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왜부여(=예부여=비류백제)
대부분 왜집단으로만 구성된 우리 민족의 나라는 왜부여가 유일하다. 황하 하류의 왜집단이 왜부여의 주민이다. 강단 유사사학은 왜부여를 동부여와 동일시하여 왜부여의 역사를 말살하였다. 왜부여는 모용씨에게 복속되었다가 고구려가 韓을 정복하면서 고구려의 주민이 되었다.
(4) 백제의 왜집단
韓의 왜
백제는 韓(황하 동쪽 제수 북쪽)에서 건국했으므로 황하 하류의 왜집단도 백제의 주민이 되었다. 광개토대왕은 396년 韓백제 북부를 정복하고 韓백제의 북쪽 해안가의 倭인(=穢인)과 韓인을 수묘인으로 하라 하였다.
요동반도 왜
백제는 CE 22년 이전에 요동반도를 백제의 영토로 편입하였고 고구려의 침입을 방어하여 백제 멸망시까지 유지하였다. 따라서 요동반도의 왜도 당연히 백제의 주민이 되었다. 석탈해는 다파나국 출신인데 다파나국은 요동반도의 왜집단이다. 광개토대왕릉비에 “404년 왜가 무도하게 대방 지역을 침입하였다. (왜는) 백제와 내통하여 석성(石城)을 (공격하고) 연선(連船) ----. 왕이 몸소 군사를 이끌고 나가 --- 평양 --- 선봉이 맞서 왕의 군대가 적의 길을 끊고 막아 좌우에서 공격하니 왜구가 궤멸되었고, 참살한 것이 무수히 많았다.”라 기록되어 있다. 석성이 신당전쟁의 전장인 요양-개주 선 부근의 지명이므로 여기의 왜는 요동반도의 왜이다.
양자강 왜
양자강 왜는, 일부는 오나라와 월나라의 주민으로 되고, 일부는 번조선의 주민으로서 해양무역에 종사하였다. 이들은 백제 건국 후 백제의 주민이 되었다. 후당은 백제유민을 장회무족이라 하는데, 양자강과 회수의 왜가 백제의 주민이었기 때문이다. 김구의 비서였던 선우진은 장개석이 자신의 고향(절강성 영파)은 옛 백제 땅이라 말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양자강왜 중 중국 남부로 이동한 왜도 백제의 주민이 되었다.
중국 남부로 이동한 왜는 진평군으로 편제된다. 『송서』, 『양서』, 『양직공도』, 『남사』, 『통전』의 진평과 『구당서』와 『신당서』의 백제 서부 지역인 월주는 광서성(廣西省) 장족자치구이다. 『송서』에 의하면, 광주(廣州) 울림군(鬱林郡)에 진평현이 있었으며, 『中國地圖集』(1995년판)에는 宋나라가 설치했던 진평현 경내에 지금까지 ‘백제향’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지금도 장족자치구의 현지인들은 백제향의 중심지인 백제허를 대백제(大百濟)라고 읽으며, 전라도에서 사용되었던 외다리방아와 맷돌을 사용하고 있다. 『中國古今地名大辭典』도 진평현이 광서성에 있다고 한다. 진평이 북조의 사서에서 언급되지 않는 것은 진평이 중국 남쪽 즉 남조 영역의 남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전라도왜
전라도왜는 1세기 초부터 백제의 주민이었다. 전술하였듯이 전라도 왜는 포상팔국으로서 신라와 가야를 침략하였고, 399년 신라에 항복한 후 403년 이후 열도의 나라(奈良)로 보내져 고구려 위성국의 주민이 된다. 일제 유사사학은 오사카와 나라에 3세기부터 가공의 야마토왜(大倭=大和) 왕조가 있었다고 날조하나, 야마토왜의 실체는 5세기 초 열도로 이주된 전쟁포로에 불과하다.
예인(왜인) 금주리
와카야마의 우전팔번 신사에서 발견된 거울(우전팔번화상경)의 명문은 다음과 같다.
