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한국학 기초 낭독 46

역사회복 2026. 4. 13. 20:01

https://youtu.be/B6Q5tBYygA8

 

(4) 가야의 영토와 경제

 

가야의 남쪽 경계는 대마도

『삼국유사』 「가락국기」는 가야의 영토를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東以黄山江, 西南以濸海, 西北以地理山, 東北以伽耶山, 南而為國尾.

(동은 황산강으로, 서남은 창해로, 서북은 지리산으로, 동북은 가야산으로, 남쪽에선 국미로 하였다)

 

가야의 영역을 기술하는 문장이므로 國尾를 고유명사로 보아야 한다. 『태백일사』 「고국려국본기」는 임나가 대마도이고 국미성은 임나의 치소라 한다. 따라서 가야 건국 시부터 대마도까지 가야의 영토였고, 임나가 한반도의 가야가 아닌 열도로 진출한 가야인의 거주지에 대한 명칭이었음도 알 수 있다. 대마도는 가야 이래 구한 말까지 계속 우리 영토였으나 현재까지 일본이 반환하지 않고 있다.

 

가라와 임나는 가야인이 열도에 만든 마을들

國尾는 ‘가라오’나 ‘가리오’로 읽을 수 있는데, 대마도 서북쪽에 가리오(狩尾)가 있고, 吉備의 長島에도 가라오(韓尾)가 있어, 대마도에서 구주와 본주까지 가야인들이 진출하면서 임나라는 지명도 대마도에서 吉備까지 이동하였다고 추측할 수 있다. 가야인들은 열도로 이주하면서 마을 이름을 가야라 하는 경우도 있었고 임나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왜5왕중 무가 자칭한 칠국제군사의 7국이 왜·백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이고, 남조 왕조가 왜왕에게 준 육국제군사의 6국이 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이므로, 열도 내에서도 가야와 임나는 다른 마을국가였다.

 

가야의 지방 명칭

가야의 수도는 김해(대가야)이고, 지방 5가야는 아라가야(함안), 고녕가야(함창), 고령가야(고령, 합천), 성산가야(고령 성산면), 소가야(고성)이다. 합천은 『삼국유사』에 가야로 명시되지 않았지만, 가야의 비사벌로서 고령가야에 속한다. 신라가 555년 가야의 비사벌을 점령하여 완산주라 하였고, 완산주는 565년에는 대야주로 되었고, 대야주는 경덕왕 때는 강양군, 고려 때는 합주(陜州)인데, 합주는 지금의 합천이다. 성산가야는 고령 성산면이다. 신라의 일리군은 경덕왕 때 성산군으로 고쳤고, 고려 때는 가리현이다. 고려 경산부 가리현은 조선 성주 가리현이 되었는데, 가리현은 주 남쪽 59리에 있으므로 현재의 고령군 성산면이다.

일부 견해는 성산가야를 현재의 성주군으로 비정한다. 그러나 성주읍 성산리 일원에 분포되어 있는 성산동고분군의 묘제나 출토유물은 가야적인 것이 아니라 신라적인 것이다. 주보돈은 성주가 4세기 초반에 변한으로부터 가야가 되므로 4세기 무렵 성주는 일단 가야 세력의 일원이고 “늦추어 잡아도 5세기 후반 이전의 어느 시점에는 신라에 편입되었다고 추정하여도 무방하겠다”고 소설을 창작한다. 한반도에 있지도 않았던 변한이 가야가 된다는 것, 5세기 후반 이전에 성주가 신라에 병합된다는 것 모두 객관적 근거가 없는 그의 생각일 뿐이다. 신라에 병합된 함창, 고성, 김해는 가야계 김씨가 있으나, 성주의 경우 가야계의 ‘성주 김씨’가 없다는 점에서 가야의 영역이었다고 보기 어렵다. 따라서 성산가야는 고령의 성산면으로 봄이 타당하다.

 

가야의 무역

신라는 경상도로 옮기면서 백제로의 복속을 거부하고 64년부터 전쟁을 하는데, 가야는 42년 건국한 이후 백제와 싸우지 않는 것으로 보아, 가야는 백제의 우월적 지위를 인정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백제는 가야의 무역을 독점하게 된다. 가야는 가야계가 진출한 열도와 가야의 무역만을 할 수 있었다.

