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한국학 기초 낭독 33

역사회복 2026. 4. 13.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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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중국 동해안의 백제유민

 

백제는 환황해, 열도, 동남아를 아우르는 해양 무역세력이었다. 그러나 강단·일제·중제 유사사학은 백제의 무역활동은 고사하고, 아예 중국 동해안 영토부터 부정한다. 강단·일제 유사사학은 백제가 가공의 함안(소위 안라) 마을국가와 다투었다는 코미디 소설을 창작하기까지 한다. 백제가 망한 후 중국 동해안에 그대로 남아 그들의 생업을 영위하였던 백제유민들의 행적을 고찰한다면 백제 무역활동의 실상과 백제 영토의 광대함이 명확하게 증명될 수 있다.

백제유민은 신라, 고려, 조선 전기까지 한반도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의 이야기는 날조되어 잊혀진, 우리 역사의 한 부분이다. 대만의 백제유민은 백제라는 국호를 유지하다가 1267년 원나라에 사신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김성호가 『중국 진출 백제인의 해상활동 천오백년』(1996)에서 중국에 진출한 비류백제로 보고 이미 그 실체를 파악하였다. 비류백제는 왜(예)부여로서 백제유민과 직접적 관련이 없으므로, 우리는 그의 연구에서 비류백제를 온조백제로 고치기만 하면 된다.

 

(1) 당나라의 백제유민

 

신라방·신라소 사람들은 백제유민

일본승려 엔닌의 838년부터 847년까지의 여행 일기에 이 시기 백제유민의 무역활동이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강단·일제 유사사학은 엔닌일기에 나오는 신라방·신라소의 신라인들이 8세기 중엽 신라에서 당나라로 이주한 사람들이라 하지만, 이주의 실체도 불명확하며, 화폐조차 없었던 촌락경제 상태의 신라인들이 단기간에 중국 동해안의 해상무역권을 장악한다거나 중국과 일본간 원양항해노선을 개발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해상무역은 대규모의 인적 물적 자본뿐만 아니라, 원양항해에 대한 지적 자본이 필수적인 사업이므로, 신라인들이 8세기 중엽에 당나라에 이주해서 그것도 노예상태로 팔려가서, 반세기도 안 되어 바로 동아시아의 해상무역을 장악했다는 것은 소설에 불과하다.

 

大使는 당나라의 관직 명

당나라는 번진(藩鎭)의 반란을 진압한 후, 819년 지방제도를 정비하면서 상업에 종사하던 중국 동해안 백제의 유민들에게 과세할 목적으로 신라방·신라소를 설치하여 그 책임자를 대사(大使)라 하였다. 엔닌 일행이 해능현에 처음으로 상륙했을 때 이들을 맞이한 당나라 관리도 ‘해능진대사 유만(海陵鎭大使 劉晩)’이라 하였다. 당나라 기본법전인 대당육전(大唐六典)」에도 “무릇 모든 군진의 대사와 부사 이상은 모두 겸인(시종)을 거느린다(凡諸軍鎭大使副使皆有廉人)”고 되어 있으며 이들의 임기는 4년(四年一替)이었다. 즉 신라방·신라소는 당나라의 지방행정기구이고, 그 책임자인 대사는 당나라의 관리였다.

 

 

청해진은 당의 조차지이고 장보고는 당의 관료

장보고는 이정기 토벌의 공로로 819년 등주 적산포 신라소의 초대 대사로 임명된다. 장보고가 828년에 신라로 가므로 그는 제2대 대사도 역임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장보고는 적산포 신라소의 대사 자리에 있으면서 부를 쌓았을 것이다. 당은 쇄국하고 있던 신라의 시장을 노리고, 신라를 압박하여 청해진을 설치하여 신라의 시장을 개방시키면서 장보고를 청해진 대사로 임명한 것으로 추측된다. 장보고가 당의 관료이므로, 장보고의 교관선(交關船)도 사무역선이 아니고 치청절도사의 지분이 있는 무역선이다. 엔닌은 장보고의 교관선을 이끌던 최훈을 ‘대당매물사(大唐賣物使) 최병마사(崔兵馬使)’라 하는데 대당매물사는 당의 물건을 파는 당나라의 수출관이란 의미이다. 강단 유사사학은 장보고가 ‘보낸’의 ‘遣’을 大唐賣物使에 붙여 遣大唐賣物使를 장보고가 당나라에 파견한 무역 사절이라, 순회하며 무역하는 관리란 뜻의 회역사(廻易使)를 장보고가 일본에 파견한 무역 사절이라 날조하고 있다. 최훈은 무역선의 선장으로 군사적 권한도 있어 兵馬司도 겸직하였을 것이다. 강단 유사사학은 장보고가 적산 법화원을 건립했다고 주장하나, 신라소가 설치되면서 법화원이 창건되고, 장보고가 신라로 간 후 신라소의 후임 대사들이 법화원을 관리하므로 개인 사찰이 아닌 신라소의 공공사찰로 보아야 한다.

