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100여 마을 시대
삼조선 시기부터 조선인들이 열도로 이주하였다. 『후한서』는 열도에 100여개 마을이 있었고 예맥조선이 멸망한 후 전한과 통하는 나라가 30여개라 한다.
여기에서 100여개 마을이 있었다는 것은 열도의 상황을 의미하지만, 전한과 교역하는 나라가 30여개였다는 것은 왜집단의 마을이 30여개였음을을 의미한다. 예맥조선이 전한 동북쪽의 무역을 독점적으로 중개하였다가 망하자, 당산 지역, 요동반도, 황하 하류의 왜집단이 직접 전한과 교역하였는데, 이들 마을의 수가 30여개였다는 것이다. 즉 전한과 교역하였다는 나라 30여개 중에 북구주의 왜집단을 제외한 나머지는 열도와 무관한 마을이다. 북구주 지역은 대형 옹관묘가 발견되는 지역으로 왜집단의 마을국가가 있었던 곳이다. 북구주의 왜가 전한과 교역했다는 증거는 요시노가리 유적에서 발견된 전한경(前漢鏡)에 의해 입증된다.
『후한서』는 57년 노국이 후한과 접촉하여 후한이 인수를 주었다고 한다. 한위노국왕(漢委奴國王)이라 새겨진 도장이 후쿠오카에서 발견되어 이 기사의 사실성이 입증된다. 노국이 전한 시에 전한과 교역한 마을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3) 가야계 지배 시대
열도는 1세기 후반부터 가야계가 진출한다. 구주는 1세기 말 가야의 분국이 되고 기내는 2세기 후반에 가야계의 야마대국이 주도하는 마을연맹체가 된다. 구주는 김씨집단이 진출하고 기내는 허씨집단이 진출한다. 구주의 건국설화는 가야와 거의 동일하고, 기내는 여자 무당이 중심이 되는 마을 연맹체를 성립시킨다.
허황옥은 허씨집단의 수장으로서 김수로왕이 직접 마중 나오도록 하였고, 자녀도 일부 허씨 성을 가지도록 하였다. 가야에 오자마자 산신령에 비단바지를 바치는 제사를 지냈으며, 가야에 오는 것도 천신의 계시에 의하였다. 허황옥의 승계자인 비미호도 귀도를 섬기며 기내 마을연맹체의 수장이 된다. 즉 기내의 야마대국은 여자 무당을 중심으로 하는 허씨집단이 세운 마을국가이다.
「김해김씨선원보략」은 김수로의 일곱 아들이 염세상계하고, 거등왕의 아들 선은 신녀와 함께 승운이거하였다고 하는데, 일곱 아들은 구주로 간 김씨집단이고, 신녀는 기내로 간 허씨집단이다. 일제는 열도의 역사를 숨기기 위해, 1915년 ‘치안상의 이유’를 들어 1914년 간행된 「김해김씨세보」의 발행을 금지시켰다.
구주의 가야 분국
『후한서』는 107년 왜의 국왕 수승이 생구 160인을 바쳤다고 한다. 『삼국지』에 의하면 70~80여년의 전쟁 끝에 비미호를 추대하였다고 하는데 비미호가 173년 신라에 사신을 보낸다. 따라서 107년 기내는 전쟁 중이다. 전쟁 중에 후한과 교역을 하기는 어려우므로 수승은 구주 마을국가의 왕으로 보아야 한다. 구주는 가야에서 가까우므로 1세기 말에 가야계가 정복하였고, 기내는 2세기 후반에야 70~80여년의 전쟁을 거쳐 야마대국이 중심국이 된다.
수승은 구주를 정복한 가야계 인물로 추정된다. 그는 구주를 정복하였으므로 생구를 많이 바칠 수 있었을 것이다. 『김해김씨선원보략』은 수로왕의 일곱 아들이 염세상계(厭世上界)하였다고 하는데, 구주에는 일곱 왕자와 관련된 전설이나 지명이 남아 있으며,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가야의 건국설화와 동일한 설화가 기재되어 있다.
