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
고구려 수도를 알지 못하면 우리 역사를 이해할 수 없다. 『삼국사』는 고구려는 처음에 중국 북부 지역에 있다가, 곧 점점 동으로 패수(浿水)의 근처로 옮겨갔다고 기술한다. 이는 강단유사사학의 소설은 역사가 아님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북경 동북쪽에서 건국한 고구려가 현도군을 정복한 14년부터 멸망 시까지 북경은 고구려의 영토였다. 고구려 멸망 시의 수도는 요양이다. 국내성은 현재의 집안에서 머나먼 서쪽의 천안시이고 한성은 현재의 평양이다. 국내성이 집안이고, 고구려 평양이 현 평양이라는 것은 개솔이며, 국내성과 현 평양은 고구려의 도읍인 적이 없다. 먼저 고구려의 실제 수도를 살피고, 강단유사사학 주장의 억지성을 살핀다.
2. 고구려 수도의 변동
1) 고구려의 건국지: BCE 37년, 홀본 = 북경시 평곡구 성산
유철은 곽거병을 보내 흉노의 동쪽을 격파하고, 이들 오환인들을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 오군의 새외지역에 이주시켜 漢을 위해 흉노를 정찰하도록 하였다. 漢이 이주시킨 오환은 흉노에 복속된 북부여 서쪽 사람들이다. 현도군이 고구려현에 설치되었으므로 고구려는 그 위치로 보아 진번조선의 지방세력인데, 진번조선이 망하자 일부 세력이 북부여를 건국하였다. 북부여가 고두막에 의해 가섭원으로 쫓겨나고, 쫓겨나서도 금와에 의해 찬탈당하는데, 추모는 동부여 즉 북부여의 왕족이었으므로 금와가 집권한 동부여의 세력이 닿지 않는 漢으로 도망쳤다고 추측할 수 있다. 오환이나 추모나 모두 북부여인이었고, 추모는 북부여의 왕족이었으므로, 홀본 즉 요동군에서 요동군 내 오환인의 지도자로 추대되었을 것이고 漢도 오환인의 관리를 위해 추모를 요동군 내 오환인의 지도자로 인정하였을 것이다. 즉 고구려는 漢에 귀부한 오환인의 자치체에서 기원한다. 추모는 요동군 성산에 도읍하고, 현도군의 동쪽 경계에 있는 책구루(幘溝漊)에서 의책을 받아갔으며 여율왕 때인 서기 14년 현도군 고구려현을 점령하므로, 요동오환을 기반으로 건국하였다고 볼 수 있다.
광개토대왕릉비는 건국 도읍지를 “於沸流谷忽本西城山上而建都焉,”라고 기술한다. 이 문구를 “비류곡 홀본 서쪽에서 산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웠다”라 해석하는 경우도 있으나, 그러한 의미가 되기 위해선 ‘於沸流谷忽本西城山上’이 아니라 ‘城於沸流谷忽本西山上’이 되어야 하므로 옳지 않다. 무엇보다도 고구려가 漢의 부용 세력으로서 漢의 영토인 요동군 내에서 건국하여, 원천적으로 성을 쌓을 수 없는 지위에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해석은 불가능하다. 문자 그대로의 올바른 해석은 “비류곡 홀본 서쪽 성산 위에 의거하여 도읍을 세웠다” 이다. 당토명승도회(唐土名勝圖會) 순천부총도(順天府總圖)에 성산(城山)이 구수(泃水) 서쪽에 표기되어 있다. 따라서 비류수는 구하이고, 비류곡 즉 홀본은 금해호(金海湖) 서쪽 구하 유역(지금의 平谷區)임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도 고구려는 홀본부여이고 홀본은 요동의 가장자리에 있다고 하여 홀본이 요동군 내라 하고 있다. 『삼국사』도 추모왕이 비류수 가에 도읍을 정하였는데, 궁실을 짓지 않았다고 한다. 궁실을 짓지 않았고 산을 도읍으로 생각했다는 것도 독립된 세력이 아니었음을 의미한다.
