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한국학 기초 낭독 43

역사회복 2026. 4. 13. 18:35

https://youtu.be/gpU8gUIDikg

 

(7) 고구려와 북주

 

온달의 북주 침략 격퇴

북주가 우문옹(무제) 시 요동에 침입하였는데, 배산(拜山)의 벌판에서 온달의 활약으로 크게 이겼다. 위가 북제와 북주로 나뉘고 북주가 577년 북제를 멸한 후 고구려와 경계를 마주하여 북주가 침입하였다. 『태백일사』는 갈석산과 배찰산에 가서 토벌하고 유림관까지 추격했다고 하며, 유림은 산서성과의 경계라 한다. 배산의 벌판은 갈석산에서 남쪽으로 더 간 배찰산 부근, 보정시 남쪽의 벌판으로 추정된다. 유림관은 임유관의 다른 명칭으로 추정되며, 산서성과의 경계이므로 보정시 남쪽에서 서쪽으로 산서성으로 가는 도정의 태행산맥에 있는 관으로 추정된다. 북주나 수는, 상곡은 고구려의 영토이므로 상곡과 거용관으로 나올 수 없고, 거용관에서 직선거리로 50km 남쪽의 임유관을 통해 요동으로 나와 고구려의 남쪽 지역을 침공하였다.

 

[임유관과 당시 요하]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8) 고구려와 수

 

고구려, 양견에게 현실 자각 타임 선사

양견(수문제)이 597년 “王은 遼水의 폭이 長江과 어떠하며, 高麗의 인구가 陳國과 어떠하다고 보는가?” 하면서 고구려를 위협하는 문서를 보내자, 고구려는 598년 濊 군사 일만으로 요서(당하 상류 남부)를 공격하였다. 濊병은 황하 하류 예인이나 494년 고구려에 투항한 예부여의 예인이다. 고구려의 공격에 영주총관 위충이 대응하자 후퇴하였다. 양견은 예상치 못한 고구려의 치고 빠지기에 당황하고 분노하여, 준비가 안 된 상태로 서둘러서 6월 양량과 왕세적을 장군으로 30만을 임유관을 통해 고구려로 보내고, 식량은 배로 황하로 보내려고 하였는데 강이식은 이를 눈치채고 보급선을 파괴하고 성을 지키면서 시간을 끌자 수의 병사들은 굶주려 병에 걸리는 상태가 되었다. 9월 隋군이 더이상 견디지 못하고 후퇴하자, 고구려군은 임유관까지 추격하여 隋군을 대부분 몰살시켰다. 이후 양견은 고구려와 전쟁하려 하지 않았다.

 

고구려, 양광에게 몰락 선사

양광은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1년 동안 전쟁준비를 한 후, 612년 113만의 군대를 동원하여 당하를 건너 요동성 등 국경 부근의 여러 성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고, 장안성(금주)으로 바로 보낸 수군도 패수(소릉하)에서 대패했고, 별동대 30만을 장안성에 보냈으나 보급 실패로 굶주려서 후퇴하다 살수(연태하)에서 거의 다 죽었다.

본고의 위치 비정은 당시의 양광 조서로 입증된다. 양광은 “고구려의 작은 무리들이 혼미하고 공손하지 못하여 발해와 갈석 사이에 모여 들면서 요(遼) 예(濊)의 경계를 자주 잠식하였다.”라고 하므로, 갈석산이 낭아산이고, 요수가 당하이고, 왜(예)가 황하 어귀 해안가에 거주하는 것으로 보는 본고의 위치 비정과 양광의 언급은 일치한다. 양광은 “발해를 덮어 우레와 같이 진동하고 부여를 지나면 번개같이 쓸어버릴 것이다.”라고 하는데, 본고에서 왜부여를 이 지역에 위치시킨 것과 일치한다. 부여를 예부여로 보지 않는다면 양광의 말은 이해될 수 없다. 동부여는 고구려의 북쪽이므로 고구려를 지나야 갈 수 있기 때문이다. 24군과 별동대 9군이 가는 길 이름이 고구려 유주 각 군현의 명칭이다. 옥저에 대해선 본고에서 남옥저가 이 지역에 있다고 하였고, 임둔도 본고에서는 韓 지역이라 하였다. 건안 남소는 이 지역의 고구려 성 이름이고, 조선 숙신은 이 지역이 옛 조선의 영토이기 때문이다. 서진은 모용황을 조선공으로 봉하였다. 명해는 낙랑군의 해명현이다. 답돈은 후한 말 요서·요동·우북평의 오환 집단 대인의 이름인데 고구려의 지명으로 남겨진 듯하다.

