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고구려 백제 예부여와 위
위의 북연 점령
『위서』에 탁발도가 432년 영구 성주 요동 낙랑 대방 현도의 6군 사람 3만가를 유주로 이동시켜 진휼하였다고 하는데, 이들 6군은 북연 영주의 6군을 의미한다. 고구려는 407년 후연을 멸한 후 서진의 유주 평주 지역은 고구려 유주로 영토화하고, 당하부터 호타하 사이에는 위성국인 북연을 세워 북위와의 완충지대를 만들었다. 고구려의 점령으로 기득권을 상실한 후연 지배층과 그들의 가솔들이 북연으로 이주하여 자신들이 사는 지역을 요동 낙랑 대방 현도로 명명하였고 고구려도 이들이 북연의 세력 강화에 일조하여 완충국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이주를 묵인하였을 것이다. 즉 북연 영주의 요동 낙랑 대방 현도는 고구려가 점령한 서진 평주의 그것들과는 다른 군이다. 탁발도는 고구려가 후연의 북부를 차지했으므로 후연의 남부는 위가 차지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여 432년 북연을 공격하였으나, 고구려와의 관계상 점령하지는 못하고, 북연을 약화시키기 위해 북연의 영주 주민들을 魏의 유주로 이동시켰다.
魏는 북연을 차지한다고 하여 고구려가 반발하지 않을 거라 확인한 후 436년 북연을 차지하였다. 위는 436년 고구려에 북연을 취할 것을 사전통보하여 우발적 전쟁을 회피하였고, 북연왕인 풍홍이 고구려로 피신하여도 고구려를 공격하지는 못하였다. 위는 고구려가 혼담을 깨도, 고구려가 남제와 통교하여도 군사적 행동은 취하지 못하였고, 484년에는 고구려의 사신을 제나라 사신의 다음 자리로 하였다. 따라서 436년 북연이 위의 영토로 된 후에도, 위와 고구려는 다투지 않았다. 고구려와 위는 서로 두려워하는 관계였다.
지명의 교치
북연과 魏의 영주 소속 요동·낙랑·대방·현도군은 고구려 유주의 요동·낙랑·대방·현도군 즉 서진의 평주였던 군들과는 다르다. 중국의 사서들이 고구려 영토인 요동·낙랑·대방·현도군과 북연과 魏의 영주 소속의 동명 군들과 혼동하여 기술하는 경우가 많아 혼란이 발생하고 있다. 고구려가 서진의 평주를 영토화하고 백제의 점령기를 제외하고 멸망 시까지 유지하였으며 당하 남쪽의 영주는 魏 등 북조 국가가 차지하다가 수나라의 영토가 되었다. 이는 중국이 수나라로 통일된 후 고구려가 수를 공격하자 영주총관이 대응한 데서 확인된다.
중국 왕조는 영토를 상실한 경우, 뺏긴 영토가 없는 것처럼 위장한다. 후한은 고구려에 요서 요동 현도를 뺏긴 후 세 군을 영토 내에 다시 설치하고 요수도 변경했다. 후연이 망한 후에도 중국인들은 고구려에 뺏긴 요동·낙랑·대방·현도군의 지명을 유지하고 요수도 중역수에서 보정시 남쪽에서 동서로 흘러 발해로 들어갔던 당하(唐河)로 변경시켰다. 고구려가 서진의 유주와 평주를 고구려의 유주로 영토화하자 魏는 유주를 다시 설치하였다. 전술하였듯이 탁발도(세조태무제)가 432년 영구 성주 요동 낙랑 대방 현도의 6군 사람 3만가를 유주로 이동시켜 진휼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북연 영주의 사람들을 魏 유주로 이동시켰다는 말로서, 고구려 유주나 유주 소속의 군과는 무관하다.
왕온 묘지명
왕온 묘지명은 고구려가 후연을 정복하면서 획득한 낙랑과 교치된 낙랑이 명백히 다름을 알려주고 있다. 묘지명에 의하면 왕온의 조상은, 왕온의 고조인 왕준(王准)이 석륵을 피해 313년 낙랑군으로 피신한 후 453년 조부인 왕평(王評)이 魏로 귀국할 때까지 낙랑군에 거주하였다고 한다. 즉 왕온의 조상은 낙랑군으로 피신하였는데, 407년 고구려가 후연을 정복하면서 고구려의 주민이 되었다가, 魏가 북연을 영토화한 후 魏로 귀국하였다(祖評携家歸國). 즉 왕준(王准)이 피신한 낙랑은 원래의 낙랑군으로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고, 북연과 魏의 낙랑은 고구려의 407년 원래의 낙랑군 점령으로 교치된 낙랑이다.
