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남북국 시대
광개토대왕의 열도 정벌
근초고왕은 371년 고구려를 한반도에서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이후 고구려와 백제는 계속하여 전쟁을 하는데, 고구려는 신라를 위성국화하고 신라에 고구려군을 주둔시켜 백제를 공격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백제는 391년부터 열도인들을 동원하여 신라를 공격하였다. 백제가 열도를 장악한 사실을 안 광개토대왕은 400년 열도를 공격하여 구주 남부를 제외한 열도 전부를 정복하였다. 이는 광개토대왕릉비에 새겨져 있다.
오사카에는 고구려 계통의 장식고분으로 추정되는 많은 고분과 고려사적(高麗寺跡) 등이 발견되며 이즈모 지역에도 고구려계 벽화고분, 가미요도 폐사에서 발견된 벽화의 파편, 가모스 신사 등이 발견되었고, 이즈모와 인접한 오카야마에서 고구려 문양의 기와가 출토되었다.
광개토대왕릉비는 400년에 지역명칭으로서의 왜 즉 열도 백제를 정복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데 400년 기사 199자 중 절반이 지워져 있다. 2면 9행 윗부분 9자가 연속하여 지워졌고, 2면 10행과 3면 1행은 거의 완전히 지워졌다. 3면 2행부터 6행까지 윗부분 약간이 지워졌는데 이는 3면 1행이 자연스럽게 지워진 것처럼 보이기 위해 일부러 지운 것이다. 3면 2행부터 7행까지 아랫부분이 지워졌는데 이는 3면 1행이 자연스럽게 지워진 것처럼 보이게 하고 407년의 기사를 지우기 위함이다. 광개토대왕릉비에서 판독이 안 되는 글자 대부분이 2면 9행 10행과 3면 1행에서 7행까지에 있다. 이는 인위적으로 글자가 지워졌음을 의미한다. 일제유사사학이 400년 기사를 지운 것은 광개토대왕의 열도 정벌 내용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열도 관리
백제가 열도를 직접 관리한 것과 달리, 고구려는 고구려의 한 집단을 정착시켜 열도를 고구려의 위성국으로 삼은 것으로 추정된다. 열도고구려가 고구려 조정과 별도로 신라로부터 인질로 미사흔을 받았으며, 백제의 공격으로 열도고구려가 무너질 때 고구려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관료를 보내 교지로서 열도고구려를 통제하였다. 고구려 위성국은 각 마을국가에 국사(國史)라는 관원을 파견하여 통제하였다.
고구려는 신라에 항복한 전라도왜를 나라로 보내 열도고구려의 국력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광개토대왕은 이들을 나라로 보낼 것을 명령하였다. 이들의 이주는 403년 「일본서기」 봉의공녀, 404년 아직기와 왕인, 405년 궁월군과 120현민의 이주, 409년 아지사주와 17현민의 이주에 기술되어 있다.
신라는 403년 전라도왜를 포기하지 않았다. 전라도왜의 소유주는 신라였기 때문이다. 신라는 광개토대왕의 명을 거스를 수 없어, 소수의 고급 기술자 즉 의복 기술자, 말 관리 기술자, 지식인만 보냈지만, 광개토대왕의 명령을 명분으로 고구려 위성국이 신라를 압박하여 405년 전라도왜 대부분이 나라로 이주되었다. 신라는 억울하여 전라도왜를 호송하는 고구려 위성국의 군사를 공격하였다. 이후 신라와 고구려 위성국은 415년까지 수차례 전쟁을 하였다.
이때 나라로 보내진 전라도왜를 대왜라 하였다. 나라에 왜가 정착한 것은 이때가 최초이다. 야마대국은 대왜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대왜는 독립적인 나라가 아니라 전쟁포로였을 뿐이다.
백제 관료인 왜5왕의 열도 탈환
백제는 구주 남부로 밀려나자 402년 구주 남부의 토착세력과 혼인동맹을 맺었다. 이마저 잃지 않기 위한 조치였을 것이다.
백제는 열도에서 고구려에 패배하여 열도인들에 대한 권위를 상실하였다. 백제는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중국 남조를 이용하였다. 즉 백제 관료였던 왜5왕은 모두 중국 남조에 조공하여 관작을 받았다. 고구려에 졌지만 멀리 있는 어떤 대국은 아직도 백제 편이므로 백제가 고구려를 이길 수 있다고 열도인들에게 선전하였다. 물론 이 절차는 조정의 통제 하에 행해졌다.