「고사기」는 지배자가 축자(竺紫)의 히무카(日向)의 다카치호(高千穗)의 구시후루다케(久士布流多氣)로 내려왔다고 하는데, 구시는 ‘구지’이고, 후루다케는 ‘솟은 봉우리’를 의미한다. 즉 구지봉에 내려왔다는 것이다. 축자는 구주 북쪽이므로 지배자가 가야에서 왔음을 의미한다. 「일본서기」에도 동일한 내용이 실려 있다. 또한 「일본서기」는 眞床追衾(신성한 이불)로 감싸서 지배자를 내려보냈다고 하는데, 이는 금합을 紅幅(붉은 보자기)에 싸서 내려보냈다는 가야의 건국설화와 동일하다.
구주의 열도가야는 철정을 가야 본국에 의존하는 가야의 분국으로서 가야와 신라의 전쟁 시 가야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121년부터 123년까지, 232년부터 233년까지, 287년부터 294년까지 신라를 공격하였다.
3세기 후반 고구려 탈영병들이 신라로 들어온 후 김씨로 입적하였는데, 그 중 일부가 김해로 남하하여 김해와 부산에 금관국을 건국하였다. 구주의 열도가야는 287년부터 294년까지 신라를 공격하여, 본국 가야를 지원하였지만, 탈영병들이 김해를 점령하여 금관국을 건국하였고, 구주의 가야 분국은 백제가 열도로 진출하면서 3세기 말이나 4세기 초에 백제로 귀속되었다.
기내 마을 연맹체의 수장국이 된 가야계 야마대국
허씨집단은 김씨집단으로부터 독립하여 자신들의 영역을 개척하기 위해 1세기 후반부터 기내로 진출하였다. 「일본서기」는 BCE 660년경 신무가 구주에서 출발하여 기내를 정복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허씨집단의 야마대국이 기내의 중심국이 되는 과정을 모델로 한 이야기이다.
한편, 신라에서도 대규모로 기내로 이주하였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신라 왕자 천일창이 94년(BCE 27 + 120) 열도로 들어왔다. 천일창이 파사왕 재위 시절 열도로 왔으며, 웅신리(熊神籬)를 가져왔다는 점과 파사왕이 『삼국사』에 유리왕의 둘째 아들로 기재된 점을 고려하면 그는 왕권 투쟁에서 패배한 박씨로 추정된다. 천일창이 게히대신(食靈大神) 즉 농업신으로 추앙된다는 점에서 천일창 집단은 신라의 선진 농업기술을 가지고 기내로 이주하였음을 알 수 있다.
가야의 허씨집단, 신라의 박씨집단, 먼저 이주했던 원주민 마을들, 백제나 고구려의 소수 이주민집단이 1세기 말부터 170년경까지 70~80여년의 전쟁을 하여, 기내의 마을국가들은 마침내 허씨집단의 야마대국을 중심국으로 마을연맹체를 성립시켰다.
기내의 중심국이 된 야마대국의 여왕 비미호는 173년 신라에 사신을 보내는데, 이는 신라산 철정을 도입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야마대국은 철정을 가야에 의존하는 경우 가야로부터 완전한 독립이 불가능할 것이며, 기내 신라계 마을과 신라 본국 사이의 연결 관계를 활용하여 신라로부터 직접 철정을 수입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실제로 기내의 마을들은 신라산 철정을 수입하였다. 야마대국은 239년 조위와 교역하여 240년 동경(三角緣神獸鏡) 100매를 받았는데, 비미호의 묘로 추정되는 하시하카고분(箸墓古墳) 인근 고분들에서 삼각연신수경과 신라산 철정이 동시에 출토된다. 이들 철정은 비소 성분이 포함되어 울산 달천광산에서 만들어졌음이 입증된다.
야마대국의 영향력은 기내와 그 부근에 한정되었으며 이세만도 통제하지 못하였다. 『후한서』는 야마대국 동쪽 천여 리의 구노국이 야마대국에 신속되지 않았다고 하며, 『삼국지』도 구노국과 야마대국은 불화하며 서로 공격하였다고 한다.
