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한국학 기초 낭독 44

역사회복 2026. 4. 13. 19:23

https://youtu.be/pKiEbOWcXCg

 

15. 가야사

 

(1) 강단 유사사학의 가야사는 소설이다

 

일제는 침략을 위해 유사사학을 이용

일본의 사이비들은 17세기부터 고대에 일본이 한반도를 지배했다고 주장하였는데, 일제는 이를 조선 침략에 활용하였다. 사이비들은 야마토왜라는 가공의 왕조를 창조한 후, 일본서기에 나오는 백제마을 신라마을 임나마을을 백제 신라 가야라고 주장하면서, 야마토왜가 한반도 남부(경상남도는 물론 전라도와 심지어는 충청도까지)를 지배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임나와 가야는 국명부터 다르므로 그들은 임나와 가야가 같다고 날조하는 데 전력을 다하였다.

물론 조선총독부 소설에 역사는 전혀 없다. 야마토왜라는 왕조 자체가 가공이다. 열도는 한반도 이주민의 마을 국가 시대, 1세기 이후의 가야계의 지배, 3세기 말 이후의 백제 지배, 5세기의 고구려와 백제의 남북국 시대, 6세기 이후의 백제 지배, 672년부터 700년까지의 신라 지배를 거친다. 701년 백제계가 신라로부터 독립하여 일본이 된다. 700년까지 열도는 우리의 역사 강역이다.

열도의 백제인들은 신라에 망해서 열도로 쫓겨난 것을 부정하기 위해 일본서기를 만들었지만 그들이 백제임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열도의 백제인들이 670년 새로 만든 국호인 일본을 사용하여 역사서의 제목을 일본서기라 하였기 때문이다. 후세인들이 일본이 백제였음을 부정하기 위해 대왜와 일본을 야마토로 읽는다고 날조하고 일본서기의 내용을 변조하여, 가공의 야마토왜 왕조를 창조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뿌리를 부끄러워하여 숨기고 있으므로, 마음이 공허하여 전범들을 추종하면서 살고 있다.

 

일본서기의 일본은 백제이고 야마토왜가 아니다

일본서기의 일본만 알아도 일제·강단 유사사학의 날조는 끝장난다. 신라와 당의 백제 침공으로 백제인들은 백제의 영토였던 열도로 피신하였다. 당은 백제를 제어하기 위해 열도에 당군을 665년부터 주둔시켰다. 백제는 당군이 열도에 주둔하던 시기인 67012월 국호를 일본으로 변경하였다. 일본은 672년부터 700년까지 신라의 지배를 받다가 701년 독립하였다. 독립 후 일본 즉 백제는 열도인을 통치하기 위해 일본서기를 창작하였다. 열도는 유사 이래 일본 즉 백제의 천황이 통치하였다는 문학서를 창작하였다. 열도의 역사에서 가야계, 왜부여, 고구려의 지배 시기를 삭제하였다.

야마토왜는 있었던 적이 없다. 야마대국은 가야의 허씨집단이 열도에 이주하여 세운 2세기의 마을국가이다. 당연히 왜집단이 주축이 된 국가가 아니었다. 일제가 야마토왜라고 주장하는 대왜(大倭)는 신라의 전쟁포로가 되었던 백제의 전라도왜가 5세기초 열도의 고구려 위성국이 지배하고 있었던 나라에 끌려간 뒤에 붙은 이름이다. 대왜는 열도의 권력을 차지한 적이 없는 피지배민에 불과하다.

일제는 일본이 백제였음을 부인하기 위해 大倭日本을 모두 야마토로 읽는다고 주장한다. 역사를 찾겠다는 사람들조차 최재석이 최초로 주장한 대왜 피지배민설을 부인하고 있다. 소위 임나일본부설도 야마토왜 고대왕국설과 비교하면 날조 강도에서 새 발의 피에 불과하다.