양광은 613년에도 고구려를 침공하였으나, 양현감의 반란으로 돌아갔고, 614년에도 공격하였으나 수나라 내부 사정이 혼란하였고, 영양왕이 항복하고 곡사정을 보내자 돌아갔다.

 

(9) 고구려와 당

 

이세민은 철저하게 준비

645년 이세민은 고구려로 갔다가 겨우 죽지 않고 도망쳤으니 양견이나 양광보다 더 지독한 패배를 당했다. 현재 남아 있는 사료로 이 전쟁의 진실을 알 수 없다. 고구려측 사서는 전해지지 않고 중국측 사서는 이세민이 날조한 거짓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세민은 수나라 꼴을 당하지 않기 위해, 영류왕을 협박하여 봉역도를 받아내고, 629년부터 636년까지 수서를 편찬하여 수의 실패원인을 연구하고, 641년 간첩 진대덕을 파견하여 고구려를 염탐하였다. 또 643년부터 군량을 확보하였는데 『책부원귀』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당)태종 정관17년(643년) 요동을 정벌하려 하였다. 먼저 태상경 위정을 하북 제군에 보내 군량을 징발하여 영주에 저장하였다. 또 태복소경 소예에게 명하여 하남의 여러 주로부터 양곡을 바다를 통해 옮기도록 하였다. 18년 8월에 이르러 소예가 “해안가 고대인성(古大人城)은 황현 동쪽 23리이고, 고구려 남쪽 470리에 있는데, 지역이 식수가 풍부하고, 산과 섬이 접하여 군량저장과 반출이 매우 편하다”라고 하여 그에 따랐다. 이에 황하 남쪽 지역으로부터 쌀 운반은 수상과 육상운송을 연결하고 바다를 거쳐, 군량 모두를 고대인성에 저장하였다.

고대인성은 산동성 북부의 해안가로서 韓 백제 동쪽으로 추정되는데, 고구려 남쪽 470리라 하므로 고구려 남쪽 경계를 본고와 같이 당하와 韓 북부로 보지 않는다면 이 거리는 이해할 수 없다. 또 당시 고구려와 접한 당의 지방명은 영주임도 알 수 있다. 수가 요서를 공격 받았을 때도 영주총관에서 대응했으며, 이세민이 하북의 군량을 보관하는 곳도 영주이기 때문이다. 이세민은 모든 준비를 마친 후, 수나라 때의 고구려 공격 유경험자인 정천숙의 의견을 물었는데, 그가 부정적으로 말하자, “지금은 수나라 때와 비교할 수 없소. 공은 단지 듣기만 하시오”라고 말하며 자신의 준비가 완벽하고 승리할 것이 분명하다고 확신하였다.

 

이세민의 요택 사기

이세민의 공격경로에 이상한 점이 있다. 隋군이나 당군의 다른 부대는 고구려 공격 시 요택을 지나가지 않았다. 그런데 이세민만 요택을 지나간다. 사람과 말이 통행할 수 없는 진흙이 200리라면 피해가야 한다. 80km를 흙을 덮어 다리를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가능하더라도 적을 공격하기도 전에 아군의 힘을 다 빼놓는 무식한 작전이다. 또 다른 부대도 요택을 통과해야 했다면 왕의 군대가 오기 편하도록 미리 다리를 만들었을 것이다. 급할 것도 없는데 왜 요택을 피하여 진군하지 않았는가? 전쟁 전 요택으로 갔다는 것은 이세민이 쫓겨서 도망칠 때의 경로를 속이기 위한 것이다. 요택은 없었다. 요택은 이세민이 만든 가공의 지명이다.

