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한국학 기초 낭독 38

역사회복 2026. 4. 13.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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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고구려 연호의 변동

 

중국 공산당 정권 수립 후 북경부터 요양까지 고구려 유물 유적이 대규모로 발굴되었다. 모택동 등 공산당 지도부도 요하 동쪽부터는 조선이라 생각했으나, 그러한 생각과 달리 본고의 주장처럼 북경부터 고구려 영토인 증거들이 속속 드러났다. 그래서 중국은 1980년부터 본격적으로 역사 날조를 시작했다. 북경부터 요양까지의 지역에서 발견된 고구려 분묘를 서진이나 삼연(전연, 후연, 북연)의 묘로 날조했다. 서진과 삼연은 영정하 이남에 있었으므로 영정하 이북의 고구려 영토에 이들의 분묘가 있을 이유는 전혀 없다. 그들은 조양의 분묘는 도굴범이 벽화를 불태웠다고 사기친다. 벽화가 고구려 벽화와 완전히 같거나 벽화에 있는 글자가 고구려의 것임을 증명하였을 것이기 때문에 벽화를 태웠을 것이다.

서진이나 삼연의 것으로 날조한 분묘에서 발견된 연호 자료를 활용할 수 있다면 고구려의 연호를 거의 완벽하게 알 수 있을 것이지만, 중제 유사사학이 이들 자료를 은폐하거나 날조하여 이용할 수 없으므로, 본고에서는 평안도와 황해도의 분묘에서 발견된 기년명 벽돌을 중심 자료로 하여 고구려의 연호를 추정한다.

 

(1) 강단 유사사학의 기년명 벽돌 연대 날조

 

강단 유사사학과 강단 유사고고학은 평안도와 황해도를 낙랑군과 대방군 지역으로 보아 이 지역에서 발견되는 유적과 유물의 주체를 중국인이나 중국계 이주민이라 주장하며, 벽돌에 쓰인 연호를 중국 왕조의 것으로 보고 벽돌이 출토된 고분의 연대를 추정한다. 강단 유사사학은 있지도 않았던 낙랑군이 4세기 전반기에 어딘가로 떠난 후에도 평안도와 황해도에는 중국인들이 남아서 무덤을 만들 때 중국의 연호를 썼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엔 일제·중제 유사사학의 소설을 향한 무한한 충성심 외에는 근거가 전혀 없다. 강단의 연대 추정 내용은 다음과 같다.

 

광화5년명 전, 황해도 봉산군, 182(후한 靈帝 光和 5)

흥평2년명 전, 평안도 대동군, 195(후한 獻帝 興平 2)

정시9년명 전, 황해도 신천군, 248(조위 齊王 正始 9)

가평2년명 전, 황해도 신천군, 250(조위 齊王 嘉平 2)

감로명 전, 황해도 신천군, 256~259(조위 高貴鄕公 甘露 연간)

경원원년명 전, 황해도 신천군, 260(조위 元帝 景元 원년)

경원3년명 전, 황해도 봉산군, 262(조위 元帝 景元 3)

태시4년명 전, 황해도 신천군, 268(晉 武帝 泰始 4)

태시7년명 전(2), 황해도 봉산군, 271(晉 武帝 泰始 7)

태시10년명 전(2), 황해도 봉산군과 평안도 평원군, 274(晉 武帝 泰始 10)

태시11년명 전, 황해도 봉산군, 275(晉 武帝 泰始 11)

함녕원년명 전(2), 황해도 신천군, 275(晉 武帝 咸寧 원년)

함녕5년명 전, 황해도 신천군, 279(晉 武帝 咸寧 5)

태강원년명 전(2), 황해도 신천군과 봉산군, 280(晉 武帝 太康 원년)

태강3년명 전, 황해도 봉산군, 282(晉 武帝 太康 3)

태강4년명 전(5), 황해도 신천군 봉산군 등, 283(晉 武帝 太康 4)

태강7년명 전(2), 황해도 신천군, 286(晉 武帝 太康 7)

태강9년명 전, 황해도 안악군, 288(晉 武帝 太康 9)

원강원년명 전, 황해도, 291(晉 惠帝 元康 원년)

원강3년명 전, 황해도, 293(晉 惠帝 元康 3)

원강5년명 전, 황해도 안악군, 295(晉 惠帝 元康 5)

태안2년명 전, 황해도 신천군, 303(晉 惠帝 太安 2)

영흥3년명 전, 황해도 신천군, 306(晉 惠帝 永興 3)

영가명 전, 황해도 신천군, 307~312(회제 永嘉 연간)

영가7년명 전, 황해도 신원군, 313(회제 永嘉 7)

건흥4년명 전, 황해도, 316(민제 建興 4)