癸未年八月日十大王年 男弟王在意紫沙加宮時 斯麻念長泰 遺開中費直穢人今州利二人等 取白上同二百旱 作此竟
명문의 내용은 “계미년 팔월의 날, 삼년상의 마지막 해(503년)에, 남동생 왕이 어시사가궁에 있을 때, 사마(무령왕)가 길이 태평하기를 바라며, 개중비직과 예인 금주리 두 사람 등을 보내 최상품 구리 이백근을 취하여 이 거울을 만들었다.”이다. 이 명문에서 무령왕 초기 왜왕은 무령왕의 동생이었음을 알 수 있다. 형인 무령왕은 백제왕으로서 삼년상을 치르고 있었고, 삼년상이 끝나갈 무렵 왜왕에게 거울을 보냄으로써 동생에 대한 신임을 확인하여 주어 열도 통치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열도에서 칼 옥 거울은 삼종의 신기로 취급되어 권력의 원천이었다. 관료인 왜왕의 권력은 스스로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백제 왕의 임명에서 나온 것이므로 왜왕들에게는 왕의 신임을 표시하는 물적 증거가 중요하였기 때문이다. 열도에서 동은 708년에나 생산되고 그 전에는 열도 외의 백제에서 공급받았으며 백상동이라는 최고의 동이 원료로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이 거울은 韓 지역에서 제작되어 왜왕에게 하사된 것이다. 강단 유사사학은 일제 유사사학의 날조된 해석문만을 제시하면서 왜왕이 백제의 관료였음을 숨기려 하고 있다.
예인 금주리는 거울 기술자로 백제의 서도에 머물렀던 사람일 것이다. 당시에는 동성왕의 韓 지역 회복으로 무령왕은 韓의 웅진에 있었다.
열도의 왜
백제가 3세기 말부터 열도에 진출하면서 열도의 왜집단도 당연히 백제의 주민이 되었다. 열도가 왜로 불리게 된 것은 어업을 했던 왜가 소규모이더라도 가장 먼저 구주 북부 해안가로 이주했기 때문이다. 열도의 역사는 한반도 이주민의 역사이며, 한맥왜 모두가 열도로 이주하였다.
전쟁포로로서 나라에 보내진 전라도왜가 열도에서 가장 큰 왜집단이었으므로 이들이 대왜로 불리었다. 이들은 고구려 위성국의 주민이 되었으나, 백제가 나라를 탈환하면서 다시 백제의 주민이 되었다.
(5) 고구려의 왜집단
당산지역 바닷가(조백하에서 난하까지 여러 강들의 어귀)의 왜는 예맥조선의 주민이 되었고, 이 지역이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으므로 이들은 당연히 고구려의 주민이 되었다.
고구려는 548년 예병 6천명으로 백제를 공격하는데, 이들은 대동강 어귀의 왜인으로 추정된다.
양견(수문제)이 597년 “王은 遼水의 폭이 長江과 어떠하며, 高麗의 인구가 陳國과 어떠하다고 보는가?” 하면서 고구려를 위협하는 문서를 보내자, 고구려는 598년 濊 군사 일만으로 요서(당하 상류 남부)를 공격하였다. 濊병은 당시의 국경인 당하에서 가까운 황하 하류에 살고 있었던, 494년 고구려에 병합된 왜부여의 왜인이다. 고구려의 공격에 영주총관 위충이 대응하자 고구려는 후퇴하였다.
양견은 예상치 못한 고구려의 치고 빠지기에 당황하고 분노하여, 준비가 안 된 상태로 서둘러서 598년 6월 양량과 왕세적을 장군으로 30만을 임유관을 통해 고구려로 보내고, 식량은 배로 황하로 보내려고 하였는데 강이식은 이를 눈치채고 보급선을 파괴하고 성을 지키면서 시간을 끌자 수의 병사들은 굶주려 병에 걸리는 상태가 되었다. 9월 수군이 더이상 견디지 못하고 후퇴하자, 고구려군은 임유관까지 추격하여 수군을 대부분 몰살시켰다. 이후 양견은 고구려와 전쟁하려 하지 않았다. 고구려의 선제 공격 시 참여한 왜병 일만은 당연히 이 전쟁에서도 참여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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