2) 독립 시의 수도 이전: CE 12년, 위나암성 = 천안시 북쪽 경계의 어느 바위산
고구려는 홀본에서 현도군의 통제 하에 있었다. 고구려가 동부여에 대항할 정도의 힘을 갖춘 후에는, 요동외요 밖으로 나가서 독립해야 했다. 『삼국사』는 고구려가 서기 3년에 도읍을 국납(國內)으로 옮기고 위나암성을 쌓았다고 하나, 천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國內는 국납이다. 국납은 나라국과 들납이다. 즉 나라들이란 의미이다. 고구려는 서기 3년에 국납 부근에 성(위나암성)을 쌓으면서 수도를 실질적으로 이전할 준비를 하였다. 서기 2년 3월에 설지가 천도를 건의하였고, 서기 2년 9월에 유리왕이 국납에 직접 가서 지세를 살폈고, 서기 3년 10월에 위나암성이 완성되었고, 협보가 서기 3년 12월에 간언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좌천되자 韓으로 떠났다. 고구려 지배층은 서기 2년 무렵 漢으로부터 독립할 기회가 되었다고 판단하여 추모왕이 정해 둔 눌현=국납 부근에 도성을 쌓을 것을 유리왕에게 건의하여 유리왕이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위나암성이 완성되었음에도 유리왕이 실질적 독립 즉 홀본에서 모든 인구와 재산 등을 위나암성으로 이전하는 것을 미루고 사냥이나 다니니 협보가 답답하여 간언하였다가 韓으로 가버렸다. 유리왕은 독립할 마음이 없었다. 설지가 천도를 건의한 후 6개월이나 있다가 국납으로 갔다. 유리왕은 독립했다가 漢이나 동부여의 공격을 받을까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협보가 서기 3년 12월에 간언하였고, 유리왕이 新의 부용세력인 채로 죽었으므로, 유리왕은 천도한다고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위나암성으로의 천도는 유리왕이 죽은 서기 12년으로 보아야 한다.
『한서』 「지리지」는 마자수가 서북쪽으로 염난수에 들어가, 서안평 서남쪽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한다. 이는 漢이 당산 지역을 일시적으로 지배했던 시기를 기술한 것으로 보인다. 마자수는 북경 북동쪽 산악지역에서 북서쪽으로 흐르는 柳河이고, 염난수는 난하를 지칭한다. 연산산맥 동부에 진번군을 설치했다가 현도군으로 바꾸었으므로 류하의 위치를 서개마현에 기술하였다. 전술하였듯이 현도군에서 실효지배했던 지역은 요동외요 내의 고구려현이고 상은태현 서개마현은 실효지배하지 못했다. 고구려의 국납성은 342년 축성되는데 『신당서』 「동이열전」 고구려조는 마자수(압록수)가 국납성 서쪽을 지나, 염난수와 합해진다고 한다. 『신당서』에 의하면 마자수가 난하이고, 염난수는 청룡(青龍)강이며 국내성은 지금의 천안시(遷安市)로 추측된다. 천안시 주변은 평야지대이며 난하와 청룡강의 퇴적토로 비옥하여 당시 고구려의 대표적 곡창지대였을 것이므로 나라들이라는 명칭이 부여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위나암성은 국납지방의 넓은 평야 주변에 있으며, 대무신왕 11년(서기 28년) 新의 침략 시 “한나라 사람들은 우리들이 있는 암석의 땅에는 샘이 없으리라 생각하여, 오랫동안 포위하여 우리가 피로해지기를 기다기고 있습니다”라는 말로 보아 바위산에 축성된 도성이다. 천안시 바로 북쪽의 나즈막한 산간지대 어느 바위산에 위나암성이 있었으리라 추측된다.
3) 209년 환도성 = 당산시 옥전현
산상왕은 198년 환도성을 쌓고, 209년 위나암성에서 환도성으로 천도하였다. 산상왕은 후한 말 혼란기를 이용하여, 고구려 영역을 확대하기 위해서 서쪽으로 천도하였을 것이다. 『삼국사』 「잡지第六」 압록수 이북의 아직 항복하지 않은 11성에서 “안시성은 옛 안촌홀이다. 혹은 환도성이라고도 한다”라고 한다. 『한서』 「지리지」 요동군편은 “대요수(조백하)는 안시 남쪽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한다. 따라서 안시현은 지금의 옥전현(玉田縣)으로 추정되고 환도성은 지금의 중가산촌(仲家山村) 동북쪽 옆의 산성으로 추정된다.
강단유사사학은 집안의 산성자산성을 환도성이라 하나, 출토된 구획선이 없는 연화문 와당의 연대를 통해 궁전지의 조성 연대를 추정하면 빨라도 5세기로 추정된다고 하여, 그들 주장에 전혀 증거가 없음을 자인하고 있다.
