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연나라의 위치

역사회복 2023. 2. 17. 08:43
 
연소왕 이전 연나라의 위치

한국사를 날조하기 위해 가장 심하게 날조된 것은 연나라 위치이다. 연나라를 날조해야 조선의 영역을 축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연나라를 날조해서 대륙조선을 지우고 평양의 유물이 중국식이라고 하면서 낙랑군이 평양이라 날조한다. 대륙은 辰조선의 영역이고, 평양은 말조선의 영역이어서 대륙과 평양 모두 조선이므로 강단유사사학이 말하는 중국식 유물이 평양에서도 나올 것이다.

연나라 위치가 왜곡되어 조선에 관한 모든 연구는 엉뚱하게 진행되고 있다. 중제유사사학은 과거에 천진이 계라고 주장하였으나 당시에 천진의 상당부분이 바닷속이라는 사실이 알려진 후, 지금은 북경이 계라 주장한다. 연나라의 위치만 바로잡아도 모든 역사 날조는 근거를 잃게 된다.

연나라 위치는 『사기』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연은 약소국이었다. 연의 전성기는 연소왕 시기뿐이다. 연 전성기 직전의 연의 영역은 조나라 무령왕과 소진의 말로 확인된다.

『사기』 「조세가」에 의하면, 무령왕 19년(서기전 307년경) 무령왕이 조의 국경을 말하면서 누완에게는 “북으로는 연이 있고, 동으로는 호가 있으며, 서쪽은 임호, 누번, 진, 한의 변경이다”라고 했고, 『사기』 「조세가」 北有燕,東有胡,西有林胡、樓煩、秦、韓之邊

공자 성에게는 “우리나라는 동으로 황하와 박락수가 있어 제 중산과 그것을 함께 사용하고 있으나 배와 노의 사용은 없다. 상산에서 대 상당에 이르기까지 동으로 연과 동호의 변경이 있고, 서쪽으로 누번과 진, 한의 변경이 있다”라 말했다. 『사기』 「조세가」 吾國東有河、薄洛之水,與齊、中山同之,無舟楫之用。自常山以至代、上黨,東有燕、東胡之境,而西有樓煩、秦、韓之邊

한편, 『사기』 「소진열전」에 의하면, 소진은 서기전 334년 연문후에게 “연나라는 동쪽으로 조선(朝鮮)과 요동(遼東)이, 북쪽으로는 임호(林胡)와 누번(樓煩)이, 서쪽으로는 운중(雲中)과 구원(九原)이, 남쪽으로는 호타하(嘑沱河)와 역수(易水)가 있습니다”라고 하고, “남으로 갈석(碣石)과 안문(雁門)의 풍요로움이 있고”라 하며, “조나라가 연을 공격한다면 출병의 명령을 발한 지 열흘이 안 되어 수십 만 대군이 동쪽 성벽쪽에 진을 치게 될 것입니다. 호타하와 역수를 건너 4, 5일 안에 도성에 이를 것입니다”라 한다. 『사기』 「소진열전」 燕東有朝鮮、遼東,北有林胡、樓煩,西有雲中、九原,南有嘑沱、易水. --- 南有碣石、鴈門之饒 --- 今趙之攻燕也,發號出令,不至十日而數十萬之軍軍於東垣矣。渡嘑沱,涉易水,不至四五日而距國都矣.

 

소진이 말하는 갈석은 『사기색은』이 인용하는 『전국책』에 의하면 상산에 있는 산이다. 【索隱】(戰國策) 碣石 山在常山九門縣。

갈석이 상산에 있고 안문이 대 옆에 있으므로 무령왕이 말하는 국경과 소진이 말하는 국경이 일치한다. 즉 연의 남쪽과 서쪽 경계는 호타하이다. 소진은 서쪽으로 조나라가 아니라 먼 지역인 운중 구원을 말했는데 운중 구원은 조나라의 서쪽 변경이다. 『사기』 「조세가」는 무령왕 26년(서기전 301년) 조나라의 서쪽 변경은 운중 구원이라 한다(復攻中山,攘地北至燕、代,西至雲中、九原).

소진은 북으로 임호 누번을 말했는데 「조세가」에선 무령왕이 임호 누번이 조나라의 서쪽 변경이라고 말하므로 임호 누번 역시 연에 접하지 않는 먼 나라를 가리키는 표현에 불과하다. 소진이 연의 경계도 아닌, 운중 구원, 임호 누번을 언급하는 것은 주변 강대국을 언급하는 것을 피하면서 연이 그곳에까지 어떤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측면도 있을 수 있다고 암시하거나 막연한 기대감을 주어 문후의 기분을 좋게 하려는 의도의 행위이고, 연의 실제 국경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연의 실질적 서쪽 경계는 태행산맥이다. 태행산맥 너머 안문까지 산악지역은 연의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에 불과하다.