태녕5년명 전, 황해도 신천군, 323~325(동진 明帝 泰寧 연간)

함화10년명 전, 황해도 신천군, 335(동진 成帝 咸和 10)

건무9년명 전, 황해도, 343(후조 石虎 建武 9)

건원3년명 전, 황해도 신천군, 345(동진 康帝 建元 3)

장무이명 전, 황해도 봉산군, 348(동진 穆帝 永和 4)

건무16년명 전, 황해도 신천군, 350(후조 石虎 建武 16)

영화8년명 전, 황해도 신천군, 352(동진 穆帝 永和 8)

영화9년명 전, 평양시, 353(동진 穆帝 永和 9)

건시원년명 전, 황해도 신천군, 407(후연 모용수 建始 원년)

 

(2) 강단 유사사학 연대 추정의 사기성

 

중국 연호의 불가능성

평안도와 황해도가 낙랑군과 대방군 지역이 아니었다는 것은 논외로 한다. 강단이 계속 억지를 부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주장엔 근거가 전혀 없기 때문에, 낙랑군과 대방군이 중역수 남쪽 지역이었다는 가장 중요한 증거 없이도 그들 주장은 거짓임이 명백히 드러난다.

晉 武帝의 태시는 10년까지 있다. 그러나 태시는 11년이 있으므로 진 무제의 연호일 수가 없다. 그리고 태시 11년은 중국의 어떤 왕조에도 없는 연호이다.

동진 明帝泰寧4(326) 226일까지 있다. 그러나 태녕은 5년이 있으므로 동진 명제의 연호일 수 없다. 그리고 태녕 5년은 중국의 어떤 왕조에도 없는 연호이다.

동진 成帝咸和9년까지 있다. 그러나 함화는 10년이 있으므로 동진 성제의 연호일 수 없다. 해의 간지가 을미로서 함화 10년은 중국 어느 왕조에도 없는 연호이다.

동진 康帝建元2년까지 있다. 그러나 건원은 3년이 있으므로 동진 강제의 연호일 수 없다. 해의 간지에 가 있는 해로서 건원 3년은 중국 어느 왕조에도 없는 연호이다.

후조 石虎建武14년까지 있다. 그러나 건무는 16년이 있으므로 후조 석호의 연호일 수 없다. 건무 16년은 후한 유수를 제외하고는 중국 어느 왕조에도 없는 연호인데, 전축분 축조 시기를 고려하면 건무는 후한 유수의 연호가 될 수 없다.

동진 穆帝永和12년까지 있다. 그러나 동수묘에 영화 13년이 나오므로 영화는 동진 목제의 연호일 수 없다. 그리고 영화 13년은 중국의 어떤 왕조에도 없는 연호이다.

원강5년명 벽돌엔 元康五年八月十八日乙酉造라 쓰여 있는데, 그들이 주장하는 295818일은 丙子일이어서 원강이 晉 惠帝의 연호가 아님이 입증된다. 晉 惠帝 이외에는 전한의 유순이 BCE 65년부터 5년간 원강을 사용하였으므로 평안도와 황해도 벽돌의 원강은 중국의 연호일 수 없다.

함녕5년명 벽돌엔 咸寧五年三月六日己丑造라 쓰여 있는데, 그들이 주장하는 27936일은 己巳일이어서 함녕이 晉 武帝의 연호가 아님이 입증된다. 진 무제의 함녕 5년 이외에 중국의 함녕 5년은 없다.

태강원년명 벽돌들엔 각각 太康元年三月六日太康元年三月八日王氏造라 쓰여 있는데, 태강 원년은 개원 시기가 429일이므로 태강이 晉 武帝의 연호가 아님이 입증된다. 진 무제 이외에는 요나라에서 태강이 사용되었으므로 평안도와 황해도 벽돌의 태강은 중국의 연호일 수 없다.

손환일이 2008년 한국고대사학회 103회 정기발표회에서 소개한 대방군 벽돌 신자료에 의하면 황해도 신천군에서 발견된 永嘉六年三月十四日辛未造라 적힌 벽돌이 있는데, 그들이 주장하는 312314일은 乙未일이어서, 영가가 의 연호가 될 수 없다. 진 회제의 영가 6년 이외에 중국의 영가 6년은 없다.

강단 유사사학은 正台正始로 우기면서 중국 왕조의 것이라 하나, 직접 본 사람이 正台라 하므로 正台로 보아야 하고 正台는 중국 왕조에는 없는 연호이다.