조위가 동천왕이 환도성에서 도망가자 그를 추격하는데, 북옥저(중국 사서는 동옥저라 함)를 지나 천여리를 가서 관구검(무구검) 기공비를 세웠고, 그것이 집안 판석령에서 발견되었으므로 집안이 환도성이 되는 것은 불가능함에도 강단유사사학은 일제와 중국의 침략적 민족주의에 충실히 복무하기 위해 눈뜨고도 못 본 체 한다. 조위군은 환도성이 한사군 설치 시 낙랑군 동부도위 치소였다고 진수처럼 착각하여 환도성에 불내(不耐)성이라 새기고 돌아갔다.
7세기 이세민의 침입 시 안시성은 건안성 신성 등과 함께 국경 부근의 성으로 기술되어 있어 고구려말의 안시성은 남역수 부근의 성으로 추정되므로 고구려 초기와 중기의 안시성(=환도성)과는 다른 성으로 생각된다.
4) 247년 평양 = 요양
동천왕은 관구검에 패한 후 247년 환도성에서 평양성으로 천도하였다. 역도원이 6세기 초에 쓴 『수경주』에서, 고구려 사신으로부터 들었다 하면서 패수는 서쪽으로 흘러 고구려 수도를 경과하고 이후 서북으로 흐른다고 주장했는데, 태자하는 요양을 서쪽으로 지난 후 서북으로 흐른다. 김부식도 “평양(요양)은 지금의 서경인 것 같다”고 하였다.
강단유사사학은 평양이 지금의 평양이라 하는데 대동강은 평양을 지나 남서로 흘러가므로, 그들이 존경하는, 예맥조선의 패수와 고구려의 패수도 구분 못하는 역도원의 말과도 맞지 않는다. 또 강단유사사학의 소설 속 낙랑군은 313년까지는 지금의 평양 즉 대동강 남쪽에 존재하는데, 그들은 동천왕이 조위에 쫓겨서 조위 영토인 낙랑군 바로 코앞인 대동강 북쪽으로 수도를 옮긴다고 한다. 강단유사사학의 경이스런 소설적 상상력에 고개가 절로 수그러진다. 강단유사사학 종사자들도 이러한 소설에는 낯이 뜨거웠는지 동천왕의 평양은 지금의 평양과 다른 곳이라는 전혀 근거가 없는 새로운 소설을 창작하기도 하고, 동천왕은 천도를 아예 하지 않았다는, 그들의 주특기인, 소설에 불부합하는 사료 부정하기를 시전하기도 한다. 일제유사사학을 향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실된 충정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5) 342년 환도성 = 당산시 옥전현
고국원왕은 342년 2월 환도성을 수리하였고 8월에는 평양성에서 환도성으로 옮아 거처했다. 고국원왕은 서진이 망한 후 북조의 혼란기를 이용하여, 고구려 영역을 확대하기 위해서 서쪽으로 천도하였을 것이다.
6) 343 황성 = 집안
고국원왕은 342년 11월 전연에 의해 환도성이 함락되어 343년 7월 환도성에서 평양 동쪽의 황성으로 천도하는데, 김부식은 황성이 요양 동쪽 목멱산중에 있다고 한다. 황성은 광개토대왕릉이 있는 집안이다. 집안은 이때 최초로 고구려의 도읍이 된다. 『동국여지승람』도 이 지역을 황성평이라 했다고 한다. 강단유사사학은 집안이 유리왕이 도읍한 국내성이라 주장하나, 최근 중국의 발굴 결과 축성연대가 320년 이상 올라가지 않는다 하므로, 집안은 고국원왕이 천도한 황성임이 입증되었다고 할 것이다. 고국원왕이 평양이 아닌 산중의 황성으로 천도한 것은, 환도성이 두 번째로 함락되자 수도의 방어력에 더 큰 고려를 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7) 427년 평양 = 요양
장수왕은 427년 황성에서 평양으로 천도하였다. 장수왕은 광개토대왕 때의 국력 회복으로 산중에서 들로 나왔다.