비미호 사후 남자 왕을 세웠으나 마을 간 분쟁으로 다시 13세의 일여를 여왕으로 세웠다. 일여는 266년 晉에 조공하였다.
비미호와 일여는 무당이다. 무당이 왕이 아닐 때 서로 싸움이 계속된다는 것은 지역 내 압도적인 힘이 없었음을 의미한다. 무당을 왕으로 내세우고 싸움을 그친다는 것은 마을들이 연맹단계에 있음을 의미한다.
(4) 왜부여(비류백제) 시대
『삼국사』는 300년 낙랑·대방 사람들이 신라에 귀부하였다고 한다. 왜부여가 낙랑·대방 옆에 있었으므로 이 기사는 왜부여인들이 신라에 귀부하였다는 사실을 말한다. 왜부여는 285년 모용외의 공격으로 망했다가, 286년 晉의 도움으로 재건하였지만, 모용외와 백제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따라서 왜부여 지배층 상당수가 기내로 진출하고, 일부가 300년 신라에 귀부한 것으로 추정된다. 『태백일사』 「대진국본기」는 왜부여의 의라왕이 열도로 이주하여 왕이 되었다고 한다. 오사카의 의라신사는 『태백일사』 기사를 입증한다.
의라왕은 야마대국이 주도하는 마을연맹체를 정복하고 기내의 왕이 된 후 300년 신라와 사신을 교환하였다. 기내 왜부여는 백제의 열도 진출에 위협을 느끼고, 312년 신라와 우호적 관계를 위해 혼인동맹을 원하자 신라는 아찬 급리의 딸을 보냈다. 왜의 왕자가 나타난다는 점에서 의라왕이 야마대국을 정복하였음이 확인된다. 야마대국은 신녀가 왕이므로 왕자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백제의 공격으로 기내의 왜부여가 위급해지자, 344년 기내 왜부여는 신라에 혼인을 청하면서 신라의 도움을 요청하였지만 신라는 거절하였고, 345년에 신라는 기내 왜부여와 단교한다. 신라는 기내 왜부여의 동맹 요구에 6등급인 아찬의 딸을 보내면서 눈치를 보다가, 백제가 기내를 상당 부분 점령하자, 동맹을 거부한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의 열도 진출 시 백제에 저항한 기내 마을들은 백제에 패배하여 쫓겨나자, 346년과 364년 신라를 침략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기내의 마을들은 마지막까지 굴복하지 않은 신라7국 등이 369년에 정복된 것을 끝으로 4세기 중반에 모두 백제에 귀속되었다.
(5) 백제 담로 시대
백제의 열도 진출 배경
백제는 가야를 통해 신라를 통제했다. 당시 백제의 핵심 지역은 환황해무역의 중심지인 韓이었다. 즉 백제는 중국 세력과 붙어있는 韓과 중국 동해안에 집중해야 했다. 가야도 신라와 다투어야 했으므로 백제와 적이 될 수 없었다. 따라서 백제와 가야는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였고, 가야의 구주 지배와 기내에 대한 영향력을 승인해야 했다.
그러나 고구려 탈영병들이 가야의 수도인 김해를 점령하여 금관국을 세우자 이러한 상황은 유지될 수 없었다. 신라에서 온 금관국 세력이 구주를 먼저 점령하여 열도를 금관국의 영향권으로 흡수할 가능성이 발생하였다. 또 비류백제의 의라왕이 기내로 진출하여 열도 전체를 장악할 가능성도 발생하였다. 당시 가야와 신라의 농업기술이 도입되어, 열도의 경제도 성장하였으므로, 열도를 환황해무역권에 포함시키는 것의 경제적 가치도 증가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사정으로 백제는 김해가 무너지는 3세기말 열도로 진출하였다.
구주 정복
「일본서기」는 경행이 82년부터 89년까지 구주를 정복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백제가 구주를 3세기 말부터 4세기 초까지 정복한 것을 모델로 한 이야기이다. 백제가 구주를 공격하는 것을 본 신라는 295년 백제와 함께 구주를 공격하는 것을 검토하기도 하였다.