이세민은 645년 10월 요택-영주-임유관의 경로로 도망쳤다고 한다. 이 경로는 불가능하다. 요하 바로 건너에 요택이 있고, 이세민 군대 외에 다른 부대가 요택을 통과하지 않고 고구려로 올 수 있었다면, 고구려군이 요택을 피하여 임유관으로 가는 길로 가서 임유관으로 가는 길을 막아버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요택은 없었다. 이세민은 강소성의 대야택으로 도망갔다. 대야택 주변의 늪지대로 도망가서 겨우 살아났다.

 

민중이 증언하는 이세민 도주경로의 진실

민중은 이세민이 아무리 사기를 쳐도 진실을 알고 있다. 이세민 관련 설화는 북경 부근과 요동반도 지역에서 전해지며 이세민이 계략으로 이겼다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것과, 산동반도와 강소성에서 전해지며 이세민이 고구려군의 공격에서 간신히 살아남았다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것의 두 종류가 있다.

첫번째 유형으로 개주(蓋州)의 황량퇴(謊粮堆) 설화가 있다. 이 설화는 이세민의 군대가 연개소문 남매의 군대에게 포위당한 데다 군량미마저 고갈되었는데, 이세민이 흙무더기를 쌓고 그 위를 곡식 낟알로 덮어 고구려 군대를 물러가게 했다는 것이 골자이다. 이 설화는 이세민이 개모성을 빼앗고 그 땅을 개주로 삼았다는 역사 기록을 차용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이세민이 이긴 곳은 당하 부근인데, 나중에 개주라는 지명이 지금의 요동반도로 이동하자 설화도 이동한 것이다.

첫번째 유형의 또다른 설화로 적곡돈(積穀墩) 설화가 있다. 이 설화의 내용도 황량퇴 설화와 비슷한데 전승의 현장이 천진시(天津市) 계현(薊縣)이라는 점만 다르며 적곡돈은 적골돈(積骨墩)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수많은 당군 전사자들의 유골을 묻었기 때문이라 한다. 당시는 계현이 중역수 부근에 있었으므로 이 설화도 지명 이동으로 지명과 함께 설화가 이동한 것이다. 당시의 계현에 있던 어떤 성을 당군이 점령했고, 많은 당군이 전사한 것도 개연성이 크므로 이 설화도 역사적 진실을 반영하고 있다. 두 설화 모두 당군(이세민)이 이긴 전투를 당시의 지명과 함께 전해주고 있다.

두번째 유형의 설화 중 산동반도의 설화는 이세민이 산동반도 즉묵(卽墨) 지방에서 연개소문의 군대와 대치하다가 포위 당해 위기에 빠졌는데 김휴(金烋)의 활약으로 구출되었다는 것, 이후 마산(馬山)에 김휴를 기리는 기념물이 조성되고 민간신앙이 발생했다는 것, 연태시(烟台市) 봉래현(蓬萊縣)에는 정상(正晌) 해가(解家) 상영(上營) 중영(中營) 소설(小雪) 대설(大雪) 멱록천(覓鹿夼) 와록(臥鹿) 우가천촌(遇駕夼村) 호가구촌(護駕溝村) 고성(古城) 대왕묘(大王廟) 섬가탄촌(摻駕疃村) 왕구촌(王溝村) 낙가하(落駕河) 쇄갑하(灑甲河) 장군동(將軍洞) 등 20개에 가까운 지명이 연개소문 군대의 내침과 관련 있다는 것, 이중에서 대왕묘, 왕구촌, 낙가하, 쇄갑하, 장군동 등은 이세민의 패배 및 도주 사실을 반영한 지명들이라는 것을 내용으로 한다. 연개소문의 산동반도 공격은 󰡔설인귀정료사략(薛仁貴征遼事略)󰡕에서도 나타난다. 隋도 수군으로 공격했고, 당도 수군으로 공격할 것을 알았기 때문에 고구려도 수군으로 대비하였다는 것은 당연하다. 전세가 유리하게 돌아가면서 고구려의 수군이 산동반도로 오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설화의 내용이 구체적이고 관련된 지역이 많아서 이들 설화가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지 않았다고 보기 어렵다. 당군은 고구려군이 임유관으로 가는 길을 선점해서 당군의 서쪽을 차단하고 계속 추격하므로 임유관으로 들어갈 수 없었고, 남쪽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당군은 남쪽으로 도망가는 것도 고구려군에 뒤처져 동쪽으로 산동반도로 몰렸는데, 이 때 산동반도 봉래현에 상륙하여 있던 고구려군이 이세민을 포위하자 겨우겨우 산동반도 남쪽의 즉묵으로 도망갔고, 즉묵에서도 김휴의 희생으로 겨우 도망쳐 해안가를 따라 강소성으로 도망갔다.

