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고구려 백제 예부여와 후연
전연의 멸망과 후연의 등장
전연이 잠깐 중국을 지배하다 370년 망하자, 근초고왕이 낙랑군 지역을 탈환하였다. 고구려는 당시 고국원왕이 전사하는 등 백제에게 밀리고 있었으므로 韓 지역 부근에서도 백제에 밀렸을 것이다. 384년 모용수가 후연을 건국하였다. 고구려가 385년 6월 요동과 현도를 점령하였다. 당시 대방왕은 모용좌였으므로 후연이 건국하면서 백제는 낙랑 지역을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도 385년 11월 요동과 현도를 후연에게 빼앗긴다. 여울은 모용수에 협력하여 부여왕에 봉해지는데, 이는 예부여 공동체가 유지되었음을 의미한다. 여울, 여화, 여암, 여숭, 여초 등 예부여계인들이 후연의 관직에 등용되는데, 선비와 예부여는 같은 조선인으로 말이 통하여 모용씨가 중국인들보다 예부여인들을 중용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광개토대왕의 韓백제 북부 정복
광개토대왕은 왕위에 오른 후 바로 요동반도 서쪽에서는 관미성 등을 탈취하고, 요동반도 동쪽에서는 수곡성 전투에서 승리하고, 한반도에서도 한수 이북의 여러 부락을 탈취하여, 한반도와 요동반도에서의 백제에 대한 방비를 완료하고, 396년에는 백제의 핵심지역인 韓 지역을 공격하였다. 당시 후연이 영정하와 韓백제 사이에 있어 광개토대왕은 수군을 이끌고 백제를 공격하였다.
광개토대왕릉비문에 의하면 광개토대왕은 396년 아단성과 미추성을 함락시켰는데 미추성은 비류가 도읍한 미추홀이므로 396년의 공격은 韓백제 북부에 대한 것임이 증명된다. 비문에 58개성 700개촌을 획득하였다고 되어 있는데 이는 고구려가 韓백제의 북쪽을 점령하여 영토로 편입하였음을 의미한다. 韓백제의 북쪽 해안가는 예인(왜인)과 한인이 살던 곳이므로 광개토대왕은 그가 정복한 지역의 예인과 한인을 수묘인으로 하라고 말할 수 있었다. 광개토대왕릉비문에 나타난, 韓과 穢의 수묘인을 뽑은 성 36개 가운데 모루성, 고모야라성, 아단성, 잡진성, 구모로성, 각모로성, 간저리성, 미추성, 야리성, 두노성, 오리성, 대산한성, 윤노성, 고모루성, 전성, 삼양성, 산나성, 나단성, 구모성, 어리성, 세성의 21성이 396년 획득한 성에 포함되어 있고 나머지도 고구려가 통치하면서 이름이 달라진 성일 것이므로 이 지역을 점령하고 영토로 유지하였음이 재확인된다.
강단 유사사학은 광개토대왕이 점령한 영토에서 수묘인으로 차출한 한예가 한강과 임진강에 있었다고 주장하나 이는 광개토대왕이 수군으로 공격한 사실과 모순된다.
광개토대왕의 후연 정복
후연은 위(북위)의 공격으로, 397년 중산에서 용성으로 밀려나서, 407년 고구려에 의해 정벌된다. 고구려와 후연의 전쟁 관련 기사와 국사편찬위원회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ㄱ) 『삼국사』 400년 2월
[9년(400)] 2월에 〔후〕연[燕]의 왕 〔모용〕성(慕容盛)이 우리 왕의 예절이 오만하다고 하여 군대 3만을 거느리고 습격하여왔다.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 모용희(慕容熙)를 선봉으로 삼아, 신성(新城)과 남소성(南蘇城) 등 두 성을 빼앗고, 7백여 리의 땅을 넓히고 5천여 호를 옮기고 돌아갔다.
