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한국학 기초 낭독 52

역사회복 2026. 4. 14.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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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반파국 날조

 

무소불위의 사이비 음상사학

강단 유사사학 다수는 고령 반파국이 대가야이고 서쪽으로 남원까지 세력권을 확장하였는데, 남원과 임실이 기문으로 반파의 세력권이고, 남쪽으로는 진주(子呑), 하동(滯沙, 帶沙, 帶沙津, 多沙津), 광양(滿奚)까지 세력권이라 한다. 강단 유사사학 중 일부는 반파국은 고령과는 다른 임나국으로 장수와 전라도 동부와 섬진강 유역을 그 영역으로 한다고 주장한다. 강단 유사사학은 음상사학으로 일가를 이룬 대가들답게 반파, 기문, 대사와 그들의 관계, 반파와 가라의 관계에 대해, 유일한 근거인 음상사를 이유로, 각양각색의 견해를 제시하나, 주류는 기문은 전북 동부, 대사는 하동이라 하면서 기문과 대사를 고령 반파국의 영역이라 한다.

사이비들은 반파 기문 대사를 한반도에 끌어들이기 위해 음상사를 근거라 주장하나, 음상사조차 성립하지 않으므로, BCE 24세기 중국 동부의 변한 지역의 나라인 반로국, 신찬성씨록의 임나의 동북에 있다는 파문(巴汶), 양직공도에 반파와 함께 방소국으로 열거된 사문(上巳文), 한원基汶河, 우륵의 12곡명인 기물(奇物) 등을 사용하여 가짜 음상사를 조작한다.

 

반파마을은 임나마을이 아니다

강단 유사사학은 반파가 임나=가야라 하나, 일본서기에 반파마을이 임나마을인 증거는 전혀 없다. 강단 유사사학은 가라마을의 다사진이 반파마을의 대사와 같으므로 반파가 임나마을에 속한다고 하는 것 같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다사진과, 대사(체사)는 같을 수가 없다. 우선 가라마을과 반파마을의 이름이 같지 않다. 또 백제마을이 반파마을로부터 516년 경에 기문만 돌려받고 체사를 받지 못했다면, 529년에는 백제 관료인 왜왕에게 반파마을이 아직도 주지 않고 있으니 반파마을을 혼내주세요라고 말해야 한다. 그런데 백제마을은 조공하는 통로로 쓰게 하여 달라라고 새로운 명분을 제시하면서 다사진을 주라 하고, 가라마을도 이 진은 관가를 둔 이래 신이 조공하는 나루였는데, 어찌 갑자기 이웃 나라에 줄 수 있습니까. 원래 분봉받은 영토와 다릅니다.”라고 한다. 다사진을 불과 10여년 전에 백제마을로 귀속시킨 왜왕의 결정이 있었다면 백제마을과 가라마을의 언급은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 된다. 또한 帶沙(滯沙)()多沙津는 훈으로 읽는다면 전혀 다른 음이다. 따라서 반파마을과 가라마을은 다른 마을이고, 다사진과 대사(체사)도 다른 곳이다.

 

조선총독부 소설을 위한 위세품과 교역품의 자의적 구별

강단 유사사학이 기문이라 주장하는 남원의 고분에서 백제의 금동신발, 청동거울, 계수호가 출토되었다. 지방세력에게 하사하는 위세품이 백제의 것이라면 당연히 그 지역은 백제가 지배한 지역이지 반파일 수가 없다. 그들은, 그들이 백제 영역이 아니라고 거짓말하는 곳에서 발굴되는 백제 위세품을 그 지역의 독립국이 백제와 교섭한 증거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위세품은 백제의 지방통제방식이므로 교역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열도 등 백제의 위세품이 나온 곳도 모두 백제의 영토가 아니라 백제와 교섭한 독립국이 되어 백제의 영토는 없어질 것이다. 충청도 전라도 모두 백제의 위세품이 발굴되므로 처음부터 백제의 영토였다. 강단 유사사학은 같은 위세품이 발견되어도 조선총독부의 소설에 따라 충청도는 백제, 나주는 마한, 남원은 기문, 열도는 야마토왜라 주장한다. 평양에서는 칠기나 동경 등 교역품이 발견되어도 중앙정부의 사여품이라 하면서 낙랑군이라 주장하다가, 백제의 영토에서 발견되는 사여품은 교역품이라 주장하면서 백제의 영토가 아니라고 한다. 또한 사이비들은 가야 토기가 전라도에 나타나면 가야의 영역이라 하고, 열도에 나타나면 가야라 않고 야마토왜라 한다. 이것이 바로 강단 유사사학과 유사고고학의 엄밀한 실증의 정체이며 조선총독부 소설에 대한 그들의 무한정한 충성의 표징이다.

