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부여의 건국과 동부여와의 구별 『삼국사』에는 두 개의 부여가 등장한다. 하나는 추모가 도망쳐오고 유화부인이 있던 동부여이다. 동부여는 유화가 사망하자 태후의 예로 장례를 치르고 추모는 감사를 표한다. 『三國史』 「髙句麗本紀」 東明聖王 十四年, 冬十月, 遣使扶餘饋方物, 以報其徳. 고구려 초기 등장하는 부여는 동부여이다. 그 왕 대소가 금와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대소가 죽고 일부는 갈사국을 세우고 나머지는 고구려에 투항한다. 『三國史』 「髙句麗本紀」 大武神王 22년 秋七月, 扶餘王從弟謂國人曰, “我先王身亡, 國滅民無所依, 王弟逃竄, 都扵曷思. 吾亦不肖, 無以㒷復.” 乃與萬餘人来投, 王封爲王, 安置掾那部. 以其背有絡文, 賜姓絡氏. 이는 광개토대왕릉비문의, 동부여가 속민이었다는 기술과 일치한다. 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