일본서기백제서기이다. 그래서 일본서기편찬 시 백제삼서를 참고하였다. 야마토왜는 없었다. 말도 안 되는 날조가 판을 치는 것은 인류의 지적 수준이 그러한 수준이기 때문일 것이다.

 

강단 유사사학은 조선총독부 소설을 수용

강단 유사사학은 야마토왜가 한반도 남부를 직접 지배한 것이 아니라, 백제 신라 가야에 군사적 경제적으로 강한 영향력을 끼쳤다고 주장하면서, 임나일본부는 가야=임나에 설치된 외교기관이나 교역기관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들이 조선총독부의 임나일본부설을 극복하였다고 주장한다.

일제가 주장하는, 가공의 야마토왜의 실재, 임나=가야, 일본서기마을국가의 명칭이 열국의 국명임을 인정한 상태에서, 야마토왜의 한반도 남부에 대한 지배영향력으로 변경하였다고 우리 역사가 회복되는 것은 아니다. 소설의 기본 구도는 그대로 두고 지배라는 표현을 영향력으로 바꿨다고 소설이 역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임나일본부설을 극복하기 위해선, 열도에서의 우리 역사를 회복하여 야마토왜의 가공성을 밝히고, 일본서기에 나오는 마을국가와 열국은 전혀 다른 실체임을 밝히면서, 가야사는 삼국사, 삼국유사』 「가락국기등 가야의 역사적 사실을 기술한 사료를 토대로 밝혀야 한다. 소설 속 등장 인물인 야마토왜의 강력함이 10에서 8로 변경되었다고 소설이 역사로 되는 것은 아니다.

강단 유사사학이 낙랑군 평양설, 야마토왜 실재설, 가야=임나설을 떨치지 못하는 이유는, 광복 후 이승만으로 인해 일제 부역자들이 교수의 대부분이 되었고, 그들에게 충성한 생명체들이 후임 교수가 되었기 때문이다. 매국노들과 매국노들에게 영합한 집단이 주류인 강단 유사사학은 낙랑군 평양설, 야마토왜 실재설, 가야=임나설이 소설임을 알면서도 그들 자신들의 치부를 감추기 위해 소설을 역사라 거짓말하고 있다.

 

김태식의 사국시대론은 소설의 강화

김태식은 야마토왜는 실재한 나라이고, 임나=가야는 연맹체라는 조선총독부의 소설을 추종하면서도 가야를 고구려 백제 신라와 대등한 나라로 보아 삼국시대가 아닌 사국시대라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가야를 존중하며 진정한 가야사를 찾는 노력으로 오해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기존 일제와 강단의 소설을 강화하는 것이다. 김태식이 사국시대라 하면서 가야=임나의 영향력을 강조하는 것은 실질상 가공의 왕국인 야마토왜의 영향력을 중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야는 건국 시부터 백제의 영향 하에 있었다. 신나라가 망하자 피할 곳을 찾고 있던 김일제 후손인 김씨들은 백제의 소개로 경상도에 정착하였다. 허씨 집단과의 연합도 백제의 중매로 가능했다. 백제는 BCE 18(황하 동쪽, 제수 북쪽)에서 건국하여, 1세기 초에 이미 을 중심으로 동으로는 산동반도-요동반도-한반도 남부까지, 남으로는 산동반도-양자강-중국 남부까지 해상교통로를 장악한 상태였으므로, 가야의 건국과 허씨 집단과의 연합은 백제의 양해 하에서만 가능하였다. 백제는 건국 후 과 요동반도 확보를 통해, 번조선 이래 유지되었던 해상 교통로를 장악하고 강한 세력이 없었던 한반도 남부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 한반도 북부는 낙랑국이 있어 백제가 확보할 수 없었다.