고구려는 열도 정벌 후, 407년 후연을 정복하고 魏와의 사이에 완충국 북연을 세워, 새로 획득한 고구려 유주(서진의 유주와 평주) 관리와 魏와의 관계에 집중한다. 신라는 전라도왜의 처리과정에서 고구려 및 고구려 위성국과 갈등을 빚게 되었다. 이 틈을 타서 백제는 430년에서 438년 사이 구주 북부, 대마도, 본주 남부를 탈환하였다. 이는 백제와 신라가 433년 동맹을 맺은 사실과, 438년 왜왕 진(珍)이 자신 외에 13인에 대한 관작을 요구한 사실에 의해 확인된다. 즉 신라와의 동맹과 백제의 열도 남부 탈환은 서로 필요충분조건 관계에 있으며, 백제가 열도 남부의 13개 마을을 회복하여 그들을 통제할 목적으로 관작을 요구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진(珍) 자신도 열도 마을국가 전체를 총괄하는 육국제군사의 칭호를 받아 열도민들에 대한 선전전을 강화하였다.
후에 개로왕이 되는 제(濟)는 451년 23개의 관작을 요구하는데, 이는 그새 열도의 백제 영역이 확대된 것을 의미한다. 후에 무령왕이 되는 개로왕의 아들 무(武)는 478년 표문에서 백제가 열도를 거의 평정하였음을 밝히고, 개부의동삼사를 주라고 요구하는데, 이는 조정이 해구의 반란 등으로 정세가 어수선한 상황에서 개로왕의 아들인 자신이 왕권 경쟁에 참여하겠다는 뜻으로 추정된다.
431년부터 500년까지 『삼국사』엔 13회 왜가 침략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신라 역사상 가장 왜가 빈번하게 침략하는 시기이다. 그 이후 신라를 침략하는 왜는 없다. 이때 신라를 침략하는 왜는 열도고구려의 편에 섰다가 백제의 북진에 근거지를 잃고 신라로 해적질을 하러 간 열도인들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백제는 500년 경 열도를 완전히 탈환하였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일본서기」는 400년부터 500년까지의 고구려의 열도 정벌과 열도고구려와 백제의 전쟁에 대해선 거의 기록하지 않고 있다. 「일본서기」는 280년부터 380년까지와 120년의 오차가 없어지는 400년 이후 500년까지, 치정이야기나 사냥이야기 등 사실과 무관한 소설로 채워져 있다. 다만 일부 이야기는 백제의 열토 탈환에 대해 변조하여 기술하고 있다.
「일본서기」 464년 2월 이야기는 신라마을 일부를 열도고구려로부터 탈환한 내용을 기반으로 창작한 내용이다. 신라마을이 열도고구려의 지배 하에 있었는데, 신라마을이 신라마을에 있던 고구려인들을 죽이자 열도고구려가 침략하였고, 신라마을이 임나(오카야마)의 일본부에 구원을 청하였다. 당시 백제는 오카야마까지 진출하여 왜왕의 사무실을 오카야마에 두었다. 백제의 영향력이 확대되자 신라마을은 백제 편에 서려 하였고, 이를 열도고구려가 허용하지 않자, 신라마을이 백제에게 구원을 요청하였고, 백제는 열도고구려에 승리하여 신라마을까지 영토로 하였다. 당시의 왜왕은 개로왕의 동생 흥(곤지)이다.
강단 유사사학은 이 이야기를 한반도의 신라와 고구려에 관한 이야기로 보면서, 황당무계한 설명을 하고 있다. 그들은 이 이야기의 行軍元帥는 外征에 나선 장군에게 주는 호칭이며 5세기에는 왜가 신라를 빈번하게 침략하였으므로, 신라를 공격하기 위해서 온 왜의 장수를 뜻한다고 주장하며 「일본서기」를 무시한다. 행군원수가 신라를 공격한 왜의 장수라면 뒤에 임나일본부가 신라를 구원하는 내용과 모순된다. 그러자 그들은 임나일본부가 신라를 구원하는 내용은 사실 여부가 의심된다고 주장한다. 그들 소설을 전제하고, 그들이 사료라고 주장하는 「일본서기」를 그들의 소설에 따라 난도질하는 것이 그들이 자랑하는 실증적 역사 연구이다.
「일본서기」 465년 3월 이야기는 백제가 나머지 신라마을을 영역화하는 사실을 기반으로 창작한 이야기이다.