 

한반도 남부식을 가야식으로 날조

강단 유사사학은 토기와 무덤의 구조 등을 근거로 남원 고분을 가야계 고분이라 하면서 남원을 반파의 영역이라 주장한다. 토기나 무덤의 구조는 지배세력이 변화시킨 것이 아니라 토착적 문화이다. 토기나 무덤양식이 같아도 지배자에 따라 백제가 지배한 곳은 백제가 되고, 가야가 지배한 곳은 가야가 된다. 백제와 신라의 지배층은 에서 왔고, 가야의 지배층은 나라에서 왔는데, 이들이 온다고 모든 문화가 지배층의 문화로 바뀌는 것은 아니다. 즉 토기 귀걸이 등 생활용품 등과 무덤의 구조는 지배세력이 달라진다고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토착적 문화이며, 토기나 무덤양식이 같아도 지배자에 따라 백제가 지배한 곳은 백제가 되고, 가야가 지배한 곳은 가야가 된다고 봄이 타당하다. 강단 유사사학이 임나=가야의 것이라 사기치는 모든 유물이나 유적은 한반도 남부식이라 해야 타당하다. 가야 토기가 아니라 한반도 남부식 토기라 해야 하고, 가야 무덤이 아니라 한반도 남부의 토착 무덤 형식이라 보아야 한다. 백제식 토기로 변경된다는 것도, 백제의 중앙에서 유행하던 토기가 지방에까지 유행되는 것으로 보아야 하지 이를 영토가 가야에서 백제로 바뀌는 증거로 볼 수는 없다.

 

열도가 백제 영토임을 숨기기 위한 날조

그들이 백제 위세품이 발견되어도 백제가 아니라고 말도 안 되는 사기를 치는 이유는, 후지노기 후나야마 등 열도의 고분에서도 백제의 위세품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나라와 구주가 모두 백제의 영토였다는 것이 드러나기 때문에, 조선총독부 소설에 무한한 충성을 다하는 그들은 코미디인 줄 알면서도 거짓말을 하고 있을 것이다.

 

억지로만 구성되는 그들의 대하소설

일본서기에 의하면 열도의 반파 마을은 백제 마을이었던 기문을 탈취하였다. 이 기사를 근거로, 강단 사이비들은 남원이 반파국의 영토로 되었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였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남원의 5세기 후반 고분을 근거로 남원이 반파의 영토라 한다. 그렇다면 그들의 소설 속에서 400년에 고구려에 망한 임나=가야는 50년 이내에 고구려를 격퇴하고 독립을 하면서 백제의 영토를 탈취해야 한다. 그것도 연맹체에 지나지 않는 임나의 각 소국이 고대국가인 고구려와 백제를 물리쳐야 한다. 그들에겐 아무런 사료적 고고학적 근거도 없다. 오직 조선총독부의 교시에 따라 반파를 열도가 아닌 한반도 남부로 비정하기 위해, 아무렇게나 지명의 음상사를 도출하고 음상사가 만능 증거라고 억지를 쓴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백제 마을은 백제 관료인 왜왕에게 다사진을 조공하는 통로로 주라고 한다. 강단 사이비들은 이 기사의 대사=체사=다사진이 하동이라 한다. 대사가 강단 유사사학의 주장처럼 하동이라면 조공하는 통로로 하겠다는 백제의 말은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 된다. 백제와 임나=가야의 영역이 어떤 방식으로 나누어 있어야 섬진강 건너의 하동이 백제와 열도의 교통로가 되는지에 대해 그들은 묵언수행하고 있다. 더구나 강단 유사사학은 일본서기250(370) 5월 신공이 백제에게 다사성을 주었다는 이야기에 나오는 다사성(多沙城)도 하동으로 본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당시 백제는 마한에 가로막혀 하동까지 영토로 할 수 없다. 또한 이 때의 다사성은 신공이 역()으로 삼도록 하겠다 하므로 백제와 야마토왜와의 교역로상 육로에 위치해야 한다. 그들의 말은 전혀 앞뒤가 부합하지 않는다. 그 경우 그들은 항상 사료가 오류라고 거짓말을 하거나 묵언수행한다.