동성왕의 고구려 유주 점령
장수왕은 475년 고구려와 위를 싸움 붙이려는 개로왕을 백제의 韓지역 한성을 공격하여 죽였다. 개로왕 사후 혼란기를 거쳐 동성왕이 479년 11월 즉위하였다. 동성왕이 해야 할 첫번째 일은 광개토대왕이 뺏어간 韓백제 북쪽 영토 회복과 개로왕의 죽음에 대한 복수였다. 백제의 무역선이 황하에서 고구려 수군에 나포되는 경우 그 피해는 막대하였을 것이다. 고구려와 백제의 황하 서쪽 전투에 관한 사료는 김부식에 의해 버려졌다. 김부식은 韓백제를 몰랐다. 백제와 위의 전쟁도 한 줄에 그쳤다. 중국 사료에 백위전쟁이 나와서 썼지만, 자신은 백위전쟁을 잘 이해할 수 없다 하여 한 줄만 썼다. 백위전쟁은 중국사료에라도 나오지만, 韓 지역 고백전쟁은 직접적인 사료가 전혀 없다. 따라서 간접적 증거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삼국사』에 의하면, 장수왕 즉위 후 425년, 435년(2회), 437년, 439년(2회), 462년, 465년, 467년, 468년, 469년, 470년, 472년(2회), 473년(2회), 474년(2회), 475년(2회), 476년(3회), 477년(2회), 479년(2회), 484년, 485년(2회), 486년, 487년, 488년(3회), 489년(3회), 490년(2회), 491년(2회) 위에 사신을 보냈다. 465년 이후 거의 매년 사신을 보냈는데, 480년부터 483년까지 위에 사신을 보내지 않았다. 『삼국사』 고구려측 기사를 보면, 480년 4월 남제가 장수왕을 표기대장군으로 봉하고 480년 4월에 고구려가 남제에 보낸 사신이 위에게 붙잡히지만, 고구려는 481년에 남제에 사신을 파견했다. 따라서 480년에 위에게 사신을 보내지 않은 것은 위와 남제 사이에서 외교적 고려를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481년부터는 백제와의 전쟁으로 사신을 보낼 겨를이 없었거나, 전쟁이 불리해지자 약한 모습을 위에게 보이기 싫어 보내지 않았다.
동성왕이 479년 11월 즉위했으므로 480년 전쟁 준비를 했다면 백제와 고구려는 481년부터는 전쟁 중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낙랑태수였던 동수는 관직 수행 중 481년 사망했는데 백제와의 전투 중 죽었을 가능성이 크다. 전술하였듯이 백제가 남제에 490년과 495년 보낸 표문에 공로자들의 관직이 등장하는데, 韓 지역 부근 관직으로 광양태수·조선태수·대방태수와 조선태수·낙랑태수가 표시되어 있다. 즉 이들 태수는 백제가 고구려의 유주(서진의 유주와 평주)를 점령하고 임명한 직책이다. 광양은 중역수 북쪽이고, 낙랑 조선 대방은 중역수 남쪽이므로 고구려가 후연을 정복하고 획득한 땅 거의 전부를 483년 이전에 백제가 빼앗았다.
『삼국사』에는 482년 동성왕이 봄 정월에 진로를 병관좌평으로 삼고, 중앙과 지방의 군사에 관한 일을 겸하여 맡게 하였다는 기사와 9월 말갈이 한산성을 공격했다는 기사가 있는데, 이는 韓지역 고백전쟁과 관련된 것이다. 당시 장수왕은 90 가까운 고령이었으므로 고구려는 백제의 공격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위를 상대로 백제가 대승
백제가 고구려의 유주를 차지하자 위는 484년 백제에게 싸움을 걸었다. 韓 지역은 중국 왕조가 한 번도 침입하지 않았다. 예군 남려의 사례에서 보듯이 韓은 중국 왕조에게는 무가치한 땅이었다. 고구려는 韓 지역이 백제 경제의 핵심지역임을 알고 백제를 약화시키기 위해 공격했지만, 중국 왕조는 백제의 무역선으로부터 구매하는 먼 나라에서 생산된 사치품이 나쁠 이유가 없었다. 따라서 위가 백제를 공격했다는 것은, 쭉 지켜보고 가지려 했으나 고구려가 무서워 보고만 있었던 고구려의 유주 지역을 백제가 차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위는 백제가 고구려를 이겨서 놀랬을 것이다. 그래서 484년은 탐색전으로 가볍게 백제를 공격했을 것인데 해 볼 만하다고 생각하여 488년에 마음 먹고 공격하였다. 백제와 위의 전쟁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ㄱ) 484년
- 『건강실록』: 영명 2년(484년) 북위가 백제를 정벌하여 백제왕 변도(弁都)를 크게 깨트렸다.
