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한국학 기초 낭독 54

역사회복 2026. 4. 14. 10:53

https://youtu.be/KcjScsEko9U

 

(11) 진경대사탑비문 날조

 

강단 유사사학은 진경대사탑비에 나타나는 임나가 김해 지역을 의미한다고 한다. 비문의 관련된 부분과 그에 대한 강단 유사사학의 판독과 해석은 다음과 같다

 

大師諱審希, 俗姓新金氏. 其先, 任那王族, 草拔聖枝, 每苦隣兵, 投於我國. 遠祖興武大王, 鼇山稟氣・鰈水騰精, 握文符而出自相庭, 携武略而高扶王室, ▨▨終平二敵, 永安兎郡之人, 克奉三朝, 遐撫辰韓之俗. 考盃相, 道高莊老, 志慕松喬, 水雲雖縱其閑居, 朝野恨其無貴仕.

대사의 이름은 심희(審希)이고, 속성은 신(新) 김(金)씨이다. 그 선조는 임나(任那)의 왕족이요, 초발(草拔)의 신성한 후예였는데, 매번 이웃 나라의 군대에 괴로워하다가 우리나라에 귀의하였다. 먼 조상인 흥무대왕(興武大王)은 오산(鼇山)의 정기를 받고 접수(鰈水)의 정기를 타고 났다. 문부(文符)를 쥐고 재상의 집안에 태어나 무략(武略)으로 왕실을 높이 떠받들었으며, ▨▨ 마침내 〈고구려와 백제의〉 두 원수[二敵]를 완전히 평정하여 토군(兎郡)의 사람들을 길이 편안하게 하였고, 〈진덕왕, 무열왕, 문무왕의〉 세 임금을 잘 받들어 진한(辰韓)의 풍속을 크게 위로하였다. 〈대사의〉 아버지는 배상(盃相)으로, 도덕은 장자와 노자를 높이고 뜻은 적송자(赤松子)와 왕자(王子) 교(喬)를 흠모하였으니, 물과 구름은 그의 한가로이 지냄을 인정하였지만 조정과 재야의 선비들은 그가 벼슬을 귀히 여기지 않음을 안타깝게 여겼다.

 

눈보다 조선총독부의 교시가 우선인 강단 사이비들

강단 유사사학은 비문 중 ‘住那’를 ‘任那’라 판독한다. 국사편찬위원회가 제시하는 비문의 이미지는 다음과 같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강단 유사사학이 임나라 읽는 글자는 누가 봐도 任那가 아니고 住那이다. 조선총독부가 임나라고 읽어라 교시하니까 강단 유사사학은 토달지 않고 자기 눈을 바보로 만들어버린다. 그들의 조선총독부 소설을 향한 충성은 끝이 없다. 자기 눈을 칼로 찔러서라도 조선총독부 소설을 떠받드는 그들의 피끓는 충절에 그 누가 감동하지 않을 것인지. 심지어 국사편찬위원회의 판독문에는 住로 읽을 수 있다는 주석조차도 없다.

 

임나로 읽어도 임나=가야 소설은 불성립

설사 임나라 읽어도 그들의 주장은 전혀 타당하지 않다. 강단 유사사학처럼 임나를 김해로 해석하면 진경대사의 선조를 괴롭힌 나라는 신라가 된다. 김해를 매번 괴롭힌 나라는 신라이지 백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경명왕은 진경대사에게 제자의 예를 표할 정도로 그를 존경하여 직접 진경대사의 비문을 지었다. 임나가 김해라면 경명왕은 신라가 임나를 괴롭힌 것을 명시하지 않았을 것이고, 부처님의 섭리라거가 좋은 인연이라거나 하는 다른 좋은 표현으로 그의 선조가 신라에 귀부했다고 기술했을 것이다. 존경하는 사람의 선조를 신라가 괴롭힌 것을 탑비에 쓰는 것은 강단 유사사학의 코미디 소설에서나 가능할 것이다. 또 문자 자체도 隣兵의 隣과 投於我國의 我를 달리 쓰고 있어 隣은 신라가 아님이 명확하다. 따라서 주나가 아니라 임나라 가정하더라도 임나는 김해가 아니다. 임나와 주나는 가야인들이 열도에 세운 가야 소국이다.