「일본서기」는 백제가 기내를 영역화하는 과정을 기술하지 않고 있다. 천황이 천황을 공격한다는 이야기가 되므로 쓸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일본서기」 474년 8월 이야기는 백제가 이세만을 영역화하는 사실을 토대로 창작한 이야기이다.
「일본서기」 479년 이야기는 해군으로 고구려 위성국을 공격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
「일본서기」 487년 이야기는 왜왕의 한 부하가 고구려 위성국과 내통하였다 하므로 당시까지도 고구려 위성국이 열도에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일본서기」 495년 이야기는 나라가 평안하다 하므로 이 무렵 백제가 고구려 위성국을 완전히 평정한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가 열도에서 고구려 위성국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백제는 가야가 우호국이어서 항해가 자유로워 쉽게 백제 조정이 열도를 지원할 수 있었지만, 고구려는 신라와 적대적으로 되면서 고구려 조정의 지원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열도의 5세기 분묘에서는 마구 갑옷 칼 등 군사적인 유물이 많이 발견된다. 이는 5세기에 백제와 고구려 위성국간 치열한 전쟁이 있었기 때문이다.
(7) 백제의 지방인 시대
백제는 韓 지역에서 가불성과 원산성을 512년 고구려에게 상실하였다. 당시 수도였던 韓의 웅진성은 지켰지만 위태로웠으므로 한반도의 웅진으로 천도하였다. 백제 무역의 핵심 기지였던 韓 북부를 상실하자, 백제는 이를 열도 경영 강화를 통해 극복하고자 하였다. 「일본서기」에 보이는 백제의 열도 경영으로 백제가 지방을 어떻게 통치하였는지 확인할 수 있다.
임나에도 관부를 설치하고 마을 간 세력 균형 도모
임나(오카야마)의 가야마을은 다수였으므로 조정은 임나에 관료를 파견하여 가야마을을 감시하였다. 이것이 「일본서기」에 나오는 임나일본부이다. 일본부의 관료가 전횡을 하기도 하여 임나에서 왜왕에게 고발하기도 하였다. 조정은 임나와 나라에 군사권을 나누어 배치하여 왜왕의 반란 가능성을 낮춘 것으로 추정된다.
가야계 다음으로 세력이 큰 신라마을은 마을 간 세력 균형을 통해 통제하였다. 물론 왜왕에게 충분한 군사를 주면 쉽게 통제할 수 있었겠지만, 그 경우 왜왕이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생기므로, 왜왕에겐 최소한의 군사력만 주었다. 주로 미약한 백제마을의 세력을 키워 신라마을의 세력을 통제하려 하였다.
512년 임나4현을 백제마을의 관할로 하여 신라마을에 대항할 수 있도록 하였다. 513년 반파마을을 약화시키기 위해 반파의 기문과 체사도 백제마을의 관할로 하였다. 529년에는 가라마을의 다사진도 백제마을에 소속시켰다.
527년에는 신라마을의 관할로 있던 남가라와 탁기탄을 독립시키겠다 즉 임나의 백제 관청의 지배 범위에 포함시키겠다고 표방하면서, 남가라 등의 관할권을 마을들 간 분쟁 대상으로 유지시켰다. 이러한 구도를 통해 백제의 왜왕에게 대항하는 세력의 부상을 방지하였다. 실제로 신라마을, 임나마을, 백제마을, 고구려마을 간 분쟁이 발생하여, 552년에 신라마을과 고구려마을이 동조하자 임나마을이 불만을 제기하였고, 553년 백제마을과 고구려마을은 전쟁을 하였고, 600년에는 임나마을과 신라마을이 전쟁을 하였다.
관료 파견, 지시 및 보고
조정은 513년 6월 오경박사 단양이를 파견하였고, 516년에는 한고안무를 파견하였다. 554년 동성자언과 동성자막고를 교대시키고, 오경박사 왕류귀와 마정안을 교대시키고, 승려, 역박사, 의박사, 채약사, 악인 등도 교대시겼다. 이들 파견 관리의 임기는 초기에는 3년이었으나 뒤에는 7년으로 되었다.
534년에는 적덕손과 기지기루를 보내서, 543년에는 진모귀문 등을 보내서, 545년에는 기릉 등을 보내서, 546년에는 약렵례를 보내서 교지를 전달하였다. 왜왕도 545년 선신파제편을 조정으로 보내 보고하였다.