강단 유사사학은 가야가 3세기에 낙랑군과 왜의 중계무역을 하였는데, 낙랑군이 없어지자 가야가 변화하였다는 등 탁월한 상상력에 기반한 노벨문학상감 집단 창작소설을 제작하였는데, 가야가 낙랑과 왜의 중계무역을 하였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중국과의 무역은 백제를 통해서만 가능하였다. 가야와 열도와의 무역도 백제가 3세기말 열도로 진출하면서부터는 백제가 독점했다고 보아야 한다. 백제는 무역세력이므로 약소국에 무역권을 침해당하려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야의 제철 기술은 弁辰이나 辰韓과는 무관하다

『삼국지』는 弁辰이 철을 생산하여, 『후한서』는 辰韓이 철을 생산하여, 주변 지역에 공급하였다고 한다. 강단 유사사학은 이 두 사서의 기사를 가야의 제철과 관련된 것으로 본다. 그러나 두 사서의 기사는 韓 지역의 신라와 관련된 것이다. 辰韓 여섯 마을이 신라고 되고, 弁韓 마을과 신라가 합병하여 弁辰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弁辰(신라)이 CE 59년 韓 지역에서 경상도로 왔으므로 韓 지역 신라의 제철기술은 신라의 이전과 함께 한반도의 신라로 왔고, 김수로 김알지 집단의 제철 기술은 가야와 계림으로 전해졌다. 물론 토착세력도 제철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5) 가야 불교 전래 시기

 

가야는 김씨와 허씨의 이주민 세력이 건국하여 건국 시부터 이들에 의해 불교가 들어왔다. 『삼국유사』 「금관성파사석탑」조는 수로왕 시부터 절이 있었고 불법을 받들었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강단 사이비들은 가야의 건국을 3-4세기 이후로 만들어서 가야를 야마토왜가 강력한 영향을 준 임나로 만들기 위해 김수로와 허황옥을 부정하고, 「금관성파사석탑」조를 날조하여 해석하면서, 가야로의 불교 전래 시기는 4-5세기라고 주장한다. 조선총독부 소설에 충성하기 위해 강단 사이비들이 자신들의 두 눈을 후벼파면서 「금관성파사석탑」조를 날조 해석하는 살신성인을 아래에서 감상하여 보자.

 

김씨 집단에 불교도가 있었다

김수로 세력은 김일제가 투후로 봉해진 산동 지역을 근거지로 하였고, 新나라 정권의 핵심 세력이었다가 왕망의 몰락으로 한반도로 피신한 집단이었다.

수로왕은 43년 도읍을 정하면서 16나한과 칠성을 언급했는데 이는 수로왕이 불교신자였을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전한 시 서역과 교역으로 연결되어 서역 불교가 전래되었으므로 수로왕이 불교를 접할 기회는 충분했기 때문이다. 강단 유사사학은 수로왕의 언급을 일연의 윤색으로 보아 불교와의 관련성을 부인한다. 그러나 일연은 역사서를 집필한 것이므로, 일연이 승려라는 이유만으로 역사서의 내용을 문언과 달리 추단하는 것은 성급한 판단이다. 물론 16나한과 칠성이 후대에 나타난 개념이지만, 수로왕의 불교적 언급을 역사를 기록한 후대에서 불교의 더 정치한 개념으로 기술하였을 수도 있으므로 용어만으로 후대의 윤색으로 주장할 수는 없다.

