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한국학 기초 낭독 61

역사회복 2026. 4. 14. 17:01

https://youtu.be/2FZBR-pJNBY

 

(9) 다시 백제의 지방으로

 

본국의 소아씨 숙청

의자왕은 열도의 사정을 알고 열도를 다시 백제의 직접 지배 하에 두기 위해, 643년 꿀벌 사육을 핑계로 왕자 풍을 파견하였다. 풍왕자는 645년 백제의 표문을 읽는 자리에서 소아입록을 죽였다. 고인대형이 韓人 즉 백제 본국 사람들이 소아입록을 죽였다고 말하자, 소아씨 호위병들은 도주하였고 나머지 소아씨 일족은 주살되었다.

이후 조정은 풍을 왜왕으로 임명하고, 열도를 다시 백제의 영토로 관리하였다. 648년에는 아좌왕이 만든 12계급을 폐지하고 백제의 관제로 복귀시켰다. 650년에는 천불상을 만들고 조정이 명한 선박 두 척을 건조하였다.

 

대화개신은 날조된 사건

일본서기는 소아입록(蘇我入鹿)이 살해된 다음 해인 646년 효덕이 대화개신이라는 정치개혁을 하였다고 한다. 대화개신의 지시 1조는 한서(漢書)와 동일하고, 2조는 757년 시행된 양로령(養老令) 가운데의 양로호령 양로선서령 양로공식령과 동일하고, 3조는 양로호령 양로전령과 동일하며, 4조는 양로부역령과 동일하다. 1조의 식봉(食封)2조의 군사(郡司)757년 양로령에 의해 비로소 제도화된 것이다. 즉 대화개신은 조작된 기사이다. 일제 유사사학은 대화개신의 지시문이 645년 이전의 야마토왜 지방조직을 아는 유일한 문헌이라 주장한다. 즉 대화개신의 지시문을 부정하면, 7세기 국가로서의 야마토왜 존재 증거는 하나도 없다. 그래서 일제 유사사학은 지시문 자체는 당시의 것이지만 문장은 그 뒤의 것이라는 이상한 주장을 하며 가공의 야마토왜 왕국을 방어한다.

 

본토 탈환을 위한 열도인 동원

의자왕과 태자 등이 잡혀가자 왜왕 풍은 백제의 왕이 되었다. 66010월 복신은 풍왕에게 본토로의 귀국과 열도인 동원을 상주하였다. 풍왕은 축자로 와서 병력과 무기를 준비하고, 배를 만들었다. 6618월 풍왕은 병력과 식량을 먼저 보내고, 95천의 병력과 함께 본토로 갔다. 남아있던 태자는 662년 여러 차례 무기와 식량을 추가로 보냈고, 6633월에도 병력 27,000을 보냈다. 6638월 병력을 추가로 보냈으나, 백강구 전투에서 패배하였다.

 

당나라군 주둔

본토의 귀족들은 열도로 피신하였고, 열도에 남아 있었던 선광이 백제 왕이 되었다. 백제는 신라와 당의 열도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방어시설을 구축하였다.

당은 6645월 곽무종을 (열도)백제로 파견하였다. 선린국보기에 인용된 해외국기에 의하면, 당나라의 곽무종 등 30인과, 좌평 예군 등 항복한 백제인 100인이 와서 백제와 협상하였다. 예군묘지명은 예군이 백제의 항복을 받았다고 기술한다. 당과 백제의 협상 결과 6659월부터 당군 이천명이 쓰쿠시(筑紫)에 주둔하였다. 당은 고구려가 목표였고, 신라를 동원하기 위해선 신라의 배후를 위협할 수 있는 백제를 통제할 필요가 있었다. 669년에도 당군 이천명이 왔고, 671년에도 당군 이천명이 왔는데, 이는 주둔군 병사의 교체였다. 당은 672년 요동반도백제와 평양(요양) 일대에서 벌어졌던 신당전쟁에서 신라의 우세가 확정되어 열도를 지배하기 어려워졌고, 신라를 위해 백제를 통제할 의미가 없어졌으므로 6725월 열도에서 철수하였다.

 

국호를 일본으로 변경

백제는 당군 주둔기인 67012월 국호를 일본으로 변경하였다. 국호 변경을 통해, 열도는 이제 백제와 단절했고 백제의 구토를 회복하려고 하지 않겠으니, 당은 일본을 공격하지 말아달라는 바람을 전달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678년 작성된 예군묘지명에서 일본이 나오는 것을 보면 670년의 국호 변경은 사실로 확인된다.