신라가 에서 백제의 속국이었다가 경상도로 이주하여 독립한 후에, 백제는 가야를 통해 신라를 통제하였다. 가야는 신라와 싸워야 했으므로 백제와 대립할 수 없었다. 가야는 열도에 진출하여 열도를 지배하고 열도인을 동원하여 신라에 대항하였지만, 3세기 말 김씨·허씨 연합이 고구려 탈영병 세력에게 김해와 부산을 탈취당하고, 백제가 열도를 접수하면서 백제에 대항할 힘을 가질 정도로 성장하지는 못하였다. 즉 한반도의 가야는 멸망 시까지 백제의 우호국으로 남았고, 열도의 가야계 세력은 백제의 직접적 지배 하에 놓이게 되었다. 물론 5세기 열도의 남북국 시대에 본주의 열도가야는 고구려의 지배 하에 있었다. 가야는 백제가 열도에 진출하기 전까지만, 가야 본국과 열도가야 사이의 무역만을 할 수 있었다. 백제가 열도에 진출한 이후에는 가야와 열도의 무역도 백제의 것으로 되었다. 가야는 백제가 가야 연안을 통과하여 열도로 가는 항로를 방해할 수도 없었다. 가야는 백제의 우호국이었지 백제와 대등한 국가는 아니었다.

김태식의 사국시대 주장은 기존 소설의 소설성 강화이다. 김태식의 조선총독부 소설에 대한 충성심이 더 강력해졌음을 의미한다.

 

강단 유사사학의 가야사 날조는 고의적 행위이다

많은 사람들은 강단 유사사학의 고의성을 의심한다. 그들은 설마 대학교수들이 고의로 소설을 역사라고 하겠어? 학설상의 견해 차이겠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최재석의 반론에 대한 그들의 태도를 보면 그들이 고의로 역사를 날조하고 있음을 명백히 알 수 있다.

최재석은 가야는 일본서기의 임나가 아니며, 백제가 망할 때까지 열도를 야마토왜가 아닌 백제가 지배하였으며, 대화개신이나 성덕태자는 조작되었음을 일본서기를 토대로 논증하였고 일본서기249년 기사의 7국을 신라7국으로 올바르게 읽었다. 본고의 많은 부분은 최재석의 연구 성과에 기반하고 있다. 최재석의 연구에 의하면 강단의 주장은 소설이 됨에도 불구하고 강단 사이비들은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그들이 학자이고 그들의 주장을 사실로 생각했다면 그들은 반론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조용히 있었고 지금도 조용하다. 오죽했으면 최재석은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내가 그들의 학문에 대하여 비판을 가하였다면 의당 (나의 비판이 타당한지 부당한지) 대답이 있어야 할 텐데도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지금(2010)까지 아무런 응답이 없다. 이병도(1989년 작고), 이기백(2004년 작고), 김철준(1989년 작고) 교수는 나의 비판에 응답하지 않고 세상을 뜨고 말았지만 내 나이 이기동 교수보다 20세 정도 연상이니 내 사후가 아니라 생존 시에 나의 비판에 답을 주기 바란다. 내 생전에 침묵을 지키다가 사후에 이러쿵저러쿵해서는 안 될 것이다. 자기 학문에 대한 비판이 나왔으면 그것에 대해 인정을 하든 반박을 하든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것이 학문하는 사람의 도리 아니겠는가?

 

강단 유사사학은 최재석의 논문에 한 글자도 반박할 수 없다. 그들의 조선총독부 소설은 아무런 사료적 근거가 없고 오직 일제 유사사학에 대한 충성에만 근거하기 때문이다. 결국 최재석은 강단으로부터 아무런 답변도 듣지 못하고 2016년 작고하였다. 강단 유사사학은 최재석 사후에도 최재석의 업적에 왈가왈부 할 수 없다. 반론할 만한 근거가 없고, 반론을 통해 쟁점이 세상에 알려지는 경우 조선총독부 소설이 위험해지고, 그들이 제작한 소설의 저질성만 드러나므로 그들은 최재석 사후에도 침묵할 수밖에 없다.

 

이제 진정한 가야사와 열도사 연구를 시작해야

일제·강단 유사사학은 가야사와 열도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소설로 도배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에 반대한다는 재야도 이들 소설에 물들어 있다. 본고만이 최재석의 업적을 계승·발전시킨, 진정한 가야사와 열도사이다.