(ㄴ) 『삼국사』 402년
11년(402) 왕이 군대를 보내 〔후연의〕 숙군성(宿軍城)을 공격하니, 〔후〕연[燕]의 평주자사(平州刺史) 모용귀(慕容歸)가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ㄷ) 『삼국사』 404년
13년(404) 겨울 11월에 군대를 출병시켜 〔후〕연[燕]을 침공하였다.
(ㄹ) 『진서』 「모용희재기」와 『자치통감』 「진기」 404년
이때 고구려가 연군을 공격하여 백 여 명을 노략하거나 죽였다
(ㅁ) 『삼국사』 405년 1월
14년(405) 봄 정월에 〔후〕연[燕]의 왕 〔모용〕희(慕容熙)가 요동성(遼東城)을 공격해왔다. 막 성을 함락시키려 하는데, 〔모용〕희가 장수와 병사들에게 명하기를, “먼저 오르지 말라. 성이 평정되기를 기다려 짐(朕)이 황후와 수레를 타고 들어갈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고구려군이〕성 안에서 방비를 엄히 할 수 있게 되어 〔후연의 군대가〕마침내 함락시키지 못하고 돌아갔다.
(ㅂ) 『삼국사』 406년 12월
〔15년(406)〕 겨울 12월에 〔후〕연[燕]의 왕 〔모용〕희(慕容熙)가 거란을 습격하였는데, 형북(陘北)에 이르렀다가 거란의 무리가 〔많은 것을〕 두려워하여 되돌아가려 하였다. 드디어 군수 보급품을 버리고 병사들을 가볍게 하여 우리나라[고구려]를 습격해왔다. 〔후〕연의 군대가 3천여 리를 행군하여 병사와 말이 지치고 얼어서, 죽은 자가 길에 이어졌다. 우리의 목저성(木底城)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ㅅ) 광개토대왕릉비문 407년
十七年丁未 敎遣步騎五萬. □□□□□□□□ 王師[四方]合戰 斬煞蕩盡, 所獲鎧鉀一萬餘領 軍資器械不可稱數.還破沙溝城婁城□□城□城□□□□□□城.
(영락 17년 정미년, 왕은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라 명령하였다. □□□□□□□□ 왕의 군대는 사방 포위작전을 펴서 모조리 살상하였다. 획득한 갑옷이 1만여벌이고 군수물자와 장비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돌아오면서 사구성 루성 □□성 □성 □□□□□□성을 격파했다.)
(ㅇ) 『삼국사』 408년 3월
17년(408) 봄 3월에 사신을 북연(北燕)에 보내 종족(宗族)으로서 예를 베푸니, 북연왕 운(雲)이 시어사(侍御史) 이발(李拔)을 보내 답례하였다. 운의 할아버지 고화(高和)는 고구려의 지파로 스스로 고양씨(高陽氏)의 먼 후손이라 말하였는데, 이 때문에 고(高)를 성씨로 삼았다. 모용보(慕容寶)가 태자가 되자 운(雲)이 무예로써 동궁을 시위하였는데, 모용보가 그를 아들로 삼고 모용씨의 성을 내려주었다.
400년 고구려가 열도를 정벌하는 사이 후연은 고구려를 700리나 점령하였다. 402년에는 고구려가 후연의 평주 숙군성을 점령하였다. 후연이 점령한 지역을 회복한 기사가 빠져 있다. 후연이 고구려 칠백리를 점령했다는 것은 영정하 북동쪽으로부터 조백하 이서까지 점령했다는 것을 의미할 가능성이 크다. 고구려가 후연의 평주에 있는 숙군성을 점령하기 위해선 이 지역을 회복해야 가능하다. 물론 396년 점령한 韓백제 북쪽에서도 공격할 수 있겠지만, 점령당한 곳을 회복하고 공격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韓백제 북쪽으로 가려면 배를 통해 군대를 이동시켜야 하는 불편이 있으므로 숙군성은 실지를 회복하고 전진하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404년 연군을 공격하였다고 하는데 연군은 후연의 수도인 용성을 의미한다. 고구려가 용성을 연군으로 개칭하였을 것이다. 수도까지 공격하였는데 백명 죽였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 404년에 용성을 공격하여 후연에 큰 피해를 준 것을, 이세민이 燕郡을 공격하여 백명이 피해를 입었다고 날조했을 가능성이 크다. 405년에는 후연이 난데없이 요동을 공격하는데, 이것도 고구려가 이전에 후연의 요동군을 점령한 사실이 기록에 빠져 있음을 의미한다. 402년이나 404년의 공격 때 요동군을 점령하였기 때문에 후연이 용성 공격에 대한 보복으로 요동군을 공격하였다고 보아야 이야기가 연결이 된다.
