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한국학 기초 낭독 37

역사회복 2026. 4. 13. 11:08

https://youtu.be/xod22TQbW_Y

 

12. 고구려 수도의 변동

 

고구려 수도의 변동은 다음과 같다. BCE 37년 홀본(북경시 평곡구 성산), CE 12, 위나암성(천안평야 북쪽 도산 자락), 209년 환도성(당산시 옥전현), 247년 평양(요양), 342년 환도성, 343년 황성(집안), 427년 평양(요양), 586 장안(금주), 영류왕 시 평양(요양). 즉 고구려의 수도는 한반도 내에 있었던 적이 없다.

 

(1) 환도성(당산시 옥전현)

 

고구려는 BCE 37, 홀본(북경시 평곡구 성산)에서 건국하고, CE 12년 독립하면서 위나암성(천안평야 북쪽 도산 자락)으로 수도를 이전하였다. 산상왕은 198년 환도성을 쌓고, 209년 위나암성에서 환도성으로 천도하였다. 산상왕은 후한 말 혼란기를 이용하여, 서남쪽으로 진출하기 위해 서쪽으로 천도하였을 것이다.

동천왕이 관구검에 패한 후 247년 환도성에서 평양성으로 천도한 후, 고국원왕은 3422월 환도성을 수리하였고 8월에는 평양성에서 환도성으로 옮아 거처했다. 고국원왕은 북조의 혼란기를 이용하여, 서남쪽으로 진출하기 위해 서쪽으로 천도하였을 것이다.

삼국유사』 「王曆편은 고국원왕이 안시성 즉 환도성으로 이도하였다고 한다. 삼국사』 「잡지第六압록수 이북의 아직 항복하지 않은 11성에서 안시성은 옛 안촌홀이다. 혹은 환도성이라고도 한다라고 한다. 한서』 「지리지요동군편은 대요수(조백하)는 남쪽으로 흘러 안시에 이르고 바다로 들어간다고 한다. 따라서 안시현은 지금의 옥전현(玉田縣)으로 추정되고 환도성은 옥전현 북부에 있는 산성으로 추정된다.

강단 유사사학은 집안의 산성자산성을 환도성이라 하나, 출토된 구획선이 없는 연화문 와당의 연대를 통해 궁전지의 조성 연대를 추정하면 빨라도 5세기로 추정된다고 하여, 그들 주장에 전혀 증거가 없음을 자인하고 있다.

조위가 동천왕이 환도성에서 도망가자 그를 추격하는데, 북옥저(중국 사서는 동옥저라 함)를 지나 천여리를 가서 관구검(무구검) 기공비를 세웠고, 그것이 집안 판석령에서 발견되었으므로 집안이 환도성이 되는 것은 불가능함에도 강단 유사사학은 일제와 중국의 침략적 민족주의에 충실히 복무하기 위해 눈뜨고도 못 본 체 한다. 조위군은 환도성이 한사군 설치 시 낙랑군 동부도위 치소였다고 진수처럼 착각하여 환도성에 불내(不耐)성이라 새기고 돌아갔다.

 

(2) 평양성(요양)

 

동천왕은 관구검에 패한 후 247년 환도성에서 평양성으로 천도하였다. 장수왕은 고국원왕이 343년 환도성에서 황성으로 천도하였는데 427년 황성에서 평양으로 천도하였다. 동천왕은 관구검에 패해 후방으로 물러난 것이고 장수왕은 광개토대왕 때의 국력 회복으로 산중에서 들로 나온 것이다. 역도원이 6세기 초에 쓴 수경주에서, 고구려 사신으로부터 들었다 하면서 패수는 서쪽으로 흘러 고구려 수도를 경과하고 이후 서북으로 흐른다고 주장했는데, 태자하는 요양을 서쪽으로 지난 후 서북으로 흐른다. 김부식도 평양(요양)은 지금의 서경인 것 같다고 하였다. 따라서 동천왕과 장수왕이 수도로 삼은 평양은 지금의 요양이다.

