② 冬壽와 佟壽의 활동시기가 같고, ③ 佟壽를 『廣韻』이나 『姓解』에서도 冬壽라고도 하기 때문이다. 이들 기록에 의하면 佟壽(판본에 따라서는 佟燾)는 前燕 慕用皝의 司馬로서, 모용황의 왕위 계승에 불만을 품고 平郭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킨 慕用仁을 치러갔다가 패하여 모용인의 휘하에 들어간다. 그 후 336년 모용황의 기습 공격으로 모용인의 세력이 괴멸할 때, 郭充과 더불어 고구려로 망명한다. 고구려로 망명한 이후의 행적은 문헌에 보이지 않으나, 안악 3호분의 묵서에 열거된 관작과 관직명으로 미루어 고구려에서도 상당한 지위를 누렸던 듯하다.

그들은 묵서명의 ‘永和十三年’이 사마담(동진 목제)의 연호로서 357년을 가리킨다고 한다. 그러나 사마담은 영화란 연호를 356년까지 사용하였고 357년에는 승평이라는 연호를 사용한다. 그들은 고구려를 우스운 국가로 여기므로 고구려가 동진의 연호를 사용하였고 동진이 연호를 바꾸어도 모르고 그대로 사용하였다고 근거없이 주장한다.

우선 고구려가 당시 밀접한 관계가 아니었던 남조 동진의 연호를 사용하였을 가능성은 매우 적으며, 사용하였다 가정하더라도, 3년상을 하여 무덤을 닫는 시점은 사망일 후 최소 1년 2개월 최대 2년 2개월이 지난 후이므로, 10월 26일에 사망했고, 무덤을 닫는 시기는 다음 다음 해의 1월 1일에서 12월 31일 사이에 있게 되므로, 사망일 후 최소 1년 2개월 최대 2년 2개월 후에 무덤을 닫는다.

 

연호가 바꿔진 지 최소 2년이 지난 시점(3년째 해)에서도 연호의 변경을 모른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리고 과거의 장례는 지금과 다르다. 그 의미가 훨씬 중요하다. 그리고 그 후손이 그 정도의 무덤을 축조할 정도의 힘을 가진 경우라면 연호를 다르게 적을 가능성은 전무하다. 강단유사사학은 기본적 사실관계를 부정하고 소설을 창작한다.

고구려는 생존을 위해서라도 중국의 상황을 항상 살펴야만 했다. 동진의 연호를 사용했다면 연초에 반드시 확인하였을 것이다. 冬壽와 佟壽는 이름도 다르다. 강단유사사학은 황해도에도 중국인 묘가 있다고 주장하여 일제·중제유사사학에 충성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고 광분한다. 물론 佟壽가 모용황에 반기를 든 사람이었더라도, 그는 중국인이 아닌 조선족 선비집단의 일원이므로, 강단유사사학의 말에는 맞는 것은 하나도 없고 그저 일제·중제유사사학을 향한 무한한 충성심만 있을 뿐이다.

동수는 고구려인으로 413년 광개토대왕이 407년 정복한 하북성 지역에서 고구려 관리(요동 태수)의 아들로 태어난 사람이다. 그래서 유주 요동군 출신의 고구려인이다. 영화는 장수왕의 연호로 469년부터 사용되었다고 보면 481년이 영화 13년이다. 현시력에 의하면 481년도 10월 1일이 戊子일이고 고구려의 독자적 역법에 의해서도 戊子일로 추측된다. 동수가 역임한 관직은 고구려의 관직이다. 물론 사지절 도독제군사 평동장군 호무이교위 등이 위나라로부터 받은 관작으로 추측되지만 이는 고구려의 관리로서 장수왕이 위에게 요청하여 받은 것이므로, 실질상 고구려왕이 준 지위이다. 동수는 현지에서 태어나 우리말도 하고 현지어도 잘 하였으므로 낙랑 韓 창려 현도 대방 등 유주 지역 전문 관료로서 근무하다가 죽어서 가문의 묘지인 안악에 묻힌 것으로 추측된다.

안악3호분은 동수의 무덤이다. 왕은 수도에 묻혔을 것이고, 고구려의 남쪽 변방에 묻힐 가능성이 적다. 3년상을 치르던 당시, 수도인 요양에서 멀리 떨어진 황해도에 부왕을 매장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수도가 환도성인 시기라면 더욱 힘들다. 환도성은 하북성 옥전현(玉田縣) 중가산촌(仲家山村)이기 때문이다. 벽화에 성상번(聖上幡)이 나온다 하여 왕릉이라 보는 견해도 있으나, 聖자로 보기 어렵다. 고구려가 한창 강성한 시기여서, 제후인 동수의 행차가 왕처럼 보일 정도로 대단했고 그의 무덤도 규모가 컸다고 볼 수 있다. 성상번이 맞고 왕을 의미한다면 장수왕이 동수가 관할하던 곳으로 순시했을 때 왕을 호위한 장면을 그린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동수가 광개토대왕이 회복한 지역에서 계속 관료로 활동하다 죽었다는 것은 이 지역을 고구려가 480년대 초까지 계속 영유하였음을 의미한다. 동수가 관직 수행 중 사망하였다는 것은 481년 10월 동성왕의 공격 시에 사망한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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