407년 이전 후연은 혼군의 전횡으로 망할 시기만을 앞두고 있었다. 이런 상태의 나라를 광개토대왕이 정벌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고, 후연은 고구려와 400년 이래 계속하여 전쟁 중이었으므로, 광개토대왕릉비문 407년 기사는 공격 대상이 지워졌지만 후연으로 추측할 수 있다. 407년 기사는 400년 기사 다음으로 많이 지워졌다. 영정하 남쪽 보정시 일대의 지명이 나타나기 때문에 일제는 이를 지우지 않을 수 없었다. 광개토대왕은 407년 후연을 정벌하고 위와의 완충지역을 남겨두기 위해 위성국인 북연을 설치하고 돌아왔다. 위는 장수왕을 도독요해제군사(都督遼海諸軍事)로 인정하는데, 요해는 요하 주변의 땅인 요하 북쪽의 유주와 남쪽의 평주를 의미하므로, 이는 위가 이 지역을 고구려의 영토로 인정하였음을 의미한다. 광개토대왕릉비에 후연 정벌의 명분이 기재되지 않고 간략히 전과만 언급된 것은 후연을 멸망시켰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정벌하더라도 왕실은 살려 놓는 것이 천자의 도리로 생각되고 있었는데, 고구려는 후연을 멸하고 위성국 북연을 세워 스스로 천자의 도리를 다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일제·중제 유사사학과 강단 유사사학의 주장처럼 백제를 정벌한 것이라면 백잔이 태왕의 은혜를 모르고 배반하여 토벌하였다라는 식의 명분이 삽입되었을 것이다.
고구려 초대 유주자사 진
고구려는 후연을 멸하고 북연을 세우면서 진번조선의 고토를 회복하고 요동고새 남쪽 영토도 새로 획득하였다. 덕흥리고분 벽에 유주자사 소속의 13개 군 태수들이 유주자사인 진(鎭)을 알현하는 내조도(來朝圖)가 그려져 있고 13군의 이름이 쓰여있다. 연군·범양·어양·상곡·광녕·대군·북평·요서·창려·요동·현도·낙랑의 12군은 명확하며, 나머지 하나는 대방으로 추정된다.
연군은 후연의 용성이고 대군은 태행산맥 서쪽이다. 따라서 이 유주 13군은 하북성에서는 북쪽은 영정하, 남쪽은 당하까지를 영역으로 하고 산서성에서는 대까지를 영역으로 한다. 통역관이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가 이 지역을 점령한 407년에는 현지인을 태수로 임명하였고, 鎭이 첫 유주자사임을 알 수 있다. 강단 유사사학은 鎭이 후연의 유주자사였다고 주장하나, 진이 국소대형이라는 고구려의 것이 분명한 관직을 역임했다는 점에서, 무의미한 주장이다. 고구려를 축소시켜 중국에 충성하려는 갸륵한 충성심의 발로로 보인다. 그들은 鎭의 관직명 중 중국의 것이 많아서 고구려의 유주자사가 아니라고 주장하나, 그들의 말대로라면 고구려 백제 신라의 왕들은 중국의 관작을 받았으므로 다 중국의 관료여야 한다. 고구려와 중국 왕조 사이 외교관계의 일환으로 중국 왕조가 고구려의 왕과 고구려 왕이 추천한 관료에게 중국의 관작을 수여하는 것이 상례였고, 현지인 통치의 편의를 위해 고구려가 중국 왕조에 적당한 관작을 요구하여 받았을 것이므로 강단 유사사학의 주장은 성립될 수 없다.