8) 586년 장안 = 금주
552년 양원왕은 장안성을 쌓았다. 평원왕은 586년 평양성에서 장안성으로 천도하였다. 『당서』는 평양성은 장안이라 불렸다고 하고, 『고기』는 평양으로부터 장안으로 옮겼다고 하므로 김부식은 두 성이 동일한지 다르다면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는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장안성은 평양과는 다르다. 중국인들은 고구려가 줄곧 평양을 수도로 하여 고구려의 왕이 있으면 평양이라고 불렀다. 장안성은 지금의 금주인데, 고구려가 중국 동북부의 대륙을 경영하기에는 평양(요양)이 너무 멀어 금주로 도읍을 옮긴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의 국력이 강화되면서 집안-요양-금주로 수도가 계속 서쪽으로 이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장안성이 지금의 금주임은 수나라의 2차 침공에서 알 수 있다. 수나라 군사는 611년 탁군에 모였다. 수군은 612년 1월 출발하면서 좌 12군은 누방 장잠 명해 개마 건안 남소 요동 현도 부여 조선 옥저 낙랑의 길로 나가고, 우 12군은 점제 함자 혼미 임둔 후성 제해 답돈 숙신 갈석 동이 대방 양평의 길로 나가기로 하였다. 隋군은 요동성을 비롯한 주변의 각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자 각 성들을 포위하고 남은 군사들을 평양(장안성) 쪽으로 보냈다. 우문술은 부여도로, 우중문은 낙랑도로, 형원항은 요동도로, 설세웅은 옥저도로, 신세웅은 현도도로, 장근은 양평도로, 조효재는 갈석도로, 최홍승은 수성도로, 위문승은 증지도로 나와서 모두 9개군 30만이 압록수 서쪽에 모였다. 수나라와의 경계였던 당하 중역수 주변 고구려 영토에 이들 지명이 있다.
수의 별동대 30만이 요동성에서 출발한 날은 6월 11일 이후이다. 양광은 전황에 진전이 없자 6월 11일 장수들을 죽일 수도 있다고 협박하였다. 그러자 장수들이 별동대라는 대책을 양광에게 건의했을 것이고, 양광이 이를 승인하는 과정을 거쳐 별동대 파견이 결정되었을 것이며, 별동대의 조직과 보급대책의 실행에도 시간이 필요하므로, 6월 11일 이후, 10일 정도 후에나 별동대가 출발하였을 것이다. 수가 퇴각하며 살수에 도착한 것은 7월 24일이다. 후퇴 시 살수에서 대패한 후 450리를 하루낮 하룻밤에 행군하여 압록수에 이르렀다고 한다. 보병은 다 죽거나 도망가고, 기병만 살아남아서 후퇴했으므로 450리를 하루낮 하룻밤에 갈 수 있었을 것이다. 압록수인 난하에서 450리 떨어진 살수는 160km 거리의 연태하(煙台河)로 추정된다. 연태하는 화살처럼 강이 곧다. 당시 고구려의 요동성은 보정시 동쪽 창주시 북서쪽이다. 요동성에서 요양까지의 거리는 700km이다. 별동대의 출발일을 6월 20일경으로 본다면 30여일 정도에 950km를 이동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수 많은 강과 고구려군의 저항, 고구려 수도에서 대치한 시간, 대능하와 요하 유역은 여름에 진흙길로 변한다는 사실, 살수까지 퇴각 시의 속도 저하 등을 고려하면 장안이 요양일 수는 없다. 금주는 요동성에서 500km이므로 30여일 정도에 550km를 이동할 수 있어서, 장안을 금주라 가정하면 날자가 맞아떨어진다. 따라서 장안은 금주이고, 내호아의 해군이 도착한 패수는 지금의 소릉하(小凌河)로 볼 수 있다.
장안성을 요양으로 보고 요하를 압록수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요하는 요양에서 50km 떨어져 있으므로 살수에서 450리를 행군하여 압록수에 이르렀다는 『삼국사』의 기록과 부합하지 않는다.
9) 영류왕 재위 시, 평양 = 요양
영류왕이 당에 봉역도를 주고, 경관을 헐어버린 것으로 보아 영류왕은 장안성에서 요양으로 옮아가서 거주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무서워서 옮긴 것이므로 정식으로 천도한다는 말도 못하고 옮겼을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가 망할 때의 수도는 평양(요양)이다.
3. 강단유사사학의 고구려 수도 변동 소설
『삼국사』는 고구려가 중국 북부에 있다가 동쪽으로 옮겼다고 하는데 강단의 소설에 의하면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동한 것이 된다. 강단은 일제의 교시를 준수하기 위해 말도 안 되는 소설을 쓰며 일제에 올곧은 충성을 보인다.