강단 유사사학은 평양이 지금의 평양이라 하는데 대동강은 평양을 지나 남서로 흘러가므로, 그들이 존경하는, 예맥조선의 패수와 고구려의 패수도 구분 못하는 역도원의 말과도 맞지 않는다. 김부식이 묘청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군사들을 집결시킨 곳이 현재의 평양보다 최소한 직선거리 70km이상이므로 현재의 평양이 고구려의 수도였다는 주장은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강단 유사사학의 소설 속 낙랑군은 313년까지는 지금의 평양에 존재해야 하므로 427년의 장수왕은 지금의 평양에 천도했다고 날조를 해도 되지만 동천왕의 평양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동천왕이 조위에 쫓겨서 조위 영토인 낙랑군 바로 코앞인 대동강 북쪽으로 수도를 옮긴다고 한다. 강단 유사사학의 경이스런 소설적 상상력에 고개가 절로 수그러진다. 그들의 소설에서 낙랑군은 대동강 남쪽에 있다. 강단 유사사학 종사자들도 이러한 소설에는 낯이 뜨거웠는지 동천왕의 평양은 지금의 평양과 다른 곳이라는 새로운 소설을 창작하기도 하고, 동천왕은 천도를 아예 하지 않았다는, 그들의 주특기인, 소설에 불부합하는 사료 부정하기를 시전하기도 한다. 일제 유사사학을 향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실된 충정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3) 황성(집안)

 

고국원왕은 34211월 전연에 의해 환도성이 함락되어 3437월 환도성에서 평양 동쪽의 황성으로 천도하는데, 김부식은 황성이 요양 동쪽 목멱산중에 있다고 한다. 황성은 광개토대왕릉이 있는 집안이다. 집안은 이때 최초로 고구려의 도읍이 된다. 동국여지승람도 이 지역을 황성평이라 했다고 한다. 따라서 집안은 고국원왕이 천도한 황성임이 입증되었다고 할 것이다. 고국원왕이 평양이 아닌 산중의 황성으로 천도한 것은, 환도성이 두 번째로 함락되자 수도의 방어력에 더 큰 고려를 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강단 유사사학은 집안 평지성이 유리왕이 도읍한 국내성이라 주장하나, 최근 중국의 발굴 결과 축성연대가 320년 이상 올라가지 않는다고 알려졌다. 강단 유사사학은 집안 산성자산성이 환도성이라 주장하나, 전술하였듯이 그 조성연대가 5세기이다. 즉 집안은 국내성이나 환도성이 될 수 없고, 황성이다.

 

(4) 장안성(금주)

 