신라는 청해진 설치 6년 후인 834년에 외래품의 소비를 규제하는데, 이는 청해진 설치로 시작된 무역이 신라 정부가 판단하기에, 신라에 불리한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신라 정부는 장보고를 청해대사라 하는데, 이는 장보고가 당나라의 관리이기 때문이며, 837년 5월 김우징이 청해진으로 도망가도 신라 정부가 그를 체포하지 못하는 것은 청해진이 당의 조차지이기 때문이다. 838년 김우징이 청해진에서 신라왕을 자처하며 당에 사신을 파견하자 당이 김우징을 신라왕으로 인정하는 것도 역시 청해진이 당의 조차지이기 때문이다. 841년 신라가 장보고가 왕권에 위협이 될 것을 우려하여 그를 제거하자 당과 신라는 5년 동안 왕래하지 않다가, 846년 신라가 변명하는 사신을 보내자, 당은 847년에야 6년 전에 즉위한 문성왕을 승인하는 책봉사를 파견하였다. 이는 장보고가 당의 관리였음을 명확히 드러낸다.

강단 유사사학은 장보고에게 청해진의 자치권이 허용되었다고 하면서도, 청해진 대사가 신라왕이 준 관직이라 하는데, 자치권과 신라의 관직은 모순되므로 헛소리에 불과하다. 신라는 851년 청해진을 폐쇄하고, 청해진의 주민들을 벽골군으로 옮겼으며, 중사처로 지정하여 당나라 측과의 영토분쟁을 미연에 방지하였다.

 

신라선은 당나라 국적선

엔닌과 함께 왔던 일본 조공사는 839년 신라선(백제유민의 원양항해선)을 용선하여 수리하고 신라인(백제유민) 항해사를 고용하여 초주에서 일본으로 돌아가는데 신라 해역을 적경(賊境)이라 부르며 신라 해안에 근접하지 않을까 매우 걱정한다. 엔닌도 847년 신라인(백제유민) 김진의 배로 귀국하던 도중 전라도 섬에 기착하게 되는데, 김진과 엔닌 모두 신라 정부에 체포되지 않기 위해 도망가듯이 섬을 떠난다. 청해진이 존속하고 있던 시기였음에도 이들이 신라 정부를 두려워 하였다는 것은 재당신라인이 신라인이 아닌 백제유민 즉 당나라인이었다는 확실한 증거가 된다.

 

강단 유사사학의 백제의 대륙 영토 은폐

이상 기술한 바와 같이 장보고는 신라의 지방세력이 아니라 당의 지방세력이다. 강단·중제·일제 유사사학은 장보고가 신라인이며 장보고가 신라인의 해상활동능력을 조직화하였다고 주장하나, 근거는 전혀 제시하지 못한다. 장보고는 당의 힘을 이용하여 중국 동해안 백제유민들의 해상무역 활동을 신라까지 확대하고, 신라의 방해로 위협받고 있었던 중국과 일본간 항해의 안전을 도모하려 하였던 사람이다. 강단·일제·중제·재야 유사사학이 장보고를 신라인으로 왜곡하는 것은 백제유민의 해상 활동을 통해 중국동해안 백제의 실상이 밝혀지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백제유민으로 드러나는 백제의 실상

엔닌은 일본과 중국 간의 항해는 물론 여행의 대부분(14단계 여정에서 11단계)을 백제유민에 의존하였는데, 이는 특별히 백제유민에 의지하려는 의도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그의 목적을 위해 행동하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었다. 그만큼 중국 동해안에서 백제유민의 해상활동이 광범위하였다. 백제가 망했어도 백제의 항해 집단은 중국 동해안에서 그들의 해상활동을 계속하였다. 중국 동해안에 백제 이외의 해상활동 세력은 전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나라가 망했어도 그들의 생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들의 활동 범위에서 요동반도 백제와 한반도 백제가 제외되고, 열도 백제는 유지되었다. 백제유민들은 중국 동해안 여러 지역에 산재한 신라방·신라소를 근거로 해상활동을 영위하였는데, 초주, 적산포, 주산군도가 중심지였다.

 

주산군도는 최후의 백제

명주는 적산포보다 백제유민 무역상이 더 많았는데도, 신라방이나 신라소가 없었는데, 이는 명주 앞바다의 주산군도가 당나라 영토가 아니라, 백제유민의 독립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9세기 중엽부터 14세기까지 주산군도를 거쳐 아랍 상인들이 양주로 왔다. 이븐 쿠르다지바의 『諸道路와 諸王國志』(885년)에 입당 루트가 Lookin-Khanfou-Khandjou-Kantu 즉 용평-광주-천주-항주로 지재되어 있고, “Kantu 앞에 높은 산이 있는데 여기가 신라국”이라 기술되어 있다. 앗 다마시키의 『대륙과 대양의 경이에 관한 시대적 정선』(14세기)에는 “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동방의 맨끝에 동쪽을 에워싼 바다가 있는데 그 빛깔이 너무 검푸러서 지프트해(瀝青海)라고 부른다. --- 이 바다 속에 6개의 섬이 있는데 이곳을 신라군도라 한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주산군도는 항주로 들어가는 길목이고, 여섯 개 정도의 큰 섬으로 되어 있으므로, 아랍 상인들이 생각한 신라는 백제유민이 차지하고 있었던 주산군도이다.