 

(10) 신라의 지방인 시대

 

열도의 영토화

당은 열도를 영토화할 수 없어 6725월 철수하였다. 당과의 전쟁이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열도를 방치할 경우 배후가 위협받을 수 있었으므로, 신라는 당이 군대를 철수하자마자 6726월 당군이 있었던 축자를 장악하였고, 7월 백제를 무너뜨렸다. 따라서 백제의 멸망은 6727월로 보아야 한다. 일본서기에는 김압실이 온 시기는 없고 67212월에 갔다고만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김압실이 열도 정벌 책임자였음을 의미한다. 김압실이 백제를 멸망시키고, 열도의 정세를 안정화시킨 후 돌아가고, 신라가 보낸 관료가 열도의 지방관으로 부임하였다.

 

신라의 열도 관리

신라는 지방관을 기내에 파견하였다. 673년 대아찬 김승원 등을 파견하여 열도의 지방 관료 선임을 완료하였다. 6752월 김승원은 고안성을 점검하였는데, 고안성은 대왜와 하내 즉 기내 전부의 田稅를 모아 조정으로 보내는 곳이었다. 6752월 조정은 왕자와 장군을 파견하는데, 이는 열도 지방관을 감찰하고, 군사제도를 정비하기 위해서였다. 조정은 67611월 사찬 김청평 등을, 67910월 아찬 김항나 등을, 68110월 일길찬 김충평 등을, 683년 사찬 김주산 등을, 68511월 파진찬 김지상 등을, 6894월 급찬 김도나 등을, 6932월 사찬 김강남 등을, 69710월 일길찬 김필덕 등을 파견하여 지방관을 교체하였다.

파견된 지방관은 축자에서부터 임기를 시작하여 관할구역을 순시하면서 기내로 들어갔다. 일본서기는 지방관들이 몇 개월 후에 신라로 돌아갔다고 하나, 이는 지방관을 사신으로 위장하여 열도가 신라의 영토였음을 숨기기 위한 조작이다. 조정은 687년 왕자 김상림 등을, 695 왕자 김양림 등을 파견하였는데, 이는 지방관을 감찰하기 위한 것이었다.

조정은 열도에 승려를 파견하여 신라식 승려제도를 실시하고, 675년에는 점성대를 설치하고, 681년에는 신라식 율령과 법식을 적용하여, 열도식 의복을 금지하였다.

692년부터 경주를 모방한 지방 도시 건설을 시작하여 649년 등원경을 완성하였다. 등원경은 궁성이 도성 북쪽에 있는 당나라 장안성과 달리, 궁성이 도성 중앙부에 위치하는 경주와 유사하고, 신라의 척도를 사용하여 건설되었으며, 기와는 신라식의 복합연화문 양식이 주류이다.

672년부터 700년까지 열도는 완전히 신라의 영토였다. 김부식은 일본서기를 신뢰하여 신라의 열도경영 사실이 적힌 사료를 무시하였다. 그 결과 삼국사에 열도 경영 사실이 전혀 나타나지 않게 되었다.

白鳳문화(하쿠호 문화)는 신라 지배기의 문화이다. 일제 유사사학은 소위 대화개신 이후부터 710년까지를 하쿠호문화라 한다. 그러나 하쿠호문화의 시작은 672년이다. 701년 일본 독립 이후에도 신라의 도움을 받았으므로 710년까지를 하쿠호문화로 볼 수 있다. 일제 유사사학이 하쿠호문화의 시작을 646년이라 하는 것은 신라의 지배 시기를 은폐하기 위함이다.

 

 

(11) 일본의 실질적 시작

 

백제계의 신라 축출

670년 백제가 국호를 일본으로 변경하였지만, 672년 신라가 열도를 접수하여, 백제 즉 일본은 사라졌다. 그러나 701년 백제가 신라로부터 독립하여 일본이라는 나라가 시작된다.

신라는 70011월 열도 지방관으로 일길찬 김소모를 파견하였다. 백제인들은 7011월 김소모 등 신라 관리들을 살해하고, 백제 즉 일본을 다시 건국하였다.