552년 양원왕은 장안성을 쌓았다. 평원왕은 586년 평양성에서 장안성으로 천도하였다. 당서는 평양성은 장안이라 불렸다고 하고, 고기는 평양으로부터 장안으로 옮겼다고 하므로 김부식은 두 성이 동일한지 다르다면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는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장안성은 평양과는 다르다. 중국인들은 고구려가 줄곧 평양을 수도로 하여 고구려의 왕이 있으면 평양이라고 불렀다. 장안성은 지금의 금주인데, 고구려가 중국 동북부의 대륙을 경영하기에는 평양(요양)이 너무 멀어 금주로 도읍을 옮긴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의 국력이 강화되면서 집안-요양-금주로 수도가 계속 서쪽으로 이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장안성이 지금의 금주임은 수나라의 2차 침공에서 알 수 있다. 수나라 군사는 611년 탁군에 모였다. 수군은 6121월 출발하면서 좌 12군은 누방 장잠 명해 개마 건안 남소 요동 현도 부여 조선 옥저 낙랑의 길로 나가고, 12군은 점제 함자 혼미 임둔 후성 제해 답돈 숙신 갈석 동이 대방 양평의 길로 나가기로 하였다. 군은 요동성을 비롯한 주변의 각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자 각 성들을 포위하고 남은 군사들을 장안(금주) 쪽으로 보냈다. 우문술은 부여도로, 우중문은 낙랑도로, 형원항은 요동도로, 설세웅은 옥저도로, 신세웅은 현도도로, 장근은 양평도로, 조효재는 갈석도로, 최홍승은 수성도로, 위문승은 증지도로 나와서 모두 9개군 30만이 압록수 서쪽에 모였다. 수군이 가는 길 이름에 수성 증지 점제 함자 등등 낙랑군의 현 이름이 나오는데, 강단 유사사학은 이곳에 열거된 여러 방면의 길들은 당시 실재하는 것은 아니고, 과거의 낙랑 지역을 회복한다는 명분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주장한다. 수나라 병사들이 대단한 역사학자들이어서 수천리 떨어진 옛날 낙랑군의 현 이름을 알고 있으므로, 그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서 길 이름을 그렇게 하였다고 한다. 무시무시한 상상력의 소유자들이다. 수나라와의 경계였던 고구려 영토에 이들 지명이 있다. 수군의 길 이름만으로도 낙랑군 한반도설은 끝장난다. 양광(수양제)의 조서가 아니라 고구려 왕의 조서에 나왔었다면 고구려 왕이 길이름을 날조했다고 주장했을 텐데, 양광의 조서니 그러지 못하고 수나라 병사들을 어마어마한 역사학자들로 만들어버리는 가공할 신공을 발휘한다. 신공왕후의 신공보다 한 수 위라고 하겠다.

수의 별동대 30만이 요동성에서 출발한 날은 611일 이후이다. 양광은 전황에 진전이 없자 611일 장수들을 죽일 수도 있다고 협박하였다. 그러자 장수들이 별동대라는 대책을 양광에게 건의했을 것이고, 양광이 이를 승인하는 과정을 거쳐 별동대 파견이 결정되었을 것이며, 별동대의 조직과 보급대책의 실행에도 시간이 필요하므로, 611일 이후, 10일 정도 후에나 별동대가 출발하였을 것이다. 수가 퇴각하며 살수에 도착한 것은 724일이다. 후퇴 시 살수에서 대패한 후 450리를 하루낮 하룻밤에 행군하여 압록수에 이르렀다고 한다. 보병은 다 죽거나 도망가고, 기병만 살아남아서 후퇴했으므로 450리를 하루낮 하룻밤에 갈 수 있었을 것이다. 압록수인 난하에서 450리 떨어진 살수는 160km 거리의 연태하(煙台河)로 추정된다. 연태하는 화살처럼 강이 곧다. 당시 고구려의 요동성은 보정시 동쪽 창주시 북서쪽이다. 요동성에서 요양까지의 거리는 700km이다. 별동대의 출발일을 620일경으로 본다면 30여일 정도에 950km 이동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수 많은 강과 고구려군의 저항, 고구려 수도에서 대치한 시간, 대능하와 요하 유역은 여름에 진흙길로 변한다는 사실, 살수까지 퇴각 시의 속도 저하 등을 고려하면 장안이 요양일 수는 없다. 금주는 요동성에서 500km이므로 30여일 정도에 550km 이동할 수 있어서, 장안을 금주라 가정하면 날자가 맞아떨어진다. 따라서 장안은 금주이고, 내호아의 해군이 도착한 패수는 지금의 소릉하(小凌河)로 볼 수 있다.

장안성을 요양으로 보고 요하를 압록수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요하는 요양에서 50km 떨어져 있으므로 살수에서 450리를 행군하여 압록수에 이르렀다는 삼국사의 기록과 부합하지 않는다. 강단 유사사학은 현재의 압록강과 평양을 고구려의 압록강과 평양으로 보는데, 지금의 평양은 고구려의 한성임이 각자성석에 의해 증명되며, 수군 별동대가 불가능한 이동거리를 움직여야 하므로 논할 가치도 없다. 강단 유사사학은 명백한 증거가 나와도 우긴다. 그들은 실증에 의해 역사를 연구하는 연구자가 아니라 실증과는 무관하게 일제 유사사학의 교시를 되풀이하는 앵무새이다.

