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한국학 기초 낭독 49

역사회복 2026. 4. 14. 08:36

https://youtu.be/4BVwk6f3ZSU

 

(8) 가야의 멸망

 

이사부는 박이사부와 김이사부 둘이다

함창 김씨 족보에 의하면 고녕가야가 254년 신라에 병합된다. 신라가 고녕가야(함창) 바로 남쪽의 사벌국을 첨해왕(247-261) 때 병합하였으므로 함창 김씨 족보의 사실성을 인정할 수 있다.

고성이 502년 신라에 점령되었다는 고성 김씨 족보의 기록은 이사부가 지증왕 때 가야를 취하였다는 열전의 기록과 부합되지만 불합리한 측면도 있다. 502년은 신라가 금관국과 가야의 함안 지역을 병합하기 전이므로 이사부가 고성에 어떻게 갔는가가 문제되며, 이사부가 512년 울릉도를 병합하였다는 점에서 해군으로 공격하였다 가정해도, 그 경우 마희로 가야인을 속였다는 것과 부합하지 않는 측면이 있다. 또 이사부가 502년에 20대였다고 하더라도 562년 경에는 80대가 되는데, 80대의 이사부에게 대가야 반란 진압을 맡기는 것은 불합리하다.

505년 이사부가 실직주의 군주가 되므로 나이 문제는 502년 고성 점령만의 문제는 아니다. 지증왕 시기 활약한 이사부와 진흥왕 시기 활동한 이사부를 동명이인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법흥왕 시기인 514년에서 540년까지 이사부의 활동이 전무하다는 점에서도 이사부를 둘로 봄이 타당하다. 만약 이사부가 1인이라면 법흥왕 시기에 가장 많은 업적을 내야 할 것이다.

삼국사는 이사부(苔宗)를 김씨로 내물왕의 4대손이라 하는데, 삼국유사는 이찬(伊飡) 박이사부(朴伊宗)에게 울릉도를 토벌하라고 하였다 한다. 즉 성이 다르고 이름표기도 다르다. 고구려와의 국경으로 추측되는 실직주 군주가 되었다는 것은 어느 정도의 경륜이 있어야 하며, 505년에 연변관(㳂邉官)을 역임한 실직주 군주였고 512년에 하슬라주 군주로서 17등급 위계의 2등급인 이찬에 있었다는 것은 이미 그 당시에 적은 나이가 아니었음을 의미한다. 박이사부는 변방의 관직으로 추정되는 연변관(㳂邉官)을 역임했고, 변방의 관료로서 새 영토를 개척하는 등 현장관료의 성격이 강하고, 김이사부는 지소태후가 섭정하는 시기에 병부령이 되어, 국사 편찬을 건의하는 등 지소태후를 보좌하는 중앙관료의 성격이 강하다. 즉 둘은 수행했던 업무의 성격도 완전히 다르고 등용된 이유도 다르다. 화랑세기에 의하면 김이사부는 지소태후의 애인으로 6세 화랑 노리부(世宗)의 아버지이다. 이사부가 한 사람이면, 505년에 20대였다 하더라도 540년대엔 60대가 되어 지소태후의 애인이 될 생물학적 나이가 되기도 어렵다. 540년대에 40대라 하여도 562년 가야 반란 진압 시 60대가 되어 그나마 진압군 사령관이 될 수도 있는 나이가 된다. 진흥왕은 550년 고구려와 백제가 지친 틈을 타서 이찬 이사부에게 도살성과 금현성을 공격하라 하였다고 하는데 당시는 지소태후가 섭정하던 시기로 이사부는 병부령으로 형식상 지휘권자이고 실제 전투를 지휘한 장군은 따로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때 김이사부의 위계가 512년 울릉도 정벌 시 박이사부의 위계와 같은 이찬이다. 551년 진흥왕이 친정하면서 거칠부 등이 주도하게 되고, 김이사부의 역할은 거의 없다. 562년 가야 토벌은 큰 어려움이 없는 전쟁이었고 별 중요하지 않은 일에 보내진 것이다.