신라가 일본의 독립을 막지 못한 것은 당시의 혼란스런 정치 상황 때문이었다. 신문왕의 왕권강화 정책에 따라 김흠돌이 숙청되면서 왕비였던 김흠돌의 딸이 출궁되고 683년 김흠운의 딸이 왕비(신목왕후)가 되었다. 687년 태어난 효소왕이 692년 왕이 되었으나, 신문왕의 왕권 강화책에 반발한 귀족들이 효소왕 등 신목태후의 소생들을 모두 살해하고 출궁된 왕비의 소생(김흠돌의 외손)인 성덕왕을 왕위에 올렸다. 삼국유사탑상 편의 대산오만진신명주오대산보질도태자전기의 효명은 김흠돌 숙청 시 오대산으로 몸을 피한 성덕왕이다. 효명은 신문왕의 왕권 강화책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귀족 세력과 연합한 후, 700년 경영과 순원 등 신문왕의 왕권 강화책을 추종하는 세력들을 모반하였다는 명목으로 제거하고, 702년 효소왕과 그 동생은 왕위를 다툰다는 명목으로 모두 살해한 후 성덕왕이 되었다. 즉 신라는 700년 경 왕권 강화파와 그에 반발하는 귀족 세력이 권력을 놓고 치열하게 다투고 있어서 일본의 독립 시도에 대처할 수 없었다.

 

일본 건국

일본은 701년 신라의 율령에서 벗어나 독립적 율령을 선포하면서 관제를 개편하고, 신라 복식을 폐기하고, 건국 공신들에게 포상하였다. 또한 배를 건조하여 독자적인 항해를 가능하게 하고, 신라로 보낼 곡식을 저장하였던 고안성을 폐지하였다. 도량형을 통일하고, 신라에 의존하지 않고 당에 사신을 파견하여 일본의 건국을 알렸다.

703년 신라 사신이 오자, 독립 과정에서 포로가 된 신라 인들을 돌려보내서 신라와의 우호적 관계를 도모하였다. 707년에는 704년 견당사와 함께 귀국한 백강 전투의 포로 3인에게 상을 주었다.

704년에는 군사제도를 정비하고, 705년과 714년의 신라 사신 영접 시 기병대를 보여 주면서 군사력을 과시하였다.

708년 평성경 조영을 시작하여 710년에 천도하였다. 평성경 조영 시 일본은 신라에 기술 지원을 요청하였고, 신라는 709년 장인들을 파견하여 도와주었다. 그러나 평성경은 당의 장안성을 모방하여 궁성이 도성 북쪽에 있는 북단중앙식을 채택하였다.

일본은 712道君首名를 신라에 파견하였는데, 파견단의 목적은 신라의 선진 농업 기술과 토목 기술을 전수받기 위함이었다.

일본은 신라 지배 시까지의 역사서인 일본서기의 편찬을 시작하였다. 당시 편찬된 일본서기의 내용을 현재는 알 수 없다. 일본서기는 편찬된 후 지속적으로 변조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에 일본서기를 편찬하였다는 것은 일본이 자신을 열도에서 새롭게 개창된 왕조로 인식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라와 일본의 갈등

성덕왕은 부도덕한 집권으로 집권 초기 권력이 불안정하였으나, 즉위 공신 김원태의 딸, 성정왕후를 출궁시키는 716년에는 왕권을 공고히 한 것으로 보인다. 왕권이 안정된 후 신라는 열도를 탈환하려 하였다. 신숙주가 본 속일본기에는 신라가 720년 일본을 공격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현재의 속일본기에는 隼人(하야토)의 반란이라 변개되어 있다. 신라는 일본 서부를 7202월 말부터 공격하였으나, 7217월에 실패로 끝났다. 722년 신라는 일본의 반격에 대비하여 모벌군에 성을 쌓았다. 신라와 일본은 계속 적대적 관계를 지속하다, 803년에야 우호적 관계로 변화되었다.

(12) 본고의 주장을 입증하는 칼의 명문

 

() 칠지도

 

명문 해독

칠지도의 명문에 의해서도 왜왕은 백제의 관료임이 드러난다. 칠지도 앞면 연호와 날짜에 대해 여러 견해가 제시되나 연호는 泰元으로 추정하고, 날짜는 X-Ray 판독 결과에 의해 십일월(十一月)로 추정한다. 앞면 22번째 글자는 , , , , , 로 추정되는데 문맥상 로 보았고, 뒷면 17번째 글자는 , , , 로 추정되는데, 문맥상 로 보았다.

