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왜부여(=예부여=비류백제)
(1) 예부여의 건국과 동부여와의 구별
『삼국사』의 부여는 두 나라이다
『삼국사』에는 두 개의 부여가 등장한다. 하나는 추모가 도망쳐오고 유화부인이 있던 동부여이다. 동부여는 유화가 사망하자 태후의 예로 장례를 치르고 추모는 감사를 표한다. 고구려 초기 등장하는 부여는 동부여이다. 그 왕 대소가 금와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대소가 죽고 일부는 갈사국을 세우고 나머지는 고구려에 투항한다. 이는 광개토대왕릉비문의, 동부여가 속민이었다는 기술과 일치한다. 갈사국도 68년 고구려에 복속한다.
111년 漢의 낙랑군을 공격하고, 121년 고구려가 현도군을 공격할 때 漢을 구원하고, 167년에 현도군을 공격하는 부여는 韓 지역 북쪽의 부여이다. 본고에서는 이 부여를 왜부여(=예부여=비류백제)라 명명한다. 위의 전투 사실에서 예부여의 위치는 낙랑군 현도군과 가까운 지역임을 알 수 있다. 동부여는 이들 군들과는 고구려로 분리되어 있다. 121년 10월 태조왕은 동부여에 가서 태후의 사당에 제사 지내는데, 121년 12월 현도성 전투에서 동부여가 적국이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강단 유사사학은 이러한 상식적 의문에 대한 답변 없이 모두 같은 부여라고 주장한다. 사서들이 부여에 동부여와 예부여를 뒤섞어 기술하고 있는 것은, 비류백제가 스스로를 백제와 구별하여 부여라 자칭하였는데, 후세인들이 비류백제가 온조백제로부터 독립하였음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비류백제는 황하 하류 왜를 기반으로 건국
동부여는 CE 22년 고구려에 의해 망했다. 비류계 세력은 BCE 6년 소서노 사망 시 온조계에 의해 숙청된다. 온조 정권에서 버림 받은 비류계 세력이 비류 후손을 중심으로, 대방고지(후에 대방군이 되는 지역)가 황하의 수류변동으로 황하에 의해 온조백제와 격리되자 독립하였다. 이들이 부여를 국호로 한 것은 당시 동부여가 망한 상태였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비류백제의 건국은 CE 22년 이후이다. 『후한서』는 CE 49년에 부여가 조공한 후 해마다 사절이 왕래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예부여의 건국은 22년에서 49년 사이의 어느 시점이라 추측할 수 있다.
왜부여가 본래 현토군에 속해 있었고 漢 말 공손씨에 복속했다는 것과 夫餘王의 장례에 옥갑을 사용하였는데, 언제나 옥갑을 현토군에 미리 갖다두었다가 王이 죽으면 그것을 가져다 장사지냈다는 것은 왜부여가 현도군과 접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부여왕의 도장에 ‘濊王之印’이란 글귀가 있고 나라 가운데에 濊城이란 이름의 옛 성이 있다. 후한에서 현도군은 구 낙랑군 동부도위 지역으로 이동했으므로, 이로부터 왜부여가 황하 하류 예(왜)를 기반으로 형성되었고 그 부근이 왜부여의 영역임을 알 수 있다.