더구나 『삼국유사』 「어산불영」조는 고기(古記)를 인용하여, 가야 건국 후 기후가 불순하여 4년간 흉년이 들었을 때, 처음에는 주술을 시도하였으나 성과가 없었고, 김수로왕이 부처께 청한 후에야 재해를 사라지게 할 수 있었다고 기술한다. 처음에 주술을 사용하였다는 것은 토착 세력의 토착 신앙에 의하였다는 것으로 추정된다. 토착적 방법이 실패하자 이주민들의 신앙인 불교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이 기사는 「가락국기」 도읍기사와 함께, 김수로왕이 불교 신자였거나, 적어도 김수로왕과 함께 온 이주민들 중에 상당한 수의 불교 신자가 있었을 가능성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당시는 허씨 세력이 도래하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허씨 집단은 불교도였다

「가락국기」 허황옥 도래 기사는 ‘建武二十四年戊申七月二十七日’이라 하여 CE 48년 7월 27일을 허황옥 도래 시기로 명시하고 허황옥의 입국 과정을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강단 유사사학은 이 기사의 역사성을 부인하고, 이 기사는 해운을 이용하여 가야에 와서 漢系 문물을 교역하던 낙랑 상선의 도래와 관련된 염문이라고 노벨 문학상감 역사 소설을 창작한다. 그들의 우수한 문학성에 경의를 표한다.

허황옥은 「가락국기」의 세세한 기사 외에도, 왕후사 기사, 질지왕 기사와 「금관성파사석탑」조에도 기술되어 있어 그 실존성과 역사성을 부인하기 위해선, 『삼국유사』와 동등하거나 더 높은 사료 가치를 지닌 증거에 의해야 함에도 강단 사이비들은 아무런 증거를 제시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조선총독부 교시에 따르면서 집단적으로 어거지를 쓰는 것이 증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거룡은 허황옥의 이동경로를 남인도 타밀-차마고도-보주-가야로 보면서 허씨 집단에 의한 타밀 불교의 가야 전래 가능성을 주장한다. 필자도 허씨집단이 보주에서 남인도와 한나라 간 무역에 종사한 타밀인(인도 남부로 이주한 조선인)들로, 47년 반란 실패로 후한에 의해 양자강변 무한으로 축출되자, 새로운 근거지를 찾아 김수로와 연합한 세력이라 생각한다. 허씨집단이 타밀인으로 타밀과 漢나라의 무역에 종사하였고, 파사석탑을 가져왔으므로 불교도였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금관성파사석탑」조의 명시

『삼국유사』 「금관성파사석탑」조는 수로왕과 허황옥이 나라를 다스리던 시기에 가야에서 불교를 믿었다고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금관성파사석탑」조는 당시에도 불교를 믿었지만, 「가락국기」에 당시에 절을 창건했다는 기록이 없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어, 가장 중요한 가야 불교 전래의 근거가 된다. 또한 파사석탑이라는 실체적 증거까지 남아있다. 너무나 명백한 증거가 있자 강단 사이비들은 사료를 날조한다.

 

강단 사이비들의 살신성인

『삼국유사』 「금관성파사석탑」조는 ‘然于時海東末 有創寺奉法之事 蓋像敎未至 而圡人不信伏. 故本記無創寺之文’이라 기술하고 있다. 강단 사이비들은 ‘海東末’의 末을 未로 판독하고, ‘像敎’를 ‘불교’로 해석하여 수로왕 시의 가야 불교 전래를 부정한다.

‘海東末’의 末을 未로 판독하기는 어렵다. 어떤 판본도 未로 헷갈릴 만한 표기를 하지 않고 있다. 더구나 바로 뒤에 ‘蓋像敎未至’의 未가 바로 나오므로 未를 末로 오각하였을 가능성을 상정하기도 어렵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에 나오는 원문의 이미지를 직접 보면 그들이 자신들의 눈을 후벼파는 살신성인을 확인할 수 있다. 아래 왼쪽 두 사진은 규장각본의, 오른쪽 두 사진은 고대 소장본의 원문 이미지이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삼국유사』에서 ‘像敎’는 「파사석탑」조 외에 「전후소장사리」에서 두 번 사용되는데, 851년 오월국에서 대장경을 가져온 사건에 대해, 대장경을 상교라 언급하고 있으므로, 상교를 불교라 할 수 없고 불상이나 경전이라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강단 유사사학은 末을 未로 판독하고, ‘像敎’의 의미를 불교로 보아 「금관성파사석탑」조 해당 문언을 “이때에 해동에 아직 절을 세우고 불법을 받드는 일이 없었다. 대개 불교가 아직 들어오지 못하여 토착인들이 신복하지 않았으므로 본기에는 절을 세웠다는 기록이 없다.”라고 날조 해석한다. 그들의 해석은, 절을 세우지 않았다는 것을 불필요하게 두 번이나 말하게 되며, 불교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본기에 절을 세웠다는 기록이 없다’는 말을 할 필요가 없게 되므로 문맥이 맞지 않는다.