[광개토대왕 시 韓 부근 국경]
* ‘韓 백제 북부’는 고구려가 396년 점령한 영토로 韓태수를 임명하여 다스린다.
강단 유사사학은 태수래조도 묵서에서 유주부의 위치를 고구려의 국도가 아닌 洛陽에서 2300리라 기술하여 진이 중국인이라고 주장하나, ‘州治廣薊 今治燕國 (유주부는 넓은 계 지역을 관할하였으나, 지금은 연국을 모두 관할한다)’라는 문구가 진이 고구려인임을 생생하게 전해준다. 이 문구는, 서진 이후 유주가 薊를 중심으로 중역수 북쪽만을 관할로 하였지만, 고구려가 후연을 정복한 후에는 유주부가 서진의 유주는 물론 평주까지 후연의 모든 지역을 관할로 하였음을 기술한다. 낙양에서의 거리를 기록한 것은, 지금 영국이 정한 위도를 사용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고구려는 당시 전쟁이 일상적인 상황에서 고구려의 지리정보를 비밀로 유지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고구려는 초기 영정하까지 회복한 후 그 남쪽으로는 크게 영토를 확장하지 못했다. 광개토대왕이 중국을 일시적으로라도 거의 정복했던 연을 무너뜨리고 새로 그 영토를 점령했으니 고구려인들은 크게 기뻐했을 것이고, 초대 유주자사가 된 진이나 그의 후손들의 자부심 또한 대단했을 것이다. 그래서 무덤에 진이 업무했던 상황을 아주 사실적으로 그렸다.
강단 유사사학은 鎭의 관작이 허구였고 내조도(來朝圖)도 鎭의 상상이나 희망사항이라 주장하기도 하나, 그들의 주장이 전혀 근거없는 허구일 뿐이다. 그들은 그들처럼 남들도 쉽게 날조를 일삼는 줄 안다. 강단 유사사학의 소설에 부합하지 않는 사료가 나타나는 경우 그들의 상투적 반응은 그것이 날조라 억지쓰는 것이다.
덕흥리고분 묵서명은 “永樂十八年 太歲在무신(戊申)년, 12월 신유(辛酉)달, 25일 을유(乙酉)일에 무덤을 완성하여 옥구를 옮겼다”라 하는데 당시 晉의 역법에 의하면 12월 1일은 辛酉가 아니라 庚申이다. 강단 유사사학은 묘지명 기록자의 단순한 착오라 주장하나, 유력자 묘지명을 적으면서 달의 간지에 착오가 있다는 것은 거의 가능성이 없다. 해의 간지인 戊申, 12월의 간지(그 달 1일의 간지)인 辛酉, 날의 간지인 乙酉를 명시했다는 것은 간지를 고려하여 시신을 무덤에 안치하는 날을 잡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서쪽 벽에 ‘太歲在己酉二月二日辛酉成關此墪戶大吉吏’(己酉年 2월 2일 辛酉日에 완성하여 이 무덤의 문을 닫았으니 크게 길하리라)라 하여 무덤을 닫은 날을 명시하면서도 간지를 부기하고 있는데 역시 간지를 고려하여 택일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택일에 간지를 고려했다면 기록자의 착오가 있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12월 1일의 간지가 다르다는 것은 고구려의 독자적 역법이 있었던 증거로 보아야 한다.