 

진경대사탑비도 열도가 우리 고대사의 강역임을 입증

비문에 의하면 진경대사는 신김씨인데, 신김씨도 김해김씨로 추정된다. 김해의 가야 왕족들이 열도로 건너가서 임나, 주나 등 마을국가를 세웠으므로 주나의 왕족인 진경대사의 선조도 김해김씨이며, 비문에서도 김유신과 진경대사가 같은 성씨라고 하기 때문이다. 흥무대왕은 김유신으로 진경대사와 일가일 뿐이고 진경대사의 직계선조는 아니지만, 경명왕은 진경대사를 존중하는 마음에서 그를 신라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김유신과 연결시켜 진경대사의 가계가 초라해보이지 않도록 하였다.

草拔聖枝는 사람의 이름이다. 강단 유사사학의 해석은 말이 되지 않는다. 신성한 후예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으려면 초발만 써서 ‘그 선조는 왕족 초발’이라고 써야 한다. 초발성지는 열도식 즉 백제식 이름이다. 초발은 수풀이고 성지는 슬기이다. 강단 유사사학은 초발성지가 열도식 이름임을 숨기기 위해 초발의 신성한 후예라고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한다.

어떻든 진경대사탑비의 주나는 주나가 열도에 있었다는 명확한 증거가 되고, 강단 유사사학이 주나를 임나라고 우기는 이유는 임나=가야 주장이 전혀 근거가 없어 날조라도 해서 근거를 하나라도 더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12) 가야의 해상 교역 날조

 

新錢(소위 왕망전)은 김해를 중심으로 남해안과 제주도 대마도 구주 북쪽에서 상당량이 발견되며, 강단 유사사학이 한4군 지역이라 사기 치는 북한과 중국 동북지방에서는 미미하게 확인된다. 이는 왕망 정권의 실세였던 김씨 집단이 김해로 도망 온 것을 의미하며 CE 42년의 가야 건국이 역사적 사실임을 증명한다.

강단 유사사학은 “김해패총에서 출토된 王莽錢, 김해 良洞里 토광묘의 後漢代 尙方鏡, 창원 茶戶里 목관묘에서 나온 前漢代 星雲鏡·五銖錢·琴形帶鉤·小銅鐸, 창원 성산패총에서 나온 五銖錢 등은 낙랑과의 교역을 방증해 주는 것들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들의 주장 대로 新錢이 평양의 낙랑군과 가야의 교역에 사용되었다면 낙랑군에서 훨씬 더 많이 발견되어야 한다. 따라서 한반도 남부에서 발견되는 新錢은 김해 평양 간 교역과는 무관하다고 보아야 한다. 동아시아의 무역은 백제에 의해 행해졌다. 가야는 백제가 행하는 무역의 상대방에 불과하였고, 백제의 무역권에 대항할 정도의 힘이 없었다. 따라서 강단 유사사학이 제시하는 가야 무역의 증거들은 가야가 백제가 행하는 무역의 상대방이라는 증거에 불과하다.

