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한국학 기초 낭독 47

역사회복 2026. 4. 14. 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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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포상팔국의 가야와 신라 공격

 

삼국사삼국유사3세기 초 포상팔국이 신라와 가야를 공격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강단 유사사학은 아무런 근거도 제시하지 않고, 209년 전쟁은 가야의 내전이라 하고 212년 전쟁은 가야와 신라 간 전쟁이라 한다. 전쟁의 시기도 4세기부터 7세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견해를 과시한다. 전쟁의 원인에 대하여도 해상교역권과의 관련성 등 가공할 창조력을 발휘하여 역사소설 발전에 공헌하고 있다.

 

포상팔국은 전라도왜

강단 유사사학은 포상팔국이 가야에 속한 소국들이라 한다. 물론 이들의 주장은 근거가 전혀 없는 소설이다. ()는 강어귀를 의미한다. 따라서 포상팔국은 왜계의 마을이다. 영산강 유역에는 왜계의 고분인 옹관묘가 다수 발견된다. 따라서 포상팔국은 전라도왜이다. 전라도는 1세기 초에 이미 백제의 영토가 되었으므로 전라도왜는 백제의 주민이다. 4세기 말까지 신라를 육지에서 공격하는 왜는 전라도왜로서 공격의 지휘자는 백제이다.

그러나 3세기 초 전라도왜의 신라와 가야 공격은 식량을 얻기 위한, 전라도왜의 자체적인 공격이었다. 3세기 초 전라도왜는 208년 신라, 209년 가야, 212년 신라를 공격하였다. 관련 사료와 국사편찬위원회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 삼국사』 「신라본기208

13(208)여름 4월에 왜인이 국경을 침범해 왔으므로, 이벌찬 이음을 파견하여 병사를 거느리고 왜인을 막게 하였다.

() 삼국사』 「신라본기209

14(209) 가을 7월에 포상8국이 가라를 공격할 것을 모의하자, 가라 왕자가 와서 도와줄 것을 요청하였다. 왕이 태자 석우로와 이벌찬 이음에게 6부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가서 가라를 구해주라고 명령하였다. 석우로와 이음은 포상8국의 장군들을 죽이고, 포로로 잡혀갔던 6,000명을 빼앗아 돌려주었다.

() 삼국사』 「물계자열전

당시 포상의 여덟 나라가 함께 아라국을 치기로 하자 아라의 사신이 와서 구원을 청하였다. 이사금이 왕손 날음으로 하여금 이웃의 군과 6부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해주게 하니 드디어 여덟 나라의 군대를 패배시켰다. --- 3년이 지나 골포, 칠포, 고사포의 세 나라 사람들이 갈화성을 공격하였다. 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하고, 세 나라의 군사를 대패시켰다.

() 삼국유사』 「피은212, 215

물계자(勿稽子): 10대 나해왕 즉위 17년 임진년에 보라국·고자국·사물국 등 8국이 힘을 합쳐 변경에 쳐들어왔다. 왕은 태자 날음과 장군 일벌 등에게 명하여, 병사를 거느리고 그들과 겨루도록 하니, 8국이 모두 항복하였다. --- 10(20년의 착오) 을미에 골포국 등 3국의 왕이 각각 병사를 거느리고 갈화를 공격해 왔다. 왕은 친히 병사를 거느리고 그것을 막자, 3국은 모두 패하였다.

 

위 사료들에 의하면, 전쟁이 세 번 있었다. 전라도왜는 208년 신라를 공격하였다. 왜인이 국경을 침법하였다는 것은 육지에서 공격하였다는 것이다. 즉 전라도왜의 침입을 의미한다.

포상팔국 즉 전라도왜는 209년에는 가야를 공격하였다. 신라본기는 가라 공격을 모의했다 하고, 물계자열전은 아라 공격을 모의했다고 한다. 포상팔국에서 가야를 공격하면 함안(아라)으로 오는 것이 당연하므로 아라 공격과 가라 공격은 같은 말이다. 삼국사』 「신라본기는 가라 왕자가 도와줄 것을 요청하였다 하는데, 물계자열전에서는 아라의 사신이 구원을 요청하였다고 한다. 가야 왕자를 아라의 지방관으로 보면 이는 같은 내용이다. 아라의 지방관이었던 가야 왕자는, 급해지자 왕에게 보고하고 직접 신라에 가서 구원을 요청하였거나, 아니면 왕까지 아라로 와서 전쟁을 대비하는 상태에서 왕명으로 신라로 갔을 것이다. 삼국유사는 신라의 변경에 쳐들어왔다고 하는데, 이는 왜가 아라가야를 이기고 낙동강까지 전진한 상황을 말한 것으로 볼 수 있다. 208년에 신라는 전라도왜의 공격을 받았으므로, 가야의 구원요청에 신속하게 응하였을 것이다.