열도 제철 시작
열도에는 양질의 철광석이 없어 경제성 있는 철정의 생산이 불가능하였는데, 6세기 후반 본토의 제련 기술을 이전시켜 사철로 경제성 있는 철정을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본토의 대형 상자형 제련로가 완전한 형태로 갑자기 오카야마에 등장하는 것으로 입증된다. 당시의 최첨단 기술을 열도로 이식하였다는 것은 열도가 백제의 영토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강단 유사사학은 제철기술도 없었던 야마토왜에게 백제가 군사력을 구걸하였다는 SF 환상소설을 창작한다.
불교 확산
백제는 당연히 백제의 영토인 열도에도 불교를 확산시켜 왕권을 강화하려 하였다. 승려는 공무원으로서 정부가 파견했다. 545년 불상을 보냈고, 552년 노리사치계와 불상과 경론을 보내면서 왜왕에게 불교를 확산시키라 명하였고, 577년 경론 승려 조불공 조사공을 파견하였다.
조정은 588년 승려와 기술자를 보내 대규모 사찰인 법흥사를 창건하였다. 595년에는 혜총과 초빙한 고구려 승려 혜자를 법흥사로 보냈다.
병력과 노역 동원
조정이 547년 진모선문을 보내서, 553년 과야차주를 보내서 병력 동원을 명령하자, 왜왕은 6월 말과 선박 무기류와 병력을 보냈다. 554년 1월 병력 동원을 명하자 왜왕은 병력 1천, 말 1백 필, 배 40 척을 보내겠다고 하였다. 조정이 554년 2월 하부 간솔 삼귀를 보내 병력 동원을 재촉하자 554년 5월 열도에서 병력이 출발하였다. 554년 12월 조정은 병력의 추가징발을 명하자, 왜왕이었던 혜왕자는 556년 1월 무기, 말, 병력을 조정으로 보냈다. 548년에는 성을 쌓기 위해 열도에서도 인력을 동원하였다.
경제 지배
「일본서기」는 각 마을마다 둔창을 설치하였다고 하는데, 둔창은 국유지를 관리하는 관청으로 보인다. 조정은 각 마을마다 국가에게 바치게 하는 형식으로 또는 죄를 용서받기 위해 국가에 바쳐졌다는 명목으로 수확이 좋은 땅을 국유지로 지정하고 이를 각 마을이 경작하게 하여 그 수확을 수취하였다. 각 마을 둔창의 곡식은 후쿠오까(福岡)의 나진(那津)으로 모아져 조정으로 보내졌다.
(8) 아좌왕의 백제 분국 시대
아좌왕의 아스카 문화
성왕의 비극적 죽음 이후 백제 왕족은 불교에 심취하였다. 위덕왕은 출가할 마음을 먹었을 정도였다. 위덕왕의 동생인 혜왕과 아좌태자의 권력투쟁은 열도를 분리하여 아좌의 것으로 하는 평화적 방법으로 해결되었다. 그리하여 아좌는 위덕왕 사망 한 해 전인 597년 열도로 가서 열도 분국의 왕이 되었다.
열도 분국은 신라와 사신을 교환하고, 600년과 607년에는 隋에 사신을 보낸다. 백제와는 계속 우호적 관계를 지속하여 602년 관륵을 통해 역법 등을 전수받았고, 612년에는 장인과 악공 등을 받았다. 백제는 608년 수가 열도로 보내는 사신을 수행한 분국 관료가 소지한 수의 국서를 징발하였다고 하는데, 이 내용이 사실이라면 백제가 분국 외교의 실상을 파악하기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분국은 603년에는 독자적 관위 12계를 시행하고, 왕실의 예법을 정비하였다. 불사를 지속적으로 시행하였다. 605년 장육불상을 만들었고, 607년 수에 사신을 보낸 것도 불교와 관련하여 도움을 받기 위해서였다. 고구려에도 불교 관련 도움을 요청하여 602년 승륭과 운총을, 610년 담징과 법정을 초빙하였다. 담징은 아좌왕이 창건한 법륭사의 금당벽화를 그렸을 가능성이 크다.
아좌왕은 621년 사망하고, 그의 아들이 승계하였을 것이다. 아좌왕 사후 토착세력인 소아씨의 전횡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소아마자는 624년 갈성현을 주라고 요청하였다. 소아씨의 전횡이 심해지자, 왕실은 639년 백제궁과 백제대사를 짓고, 백제궁에 거주하면서 왕실과 백제와의 관련성을 무기로 소아씨를 통제하려 하였다. 그러나 소아씨의 횡포는 더 심해져, 소아씨의 사당에서 팔일무를 추고, 전국의 백성을 동원하여 쌍묘를 조성하였고, 소아씨 일족이 중요 관직을 독점하고, 자식들을 왕자라 하고 자신들의 집을 궁이라 하고 병사를 배치하여 지켰다.