 

봉수망과 제철유적까지 조작하는 유사사학

일부 강단 유사사학은 반파국이 장수를 수도로 하고 전라도 동부지방을 영역으로 한 가야연맹체의 한 나라라고 주장하며, 장수가 철의 생산과 유통으로 국력을 다져 봉수망을 구축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들 주장엔 전혀 근거가 없다. 그들 스스로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직은 반파국과 제철유적의 연관성이 입증되지 않았지만, 반파국 가야 고총에서 단야구와 편자를 중심으로 마구류, 무구류 등 지역색이 강한 철기류가 출토되어 그 가능성을 더욱 높였다. 일단 반파국이 봉화 왕국으로 융성하는데 철의 생산과 유통이 결정적인 공헌을 했을 것으로 유추해 두고자 한다.

 

이들 강단 유사사학도 여타 강단 유사사학처럼 고분이 가야식이라고 하면서 전라도 동부를 가야라고 주장하나, 묘제는 한반도 남부식이지 가야식이 아니다. 이들이 장수의 봉수망과 제철 유적이라 주장한 유적 역시 가야 토기를 근거로 하나 이들 토기는 한반도 남부식 토기이고 가야식 토기가 아니다. 백제의 수도였던 사비에서도 그들이 말하는 가야식 토기가 발견된다. 사비도 가야 영역이었는가? 즉 장수가 반파국의 수도이고 그들이 주장한 봉수와 제철유적이 반파국의 것이라는 증거는 전혀 없다. 그들은, 가야연맹체의 구성원에 불과하며 수도를 지킬 읍성조차도 없는 반파가 고대국가 백제를 침략하여 영토를 탈취하여 봉화망과 제철소를 운영하였다고 하는데 이러한 주장은 소설이라 하기도 어렵다. 곽장근은 그가 주장하는 봉화나 제철 유적이 그가 주장하는 시기의 것이라 입증할 탄소연대측정의 결과는 하나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곽장근이 제시하는 봉화와 제철 유적이 실제 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아무런 실증이 없는 주장을 근거로 정부 예산을 받아내서 아무런 실증이 없는 결과물을 내놓아도 용인되는 것이 강단 유사사학과 강단유사고고학이 자랑하는 사이비 카르텔의 힘이다.

그들이 제시하는 유일한 근거는 일본서기반파가 자탄과 대사에 성을 쌓고, 만해와 연합하여 봉수와 저각을 설치하여 일본에 대비하였다라는 이야기이다. 그들에 따르면 대사는 하동이므로 하동부터 장수까지의 봉화망이 있어야 하는데 그들은 하동부터 시작되는 봉화망은 제시하지 않고 있다. 그들에 의하면 반파는 백제를 침략하여 영토를 확보한 나라이며 봉수망을 운영할 정도의 대국이고, 그들이 인용하는 일본서기에 의하면 반파는 신라를 괴롭히는 나라인데, 일본은 겨우 5백명으로 반파를 진압하려 했다. 그들의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는 역사소설도 될 수가 없다.