골포 칠포 고사포의 전라도왜는 212년 신라를 공격하였다. 삼국사에 의하면 가야가 2123월 왕자를 볼모로 보낸다. 삼국사는 포상 국가의 공격이 209년과 212년이라 하고, 삼국유사212215년이라 하는데, 삼국사는 가야 왕자가 볼모로 온 시기까지 기록하고 있고, 208년과 211년에 해충의 피해를 크게 입은 백제의 상황을 고려하면, 삼국사의 시기가 더 신빙성이 있다고 보인다.

 

포상팔국이 가야와 신라를 공격한 이유

2세기 말 3세기 초의 기후가 전쟁의 원인이다. 삼국사관련 기사와 국사편찬위원회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 신라본기193

10(193)6월에 왜인(倭人)들이 큰 기근을 겪어, 우리나라에먹을 것을 구하러 온 사람이 1천여 명에 달하였다.

() 신라본기196

13(196)3월에 가뭄이 들었다.

() 신라본기198

3(198)5월에 나라 서쪽에 홍수가 났으므로, 수해를 입은 주()와 현()에는 1년간 조()와 조(調)를 면제해 주었다.

() 신라본기200

5(200) 가을 7월에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보이고, 서리가 내려 풀이 죽었다.

() 신라본기201

6(201) 2월에 가야국이 화친하기를 청하여 왔다.

() 신라본기201

6(201)3월 정묘(丁卯)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큰 가뭄이 들어 중앙과 지방의 죄수들을 조사한 후 가벼운 죄수들은 죄를 없게 하여풀어주었다.

() 신라본기203

8(203) 겨울 10월에 말갈(靺鞨)이 국경을 침범해 왔다. 복숭아꽃과 자두꽃이 계절에 맞지 않게피었다. 많은 사람들이 전염병에 걸렸다.

() 신라본기205

10(205)가을 7월에 서리와 우박이 내려 곡식을 죽였고, 태백성(太白星)이 달을 가렸다.

() 신라본기208

13(208)여름 4월에 왜인(倭人)이 국경을 침범해 왔으므로, 이벌찬(伊伐湌) 이음(利音)을 파견하여 병사를 거느리고 왜인을 막게 하였다.

() 신라본기210

15(210) 봄과 여름에 가뭄이 들어서, 왕이군읍(郡邑)에 사신을 보내 감옥에 갇힌 죄수들을 살펴보고,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지은 자들을 제외한 모든 죄수들을 죄를 없게 하여풀어주었다.

() 신라본기212

17(212)여름 5월에 많은 비가 내려 백성들의 집이 떠내려가고 무너졌다.

() 백제본기208

43(208) 가을에 누리[]가 생기고 가물어 곡식이 잘 자라지 못하였다. 도적이 많이 생기자 왕이 위무하고 안정시켰다.

() 백제본기211

46(211) 가을 8월에 나라 남쪽에서 누리가 곡식을 해쳐 백성들이 굶주렸다.

 

삼국사는 신라의 기후를 자세히 기록하는데 이는 한반도 서쪽에도 큰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신라는 가뭄과 한해(寒害) 등 기상이변으로 201210년 죄수들까지 풀어준다. 백제는 208년과 211년 해충의 피해까지 입는다. 이로 인해 도적이 많이 생기고 백성들이 굶주렸다.

201년 가야가 신라에 화친을 요청하는데, 이는 2세기 말에 신라 가야 모두 흉년이 들어, 두 나라 모두 어려운 사정임을 알고 전쟁을 그치고 내정에 집중하자고 한 것으로 보인다. 193년에 신라로 먹을 것을 구하러 온 왜도 전라도왜이다. 백제는 영토가 넓어 한반도 남부의 전라도왜까지 챙기지 못하다보니 전라도왜가 배고파서 자구책으로 208, 209, 212년 전쟁을 일으켰을 것이다. 전라도왜는 208년 신라를 공격하여 실패하자 209년에는 가야를 공격한 것으로 추정된다.

 

강단 유사사학의 소설

강단 유사사학이 어떤 근거도 없이, 전쟁의 시기를 가야=임나에 맞추기 위해 4세기부터 7세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주장하는 것은 소설의 일부에 불과하다. 그들의 탁월한 소설은 계속된다.

강단 유사사학은 포상팔국을 마산 함안 고성 지역의 나라라고 하여 209년의 전쟁을 가야의 내란으로 본다. 그러나 보라 고자 사물 골포 칠포 고사포가 가야인 근거는 전혀 없고 가야의 내란이라 기술하는 사서도 없다. 그들은 일제 유사사학의 독창적 발명품인 음상사 기법을 적용하여 음소가 하나라도 비슷하면, 포상팔국을 가야의 영역에 위치시킨다.