 

() 泰元四年十一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練銕七支刀 出辟百兵 宜供供侯王 □□□□

() 先世以來未有此刀 百濟王世子奇生 聖意故 爲倭王旨造 傳示後世

 

앞면은 泰元 4(408) 1116일 병오날 정오에 만든 백련철 칠지도는 온갖 재앙을 물리치고 쫓아내니 후와 왕들마다 주기에 적당하여, □□□□ 만들었다이다. 뒷면은 옛날부터 지금까지 이런 칼은 없었는데, 백제 왕세자가 기이하게 살아나, 성상께서 고안하여 왜왕을 위하여 교시하여 만드셨다. 전하여 후세까지 보여라.”이다. 供供은 후와 왕들 여럿에게 각각 준다는 의미이다. 왜왕은 왕의 계급이므로 왜왕만을 위해 만들었다면 후()자는 불필요하다. 일제·강단 유사사학은 공자가 두 개 있는 것, 왕이 아닌 후와 왕인 것을 애써 무시하려고 한다. 백제는 후와 왕이 많이 있었다. 공을 세우면 후가 왕이 될 수도 있었다. 칠지도를 여러 개 만들어 나누어주었다는 의미로 을 두 번 쓴 것이다. 따라서 뒷면에 새겨진 왕이나 후는 칠지도마다 달랐고 일본에서 발견된 칠지도에는 열도 관료의 우두머리인 왜왕이 새겨졌다. 은 전지왕을 높여 부르는 말이고, 意故는 일부러 의도하였다는 말로 전에 없던 칼의 모양을 고안하였다는 말이다. 앞에서 없던 칼이라 했으므로 이런 칼이 생긴 사유가 나와야 한다. 기존의 해석은 이 부분에서 모두 실패하여 올바른 해석이라 할 수 없다. 이 전지왕 즉 백제의 왕임을 부인하기 위해 일제·강단 유사사학은 백제 왕세자에서 奇生을 분리하고 奇生聖意()에 붙여 해독을 방해하고 있다. 이 백제의 왕이 되는 순간 왜왕은 백제의 관료가 되기 때문이다. 傳示後世는 하급자에 대한 명령문이다. 외국에 대한 말일 수가 없다. 받을 사람이 아들이나 조카, 동생 등 친척들이고 공식적으로는 하위 관료이므로 백제의 왕은 위와 같은 명문을 새길 수 있었다. 전지왕은 아들이 죽을 것 같다가 살아나(百濟王世子奇生) 기쁜 마음에 백제국 모든 후와 왕들에게 칠지도를 하사하였다. 泰元 전지왕의 연호이다. 전지왕 4년과 泰元 4년이 일치한다. 또한 正陽은 현재까지 발견된 칼이나 거울의 명문에 사용된 경우가 없고 칠지도에 유일하게 보이는데, 그 사전적 의미는 정오이지만, 사기』 「사마상여열전에 나오는 정양에 대해 사기색은은 남면수조(南面受朝)하는 천자의 권위를 의미한다고 해석하고 있다. 즉 칠지도는 천자인 전지왕이 백제의 제후들에게 하사한 선물이다.

이렇게 명백한 증거가 있음에도 일제·강단 유사사학은 판타지 소설이 진실이다고 주장하기 위해 명문을 왜곡하여 해석하면서 백제와 왜가 동등하다느니 백제가 왜에 헌상한 것이다느니 동진이 백제를 통해서 준 것이라는니 하는 억지를 부리고 있다.

 