연의 북쪽 경계는 갈석산과 나중에 漢이 수리하여 지킨 요동고새이다. 연의 수도는 소진의 말에 의하면 조나라가 침략시 호타와와 역수를 넘어야 수도에 온다고 했으므로 남역수 현재 구글지도에서 중역수와 북역수는 볼 수 있지만 남역수는 보이지 않는다.『中國古今地名大辭典』에 남역수가 徐水에 들어간다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서수구 부근으로 흘렀던 강으로 추정된다. [南易水。源出易縣西南。東流入徐水]

북쪽 요동고새 남쪽으로 추정되고 이는 호타하와 역수를 넘어 4-5일도 되지 않아 조나라가 수도에 올 수 있다는 소진의 말과 일치한다. 구글 지도에 의하면 석가장 근처의 호타하에서 요동고새까지의 직선거리를 측정하면 130km에 불과하다.

연의 동쪽 경계는 고대 황하이다. 소진이 말하였듯이 황하 동쪽은 조선이다. 연의 요동고새 북쪽도 조선이다. 여기의 조선은 진번조선이다. 사마천이 「조선열전」에서 “전 연의 시기에 진정 처음으로 진번조선을 침략하여 복속시킴을 경험하였다. 관리를 두고 장새를 쌓으려 하였다”라고 하기 때문이다.

연의 북쪽이 요동고새를 넘어가지 못하는 것은 『한비자』 「유도편」과 『시경』 「대아」 한혁편으로 입증된다. 물론 한혁편의 내용은 서주시기의 일이지만, 연은 연소왕 이전까지 제나라의 도움으로 나라를 유지하는데 급급했으므로, 서주 이후 연소왕 이전에 북쪽 경계를 확대시켰을 가능성은 없으며, 『한비자』 「유도편」이 직접 언급하는 경계와 일치한다. 고고학적으로도 연나라의 중심지역이라 날조되어 온 북경과 보정을 잇는 선 일대로부터 천진을 포함하는 지역에서조차 연나라 유적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궈다순·장싱더(郭大順·張星德) 지음, 김정열 옮김, 『동북문화와 유연문명 하』, 동북아역사재단, 2008. 1059쪽.

『한비자』 「유도편」은 연 양왕 연의 소양왕은 소왕으로 또는 양왕으로 불린다.

이 황하를 경계로 하였고, 계(薊)를 수도로 삼았고, 탁과 방성을 공격하였고, 제를 없애고, 중산을 평정했다고 한다. 『한비자』 「유도편」 燕襄王以河為境,以薊為國,襲涿、方城,殘齊,平中山

『讀史方輿紀要』는 「順天府」 固安縣 동남 17리에 있고 이목이 연에서 탈취한(『괄지지』 인용) 方城舊城이 연소왕이 공격한(『한비자』 인용) 방성이라 한다. 『讀史方輿紀要』 方城舊城,《括地志》:在今縣東南十七里。本燕舊邑。趙悼襄王初,李牧伐燕,取方城。《韓非子》:燕以河爲境,以薊爲國,襲涿方城,殘齊平山。是也。

『시경』 「한혁편」은 추족과 맥족을 다스리는 한후를 위해 연나라 백성이 韓城을 쌓았다고 한다. 『시경』 「한혁」 溥彼韓城 燕師所完, … 王錫韓侯, 其追其貊

후한 사람인 왕부의 『잠부론』도 주선왕 시 한후의 나라 부근에 연이 있었다고 한다. 『잠부론』 昔周宣王亦有韓侯,其國也近燕

『水經注』 「聖水 巨馬水」편은 거마하의 북쪽 지류인 聖水가 방성구성과 한성을 지나는데, 방성구성이 이목이 연에서 탈취한 방성이고 『水經注』 「聖水 巨馬水」 又東逕方城縣故城北,李牧伐燕取方城是也

성수 옆 한성이 『시경』 「한혁편」의 한성이라 『水經注』 「聖水 巨馬水」 聖水又東南逕韓城東,《詩·韓奕章》曰:溥彼韓城,燕師所完,王錫韓侯,其追其貊,奄受北國。

한다. 즉 요동고새 바로 위에 진번조선의 방성과 한후의 韓城이 있으므로 연소왕 이전 연의 북쪽은 요동고새일 수밖에 없다.

진개의 침략으로 연이 조백하 부근까지 진출하였고, 진번조선이 뺏긴 요동고새 북쪽에서 조백하까지의 지역(진개5군)은 진번조선(대부여의 후국)의 핵심 지역이었으므로 진번조선은 약화되어 결국 멸망하였고, 북경 북쪽 진번조선의 지방세력이었던 고구려가 서기전 232년 대부여를 무너뜨리고 북부여를 건국한다.

                                                              [그림 7: 연의 전성기 직전 영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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