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한국학 기초 낭독 30

역사회복 2026. 4. 13. 08:20

https://youtu.be/EtwReZUHLyc

 

(7) 개로왕이 죽은 한성과 고구려의 에서의 남진정책

 

고구려는 한반도 한성(한강 남쪽)을 점령하지 못했다

475년 장수왕은 한성을 공격하고 개로왕을 죽였다. 강단 유사사학은 장수왕의 한성 공격 이후 즉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한 이후 고구려가 한성을 영유하였고, 아산만 지역까지 영토로 하였다고 근거없이 주장한다. 그런데 그 이후에도 백제본기에 한성이 등장하며 고구려나 신라가 한성을 점거했다는 기사가 없다. 이는 백제가 한성을 변방의 성으로서 유지하였음을 의미하고 장수왕의 한반도 남진은 없었음을 알려준다. 강단 유사사학은 장수왕 한반도 남진이라는 소설을 쓰고 그에 맞추기 위해 삼국사를 부정하고 있다. 백제의 한반도 북쪽 경계는 한강을 넘어가는 경우도 있었고, 최소 한강은 유지하였다. 진흥왕대 이후 한강 북쪽이 신라의 수중으로 들어갔을 때도, 한수 남쪽 한성을 신라가 점령했다거나 그것을 암시하는 기사는 전혀 없다.

 

개로왕은 서도 한성에서 죽었다

고구려가 어디로 남진했는가를 살피기 위해 개로왕이 죽은 곳을 알 필요가 있다. 백제는 동도와 서도가 있었는데, 이를 후세인들이 몰라서 많은 백제의 역사가 누락되었고, 남아 있는 백제의 역사마저 왜곡되었다. 삼국사에는 개로왕의 죽음에 대해 두 건의 다른 기사가 존재하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 자비 마립간 177(47407())

17(474)가을 7월에 고구려왕 거련(巨連)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공격하였다. 백제왕 경()이 아들 문주(文周)신라에보내 도움을 요청하였다. 왕이 군사를 내어 구해주려고 하였으나 신라군이미처 도착하기 전에 백제가 이미 고구려에함락되었고 경() 또한 살해되었다.

() 개로왕 219(47509())

21(475) 가을 9월에 고구려왕 거련(巨璉)이 군사 30,000명을 이끌고 와서 왕도인 한성(漢城)을 포위하였다. 왕이 성문을 닫고 나가 싸우지 못하니 고구려 사람들이 군사를 네 길로 나누어 협공하고, 또한 바람을 타고 불을 놓아 성문을 불태웠다. 사람들의 마음이 매우 두려워하여 나가서 항복하려는 자들도 있었다. 왕은 군색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수십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문을 나가 서쪽으로 달아나니 고구려 사람이 추격하여 왕을 해쳤다.

이보다 앞서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이 몰래 백제를 도모하려고 백제에서 첩자 노릇을 할 만한 사람을 구하였다. 이때 승려 도림(道琳)이 응하여 말하기를, “어리석은 소승이 아직 도()는 알지 못하지만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려는 생각은 있습니다. 바라건대 대왕께서는 신을 어리석다 여기지 않으시고 지목하여 시키신다면 왕명을 욕되게 하지 않을 것을 약속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기뻐하여 몰래 보내 백제를 속이게 하였다. 이에 도림은 거짓으로 죄를 짓고 도망가 백제로 들어갔다. 당시 백제왕 근개루(近蓋婁)는 장기와 바둑[博奕]을 좋아하였다. 도림이 대궐 문에 이르러 아뢰기를, “신이 어려서부터 바둑을 배워 자못 신묘한 경지에 들었으니 바라건대 대왕의 곁에서 알려 드리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불러들여 바둑을 두어보니 과연 국수(國手)였다. 마침내 그를 높여 상객(上客)으로 삼고 매우 친하게 지내면서 서로 늦게 만난 것을 아쉬워하였다.