- 『태평환우기』: 효문제가 군사를 보내 백제를 정벌했다.
- 『통전』: 효문제가 군사를 보내어 백제를 정벌했다
(ㄴ) 488년
- 『삼국사』: 동성왕 10년에 위(魏)가 침공하였으나 우리 군사가 그들을 물리쳤다.
- 『자치통감』: 위나라가 군사를 보내 백제를 공격했는데 백제에게 패하였다.
- 『남제서』: 삭제된 324자 대부분이 위나라의 치욕적 패배를 기록한 부분이다. 고구려에 대해 建武 3년(496년)의 일을 기록하는 부분에서 원문이 사라진다. 고구려에 관작을 주었다는 부분부터 삭제된 것으로 추측되는데, 남제가 502년 망하므로, 삭제된 부분에서 고구려 관련 부분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삭제된 부분에 이어서 나오는 내용은 백제의 공로자에게 관작 수여를 요청하는 것이므로 바로 앞에는 그들의 공로가 나와야 하는데, 그 공로가 중국인들에게 치욕적이어서 누군가가 삭제했다. 『남제서』를 쓴 소자현은 남제를 건국한 소도성의 손자로, 남제는 소자현 할아버지의 나라이다. 『남제서』는 위를 위로(魏虜)라 하여 오랑캐로 간주하고, 『남제서』 「동남이열전」 고구려조에서 위가 중국 왕조인 남제와 오랑캐인 고구려의 사신을 나란히 앉게 하였다고 기록한다. 백제가, 남제를 소자현이 오랑캐라고 생각하는 고구려와 동일하게 취급한 위를, 격퇴한 것은 소자현에게 유쾌한 사건이었다. 소자현에게 백제와 위의 전쟁은 춘추필법이 적용되는 사건이 아니었고 오히려 신나는 사건이었으므로 자세히 기록하였을 것이다. 중국 대부분을 차지했던 위가 백제에게 무참히 패배했다는 기록을 본 후세의 중국인들은 이를 참을 수 없었고, 역사서가 써진 이후에도 춘추필법을 적용하여 이 부분을 삭제했다. 중국인들의 역사를 대하는 태도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대목이다.
(ㄷ) 490년
- 『남제서』: 이 해에 [北]魏 오랑캐가 또다시 騎兵 수십만을 동원하여 百濟를 공격하여 그 地境에 들어가니, 牟大가 장군 사법명(沙法名) 찬수류(賛首流) 해례곤(解禮昆) 목간나(木干那)를 파견하여 무리를 거느리고 [北魏] 오랑캐군을 기습 공격하여 그들을 크게 무찔렀다.
- 『남제서』: 建武 2년(495년)에 牟大가 사신을 보내어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 “(중략) 지난 庚午年에는 獫狁이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 깊숙히 쳐들어 왔습니다. 臣이 沙法名 등을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역습케 하여 밤에 번개처럼 기습 공격하니, 匈梨가 당황하여 마치 바닷물이 들끓듯 붕괴되었습니다. 이 기회를 타서 쫓아가 베니 시체가 들을 붉게 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 銳氣가 꺾이어 고래처럼 사납던 것이 그 흉포함을 감추었습니다. (후략)”
위는 이 지역을 차지할 호기라 여기고 488년 대규모로 백제를 공격했다. 488년에 대패한 위는 미련이 남아 490년에 다시 한 번 공격했지만 또 지고 포기했다. 근초고왕 때 태자(근구수왕)가 한반도백제에서 북진하여 지금의 평양을 점령하고, 더 나아가 수곡성 서북쪽에 이르러 “오늘 이후에 누가 다시 이곳에 올 수 있겠는가”라 하면서 자부했다. 수곡성은 요동반도 백제에 있는 성으로 지금의 단동(丹東)시 부근으로 추정된다. 한반도에서 북진하여 요동반도 백제보다 더 북으로 갔으니 자부할 만했다. 그런데 동성왕은 그보다 더한 것을 하였다. 백제는 전성기의 고구려와 위를 상대해서 모두 이겼다. 특히 488년 전쟁의 승리는 중국인들이 분에 겨워 역사서를 지울 정도였으므로,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에 못지 않을 대승이었을 것이다. 만약 위가 백제를 이겼다면, 위는 고구려까지 침공했을 것이다.