고구려인이 3년상을 치렀으므로 鎭이 407년의 유주자사가 되기는 어렵다는 견해도 있을 수 있으나, 3년상은 사망 후 3년째 길일을 택하여 매장하는 것이므로 매장완료일인 409년 2월 2일로 사망일을 판단할 수는 없다. 409년에 매장을 하였다면 사망일은 407년의 어느 시점도 가능하다. 鎭은 고구려의 첫 유주자사로서의 책임감 때문에 노구에도 격무를 이어가다 부임 후 얼마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따라서 매장일을 이유로 鎭의 유주자사 취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태수래조도가 370년 전연이 망했을 때의 상황을 그린 것이라는 견해도 있으나, 당시 근초고왕이 낙랑태수로 인정되고 있으며 고구려가 전반적으로 백제에 밀리는 상황이었으므로 타당성이 없다.
5세기 고구려의 유주 전문 관료 동수
고구려가 이 지역을 480년대 초까지 유지하였다는 것은 안악3호분 묵서명에 의해서도 증명된다. 김일권의 판독문과 그 해석을 참고하고 일부를 수정하면 묵서명은 다음과 같다.
판독문: 永和十三年十月戊子朔卄六日癸丑, 使持節 都督諸軍事 平東將軍 護撫夷校尉 樂浪, 韓, 昌黎, 玄菟, 帶方太守 都鄕侯, 幽州 遼東 平郭 都鄕 敬上里, 冬壽, 字□安, 年六十九薨官.
해석: 永和 13년 10월 무자삭월 26일 계축일에, 使持節 都督諸軍事 平東將軍 護撫夷校尉이자, 樂浪, 韓, 昌黎, 玄菟, 帶方太守이자 都鄕侯이며, 幽州 遼東郡 平郭縣 都鄕 敬上里 출신인 冬壽는 字가 □安으로, 나이 69세에 관직 수행 중 사망하였다.
기존 견해는 樂浪과 昌黎 사이 한 글자를 舊나 相으로 보았으나 韓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낙랑군에 태수와 다른 관제를 설치했다는 근거는 없고, 후술하는 평양역 구내 무덤에서 韓태수가 명확히 기록되어 있으므로, 한 글자의 군은 韓으로 보아야 한다.
강단 유사사학은 안악3호분 묵서명의 동수(冬壽)가 『資治通鑑』에서 336년 前燕의 慕容皝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실패하여 고구려로 망명했다고 한 佟壽라고 한다. 그들은 묵서명의 ‘永和十三年’이 사마담(동진 목제)의 연호로서 357년을 가리킨다고 한다. 그러나 사마담은 영화란 연호를 356년까지 사용하였고 357년에는 승평이라는 연호를 사용한다. 그들은 고구려를 우스운 국가로 여기므로 고구려가 동진의 연호를 사용하였고 동진이 연호를 바꾸어도 모르고 그대로 사용하였다고 근거없이 주장한다. 우선 고구려가 당시 밀접한 관계가 아니었던 남조 동진의 연호를 사용하였을 가능성은 매우 적으며, 사용하였다 가정하더라도, 3년상을 하여 무덤을 닫는 시점은 사망일 후 최소 1년 2개월 최대 2년 2개월이 지난 후이므로, 연호가 바꿔진 지 최소 2년이 지난 시점(3년째 해)에서도 연호의 변경을 모른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리고 과거의 장례는 지금과 다르다. 그 의미가 훨씬 중요하다. 그리고 그 후손이 그 정도의 무덤을 축조할 정도의 힘을 가진 경우라면 연호를 다르게 적을 가능성은 전무하다. 강단 유사사학은 기본적 사실관계를 부정하고 소설을 창작한다. 고구려는 생존을 위해서라도 중국의 상황을 항상 살펴야만 했다. 동진의 연호를 사용했다면 연초에 반드시 확인하였을 것이다. 冬壽와 佟壽는 이름도 다르다. 강단 유사사학은 황해도에도 중국인 묘가 있다고 주장하여 일제·중제 유사사학에 충성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고 광분한다. 물론 佟壽가 모용황에 반기를 든 사람이었더라도, 그는 중국인이 아닌 선비집단의 일원이므로, 강단 유사사학의 말에는 맞는 것은 하나도 없고 그저 일제·중제 유사사학을 향한 무한한 충성심만 있을 뿐이다.