왜부여와 백제의 구별
『삼국사』는 “동명(東明)의 후손 중에 구태(仇台)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어질고 신의가 있었다. 처음에 대방(帶方)의 옛 땅에서 나라를 세웠는데, 한(漢)의 요동태수 공손도(公孫度)가 자기의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으며, 마침내 동이(東夷)의 강국이 되었다”라고 『북사(北史)』와 『수서(隋書)』를 인용하여 백제의 시조 구태설을 소개하는데, 이는 예부여와 백제가 뒤섞인 이야기이다. 『삼국지』에는 부여의 왕과 공손도 일족 딸의 혼인이 기술되어 있다. 따라서 공손도와의 혼인은 왜부여에 관한 이야기이다. 『북사(北史)』와 『수서(隋書)』는 백제가 대방고지를 탈환하자 왜부여와 공손씨의 혼인동맹을 백제의 이야기로 착각하여 기술한 것으로 추측된다. 왜부여는 동이의 강국이라 할 수는 없고 그 부분은 백제에 관한 이야기이다. 대방고지에서 나라를 세운 것은 예부여와 백제 모두에 타당한 이야기이다. 백제와 예부여의 건국자는 소서노인데, 후세에 여자를 건국자로 하지 않기 위해 백제와 예부여 모두 비류와 온조의 아버지인 우태(优台 優台)를 시조라 하였다. 『북사(北史)』와 『수서(隋書)』 등 중국 사서는 해마다 백제가 네 차례 시조 구태의 묘(廟)에 제사 지낸다고 하며, 『삼국사』는 백제왕들이 동명왕묘에 배알한다고 하며, 『삼국사』에 인용된 『해동고기』도 백제의 시조는 동명 또는 우태라 한다. 백제가 시조를 동명이라고도 한 것은 백제도 우리 민족의 중심국으로 자처하였음을 의미한다. 대부여 이래 중심국의 지배자는 東明(해모수)이라 하면서 정통성을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우태가 해부루의 서손이라는 말은 비류와 온조를 辰國(부여)의 왕통에 연결시키기 위한 것이다. 연타발 소서노의 상업세력이 정통성을 얻기 위해 비류세력은 국호와 왕성(王姓)을 부여라 하였고, 백제는 왕성만을 부여라 하였다. 구태(仇台)는 우태가 와전된 표현이다. 중국인들이 우리 민족의 시조를 비하하는 한자를 사용하여 仇자로 전해지게 되었다.
(2) 왜부여의 변화
후한에 예속될 수밖에 없는 지리적 위치
예부여는 한나라 바로 옆에서 건국하였으므로 후한에 예속될 수밖에 없었다. 예부여는 49년부터 후한에 조공하였다. 예부여는 111년 낙랑군을 공격한 후 바로 귀부하고, 167년 현도군을 공격한 후에도 174년 바로 귀부하는데, 이는 예부여의 위치상 漢에 귀부하지 않으면, 漢은 물론 고구려나 백제 선비 등 다른 세력에 의해 바로 점령당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漢이 소국인 예부여를 놓아 두었던 이유는 다른 세력들을 통제하는데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단석괴의 지배
단석괴가 그 영토를 3부로 나누어서 그 중 동부가 우북평에서 요동까지인데, 부여와 예맥과 접한다. 여기서 부여는 예부여이고, 예맥은 고구려이다. 단석괴는 영토 내 호수에 물고기가 많아서, 이를 식량으로 활용하기 위해 왜인 천여가를 강제 이주시켜 물고기를 잡도록 하였다. 단석괴가 왜인들을 잡아간 곳이 예부여이다.
공손씨와 연합, 조위에 예속, 모용외의 공격, 서진에 예속
공손씨는 고구려와 선비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예부여와 혼인동맹을 맺었다. 예부여는 조위가 공손씨를 멸한 후 245년 고구려를 공격할 때 조위에 군량을 제공하여 적극적으로 조위에 협조하였다. 낙랑군 북쪽을 차지한 모용외가 285년 예부여를 공격하여 의려왕은 자살하고 왕족들은 옥저로 도망가는 등 거의 망했으나 진의 도움으로 나라를 재건하였다.