강단 유사사학은 『삼국지』와 『후한서』를 오해하여 가야가 철의 주산지로서 낙랑군과 무역을 하였다고 주장한다. 『삼국지』는 변진의 철이라 하고, 『후한서』는 진한의 철이라 하는데, 변진과 진한 모두 韓 지역의 신라를 가리킴은 전술하였다. 韓 지역 신라의 철이 좋았던 이유는 석씨 집단이 당시 질 좋은 철을 생산하였던 남인도 타밀에서 왔거나 타밀인들의 기술을 습득하였기 때문이다. 어떻든 『삼국지』와 『후한서』가 말하는 철 생산자와 가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들은 가짜 무역을 만들고, 가야가 낙랑군과 왜 신라의 중개무역으로 번성하였으며, 낙랑군이 평양에서 없어지자 가야가 약화되었다고 한다. 가야가 약화되자 포상팔국이 가야를 공격했고, 가야는 교역상대를 낙랑군 대신 백제로 변경하였으나 광개토대왕의 공격으로 망했다고 한다. 전부 사료적 근거가 전혀 없고 그들의 소설이다. 특히 포상팔국의 공격이 『삼국사』와 『삼국유사』에서 3세기 초라고 나와 있음에도, 어떤 근거도 없이, 오직 조선총독부의 소설에 충성하기 위해 4세기에 있었다고 사기 친다. 그들은 가야가 해상으로 평양의 낙랑군과 김해 사이의 무역을 했다고 주장하는데, 당시의 항해기술상 김해와 평양간 항해는 백제의 해안을 따라서 행해져야 하므로, 백제가 가야의 영향권 내에 있지 않는 이상, 가야의 독자적 무역은 있을 수 없는 이야기이다. 평양에 낙랑군은 없었고, 평양은 고구려의 한성이므로, 평양과 김해의 무역은 고구려와 가야의 무역이 된다. 즉 그들의 낙랑군과의 교역 소설은 낙랑군 평양설에 의존하므로, 낙랑군 평양설이 사기임이 드러난 이상 코미디에 불과하다.

『남제서』는 479년 가야왕 荷知를 輔國將軍本國王으로 책봉하였다 하는데, 강단 유사사학은 이를 근거로 가야가 對中交易을 독자적으로 성공시켰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가야의 조공을 사실로 보기는 어렵다. 소도성은 찬탈로 정권을 잡아서 정통성을 과시할 필요가 있었고, 북조의 위와 비교하여 적당한 수의 조공국을 만들 필요가 있어, 가야를 이용하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소도성의 신하들이 백제에게 조공국을 추천해 주라 부탁하여 백제가 가야와 가야왕의 이름인 하지를 알려 주었을 것이다. 남제는 하지왕을 책봉했다고 하면서 가야의 정확한 표기를 몰랐기 때문에 ‘자기나라 왕’을 뜻하는 ‘본국왕’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을 것이다. 강단 유사사학은 가야를 연맹체라 하고 대가야를 고령의 마을국가라고 하면서도, 자기들의 소설을 위해선 마을국가가 고대국가 백제의 해상무역권을 침해한다는 놀라운 주장을 서슴치 않는다.

 

(13) 가공의 야마토왜 정권과의 교역 날조

 

강단 유사사학은 근초고왕 시 백제와 신라. 양국은 야마토왜와의 독점적인 교역권을 확보하기 위하여 치열하게 경쟁하였으나 백제측의 우세로 끝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근거는 전혀 없다. 야마토왜가 가공인데 어떻게 가공 정권과의 교역이 있을 수 있는가?

열도에는 가야가 먼저 진출하였다. 3세기 말부터 백제가 열도에 진출하여 열도를 지배하였다. 가야가 먼저 열도에 진출한 후 한반도와 열도의 교역을 하였겠지만, 백제의 열도 진출 후엔 열도의 무역도 백제의 관할이 되므로 가야의 무역이란 있을 수 없다. 더구나 백제가 열도에 진출하면서, 열도에 진출하여 한반도와의 교역을 하고 있었던 허황옥계(타밀계)의 기내 야마대국과 구주의 가야 분국이 백제에 점령되고, 한반도의 가야 권력도 고령의 토착세력으로 이전되므로 가야는 해상무역에서 완전히 퇴출당한다.

열도가 백제 땅이고 동아시아의 유일한 해상무역세력은 백제이므로 강단 유사사학의 주장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소설에 불과하다. 그들이 백제 신라 임나=가야와 야마토왜의 교역 근거로 주장하는 「일본서기」의 조공 이야기는 열도의 마을국가들이 백제의 담로나 왜왕과 더 밀접한 관련을 맺어 주변 마을국가들보다 우월한 위치에 서려는 시도에 관한 이야기일 뿐이다.