飛鳥문화(아스카 문화)는 아좌왕의 분국 시대 불교문화이다. 일제 유사사학은 아스카문화가 그리스, 사산조 페르시아, 북위, 북주문화가 집결하여 이루어진 문화라고 하며 백제의 문화임은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
성덕(聖德)은 가공의 인물이다
일제 유사사학은 야마토왜정권을 날조하기 위해 성덕(소위 성덕태자)을 창조하였다. 「일본서기」의 천황들이 가공의 인물이라는 것은 일제 유사사학도 알고 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천황은 다음과 같은 여러 문제가 있다. 제1대부터 제15대까지 대체로 천황이 100세 이상이다. 또한 천황의 수명은 「일본서기」보다 8년 전에 나왔다는 「고사기」와도 일치하지 않는다. 1대부터 30대까지 천황권의 공위 시기가 13번이나 있으며 그 기간도 11개월에서 12개월이 4번, 1년에서 2년이 5번, 2년에서 3년이 2번, 3년에서 4년이 2번이다. 29대 흠명의 자녀 4인이 연이어 왕위에 올라 56년을 지배하며, 33대 추고의 나이를 576년 18세라 하였다가 586년 34세라 하는데, 이는 매우 의심스러운 상황이다. 34대 서명이 증손뻘인 35대 황극과 혼인하며, 이 둘 사이에 38대 천지가 태어나며, 황극의 남동생이 36대 효덕이 되고, 황극이 다시 37대 제명이 되는데, 이러한 왕위 승계는 조작일 수밖에 없다. 「일본서기」는 창작된 이후에도 무수한 변개를 거쳤다. 대표적으로, 11세기의 『신당서』의 편찬자가 본 「일본서기」에 의하면, 36대 효덕-천풍재-천지-천무-총지 모두 부자관계이다.
가야, 백제, 고구려와 백제의 남북국, 백제, 신라의 순으로 지배하는 열도의 역사를 숨겨야 했으므로, 「일본서기」는 처음부터 날조였고, 날조가 드러나면 또 날조해야 했다. 그래도 일본이 야마대국과 무관하다는 것을 숨길 수 없어서 일본을 야마토로 읽는다는 억지를 써야 한다. 일제 유사사학은 「일본서기」의 모순을 해결할 수 없어서, 성덕과 대화개신만이라도 구체적으로 날조하여 야마토왜의 가공성을 보완하려 시도하고 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성덕은 586년 혼인한 용명과 혈수부간인 사이의 첫째 아들인데, 587년에 소아(蘇我)씨와 함께 참전하여 부처님께 절과 탑을 세운다고 맹세하며 정적인 물부(物部) 부자를 살해하였고 593년에 추고의 섭정이 되어 열도의 모든 정사를 주관하였으며, 604년에 헌법 17조를 만들었다.
이러한 성덕에 관한 기사는 조작 기사임이 분명하다. 586년 이후 태어나서 587년 전쟁에 나간다는 것이 말이 안 된다. 황태자가 나이가 어려 고모가 섭정이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있어도 황태자인 남자가 고모인 왕의 섭정이 된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 그것도 실권자인 蘇我씨와 동지인 황태자이다. 「일본서기」에 나오는 천황들은 날조되었음이 명백하여 실존인물로 만들기 어려우니, 일본인들은 성덕을 날조하여 「일본서기」에 집어넣어 실존인물로 만들고 그가 만들었다는 헌법 17조를 역사적 사실로 몰고가려 하였지만, 헌법 17조의 한문체가 7세기 초에는 성립할 수 없음을 일제 유사사학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
성덕은 백제의 아좌왕을 모델로 날조된 인물이다. 성덕의 초상화도 와좌왕의 초상일 것이다. 성덕 전설을 기술하고 있는 문서들은 불교판 「일본서기」에 불과하다. 당시의 불교는 국가 불교 즉 관료 불교였으므로, 불교에서도 백제의 흔적을 지워야 했다. 열도인들은 아좌왕이 열도 지역의 불교 확산에 심대한 영향을 주었으므로 이를 성덕이라는 가공인물을 통해 지우기 위해 성덕 전설을 만들고, 그것을 다시 「일본서기」에 편입시켰다. 백제의 왕자인 아좌 즉 성덕(聖徳)을 가공의 야마토왜(일본)의 왕자로 날조하고 헌법 17조 등 여러 정치적 행위를 부가한 것이 날조의 실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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