부여에서 발견된 칠지도

칠지도는 부여 군수리(軍守里) 사지(寺址)에서도 발굴되었는데, 현재로선 19381차 발굴 조사에서 칠지도가 출토됐다는 관계자의 기록만이 전해질 뿐 그 소재는 묘연하다. 일제가 절취하여 현재 전해지지 않고 부여박물관은 모조품만 전시하고 있다. 강단 유사사학이 관리하는 국가기관 누리집에는 일제가 발굴했다는 사실과 일제가 절취하였다는 사실을 전혀 기재하지 않고 있다. 칠지도가 여러 개 있었다는 것이 밝혀지면 본고의 주장대로 열도가 백제의 영토였음이 입증되므로 일제에 충성하는 강단 유사사학은 이를 은폐하고 있다. 부여에서도 칠지도가 발굴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백제왕이 관료인 후와 왕들에게 하사했다는 주장의 타당성이 입증된다. 또한 칼은 본래 위 사람이 아래 사람에게 하사하는 위신재이고, 칠지도가 한 해를 상징하는 6잎 풀인 명협(蓂莢)과 같은 모양이어서 달력을 하사하는 의미가 있는데, 달력을 정하는 것은 천자의 권한이다. 즉 백제는 내부적으로는 천자의 나라임을 자처하였다.

 

칠지도 관련 사실

칠지도 하사 당시, 왜왕이라는 관료가 있었다는 사실에서 광개토대왕의 열도 정복 시에도 구주 남부는 백제가 유지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의 열도 정복으로 기내에 있던 왜왕은 기내에서 쫓겨나 구주 남부로 옮겼을 것이다.

백제가 열도를 회복하고, 칠지도를 하사받은 왜왕이 기내에 정착하면서 칠지도도 기내로 옮겨졌을 것이다.

전지는 초대 왜왕이다. 삼국사일본서기에 전지 이전의 왜왕으로 추측할 만한 인물이 보이지 않는다. 근초고왕 시 열도 정복을 완성하였지만, 근초고왕은 과 한반도에서 모용씨와 고구려와의 전쟁에 집중하였으므로 왜왕이라는 관료를 설치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의 열도 경영은 광개토대왕의 공격에 대항하면서 본격화되었다. 진사왕과 아신왕 시 열도인을 동원하여 신라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전지가 초대 왜왕이었고, 근초고왕 시에는 왜왕이라는 관직도 없었다. 칠지도를 근초고왕이 하사하였다는 주장은 X-Ray 판독(11)과도 불부합하며, 당시의 역사적 상황과도 맞지 않다.

 

() 경인명도

 

명문 해독

구주(九州) 복강시(福岡市) 원강고분군(元岡古墳群) G-6호분에서 201197일 명문이 새겨진 칼이 발견되었다. 경인명도 명문의 판독에 마지막 글자를 제외하고는 큰 이견은 없다. 즉 일반적으로 大歲庚寅正月六日庚寅日時作刀凡十二果練으로 판독하는데, 마지막 자는 외에도 ’, ‘등으로 읽힐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세 글자의 의미가 비슷하여 판독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여지는 거의 없다. 즉 경인명도 명문은 그 해석만이 문제되고 있다.

연민수는 12가 동양에서 완결성을 의미하는 수라고 주장하면서 경인해 정월 경인날에 쇠를 잘 단련해 이 칼을 만들었다고 해석한다. 연민수의 해석에 의하면 은 내용상 어울리지 않는 글자가 된다. 연민수처럼 해석하려면 무릇으로 보아야 하는데, ‘무릇완벽하게 만들었다는 말이 어울릴 수 없다. 그래서 연민수는 에 대해선 침묵하고 있다.

1212개의 의미로 보아 경인해 정월 경인날에 칼을 만들었는데 모두 12자루이다라고 해석하는 견해가 있으나, 가 칼을 세는 단위로 사용된 예를 찾을 수 없으며, 하사품의 성격상 만든 물품의 총 수량을 받는 사람에게 알려준다는 것은 매우 어색하다.

이 칼은 위덕왕이 570년 백제의 관료에게 하사한 칼이다. 그런데 위덕왕은 출가할 마음을 먹었을 정도로 불교에 심취한 왕이었다. 따라서 명문에 불교적 사고가 나타날 가능성이 있다. 필자는 명문을 大歲庚寅正月六日庚寅日時作刀凡十二果鍊으로 보고 十二果十二因果의 줄임말로 보아 경인년 16일 경인일에 맞추어 만든 이 칼은 모든 12 인과를 없앤다로 해석한다. 이렇게 해석하는 경우 경인명도 명문은 칼의 베는 속성을 인과의 고뇌를 끊고 해탈하는 의미로 승화시키는 뛰어난 문장이 된다. 기존 해석은 아무 의미 없는 언급에 불과하므로 명문의 의미일 가능성이 거의 없다. 칼은 원래 부하에 대한 하사품이지만, 경인명도의 명문은 경인명도가 부하에 대한 하사품임을 다시 한 번 확인시킨다. 외교적 고려 하에 주는 칼에는 외교적인 수사가 기록되어야 하는데, 경인명도에는 증여자인 위덕왕의 사상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경인명도 관련 사실