따라서 이사부를 2인으로 보아야 한다. 강단 유사사학이 성도 다르고 수행한 업무도 다르며, 나이를 고려하면 한 사람이 될 수 없는 두 이사부를 한 사람이라 우기는 것은 삼국사삼국유사를 신뢰할 수 없는 사서로 만들고, 법흥왕 시기에 이질부례가 활동했다고 창작한 일본서기의 내용을 한반도에서의 역사적 사실로 주장하기 위해서이다.

지증왕 때 활약한 박이사부가 512년 울릉도를 병합할 때도 계략으로 이겼다는 점에서 502년 고성 공격에서도 마희로 표현된 어떤 계책을 사용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따라서 이사부를 두 사람으로 보면, 고성 김씨 족보와 삼국사』 「이사부열전의 가야 점령 기사의 신뢰성이 인정되어 502년을 신라가 고성을 병합한 시기로 볼 수 있다. 이 경우 삼국사』 「이사부열전은 둘을 한 사람으로 본 실수가 있게 된다.

 

우륵의 신라 귀부

금관국(김해와 부산)532년 신라에 항복하여 병합되었다.

신라는 법흥왕(재위 514-540) 때 무력으로 가야의 함안을 병합하였다. 금관국을 병합한 후 함안을 병합하였을 것이므로 함안의 영토화는 532년에서 540년 사이에 있었다. 동국통감 동사강목 538년 함안을 병합하였다 한다.

화랑세기522년 가야 이뇌왕이 신라 여인과 혼인 후 얼마 되지 않아 이뇌의 숙부인 찬실이 왕위를 찬탈하였다고 한다. 찬실왕(贊失王)과 가실왕(嘉悉王)모두 기리다와 칭찬하다의 의미가 있으므로 같은 왕으로 보인다. 우륵은 가실왕의 명으로 12곡을 만들었다. 우륵은 신라가 532년 김해를, 538년 함안을 점령하여 가야의 영역이 고령과 합천만 남게 되자, 나라가 곧 망할 것으로 예상하고 진흥왕 때 신라에 귀부하였다. 진흥왕은 신라가 550년 도살성과 금현성을 점령한 후, 551년 충주로 순행하여 우륵의 연주를 들었다.

 

신라의 확장 과정에서 가야는 신라에 정복됨

백제는 지역에서는 고구려에 밀렸으나, 한반도에서는 여전히 한강 이북에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 523년 한수 이북에 쌍현성을 쌓았고, 523년 패수에서 고구려군을 물리쳤고, 548년 한수 이북의 독산성 전투에서 신라와 힘을 합쳐 고구려를 격퇴시켰다. 신라는 동맹을 깨고, 550년 도살성과 금현성을 차지하고, 553년 한강 북부의 백제 영토를 탈취하였다.

551년 신라가 고구려의 10군을 탈취할 때 백제도 고구려를 공격하여 고구려의 한성(현 평양)을 차지하고 평양(현 요양)을 향해 공격하였는데, 552년 신라가 백제의 점령지를 공격하여 백제는 평양(현 요양) 공격을 포기하고 한성(현 평양)도 신라에 탈취당하였다. 백제는 한강 이북의 고토 6군을 고구려로부터 회복하였지만, 553년에는 회복한 영토를 포함하여 한강 이북 전체를 신라에 탈취당하여 한강 북부를 상실하였다.