가야의 내란으로 보면서도 보라국을 나주나 섬진강 하구로 보아 가야 강역과 일치하지 않는 말을 한다. 삼국유사에서 가야 강역이 서북은 지리산, 서남은 창해라 하므로, 하동은 가야의 영역이 아니었다. 하동이 영역이었다면 서쪽으로 섬진강까지라 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야가 신라와 다투는 와중에 백제의 강역을 침범하기는 어려우므로 가야의 영역이 백제 쪽으로 확장되는 것은 어렵다. 강단 유사사학의 주장에 논리는 전혀 없다.

아라가 가야의 지방인데, 강단 유사사학은 아라를 착오로 보아 안라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러한 주장은 일본서기열도의 마을국가인 안라를 한반도 남부에 있었다고 조작하여 가야=임나를 만들기 위한 것이다. 김태식은 더 뛰어난 상상력을 발휘하여 아라가 주도한 8국이 가라를 공격하였다고 한다. 아라가 공격 받았다는 사료는 김태식의 조선총독부 소설을 향한 충성심 앞에서는 휴지조각이 되어버린다.

강단 유사사학은 난데없이 이백년도 더 전에 辰韓에 합병된 지역의 弁韓이 한반도 남부에 등장하여 가야를 공격하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변한이 포상팔국으로 변신하는 SF 시공 초월 역사 스릴러물을 창시한 그들의 업적은 영원히 빛날 것이다.

물계자열전에 의하면 신라는 가까운 군의 병사를 출동시켰는데, 강단 유사사학은 당시 군이 설치되지 않았다고 하면서, 신라에 복속되었지만 자치적인 성격을 유지하고 있던 소국들의 군사라고 주장한다. 전혀 근거가 없는 이 주장도 가공의 야마토왜가 한반도 남부에 강력한 영향을 주는 소설을 작성하기 위한 기초이다. 고대국가 신라가 없어야 조선총독부의 가야=임나 소설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강단 유사사학은 212년 신라에 전쟁을 일으킨 포상삼국도 가야의 소국으로 함안, 마산, 고성 지역의 나라라 한다. 그들의 주장대로 209년 전쟁이 가야의 내란이었다면, 신라가 209년 포상팔국에 대승을 하여 가야 왕권을 지켜주었으므로, 내란 세력은 제거되었을 것이다. 3년만에 내란 세력이 부활한다는 것은 그들의 소설 속에서나 가능할 것이다. 설사 내란 세력이 부활하였다 가정하더라도, 내란 세력은 약한 가야의 중앙정부를 공격할 개연성이 크므로 그들 소설의 탁월함은 전혀 달라지지 않는다. 강단 유사사학의 소설적 상상력은 정말로 범상스럽다.

강단 유사사학은 전쟁의 원인에 대하여도 해상교역권과의 관련성 등 가공할 창조력을 발휘한다. 해상은 백제가 지배하고 있어 백제의 주민인 왜와 가야가 다툴 대상도, 가야가 내부적으로 다툴 대상도 아니다.

전쟁의 결과에 대해, 강단 유사사학은 가야가 국가임을 부정하므로 김해는 약해지고 가야의 다른 지역과 신라는 강해졌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고고학 발굴성과를 근거로 그에 반대하기도 한다. 가야가 약해진 곳을 굳이 따진다면 김해가 아닌 전쟁터였던 가야의 아라지방이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어느 나라가 멸망하였거나 멸망할 정도의 피해를 일으킨 대규모의 전쟁도 아닌데, 전쟁이 야기한 사회적 변화를 고고학 발굴성과로 알 수 있다는 그들의 능력도 놀라울 따름이다.

 

강단 유사사학 포상팔국 소설의 목적

강단 유사사학이 전라도왜의 가야와 신라 공격과 관련하여 날조의 강도를 높이는 이유는 임나선생님을 영접하는데 전라도왜가 결정적 장애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포상팔국이 전라도왜임을 숨겨야 거기에 CE 9년에 돌아가신 마한이 사후세계를 전라도에서 영위할 수 있고, 전라도왜와 가야·신라의 전쟁이 아니라 돌아가신 변한이 시공간을 초월하여 한반도 남쪽에서 부활하여 가야의 내분이 있어야 가야가 없는 듯하게 된다. 결정적으로, 403년 이후에 열도의 나라로 끌려가서 고구려계 국가의 지배를 받고 6세기에는 백제의 주민으로서 백제 파견관료인 왜왕의 지배를 받는 전라도왜를 숨겨야 한반도를 지배하는 가공의 강력한 야마토왜가 성립할 수 있다. 그들이 주장하는 강력한 고대국가인 야마토왜(大倭 大和)의 실체는 신라의 전쟁포로였고, 광개토대왕의 명령으로 나라로 끌려가서 나라의 개척에 사역된 피지배민에 불과했음을 숨기기 위해 강단 사이비들은 진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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