연민수는 일본서기의 열도 병력 동원 기사를 근거로, 경인명도가 554년 관산성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는 축자국조(筑紫國造)에게 위덕왕이 하사한 칼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경인명도의 명문과 발굴지만으로 하사 사유와 수령자를 특정하기는 어렵다. 칠지도에서 보듯이, 백제 왕은 관료들에게 수시로 칼을 하사할 수 있었고, 554년의 전공에 대해 570년에야 칼을 하사한다는 것도 개연성이 없다. 위덕왕이 불교에 심취하였고, 경인명도 명문에도 불교 사상이 나타났다는 점에서 불사와 관련하여 관료들에게 칼을 하사하였는데 수령자 중에 구주의 백제 관료가 포함되었다고 추정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 개로왕 관련 칼들

 

船山(후나야마)고분 쇠칼 명문 해독

백제의 금동관과 금동신발이 발견된 구주 구마모토(熊本) 후나야마 고분에서 쇠칼도 출토되었다. 쇠칼의 명문은 다음과 같다.

 

治天下獲(加多支)鹵大王世 奉事典曹人名无()弖 八月中 用大鐵釜并四尺廷刀 八十練()十振 三寸上好()刀 服此刀者 長壽 子孫洋()恩也 不失其所統 作刀者名伊太() 書者張安也

 

천하를 다스리시는 개로대왕 때, 봉사했던 전조인 무리대. 8월 중 큰 용광로를 사용하여 4척 직도를 만들었다. 정성스럽게 만든 삼촌 넓이의 매우 잘 다듬은 칼이다. 이 칼을 차는 자는 장수하고, 자손은 번성하여, 삼은을 얻는다. 그가 통할하는 바도 잃지 않는다. 칼을 만든 이는 이태화이고, 글을 쓴 이는 장안이다.

 

후나야마 쇠칼 관련 사실

무리대는 개로왕 시 왜왕인 곤지의 부하로 일했던 사람으로 추정된다. 고구려 위성국과의 전쟁에서 연승하는 시기였으므로 많은 일을 하였을 것이다. 왜왕이 무리대의 공적을 치하하기 위해 칼을 하사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칼이 발견된 고분은 무리대의 묘로 추정된다.

 

이나리야마(稻荷山)고분 쇠칼 명문 해독

사이타마의 이나리야마 고분에서 출토된 쇠칼의 명문은 다음과 같다.

 

() 辛亥年七月中記 乎獲居臣上祖名意富比垝 其児多加利足尼 其児名弖已加利獲居 其児名多加披次獲居 其児名多沙鬼獲居 其児名半弖比

() 其児名加差披余 其児名乎獲居 臣世爲杖刀人首 奉事来至今 獲加多支鹵大王 寺在斯鬼宮時 吾左治天下 令作此百練利刀 記吾奉事根原也

 

신해년 7월 중에 기록한다. 乎獲居인 저의 上祖意富比垝, 그 아들은 多加利足尼, 그 아들은 弖已加利獲居, 그 아들은 多加披次獲居, 그 아들은 多沙鬼獲居, 그 아들은 半弖比, 그 아들은 加差披余, 그 아들은 乎獲居이다. 내가 대를 이어 杖刀人의 우두머리가 되어 봉사하여 지금에 이른다. 개로대왕의 치소가 斯鬼宮에 있을 때, 나는 천하를 다스리는 것을 도왔다. 이 백련의 날카로운 칼을 만들게 해서, 내가 봉사한 근원을 기록한다.

 

이나리야마 쇠칼 관련 사실

칼을 만들게 한 는 개로왕이 왜왕 제였을 때 개로왕의 고구려 위성국 공격을 보좌하였다. 따라서 455년 이전에 활약했다. 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獲居가 아닌데, 이는 광개토대왕의 공격 시 할아버지가 고구려군에 패하여 직위를 박탈당했기 때문일 것이다. 의 활약 시기에 의하여, 신해년은 당연히 471년이다. 는 전공을 세워 가문을 다시 일으킨 것을 후손에게 알리고자 이 칼을 만들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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