이 문구의 올바른 의미는 “이때에 해동 끝에 절을 세우고 불법을 받드는 일이 있었으나, 대개 불상이나 경전이 전해지지 않아, 토착인들이 신심을 갖고 복종하지 않았으므로, 본기에는 절을 세웠다는 문언이 없다.”이다. 올바른 해석에 의하면 이때도 절을 세우고 불법을 받들었지만 토착인들이 신봉하지 않아 본기에 절을 세웠다는 문언이 없다고 하므로, 불필요한 말도 없고 문맥도 맞는다. 즉 창사봉법의 절은 이주민 집단의 일부인 소수 불교도를 수용하는 소규모의 절이었으므로 역사서에 기록할 만한 규모의 절이 아니었을 것이다. 토착인들이 신봉하지 않아서 대규모의 절을 짓지 않았으므로 역사서에는 절을 세웠다는 문언이 기록될 수 없었을 것이다. ‘然于時海東末 --- 故本記無創寺之文’ 뒤에 ‘逮第八代銍知王二年壬辰置寺於其地(제8대 질지왕 2년 임진년에 이르러 그 땅에 절을 세웠다)’라고 이어지는데, 여기서 ‘其地’는 ‘소규모의 절이 있던 곳’이다. 즉 일연은 절이 있었고 불법을 받들었음을 전제하고 있다.

창사봉법은 있고 상교(불상이나 경전)는 전해지지 않았다는 말은 모순이라는 반론도 가능하다. 김수로왕은 건국 기사에서 보이듯 평화롭게 왕위에 올랐으므로 불교를 토착인들에게 강요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신앙의 변경은 시간이 걸리는 사건이다. 따라서 불교 전래 초기 토착인들이 불교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사실을 일연이 완곡하게, 상교가 전해지지 않아 토착인들이 신봉하지 않았다고 표현하였을 것이다.

일연은 수로왕 시에도 불교가 전래되어 절이 있었지만 절을 창건했다는 문언이 「가락국기」에 나타나지 않은 이유를 설명하는데, 강단 유사사학은 글자를 날조하고, 단어의 의미도 날조하여 가야에 불교가 전래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가장 백미는 ‘海東末’의 末을 未로 읽는 그들의 뛰어난 시각이다. 얼마나 심오한 혜안을 가져야 그런 경지에 오를 수 있을지 경외감이 앞을 가로막을 뿐이다.

 

末을 未로 날조하는 정도는 일상이다

그들의 소설 가야사에선 末을 未로 바꾸는 정도의 날조는 일상적인 것이다. 이들이 이렇게 하는 이유는 가야가 1세기에 건국되었고 당시에 불교가 전래되었다는 『삼국유사』를 인정하면 가야=임나 주장이 무너지므로, 조선총독부의 지령에 따라 어떻게든 1세기의 가야 건국과 불교 전래를 부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날조는 그들의 고의성을 입증한다. 그들의 행태는 조선총독부 소설에 대한 무한한 충성을 상정하지 않으면 결코 이해될 수 없다.

 

소승불교 전래

가야를 포함한 열국 초기 소승불교가 전래되었다. 관련 사료는 다음과 같다.

(ㄱ) 최치원의 「지증대사탑비」

그 교(불교)가 일어나는데 비파사(毗婆娑)가 먼저 이르렀으니 곧 사군(四郡)에 사체(四諦)의 법륜이 달렸고, 마하연(摩訶衍)이 뒤에 이르니 한 나라에 일승(一乘)의 거울이 빛났다.

(ㄴ) 『신라고기』를 근거로 한 민지의 「금강산 유점사 사적기」

종은 바다를 떠가며 여러 나라를 거쳐 금강산 동쪽의 안창현(安昌縣) 포구에 닿았는데, 이때는 곧 신라 제2대 남해왕(南解王) 원년, 즉 한나라 평제(平帝) 원시(元始) 4년(기원후 4년)이었다.