1) 홀본 = 환인 오녀산성
아무 근거가 없다.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 부근의 소국이라는 일제의 교시에 맞추기 위해 그 부근에서 아무데나 지정한다. 강단에 의하면 환인에서 집안 평양으로의 이동은 남쪽으로 이동한 것이 되어 『삼국사』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2) CE 3년 국내성 (위나암성) = 집안 평지성 (통구성)
유리왕의 천도를 부정하는 견해가 있고, 천도를 긍정하는 견해는 집안 평지성으로 옮겼다고 한다. 고구려의 국내=국납이 당산 옆의 천안시임을 부정하기 위해 모두 집안이라고 사기친다.
3) 209년 환도성 = 집안 산성 (산성자산성)
집안 평지성과 집안 산성은 2.5km 거리이다. 고구려는 2.5km를 옮긴 것을 도읍을 옮긴 것으로 말할 리가 없다. 이유도 모른다. 환도성의 실체가 당산시 옥전현임을 부정하기 위한 거짓말에 불과하다.
조위가 동천왕이 환도성에서 도망가자 그를 추격하는데, 북옥저(중국 사서는 동옥저라 함)를 지나 천여리를 가서 관구검(무구검) 기공비를 세웠고, 그것이 집안 판석령에서 발견되었으므로 집안이 환도성이 되는 것은 불가능함에도 강단유사사학은 일제와 중국의 침략적 민족주의에 충실히 복무하기 위해 눈뜨고도 못 본 체 한다. [관구검기공비 발견 위치로 환도성이 집안이라는 것은 개사기임이 드러났음에도 강단 사기꾼들은 대중은 모르겠지 하면서 함구하고 있다. 즉 그들이 사기꾼 집단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4) 247년 평양 = 개소리 잔치
평양설은 동천왕이 조위에 대패하여 조위 낙랑군 맞은 편으로 천도한다는 견해로 아직은 강단 사기꾼들의 다수설이다. 동천왕의 평양은 지금의 평양과 다른 곳이라는 전혀 근거가 없는 새로운 소설이 사기집단의 신 다수설같다. 동천왕은 천도를 아예 하지 않았다는 사기꾼도 있다. 모두 사기꾼들이고 일제에 대한 깊은 충절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차이는 없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 『삼국사』 동천왕 천도기사에 대한 주석은 다음과 같다. (2022.3.10.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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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성(平壤城) : 이 기사의 평양성 위치에 대해서는 현 북한 평양설(채희국, 25~26쪽 ; 정찬영, 14쪽; 손영종, 153~154쪽), 현 북한 자강도 강계설(이병도, 373쪽; 徐永大, 114~137쪽). 현 지안시 동대자(東台子)유적설(魏存成, 33쪽), 현 지안시 양민지역설(張福有, 14~15쪽; 임기환, 252쪽), 환런[桓仁]지역 나합성설(조법종, 188~194쪽), 현 집안현성[국내성]설(심광주, 181쪽; 김희선, 154~155쪽; 여호규, 76쪽, 강진원, 211~213쪽; 기경량, 254~260쪽) 등이 있다.
현 북한 평양설은 북한학계의 주류 견해인데, 당시는 북한 평양지역에 낙랑군이 존재하고 있었으므로 수용하기 어렵다. 여러 견해 중 현 지안시 평지성인 집안현성[국내성]이 다수의 지지를 받는 견해이다. 그런데 현재 남아있는 이른바 국내성에 대한 지금까지의 성벽 및 성 내부 발굴 조사 결과 3세기 후반 이상으로 올라가는 유적을 찾기 힘들다. 이 때문에, 동천왕 때에 과연 현존 국내성의 성벽이 축조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아 있다. 성벽 축조는 인정하지 않더라도 현 국내성 일대가 도읍으로서 거주지가 되었다는 점은 인정할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평양’이란 이름은 고구려왕의 장지명인 동양(東壤), 중양(中壤), 서양(西壤), 호양(好壤)이란 지명에서 유추하자면 집안 일대의 너른 평지를 가리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동천왕 21년(247)의 평양성 위치에 대한 논란에 대해서는 권순홍, 5~14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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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342년 환도성 = 집안 산성 (산성자산성)
아무런 배경도 이유도 없이 환도성은 당산시에 있으면 안 되므로 환도성은 집안이라고 주장한다.