동수는 고구려인으로 413년 광개토대왕이 407년 정복한 하북성 지역에서 고구려 관리(요동 태수)의 아들로 태어난 사람이다. 그래서 유주 요동군 출신의 고구려인이다. 영화는 장수왕의 연호로 469년부터 사용되었다고 보면 481년이 영화 13년이다. 현시력에 의하면 481년도 10월 1일이 戊子일이고 고구려의 독자적 역법에 의해서도 戊子일로 추측된다. 동수가 역임한 관직은 고구려의 관직이다. 물론 사지절 도독제군사 평동장군 호무이교위 등이 위나라로부터 받은 관작으로 추측되지만 이는 고구려의 관리로서 장수왕이 위에게 요청하여 받은 것이므로, 실질상 고구려왕이 준 지위이다. 동수는 현지에서 태어나 우리말도 하고 현지어도 잘 하였으므로 낙랑 韓 창려 현도 대방 등 유주 지역 전문 관료로서 근무하다가 죽어서 가문의 묘지인 안악에 묻힌 것으로 추측된다.
벽화에 성상번(聖上幡)이 나온다 하여 왕릉이라 보는 견해도 있으나, 안악3호분은 동수의 무덤이다. 왕은 수도에 묻혔을 것이고, 고구려의 남쪽 변방에 묻힐 가능성이 적다. 3년상을 치르던 당시, 수도인 요양에서 멀리 떨어진 황해도에 부왕을 매장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수도가 환도성인 시기라면 더욱 힘들다. 환도성은 하북성 옥전현(玉田縣)이기 때문이다. 벽화의 글자는 聖자로 보기 어렵다. 고구려가 한창 강성한 시기여서, 지방관료인 동수의 행차가 왕처럼 보일 정도로 대단했고 그의 무덤도 규모가 컸다고 볼 수 있다. 성상번이 맞고 왕을 의미한다면 장수왕이 동수가 관할하던 곳으로 순시했을 때 왕을 호위한 장면을 그린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동수가 광개토대왕이 407년 정복한 후연 고토에서 계속 관료로 활동하다 죽었다는 것은 이 지역을 고구려가 480년대 초까지 계속 영유하였음을 의미한다. 동수가 관직 수행 중 사망하였다는 것은 481년 10월 동성왕의 공격 시에 사망한 것을 의미한다.
韓태수를 설명할 수 없는 강단 유사사학의 뒤죽박죽 소설
영화가 장수왕이 469년부터 사용한 연호이고 480년대 초까지 고구려가 이 지역을 다스렸다는 것은 평양역구내무덤의 벽돌로도 확인된다. 평양역구내무덤은 벽돌로 바닥과 벽체, 천장을 축조하는 일반적인 벽돌무덤과 달리, 벽체 아랫부분만 벽돌로 쌓고, 벽체 윗부분과 천장부분은 돌로 쌓았으며 무덤에는 석회를 사용했다. 이 무덤을 축조한 벽돌 가운데 측면에 글자가 양각으로 새겨진 벽돌이 발견되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永和九年三月十日遼東韓玄菟太守領佟利造 (영화구년 삼월 십일 요동 한 현도태수가 명령하여 동리가 만들었다)
韓태수가 있고, 한태수, 요동태수, 현도태수를 임명할 수 있는 나라는 본고에서 제시된 시기의 고구려밖에 없다. 韓백제의 북쪽을 韓이라 하여 고구려가 韓태수를 임명하였다. 동수가 낙랑 韓 창려 현도 대방태수를 역임한 것과 같이, 이 묘의 묘주(묘를 만든 후손일 가능성도 있다)도 韓 요동 현도태수를 역임하였다. 강단 유사사학의 영화9년은 353년인데, 353년에는 그들이 날조한 소설에서도, 한반도에서 중국세력이 사라진 상태이므로, 강단 유사사학은 韓태수를 설명할 수 없다. 前燕 등 다른 나라에 韓이라는 군은 없다. 따라서 영화가 동진의 연호라는 강단 유사사학의 주장은 성립할 수 없다. 또 강단 유사사학은 ‘永和 9年 3月 10日에 遼東·韓·玄菟太守領인 佟利가 조영함’이라고 해석하여 太守領이라는 새로운 관직을 근거도 없이 창설하고, 묘주 이름을 벽돌 하나의 측면에 쓴다는 기이한 상상력을 발휘하여 그들의 비학문성 수준을 명확히 표현한다.