두번째 유형의 설화 중 강소성의 설화는 연운항시(連雲港市) 숙성(宿城) 보가산(保駕山), 숙천시(宿遷市) 영자산(靈赭山), 염성시(鹽城市) 건호현(建湖縣) 신장향(辛庄鄕) 보탑촌(寶塔村) 세 곳에서 채록된 것이 유명한데, 세 편 모두 연개소문의 내침을 배경으로 하며, 보가산 설화는 이세민이 연개소문에 의해 죽음 직전까지 몰렸다가 설인귀의 도움으로 살아나고 이세민이 장사귀(張士貴)의 농간 속에 가려진 천하 장재(將才) 설인귀를 얻는다는 내용이고, 영자산 설화는 설인귀가 당군의 연패를 끊고 고구려군에 대승을 거둔다는 내용이며, 보탑촌 설화는 이세민이 연개소문에게 쫓기다가 우물에 숨었는데 우물을 수색한 고구려군이 거미줄을 보고 그냥 지나쳐 이세민이 목숨을 구한 뒤 그 은혜를 기려 우물 근처에 탑을 세웠다는 이야기이다. 보탑촌 설화에는 이세민이 어니하(淤泥河)에 빠졌던 내용도 있으며 지금도 탑의 동북방으로 어니하가 흐른다고 한다. 이 설화들을 토대로 이세민의 도주경로를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이세민이 구사일생으로 즉묵을 빠져 나왔지만, 추격하는 고구려군에게 강소성 연운항에서 또 죽을 뻔 했는데 설인귀가 구출하여 이세민은 다시 남쪽의 염성시로 도망갔다. 염성시에서도 이세민은 고구려군에 쫓기자 살기 위해 대야택의 늪지대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고, 늪지대를 통과하여 북쪽으로 숙천시로 도망갔다. 숙천시에서 설인귀의 공으로 고구려군의 추격을 간신히 벗어났다. 이세민이 늪에서 울부짖었던 것을 신하들과 호위 병사들이 다 보았으므로, 이세민은 늪으로 도망간 사실은 감출 수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전쟁하러 갈 때도 늪을 거쳤다고 거짓말하여 올 때도 늪을 거친 것이 정상적 후퇴 경로였다고 후세인들을 속이려 하였다.

따라서 이세민이 날조한 이세민의 후퇴경로는 완전한 거짓이다. 이세민은 임유관을 통해 수도로 귀환하지 않았다. 이세민은 봉래-즉묵-연운항-염성-대야택 늪지대-숙천-장안의 경로로 도망갔다. 산동성과 강소성에서의 사건을 본 민중은 구전으로 진실을 후세에 전하였고, 경극과 소설을 통해서도 용맹스러운 연개소문과 찌질한 이세민이라는 진실된 역사를 기록하였다. 민중이 전한 진실은 이세민도 막을 수 없었다.

 

이세민이 다시는 고구려와의 전쟁터에 가지 못한 이유

도망가면서 당군은 거의 다 죽었고, 이세민도 죽음 직전까지 갔다. 이세민은 이 때의 경험으로 다시는 고구려 쪽으로 발을 딛지 못했다. 이세민이 신하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고구려를 지속적으로 괴롭히는 소모전으로 전략을 바꾼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는 이세민이 겁먹어서 못 갔고, 화살 맞아 아파서 못 간 것을 변명한 것이다. 이세민은 어떻게든지 고구려를 이겨서 자신의 치욕을 감추기 위해 죽을 때까지 고구려를 계속 공격하였다. 이세민에 관한 역사서의 기록은 거의 이세민이 창작한 거짓으로 보아야 한다. 인류 역사상 가장 실제와 다르게 과포장된 인물이 이세민일 것이다.

 

[이세민의 도주경로]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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