그런데 강단 유사사학은 어떤 근거도 없이 신라가 551년 고구려의 10군을 탈취할 때 백제가 한강 유역을 확보하였다고 문학을 한다. 자기 땅을 어떻게 회복하는가? 그리고 나서 그들은 일본서기를 근거로 553년 신라가 한강 이남 한성까지 확보하였다고 주장한다. 강단 유사사학이 근거라 주장하는 일본서기552년 기사는 이 해에 백제가 한성과 평양을 포기하였다. 그래서 신라가 한성으로 들어갔다. 현재 신라의 우두방, 니미방이다.”라 하는데, 여기의 한성은 고구려의 한성(현 평양)이다. 이 기사는 신라의 공격으로 백제가 평양(요양) 공격을 포기하고, 백제의 점령지였던 한성(평양)도 신라에게 빼앗긴 것을 의미한다. 한성이 백제에만 있는지 아는 강단 사이비들은 사료가 있어도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백제는 멸망 시까지 한강 이남을 상실하지 않았다. 이 때 신라가 한강 남쪽을 차지했다면 진흥왕 순수비는 한강 남쪽에 있어야 한다.

어떻든 신라가 동맹을 깨고 계속하여 백제를 공격하여 한수 이북의 백제 영토를 점령하였고, 가야도 김해와 함안을 연속하여 탈취당하였으므로, 백제와 가야는 연합하여 554년 신라의 관산성을 공격하였으나 대패한다.

신라는 555년 가야의 비사벌(합천)을 공격하여 완산주를 설치한다. 이는 가야에 대한 보복일 수도 있으나, 가야가 관산성을 공격하지 않았어도 진행되었을 것이다. 화랑세기는 문노가 557년 북가라를 정벌했다고 하는데, 이는 남아있던 영역인 고령을 점령했음을 의미한다. 이 때 가야가 실질적으로 멸망하였고, 신라의 지방으로 만들지만 않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삼국사562년 가야가 배반하여 토벌하였다고 하는데, 가야가 침략하였다고 하지 않고 배반하였다고 함은 가야가 사실상 557년에 멸망했음을 의미한다. 고령이, 반란이 진압된 후인 562년 대가야군이 되었다는 점에서 557년 고령을 점령한 후에 신라가 가야를 제후국으로서 대우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삼국사는 우륵의 음악을 전수 받은 신라인 세 명이 우륵의 12곡을 5곡으로 요약하였는데, 진흥왕이 이를 듣고 즐거워하자, 간관이 나라를 망친 음악으로 취할 수 없다고 하니, 진흥왕이 가야왕의 잘못이고 음악의 문제는 아니라 하면서 대악으로 삼았다고 한다. 이로부터 가야가 망할 때의 왕은 우륵 12곡을 작곡하도록 명한 가실왕임을 알 수 있다. 가야가 공식적으로 없어질 때의 왕은 도설지왕이므로 가실왕과 도설지왕 사이에 다른 왕은 없다고 추측할 수 있다. 신라가 557년 가야가 항복하자 554년의 반신라행위의 책임을 물어 가실왕을 폐위시키면서 도설지왕을 제후왕으로 즉위시켰을 것이다.

 

강단 유사사학은 가야 멸망 시엔 가야=임나를 부정

강단 유사사학은 가야에 대해선 철저히 삼국사삼국유사를 무시하고 가야=임나라고 소설을 쓰면서 일본서기의 임나를 가야라고 우기다가, 갑자기 가야의 멸망에 대해선, ‘가야의 반란이라는 문언은 무시하지만, 삼국사삼국유사를 참고하여 562년에 가야가 망했다고 한다. 일본서기에는 562년 이후에도 신라와 전쟁을 하고 고구려 백제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는 임나가 7세기 중반까지 꾸준히 등장하는데, 그들도 7세기까지 임나를 한반도에 존치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부담을 느꼈는지, 태세전환하여 562년 가야=임나가 망했다고 말한다. 그들은 가야=임나가 망한 후에도 일본서기에 왜 임나가 나오는지는 설명하지 않는다. 조선총독부 선생님들이 교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일제의 소설에 대한 무조건적 충성을 실증하기 위해 총독부 교시의 결함에 대해선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그들이 말하는 실증주의는 조선총독부에 대한 그들의 충성을 실증하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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