[선비와 예부여]

백제의 공격, 모용황의 지배
『자치통감』은 346년 1월 하충의 사망을 기술하면서 하충과 관련된 사실을 기술한다. 『자치통감』은 하충이 모용황이 337년 10월 연왕을 자칭하는 것을 추인하는데 관련되었음을 기술한 후, 모용황이 왜부여를 복속시킨 과정을 기술하면서, 왜부여가 취약해진 것은 백제의 공격으로 왜부여가 연(모용황) 쪽으로 밀려났기 때문이라고 기술한다. 『진서』 「모용황재기」에 의하면 모용황 3년 즉 336년 묘용황이 왜부여를 정복하였다. 따라서 백제는 모용황이 왜부여를 공격하는 336년 이전 어느 시점에 왜부여에게 본거지를 이동시킬 정도의 타격을 주었다. 모용외는 서진이 복국시킨 왜부여를 점령하려 하지 않았지만, 모용황은 진은 남쪽으로 갔고, 다른 세력이 왜부여를 정복할 수도 있다 생각하여 바로 점령하였다. 강단 유사사학은 336년 이전 어느 시점의 백제의 왜부여 공격을 346년 있었다고 날조하며 백제가 아니라 백제로 표현된 세력이라고 하여 그들의 문학에 부합하지 않는 사서의 내용은 가차없이 부인한다. 강단 유사사학은 “初” 이하의 내용을 본문의 346년 기사와 같은 시기의 사건으로 보는 무식함을 발휘한다. 그리고 ‘백제’라는 명백한 표현을 아무 근거도 없이 ‘백제로 표현된 세력’이라고 소설을 쓴다. 그들은 백제가 아니라 고구려나 물길의 오기라고도 한다. 그들은 일제가 교시하는 소설을 역사로 거짓말하기 위해 일제의 교시와 부합하게 사서를 왜곡하고 날조한다.
『태백일사』 「대진국본기」는 왜부여의 일부 세력이 열도로 이주하였다고 한다. 당시 왜부여의 상황이 모용씨와 백제에 의해 양쪽에서 공격 받는 상황이고 왜부여인들은 어업과 항해에 능한 왜인들이 다수이므로 신빙성 있는 기사로 생각된다. 현재 의라신사가 오사카 강어귀에 있는데, 강어귀는 왜집단이 선호하는 정착지이다. 왜부여 즉 비류백제가 일본 천황가가 된다는 견해가 있으나, 열도의 기내는 초기 가야계 지배, 4세기 전반 왜부여 지배, 4세기 후반 백제 담로 지배, 5세기 초부터 중반까지 고구려의 지배, 이후 백제 지배 시기를 거쳐 잠시 신라의 지배를 받다 일본으로 독립하므로 왜부여가 천황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백제와 전연의 전쟁
『진서』 「모용황재기」 345년 기사에, 봉유가 모용황에게 고구려 백제 우문부 단부의 사람들은 포로로 잡혀 온 사람이라고 하면서 이주정책의 필요성을 말하는 부분이 있는데, 이는 전연과 백제가 전쟁을 하였음을 의미한다. 왜부여와 낙랑군을 두고 백제와 전연이 다투었지만, 전연이 왜부여와 낙랑군 모두를 차지하였고, 이 과정에서 백제인 포로가 발생하였다. 강단 유사사학은 이 기사의 백제에 대해서도 황당한 근거를 들이대면서 여기의 백제는 백제가 아니거나 백제의 해안식민지라는 소설을 쓴다.
백제의 왜부여 공격, 전연의 백제인 포로, 백위 전쟁, 백제의 요서군 등등을 고려하면 백제가 분명함에도 사이비들은 그들의 소설에 반하면 객관적 사료를 무시하며 소설을 창작한다.
고구려와 백제의 다툼 중 고구려에 투항
전연은, 인질로서 전연의 수도인 업에 머물던 예부여 왕자 여울이 성문을 열어주어 전진에게 망한다. 즉 예부여는 모용황에게 정복된 뒤에도 속국으로 나라를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예부여는 고구려의 후연 점령으로 고구려 유주에 속하였고, 동성왕 시 백제에 귀속되었다가, 고구려의 반격 시 494년 고구려에 투항한다. 당시 고구려와 백제가 다투는 중간에 있어 독자적으로 생존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강단 유사사학은 이때 투항한 부여도 동부여라고 하나, 동부여는 광개토대왕릉비문에 의하면, CE 22년 투항하였다가 중간에 조공하지 않았다 하여 410년 다시 토벌되므로, 494년에 다시 투항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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