재야는 일본서기에는 가야=임나의 근거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일본서기를 인용하여 가야사를 기술하지 마라고 한다. 이들은 일본서기를 읽어보지 않고 추정에 의해 말한다. 일본서기에도 가야=임나의 근거는 없다. 오히려 일본서기에 가야임나의 근거가 가장 많이 있다. 일본서기는 대륙과 한반도에서 패망한 백제인들이 열도인을 통치할 목적으로 만든 문학서로서, 패망한 백제인들의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처음부터 많이 왜곡되었고, 만들어진 이후에도 정신병적 일본인들이 꾸준히 변개하였지만, 그러함에도 열도가 한반도 이주민들의 마을 국가들로 출발하였고 주로 백제가 지배했다는 사실을 감추지는 못하고 있다. 재야가 강단 유사사학을 공격하고 싶다면 일본서기를 더 많이 연구하여 일본서기가 내포하고 있는 역사적 사실을 제시하고, 일제와 강단이 일본서기를 어떻게 날조하여 소설을 작성하고 있는가를 드러내야 할 것이다.

 

(2) 가야는 변한(弁韓)이나 변진(弁辰)과 무관하다

 

변진은 의 신라이고, 변한은 중국 동부에 있었으므로 가야와는 전혀 무관하다. 가야가 연맹체라는 사이비들의 주장에도 아무런 근거가 없다. 강단 유사사학은 삼국지의 마한에 대해 기술한 이야기를 한반도 중남부의 일로 날조하여, 삼한이 BCE 2세기에서 CE 3세기까지 한반도 중남부에 있었다고 날조한다. 그들은 마한(馬韓)은 한반도 서남부, 진한(辰韓)은 경상도 북부, 변한(=변진)은 경상도 남부라 하면서 가야가 변한=변진 12개국에서 기원한 연맹체의 나라라고 한다. 이를 토대로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 초기 역사를 부정한다. 사이비들은 이러한 날조를 사료비판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한다.

그런데 그들이 사료비판을 진실로 한다면 한반도 남부가 삼한이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중국의 사서는 주변 나라를 폄하하면 폄하했지 과장하여 말한 적은 없다. 그러한 중국의 사서인 삼국지후한서가 동시에 삼한이 방사천리라 했으면 방사천리나 방사천리가 넘는 지역에서 삼한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사료비판의 의미만 알아도 변한이 변진과 같다는 멍멍이 소리는 내지 못할 것이다. 삼한이 진한 마한 변한인데 변진이 있다면 그것은 진한과 변한 모두와 관련되는 것임은 삼척동자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삼국사에는 변한이 나라를 들어 진한의 유민을 자처한 신라에 항복했다는 기사도 있다. 오로지 조선총독부 소설에 충성하여 교수자리를 차지하려는 일념 하나로 소설을 쓰기 때문에 그들은 멍멍이 소리를 내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사료비판의 의미의 반만 알아도 삼국지후한서의 삼한에 대한 모순적 기술에서 진정한 삼한을 찾았어야 할 것이다. 진수와 범엽이 진한과 마한을 헷갈려 하면서 일관되지 않은 설명을 하고 있으면, 그 이유를 알아내 진정한 역사를 찾아야 함에도, 그들은 조선총독부 소설에 영합하기 위해 BCE 24세기의 고조선에 대한 설명을 CE 3세기의 한반도 남부에 적용하여 당시까지 백제 신라 가야는 없었고 70여개 소국이 원시적인 군장사회로 존재했으며 소도로 도망치면 군장이 처벌할 수 없다는 꿀꿀이 소설을 쓰고 있다.

강단 유사사학이 사료비판의 1%만 염두에 두었어도 일본서기는 열도에 있었던 조선인 이주민들의 마을국가를 백제가 통치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라고 주장하였을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멍꿀 소리를 사료비판으로 위장하나, 그들의 사료비판은 조선총독부 소설을 합리화하는 소설 작성 수단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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