오카야마(岡山) 정복
오카야마에는 가야계 이주민들이 정착하고 있었다. 이 지역엔 가야계 지명이 도처에 있고, 유적・유물도 대부분 가야계이다. 「일본서기」에 나오는 임나가 이곳이다.
백제의 오카야마 정복은 우라전설에 기록되어 있다. 마을 연맹체의 중심국이었던 야마대국은 오카야마를 정복할 능력이 없었고, 의라왕은 백제가 두려워 신라와 동맹하려 노력하는 중이었으므로, 오카야마의 가야계 세력을 정복할 수 있는 세력은 열도에선 없었다. 따라서 오카야마의 우라와 싸우는 상대방은 백제이다. 열도인들은 백제의 열도 정복 사실을 지우기 위해 백제를 이소세리히코(彦五十狹芹彦)나 키비쓰히코(吉備津彦)로 변조하여 기내세력이 우라를 정복했다고 날조하였다.
우라전설은 꿩과 매, 잉어와 물새로 백제의 우위를 표현하고 있는데, 이러한 방식은 해모수와 하백, 김수로와 석탈해의 우열관계 표현 방식과 동일하다.
기내 정복
당시 기내를 지배하고 있던 정치체는 왜부여이다. 백제는 왜부여와의 전쟁을 통해 왜부여를 이겼고, 백제마을은 백제에 복속하였지만, 신라마을들은 백제에 복속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백제는 369년 백제마을과 함께 신라7국 등 백제에 복속하지 않고 있었던 마을들을 정복하였다. 「일본서기」는 왜부여가 패배한 사실은 기록하지 않고, 신라7국이 패배한 사실을 가공의 인물인 신공이 한반도 신라를 정벌하는 것으로 날조하고 있다.
369년 신라마을을 복속시킨 백제 관료는 목라근자인데, 목라근자가 신라마을의 여인을 얻어 낳은 아들이 목만치이다. 목만치는 임나(오카야마) 관료로 활동하다 임나가 열도고구려에 속하게 되자 백제 조정으로 와서 구이신왕 시 전횡하였다.
열도 관리
백제는 더 동진하여 나고야와 동경까지 정복하였다. 열도를 정복한 후 담로도에 담로를 두어 열도를 관리하였다.
백제는 마을 간 세력균형을 통해 백제에 대항하는 세력의 부상을 막기 위해 백제에 우호적인 백제마을의 관할을 증가시켰다. 369년 신라마을을 복속시킨 후, 그때까지 복속하지 않았던 고해진 남만 침미다례를 복속시켜 백제마을에 부속시켰다. 370년에는 다사성도 백제마을에 부속시켰다. 392년에는 해인을 평정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백제의 지배력이 열도의 변방까지 미쳤음을 의미한다. 394년에는 열도의 물자를 동원하기 위해 배를 만들기도 하였다. 396년에는 고구려 백제 임나 신라마을 모두를 동원하여 수리시설을 만들었다. 397년에는 왜왕 직위를 신설하고 태자 전지를 초대 왜왕으로 파견하여 열도의 동원체계를 강화하였다. 이는 고구려와의 전쟁에 동원되는 본토의 동원 역량이 한계에 다다랐기 때문이었다.
백제는 열도를 환황해 무역권의 일부에 편입시켰다. 또한 고국원왕의 원수를 갚기 위해 지속적으로 백제를 공격하는 고구려에 대항하는 방편으로, 고구려 편을 드는 신라를 391년부터 열도인들을 동원하여 공격하였다. 이러한 정황이 광개토대왕릉비 병신년조 초입부에 새겨져 있다.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入貢于)百殘 (聯侵)新羅 以爲臣民 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討伐殘國
[백제와 신라는 예부터 속민이어서 줄곧 조공해왔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 이래 백제에 조공하며 연합하여 신라를 침략하였으므로 臣民(=신라)을 위하여, 영락 6년 丙申년부터 왕이 친히 수군을 이끌고 百殘國을 토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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