 

[엔닌일기에 기재된 백제유민]

 

백제유민과 일본

백제유민은 열도와 무역을 하였고, 열도로 이주하기도 하였다. 소위 「육국사」와 「일본기략」에 기록된 신라인과 당인의 귀화는 백제유민의 귀화를 의미하고 신라선은 당연히 백제유민의 항해선을 말한다. 일본은 869년 신라 해적(중일간 무역을 위해 구주에 있던 백제유민)이 견면선을 약탈하였다고 하면서 윤청과 선견 등 30인을 각처로 분산시킨 후, 무역을 금지하고 백제유민의 열도 이주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자 백제유민(신라 해적으로 표기됨)들은 45척의 배를 동원하여 893년 5월 구주 북부 마쓰우라군과 구주 서남부 히고호다를, 894년 4월에는 대마도를 점령하였지만, 결국 894년 9월 패퇴하여 열도에서 철수하였고, 그 후 일본은 11세기나 12세기까지 중국에 사신조차 파견할 수 없게 되었다.

 

(2) 5대10국 시기의 백제유민

 

오월국은 백제유민의 나라

오월국(吳越國)은 절강성에 전류(錢鏐)가 세운 나라이다. 전류는 852년 절강성 임안(臨安)에서 태어나 소금장수를 하다가, 혼란기 관리가 되어 황소의 난을 진압하고 그 공로로 진해군절도사겸윤주자사가 되어 893년 절강지역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전류는 907년 후량으로부터 오월왕으로 봉작을 받지만, 893년부터 절강지역을 실질적으로 통치하였고, 전류의 손자 전홍숙이 978년 북송에 나라를 바쳐 오월국은 사라지게 되었다. 오월국의 영역은 항주와 주산군도 등 백제유민이 가장 많이 활동했던 곳이다.

 

무염선원은 백제유민들의 절

북경 중국국가도서관에 당무염선원비(唐無染禪院碑)의 탁본이 전해지는데, 당무염선원비는 901년 산동성 등주 곤유산(崑嵛山) 무염선원의 중창 역사와 모습을 담은 비석으로 오랫동안 사찰 경내에 남아있었으나, 1950년대 말이나 60년대 초에 파괴되었다. 무염선원비 측면과 후면 비음기(碑陰記) 공덕자 명단을 통해 공덕자들이 산동과 절강 지역의 유력자들이고, 이들이 오랜 기간에 거쳐 많은 물력과 정성을 쏟았을 정도로 무염선원이 규모가 컸음을 알 수 있다. 공덕자 명단에 전류는 황제처럼 한 행에 독립적으로 적혀 있고, 그의 동생 전진(錢鎭), 진언(陳言), 명주자사 황성(黃晟) 등 절강지역의 고위 관리들이 연이어 적혀 있다. 김청(金淸)은 비문과 비음기에 불탑을 시주했다고 되어 있는데, 비문에는 ‘鷄林金淸押衙’로 비음기에는 ‘新羅國押衙金淸’으로 되어 있다.

무염선원비문이 전류와 김청이 백제유민임을 증명한다. 우선 김청은 신라소나 신라방의 압아이며, 비문에 절강지역과 무역을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백제유민이 확실하다. 전류는 항주 옆의 임안에서 태어나 소금장수를 하였으므로, 출신지와 직업상 백제유민일 가능성이 있는데, 전류 등 절강성의 실권자들이 산동의 무염선원 중창을 지원했다는 것은 전류 등 오월국 지배층이 백제유민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산동 지역의 백제유민과 거래관계로 얽혀있지 않다면 오월국 지배층이 산동 지역의 절에 시주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무염선원의 중창이 백제유민이 많이 활동했던 산동성과 절강성의 후원자들에 의해서만 이루어졌다는 것도 이들 모두가 백제유민임을 의미한다. 후당과 북송도 전류왕을 이왕(夷王)이라 하여 오월국이 백제유민의 나라임을 알고 있었다. 주산군도에 독자 영역을 구축하고 있었던 절강성의 백제유민들은 당말기 중앙권력이 약해지자 절강성을 점령하여 그들의 나라를 만들었다. 이들이 북송에 나라를 넘긴 것도 상업세력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농업에 기반한 정권은 정치권력의 상실이 모든 것이나 다름없는 농지에 대한 지배권의 상실을 의미하므로, 질 것이 거의 확실해도 끝까지 전쟁을 하기 때문이다. 또 이들은 백제가 망한 후에도 상업활동을 영위하였던 경험이 있었으므로, 죽음으로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는 선택보다는 정치권력을 포기하고 상업활동을 보존하는 선택을 하기 더 쉬웠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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