 

전축분 벽돌에서 발견된 연호 20개 중 무려 11개의 연호가 결코 중국의 연호가 될 수 없음이 입증되는데 사이비들은 이들 연호가 중국의 연호라고 우긴다. 광개토대왕릉비와 서봉총 은합, 금동불상 광배 등에 의해 고구려가 연호를 사용하였음이 입증되고, 발견된 연호 20개 중 결코 중국의 연호가 될 수 없는 것이 11개나 되며, 각 왕조는 같은 연호를 사용한 경우가 많으므로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발견된 연호는 고구려의 연호로 보는 것이 정상적임에도, 강단 유사사학은 동북공정에 대한 충성심을 표현하기 위해 중국 왕조의 연호라고 억지를 쓴다.

 

강단 유사사학 주장의 억지성

그들의 주된 억지는 연호 변경을 모르고 구 연호를 사용하였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흥평 2, 가평 2, 경원 원년, 경원 3, 함녕 원년, 태강 원년, 태강 3, 원강 원년, 원강 3, 태안 2, 건원 3, 영흥 3, 건시 원년 등의 연호는 어떻게 연호 변경을 알고 바뀐 연호를 사용하였는지 이해할 수 없게 된다. 필자가 원년 이외에 2년과 3년을 포함하는 이유는 동수묘의 영화 13년을 그들이 연호변경을 모르고 영화 13년이라 썼다고 억지 쓰기 때문이다. 동수는 영화 13년에 전사하였는데, 당시의 3년상 관습상 영화 15년에 무덤을 닫는다. 즉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영화 15년은 승평 3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벽돌로 대규모의 무덤을 만들 정도의 지배층이라면 연호나 날자의 착오를 용인하지 않는다. 연호 변경을 알 수 없었다면 연호를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조선총독부의 소설에 대한 무한한 충성심을 표현하기 위해 그들은 말도 안 되는 억지를 쓰면서 조선총독부의 소설을 지키고 있다. 억지의 백미는 태강 원년에서 드러난다. 그들은 3년이 지나도 연호 변경을 모른다고 했다가, 태강은 연호가 바뀌지도 않았는데(개원 시기가 429) 3월에 태강이라는 연호를 썼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애절한 충성심에 눈물이 앞을 가린다.

김미경과 안정준은 건시원년명 벽돌의 건시를 혜제 시 司馬倫이 찬탈하여 19일부터 49일까지 사용한 연호로 보아 301년이라 주장한다. 연호 변경을 모르고 기존 연호를 사용한다고 끈질기게 주장하다가, 갑자기 3개월 반란자의 연호를 사용했다는 그들의 자기모순은 그 탁월성이 유사사학계의 으뜸이라 아니할 수 없다.

 

연호의 추종 왕조 설정과 그 수시 변동

연호의 추종 왕조도 소설이다. 그들은, 그들 소설에 의해 평양에서 낙랑군이 없어진 후인 313년 이후 중국인들이, 진과 동진의 연호를 쓰다가, 343년에는 후조의 연호를 쓰다가, 345년에는 다시 동진의 연호를 쓰다가, 350년에는 다시 후조의 연호를 쓰다가, 352년에는 다시 동진의 연호를 쓰다가, 407년에는 다시 후연의 연호를 쓴다고 한다. 동진은 북조를 통제하기 위한 외교적 고려의 대상이 될 뿐이지 고구려가 복종하는 체 할 대상은 될 수 없으므로 고구려가 동진의 연호를 사용한다는 것은 개연성이 거의 없고, 중국인들이 사용하였다 하더라도 멀리 있는 동진의 연호를 사용할 이유를 찾기 어렵다. 왜 후조의 연호를 썼는가에 대해 여호규는 한편 340년대에 後趙의 연호가 많이 나오는데, 이를 후조 방면의 망명객이나 후조와 교섭하던 재지세력과 연관된다고 해석하기도 한다.”라고 하면서 주석이나 근거는 전혀 제시하지 않는다. 이는 그의 주장에 아무런 근거가 없음을 나타내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고구려의, 강단의 거짓말에 의하면 중국계 망명인들의, 연호 추종이 수시 변동인 이유는 그 누구도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여호규는 건시 원년을 ‘407(동진)’이라 표시한다. 후조의 연호를 사용한다는 것도 겨우 거짓말 하면서 넘어갔는데, 건시 원년(후연의 연호에 의해서 407) 관련하여 후연의 연호를 사용한 이유를 또 조작하는 것은 모양이 안 난다고 그는 생각한 것 같다. 이미 언급하였듯이 김미경과 안정준은 건시원년명 벽돌의 건시를 혜제 시 司馬倫이 찬탈하여 19일부터 49일까지 사용한 연호로 보아 301년이라 주장한다. 이들은 추종 연호의 수시 변동을 조금이라도 완하하기 위해 후연이라도 추종 대상에서 제외하려고 하는 것 같다. 거짓말과 자기모순을 활용하는 그들의 조선총독부 소설을 위한 살신성인은 가련하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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