영류왕이 당에 봉역도를 주고, 경관을 헐어버린 것으로 보아 영류왕은 장안성에서 요양으로 옮아가서 거주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무서워서 옮긴 것이므로 정식으로 천도한다는 말도 못하고 옮겼을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가 망할 때의 수도는 평양(요양)이다.

 

(5) 강단 유사사학의 고구려 수도에 관한 소설

 

고구려 수도를 알지 못하면 우리 역사를 이해할 수 없다. 삼국사는 고구려는 처음에 중국 북부 지역에 있다가, 곧 점점 동으로 패수(浿水)의 근처로 옮겨갔다고 기술한다. 고구려는 북경 동북쪽에서 건국하였고, 요양이 수도일 때 멸망하였다는 본고의 주장은 삼국사의 기술과 일치한다.

강단 유사사학은 고구려가 압록강 중류에서 건국하였고 평양에서 멸망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들에 의하면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동한 것이 되어 삼국사의 기술과 완전히 다르다. 홀본이 환인 오녀산성이라는 주장의 근거는 전혀 없다. 그들은 국내성이 집안 평지성이고 도읍지였다고 주장하나 삼국사는 국내성 축조가 342년이라 하므로 그들의 주장은 소설에 불과하다. 국내(나라들=천안평야)에 있는 위나암성이 도읍지였고 국내성은 도읍지가 아니었다. 강단 유사사학은 집안 평지성이 유리왕이 도읍한 국내성이라 주장하나, 최근 중국의 발굴 결과 축성연대가 320년 이상 올라가지 않는다. 그들은 집안 산성자산성이 환도성이라 하나, 궁전지의 조성 연대가 빨라도 5세기라 스스로 주장하고 있어 그들 주장의 무근거성을 자인하고 있다.

집안이 환도성이라면 집안에서 발견된 관구검기공비가 설명되지 않는다. 조위는 환도성에서 북옥저를 지나 천여리를 가서 관구검기공비를 세웠기 때문이다. 관구검기공비 발견 위치로 환도성이 집안이라는 주장은 소설임이 드러났음에도 강단 유사사학은 대중은 모르겠지 하면서 함구하고 있다.

강단 유사사학은 동천왕이 평양(요양)으로 천도한 사실에 대해선, 그들 소설상 평양은 현재의 평양이고 당시의 낙랑군이 현재의 평양에 있으므로, 근거도 없는 갖가지 소설을 양산하여 그들이 소설가임을 공표하고 있다.

343년 집안이 실제로 고구려의 수도가 되자 그들은 이 때의 수도는 집안이 아니라는 코미디를 발산한다. 장안(금주)이 수도가 되자 이 때의 천도를 부인하기 위해 강단 유사사학은 평양 신시가지설을 주장한다.

전술하였듯이 묘청의 난 진압과정으로 볼 때 고구려의 평양은 현재의 평양이 아님이 확실하므로 그들의 모든 주장은 소설도 되지 못한다. 고구려 수도에 관한 강단 유사사학의 주장은 전부 거짓말이며 아무런 근거도 없다. 그들은 오직 일제의 교시를 수호하고 고구려를 압록강 중상류의 소국으로 묶어놓기 위해 고구려의 수도에 대해 소설을 쓰고 있을 뿐이다. CE 14년 고구려가 현도군을 점령한 이래 북경은 고구려의 영토였고, 광개토대왕의 후연 정벌 이후 당하까지 고구려의 영토였다. 고구려의 중국 북동부 강역을 부인하고 평안도와 황해도를 중국 땅으로 만들기 위해 강단 유사사학은 오늘도 조선총독부의 소설에 충성맹세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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