(ㄷ) 『삼국유사』 「금관성파사석탑(金官城婆娑石塔)」

금관(金官) 호계사(虎溪寺)의 파사석탑(婆裟石塔)이라는 것은 옛날에 이 읍이 금관국이었을 때 시조 수로왕(首露王)의 비인 허황후(許皇后) 황옥(黃玉)이 동한(東漢) 건무(建武) 24년 무신에 서역의 아유타국(阿踰陁國)에서 싣고 온 것이다. --- 수로왕이 그를 맞이하고 함께 나라를 다스린 것이 150여 년이었다. 이때에 해동 끝에 절을 세우고 불법을 받드는 일이 있었으나, 대개 경전이 전해지지 않아 토착인들이 신복하지 않았으므로 본기에는 절을 세웠다는 문언이 없다.

 

비파사는 소승불교이고 마하연은 대승불교이다. 따라서 「지증대사탑비」에 의하면 신라에 대승불교가 들어오기 전에 소승불교가 들어왔다. 「금강산 유점사 사적기」의 내용은 석가가 열반한 후 문수보살이 사람들을 시켜 53개의 불상을 주조하게 한 후 종에 넣어 바다에 띄웠는데, 혁치(赫熾)가 왕으로 있던 월지국(月氏國)에 도착했다가 다시 여러 나라를 거쳐 금강산 동쪽의 안창현(安昌縣) 포구에 닿았는데, 이때가 신라 제2대 남해왕(南解王) 원년이라는 것이다. 신라는 남해왕 시 韓 지역에 있었다. 전한 시 서역과 교역으로 연결되어 서역불교가 전래되었으며, 신라는 낙랑군 동부도위로부터 침략을 받기도 하므로 韓 지역의 신라가 불교를 접할 가능성이 매우 크며, 얼마 되지 않아 불교식 왕호인 파사왕(婆娑王:재위 80~112)이 나타나므로 「금강산 유점사 사적기」의 CE 4년에 신라가 불교에 접했다는 기사는 매우 신빙성이 크다. 「금강산 유점사 사적기」에 의하면 남해왕이 이 때 불교신자가 되었다. 신라가 CE 59년 겨울 한반도로 이전하며 한반도에도 자연스럽게 불교가 전래되었을 것이다. 허씨집단은 CE 48년에 가야로 왔고 긴 항해의 안전을 위해 파사석탑을 가져 왔으므로 이들과 함께 불교가 전래되었음은 당연하다. 당시의 불교는 대승불교 출현 전이므로 소승불교이다.

김수로 김알지는 新에서 왕망의 혈족으로 상당히 중요한 관직을 수행하였을 것이므로 이들이 당시 전한 때부터 전래되었던 불교를 모를 리가 없다. 고구려는 前漢 내에서 漢인과 함께 살며 건국했으며 漢과 전쟁하며 포로도 잡아갔으므로 불교에 접할 기회는 신라보다 많았을 것이다. 백제도 타밀인과 접촉하고 동남아와도 무역하였으며, 신라처럼 낙랑군 동부도위와도 접촉하였으므로 불교와 접촉하였을 것이다. 삼국이 건국한 지역이 하북성이므로 불교와의 접촉 시기에서 漢과 큰 차이가 있을 수 없다. 열국의 사람들이 다양한 형태로 불교와 접촉할 기회가 있었으며, 가야와 신라의 지배층이 중국에서 한반도 남부로 이동하였으므로, 한반도 동남부에서도 김수로 김알지가 이동해온 20년대 이후로는 불교와 접할 수 있었다. 한반도 북부와 한반도 서부는 고구려 백제의 영토이므로 불교와 접할 수 있었다. 종교의 전파라는 것은 접촉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이므로 접촉이 있었다면 전래되는 것이 당연하다.

강단 유사사학은 대승불교 승려의 왕실 파견만을 불교 전래로 보고 있어 『삼국유사』와 「지증대사탑비」가 말하는 소승불교의 전래를 설명하지 못함은 물론 대승불교의 전래 시기도 밝히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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