 

실제 역사

강단 유사사학이 기문을 남원, 대사를 하동이라 주장하면서 논거로 제시하는 일본서기의 반파, 기문, 대사 관련 부분은 열도의 마을 사이에 발생한 사실이다. 임나4, 기문, 체사, 다사진의 마을 간 이동은, 6세기 초 백제가 고구려의 열도 위성국으로부터 열도를 완전히 탈환한 후, 고구려계 지배하의 기존 마을들 간 역학관계를, 백제의 지배에 편하도록 재편하여, 안정적 지배질서를 구축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기문, 체사, 대사, 다사진, 백제, 안라, 반파, 만해, 마차해, 추봉, 신라, 사라, 가라는 열도의 마을 이름이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기문은 백제마을의 영토였다가 고구려계의 지배 시 반파마을의 영토가 되었고, 6세기 초 백제가 탈환하자 다시 백제마을의 영토가 된다. 백제의 관료인 왜왕이 513년 기문을 백제마을의 관할로 변경할 때 체사도 함께 백제마을의 관할로 한다. 그러자 514년 반파마을이 마차해마을 추봉마을과 함께 왜왕에게 반항하여 신라마을을 침략한다. 515년 왜왕이 물부련을 책임자로 군사 500명을 파견하여 반란을 진압하려 하였지만 실패하였고, 백제마을의 사자는 신라마을을 거쳐 백제마을로 돌아갔다. 문제가 어떻게든 해결되어 516년 백제마을은 기문을 받은 것에 대해 왜왕에게 감사하였다. 529년 백제마을은 가라마을의 다사진도 백제마을의 관할로 받았다.

 

 

 

 

(6) 남가라 날조

 

일본서기는 남가라가 김해가 될 수 없다고 함

강단 유사사학은 일본서기의 남가라가 김해라 주장한다. 그러나 일본서기에 의하면 남가라는 결코 김해일 수 없다.

일본서기249(강단 사이비들은 369년으로 수정함) 일본이 신라에 속해 있었던 남가라 탁국 탁순 등 7국을 평정하였다고 하는데, 3세기 말 이후 369년 이전에 김해는 신라의 영토가 아니었고 금관국의 영토였다.

일본서기527년 이후 일본이 당시 신라의 관할이던 남가라 등을 임나의 관할로 변경하려 회의를 하는 등 여러 노력을 하였으나 계속 실패하였다 하는데, 금관국은 532년 신라에 투항하므로 그 이전에는 신라의 영토가 아니었다. 강단 사이비들은 529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532년을 전후한 시기까지 신라가 이들 마을을 병합하였다고 주장하면서, 그들의 소설과 불부합하는 일본서기의 내용은 철저히 무시한다.

일본서기600년 신라와 임나의 전쟁 시 일본이 임나를 도와서, 신라가 항복하면서 남가라를 할양하겠다고 하였다는데, 한반도에선 600년에 신라와 가야가 전쟁을 할 수 없다.

강단 유사사학은 남가라를 김해, 탁기탄을 낙동강 동안의 영산, 탁순을 창원이라 주장한다. 고대국가의 일반적 국경선에 비추어, 낙동강 동쪽의 영산이 낙동강 서남쪽의 창원 김해와 동일한 정치적 운명을 갖는다는 것은 그들의 소설 속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이처럼 일본서기의 남가라는 결코 김해가 될 수 없음에도, 그들은 조선총독부 소설에 대한 애끓는 충정으로 앞뒤 불일치의, 모범적 유사사학성을 실현하고 있다.

 

실제 열도의 역사

일본서기의 기술을 합리적으로 이해하면 다음과 같다. 369년 백제 담로는 신라마을에 속해 있던 남가라 등을 독립시켜 신라마을의 세력을 약화시켰다. 400년 광개토대왕의 열도 공격으로 백제는 북부 열도를 잃게 되었는데, 이때 신라마을이 남가라 등을 회복한 것으로 추측된다. 일본서기는 신라마을의 관할권 회복을 기술하지 않고 있다. 5세기 말 열도를 전부 회복한 백제는 527년부터 남가라 등을 다시 독립시키겠다 즉 임나에 있는 백제 관청의 지배 범위에 포함시키겠다고 표방하면서, 남가라 등의 관할권을 마을들 간 분쟁 대상으로 유지시켰다. 이러한 구도를 통해 백제의 왜왕에게 대항하는 세력의 부상을 방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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