강단 유사사학은 대사=다사진=하동이라 날조하면서 가야와 백제가 야마토왜와의 교역을 위해 하동을 두고 경쟁하였다고 주장하나, 고령이 가야의 맹주국이라면 열도와의 무역을 위해선 낙동강을 통해 김해로 가거나, 김해에서 가까운 남해안으로 가면 되고, 지리산을 넘어 섬진강으로 가는, 반대방향으로 우회하는 경로를 취할 필요가 없으며, 백제는 서해안이나 전라도의 남해안으로 가면 되고, 섬진강 건너의 하동을 경유하여 가는 경로를 취해야 할 필요가 없다. 즉 하동이 야마토왜와의 교역을 위한, 백제와 가야의 쟁탈지가 될 이유는 전혀 없다. 일제·강단 유사사학은 전혀 사리에 맞지 않는 말을 하면서 「일본서기」가 전하는 열도의 마을국가 이야기를 한반도의 역사라 사기 치고 있다.

강단 유사사학은 가야는 백제와 야마토왜 사이에서 중계무역을 하려 하였고, 백제는 가야 지역 내에서 야마토왜와 직접 교역하려 하여, 가야와 백제 사이 갈등이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일본서기」의 열도 이야기를 한반도에서 있었던 일이라 사기 치려다 말도 되지 않는 소설을 창작하고 있다. 백제는 항해능력이 없어서 가야 지역 내에서 야마토왜와 교역하려 하였는가? 항해능력이 없었다면 왜 백제는 다사진을 차지하려고 하였는가? 도대체 그들의 소설은 앞뒤조차도 맞지 않는다.

똑같은 백제 위세품이 나와도 일제의 소설에 따라 남원은 임나=가야, 나주는 마한, 열도는 야마토왜, 충청도는 백제라고 주장하면서, 위세품을 교역의 증거라고 주장하는 강단 유사사학은 가야도 하동을 통해 해로로 중국과 교통하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교역품목이 발견된다는 것이 그 나라가 교역을 주도적으로 행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가야는 백제가 행하는 교역의 당사자였을 뿐이다. 연맹체의 마을국가가 고대국가 백제의 해상무역권을 침해하였다는 주장은 소설적 가능성도 없다.

 

(14) 가공 야마토왜의 해외 군사기지 날조

 

강단 유사사학은 아무런 근거도 없이, 「일본서기」를 날조 해석하여, 야마토왜가 가야에 군사기지를 설치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일본서기」 249년(신공49년) 이야기를, 249년을 369년으로 바꾸고, 일본을 백제로, 신라7국을 임나7국이라고 변조하고, 정복을 상호선린우호관계로 날조한 후, 다음의 「일본서기」 262년 기사를 날조 해석하여 382년 가야가 백제의 실질적 지배 하에 들어갔다고 주장한다.

 

62년에 신라가 조공해오지 않았다. 그 해에 습진언을 파견하여 신라를 치도록 하였다. [『백제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임오년(壬午年)에 신라가 귀국을 받들지 않으므로 귀국이 사지비궤(沙至比跪)를 보내어 이를 치도록 하였다. 신라인은 미녀 두 명을 단장시켜서 나루에서 사지비궤을 맞이하여 유혹하였다. 사지비궤는 그 미녀를 받고는 도리어 가라국을 쳤다. 가라국의 왕 기본한기(己本旱岐)와 아들 백구지(百久至), 아수지(阿首至), 국사리(國沙利), 이라마주(伊羅麻酒), 이문지(爾汶至) 등은 그 인민을 데리고 백제로 도망해 왔다. 백제는 이들을 두터이 대우하였다. 가라국 왕의 누이인 기전지(旣殿至)가 대왜(大倭)에 가서 ‘천황은 사지비궤을 보내어 신라를 치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지비궤는 신라의 미녀를 받고 신라를 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우리나라를 멸망시켜 형제, 인민 모두가 떠도는 신세가 되니 걱정스러운 마음에 견딜 수가 없어 이렇게와서 아룁니다.’라고 말하였다. 천황은 매우 노하여 목라근자를 보내 병사를 이끌고 가서 가라에 모여 그 나라의 사직을 복구시키도록 하였다.” 어떤 책에서는 “사지비궤는 천황이 노하였음을 알고 감히 공공연히 귀국할 수 없어 몰래 잠입하였다. 그 누이동생은 황궁에서 일하고 있었다. 비궤는 은밀히 사람을 보내어 천황의 노여움이 풀렸는지 어떤지를 알아보게 하였다. 누이동생은 꿈을 핑계 삼아 ‘어젯밤 꿈에서 사지비궤를 보았습니다.’라고 아뢰자 천황은 ‘어떻게 감히 비궤가 돌아올 수 있는가.’라며 몹시 분노하였다. 누이동생이 이말을 전하자 비궤는 용서받지 못할 것을 알고 석굴에 들어가 죽었다.”라고 하였다.].