강단 유사사학의 호연지기
강단 유사사학은 백위전쟁의 실체가 중국 사서에 의해 분명함에도 백위전쟁이 아닌 고백전쟁이라고 소설을 쓴다. 그들이 머지않아 노벨문학상 등 국제적 문학상을 받아 소설한류를 일으킬 것이라 생각된다. 그들은 역사학의 문학화와 문헌자료를 개무시하는 초탈문헌주의 유사역사학을 창시한 업적으로 세계역사에 그 이름을 떨칠 것이다. 『삼국사』는 물론 중국 사서인 『건강실록』 『태평환우기』 『통전』 『자치통감』 『남제서』를 아무것도 아닌 듯이 가볍게 부인하는 그들의 호연지기와 기개는 유사학자들의 영원한 귀감이 되기에 손색이 없을 것이다.
동성왕이 천지에 제사를 지낸 이유
동성왕은 486년에 서도 웅진의 궁실을 수리하고 우두성을 쌓고 대궐 남쪽에서 군사를 사열하였다. 백제는 위의 재침에 대비한 것으로 보인다. 백제는 488년 위에게 대승을 한 후 489년 10월 천지에 제사를 지냈다. 강단 유사사학은 488년의 위에 대한 대승을 부인하기 때문에 이 제사에 대해서도 실추된 왕권 회복 등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한다.
고구려의 유주 회복
고구려는 백제에 빼앗긴 유주를 494년 되찾은 것으로 보인다. 문자명왕은 492년 즉위 시 위로부터 도독요해제군사를 받아 명목상은 요해를 지배한 것이 되나, 장수왕이 받았던 직위와 같은 것이므로 유주를 회복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남제가 494년 7월 문자명왕을 도독영평이주로 책립하므로 이 때에 유주를 회복한 것으로 보인다. 예부여가 494년 2월 고구려에 귀부하는데, 이는 고구려와 백제의 싸움 와중에서 백제에 속했다가 고구려에 항복하는 것이므로, 이 무렵 고구려 백제 간 전쟁이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고구려는 503년부터 512년까지 백제의 韓을 공격하여 무령왕이 다시는 서도에 오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백제는 554년 웅천에서 고구려의 침입을 격퇴하므로 韓을 완전히 상실하지는 않았다. 백제는 607년 이전에 송산성 석두성까지 회복하였다. 고구려가 수와 전쟁을 치를 때를 이용하여 회복한 것으로 추측된다.
연가7년명 금동불상광배의 樂良
연가7년명 금동불상광배의 ‘연가(延嘉)7년’을 539년으로 보는데, 이 불상광배 뒷면에 ‘高麗國樂良東寺’가 새겨져 있다. 강단 유사사학은 ‘樂良’을 지금의 평양이라 한다. 강단 유사사학이 주장하듯이 6세기에 濼浪이 樂良으로 변하여 쓰여졌다면, 덕흥리고분과 안악3호분(동수묘)에 의해 고구려에 유주 濼浪郡이 있었음이 입증되므로, ‘高麗國樂良’은 고구려 유주의 樂浪郡으로 보아야 한다. 강단 유사사학은 어떤 근거도 없이 樂良을 평양이라고 억지를 쓴다. 지금의 평양은 최리의 낙랑국이 되었다가 CE 32년 고구려의 영토가 되어 漢城으로 불렸으므로 6세기에 樂良이라 표기될 수 없다. 평양은 고구려 수도의 명칭이므로, 수도를 평양이라는 지명 대신 변방에 있는 한 군의 명칭으로 부른다는 것은 강단 유사사학의 소설에서나 가능한 일일 것이다. 강단 유사사학의 억지는 어떻게 해서든지 고구려의 보정시 일대 지배를 숨기려는 행위로밖에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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