강단 유사사학은 韓태수가 명확히 표시되었음에도 그들의 유사사학성을 자랑하기 위해, 영화를 동진의 연호로 보고 영화가 쓰인 벽돌과 그 벽돌이 사용된 무덤을 중국 낙랑인들의 것이라 주장한다. 강단 유사사학에 의하면 낙랑군은 한반도에서 없어지지 않는다. 원래 없던 것이니 313년에 거짓으로 없앴다고 해도, 없앨 수가 없는 것이다. 강단 유사사학은 佟利를 묘주로 보나, 동리는 벽돌이나 무덤을 만든 기술자이다. 황해도 신천에서도 측면에 ‘永和八年二月四日韓氏造塼’이라 쓰인 벽돌이 발견되었고, ‘--寺皃造’ ‘□□□年大歲□□孫氏造’ ‘--年十九日□揚氏造記’ ‘□□楊氏造記’ ‘五官作’ ‘□月廿九日王氏造’ ‘□其三年三月□二日王氏造’ 등등 벽돌이나 무덤 기술자로 추정되는 사람을 표시한 벽돌이 많이 발견되었다. 벽돌에 기술자들이 자신들의 이름을 표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장무이묘의 무신년
장무이묘의 벽돌로부터 무덤을 무신년에 만든 것으로 볼 수 있다. ‘使郡帶方太守張撫夷塼’ 등의 명문으로부터 묘주가 고구려 유주의 어양에서 태어나 대방태수를 지냈던 장씨임을 알 수 있다. 강단 유사사학은 대방태수와 撫夷를 허구의 자칭이라고 주장하나 무덤에 허구의 관직을 적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撫夷는 고구려 왕이 위로부터 받아 준 작호이다.
무신년은 고구려가 후연을 정복한 이후의 무신년이다. 따라서 408년도 가능하나, 덕흥리고분의 태소래조도에 의하면 고구려는 초기 현지인을 태수로 임명하였으므로 408년으로 보기는 어렵다. 위는 488년과 490년 백제와의 전쟁에서 대패한 이후 쇠락의 과정을 겪는다. 또한 523년에는 6진의 난이 일어나는 등 거의 망하는 단계에 있었다. 따라서 528년에 무덤이 만들어졌다면 위로부터 받은 撫夷를 자랑스러워 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568년이나 628년도 북제의 위상, 당과 고구려의 대치관계상 북제나 당으로부터 작호를 받았더라도 그것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생각할 가능성은 적다. 따라서 장무이묘의 무신년은 468년으로 추정할 수 있다.
강단 유사사학은 477년인 영화9년명 벽돌이 발견된 평양역구내무덤 등을 근거로 널방 천장에 석개를 하는 무덤을 고구려의 4세기 무덤으로 보면서, 장무이묘도 같은 형식의 무덤이므로 348년으로 본다. 고구려의 연호를 무조건 부정하고, 평안도는 낙랑군 황해도는 대방군이라는 일제의 교시에 근거하여, 평안도와 낙랑군의 큰 무덤들은 모두 중국계 유이민의 것이라는 소설을 창작하는 그들은 진정한 유사문학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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