 

위 「일본서기」 내용은 열도의 마을국가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고대국가들 관계에서는, 미인 두 명에 의해 공격대상이 바뀌는 것도, 공격대상이 변경되어 공격 받은 나라가 갑자기 망하는 것도, 망한 나라가 금방 복구된다는 것도, 인민이 왕과 함께 이웃 나라로 도망가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모든 일은 내용상 마을국가들 사이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이다.

백제의 담로가 신라마을을 통제하라고 보낸 사람들이 뇌물을 받고 가라마을을 괴롭히니, 담로가 백제마을을 시켜 먼저 보낸 사람들을 처리했다고 보아야 말이 된다. 강단 유사사학은 이 이야기에서, 일본이 보낸 사람을 삭제하고, 가야마을 침략자를 일본에서 신라마을로 날조하고, 가야 구원자도 일본의 명령을 받는 백제마을에서 백제로 날조한 후, 382년 신라가 가야를 침입하였는데, 백제가 가야를 구원하였다는 가공의 역사를 창작한다. 이어서 백제의 영향권에 들어간 가야는 백제가 요청한 야마토왜 군대의 가야 주둔을 수용하였다고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은 소설을 창작한다.

 

한편<광개토왕릉비>에 보이는 400년과 404년 백제가 끌어들인 야마토왜와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고령가야는 야마토왜에게 대고구려전의 전진기지를 제공하고 있다. 그런데 382년 이래 고령가야는 실질적으로 백제의 영향권 안에 들어가 있었다. --- 369년 이래 백제와 상하관계를 맺고 있던 가야는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걸친 신라의 침입과 고구려의 남하에 대항해서 더욱 백제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지금까지의 가야와 백제와의 형식적인 상하관계는 실질적인 상하관계로 전환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고령가야는 백제의 직접 구원을 받고 야마토왜에게 전진기지를 제공하게 됨으로써 지금까지 백제와의 관계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던 탁순을 제치고 백제와의 관계에서도 중심적인 역할을 하기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강단 유사사학의 위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창작소설이다. 먼저 야마토왜의 실체가 없다. 광개토대왕릉비문 400년과 404년에 나오는 왜는 모두 백제의 주민이다. 400년 동원된 왜는 열도의 왜로서 바로 신라 해안으로 공격했고, 404년 동원된 왜는 요동반도의 왜이다. 모두 가야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가야가 가공의 야마토왜에게 대고구려 전진기지를 제공했다는 것은 어떤 근거도 없는, 강단 유사사학의 상상에 불과하다.

바보가 아닌 한 열도 마을국가들간의 이야기로 판단할 수밖에 없는 「일본서기」의 문언을 마음대로 파괴하여, 한반도 남부의 이야기로 날조하고, 있지도 않았던 야마토왜 정권을 창설하고, 나아가 야마토왜의 해외 군사기지까지 날조하는 그들의 상상력과 조선총독부 소설에 대한 충정은 일제 유사사학을 뛰어넘는 청출어람의 수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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