6) 343년 평양 동쪽 황성 = 개소리 잔치
강단의 주장은 개소리들 잔치라고 보면 된다. 평양설, 천도 부인설, 압록강 중상류 평양설, 환도성 부근설 등 일제에 대한 충절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황성이 집안이고 이 때 최초로 집안이 고구려의 수도가 되는데, 다른 고구려의 수도를 집안이라 사기치다 보니 정작 집안이 수도일 때는 집안이 아니라고 하게 된다. 그러니 사기꾼들 말은 하나라도 믿을 것이 없게 된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 『삼국사』 고국원원 천도기사에 대한 주석은 다음과 같다. (2024.2.4.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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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학계에서는 동천왕 시기의 평양성은 대체로 압록강 중상류 일대에 위치했다고 보면서도 이 기사의 평양 동황성은 지금의 평양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늘어나고 있는데(신동하, 19-20쪽; 차용걸, 15-16쪽; 임기환 1995, 17쪽; 김미경, 29-30쪽), 청암동토성(민덕식, 126-127쪽; 장효정, 142-143쪽; 김지희, 26-39쪽), 안학궁 일대(임기환 2007, 16-17쪽) 등으로 비정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신증동국여지승람』 과 「동여도(東輿圖)」 등 조선시기의 지지(地誌) 자료를 참조하여 평양 동황성을 평양 동쪽의 의암동토성으로 비정한 다음, 이 기사는 후대의 인식이 반영된 것으로 역사적 사실로 보기 어렵다는 견해도 제기되었다(기경량, 327-343쪽). 이처럼 평양 동황성의 위치 비정에 대해 논란이 분분한데, 고구려가 4세기 초에 평양지역으로 진출한 이후 압록강 중상류에 있던 평양성의 명칭을 평양 동황성으로 개칭했을 가능성(여호규, 163-165쪽),‘거처를 옮겼다[移居]’라는 표현이 임시적 거처 이동으로 기존의 도성인 국내성이나 환도성과 멀리 떨어지지 않았을 가능성(권순홍, 21쪽) 등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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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427년 평양과 586년 장안 = 현 평양
사기꾼들은 장안성을 숨기기 위해 “이때 천도한 평양 도성은 평양 시가지의 동북쪽 일대로 비정되는데, 평원왕 28년(586)에 도읍으로 삼은 장안성(현재의 평양시가지)과 구분하기 위해 전기 평양성이라 일컫는다.”라고 한다. 사기꾼들은 고구려 영토의 광대함을 숨기기 위해 평양 내에서 천도를 했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반복한다.
현 평양은 한성이다. 고려의 서경인 고구려 평양을 현 평양으로 보면 김부식이 평양의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평양 북쪽 70km에 진압군을 집결시켰다는 모순이 발생한다. 사기꾼들은 그러거나 말거나 일제에 충성하면 된다고 생각하니 아무런 잘못을 느끼지 않는다.
4. 결
강단 사기꾼들은 고구려의 건국지가 북경시 평곡구 성산이란 것, 위나암성이 천안시 북쪽 부근이라는 것, 환도성이 당산시 옥전현이라는 것, 평양이 요양이라는 것, 황성이 집안이라는 것, 장안이 금주라는 것을 숨기고 있다. 환인, 국내성, 현 평양(한성)은 고구려의 수도였던 적이 없다. 국내성은 천안시로 집안과는 전혀 무관하다. 사기꾼들은 위나암성 환도성 국내성을 집안이라 사기치고, 최근에는 동천왕의 247년 평양도 집안이라 하는 경우도 있다. 집안은 황성으로 343년부터 427년까지만 고구려의 수도였다. 사기꾼들은 황성이 고구려의 수도였던 시기에는 집안이 아닌 것 같다는 갖가지 소설을 늘어놓는다.
고구려 수도에 관한 강단 사기꾼들의 말은 전부 거짓말이며 아무런 근거도 없다. 오직 일제 교시에 따라 고구려를 압록강 중상류의 소국으로 묶어놓기 위해 고구려의 수도에 대해 소설을 쓰고 있을 뿐이다. 사기의 가장 명확한 증거는 관구검기공비가 집안에서 발견된 것이다. 물론 『삼국사』가 고구려는 처음에 중국 북부 지역에 있다가, 곧 점점 동으로 패수(浿水)의 근처(요양)로 옮겨갔다는 기사도 중요한 사기의 증거이다. 북경이 고구려 영토였고, 광개토대왕의 후연 정벌 이후 당하까지 고구려의 영토였다는 것을 부인하면 사기꾼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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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학술지 역사비평사에 이의신청서 제출 (0) | 2024.02.03 |
역사비평사 사기꾼들의 심사문(게재거부) 공개('요동반도 백제와 대동강 원산만 선의 허구성'에 대한 심사문임) (0) | 2024.02.02 |
4세기 전반기에 고구려가 중국의 영토를 뺏었는가? (2) | 2024.01.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