도림이 하루는 왕을모시고 앉아서 조용히 말하기를, “신은 다른 나라 사람인데 왕께서 저를 멀리하지 않으시고 은혜를 매우 두텁게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오직 한 가지 기술만 바쳤을 뿐 아직 털끝만한 이익도 드리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바라건대 한 말씀 올리려 하오나 왕의 뜻이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말해 보시오. 만일 나라에 이롭다면 이는 선생에게서 바라는 바입니다.”라고 하였다. 도림이 말하기를, “대왕의 나라는 사방이 모두 산과 언덕, 강과 바다입니다. 이는 하늘이 베풀어주신 험한 요새이지 사람이 만든 형국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방의 이웃 나라들이 감히 엿볼 마음을 갖지 못하고 단지 받들어 섬기기를 원할 뿐이며 다른겨를이 없습니다. 그러니 왕께서는 마땅히 숭고한 위세와 많은 업적으로써 남의 이목을 두렵게 해야 하건만, 성곽이 수리되지 않고 궁실도 고치지 않았으며 선왕의 해골이 맨땅에 임시로 묻혀있고 백성의 집들은 강물에 자주 허물어지니 신은 대왕께서 취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맞소! 내가 장차 그리 하겠소.”라고 하였다. 이에 나라 사람들을 모두 징발하여 흙을 쪄서 성을 쌓고 그 안에 궁궐과 누각과 전망대와 건물을 지었는데 웅장하고 화려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 욱리하(郁里河)에서 큰 돌을 가져다 덧널[]을 만들어 아버지의 뼈를 묻고, 하수(河水)를 따라 둑을 쌓았는데 사성(虵城)의 동쪽에서부터 숭산(崇山)의 북쪽에 이르렀다. 이 때문에 창고가 텅 비고 백성들이 곤궁해지니 나라의 위태로움이 쌓아놓은 달걀보다 심하였다.

이에 도림이 도망쳐 돌아가 아뢰니 장수왕이 기뻐하며 장차 백제를 정벌하려고 장수들에게 군사를 주었다. 근개루가 그 말을 듣고 아들 문주(文周)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가 어리석고 밝지 못하여 간사한 사람의 말을 믿어 이 지경이 되었다. 백성이 쇠잔하고 군사가 약하니 비록 위태로운 일이 있을지라도 누가 기꺼이 나를 위해 힘써 싸우겠느냐. 나는 마땅히 사직(社稷)에서 죽겠지만, 네가 이곳에서 함께 죽는 것은 이로울 게 없다. 어찌 난을 피하여 나라의 계통[國系]을 잇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문주는 이에 목협만치(木劦滿致) 조미걸취(祖彌桀取) (목협과 조미는 모두 복성(複姓)인데, 수서(隋書)에서는 목협(木劦)을 두 개의 성이라고 하였다. 어느 쪽이 옳은지 알 수 없다) 와 함께 남쪽으로 갔다. 이때에 이르러 고구려의 대로(對盧) 제우(齊于) 재증걸루(再曾桀婁) 고이만년(古尒萬年) (재증과 고이는 모두 두 글자로 된 성이다) 등이 군사를 이끌고 와서 북성(北城)을 공격하여 7일 만에 빼앗고 옮겨서 남성(南城)을 공격하니 성 안에서는 위태롭고 두려워하였다. 왕이 나가서 도망하자 고구려 장수인 걸루 등이 왕을 보고 말에서 내려 절한 다음에 왕의 얼굴을 향해 세 번 침을 뱉고는 그 죄를 나열한 다음 포박하여 아차성(阿且城) 아래로 보내 죽였다. 재증걸루와 고이만년은 본래 백제 사람이었는데, 죄를 짓고 고구려로 도망했었다.

 

두 기사는 해가 일치하지 않고 월까지 일치하지 않는다. 단순한 실수라면 해나 월 중 하나는 일치할 것이므로, 이는 단순한 실수가 아니다. 고구려의 한성 침입은 두 번 있었다. 첫 번째 침입은 한반도 한성이었고 두 번째 침입은 지역 한성이었다. 삼국사는 백제 기사가 해를 연속하여 없는 경우가 많다. 대륙백제의 기사는 신빙성이 없다고 보아 김부식이 배제한 결과이다. 개로왕의 경우 즉위 후 14년부터 기사가 나타난다. 이것은 개로왕이 14년까지 서도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 기사가 말하는 각종 공사는 대륙에서 행해졌다.

책계왕 원년(286)에 대방군이 고구려의 공격을 받고 구원을 요청할 때 백제는 대방군을 도와주고 고구려에 대비하여 아차성(阿且城)과 사성(蛇城)을 수리하며 대비하였다. 즉 아차성은 지역에 있었다. ‘사방이 산과 언덕, 강과 바다라는 말도 한반도 한성보다는 대륙 한성에 더 부합한다. 서도 한성은 한수 남쪽이며, 서쪽으로는 황하와 백양정이 있고 동쪽은 바다이다. 황하로 인해 백성의 집들은 강물에 자주 허물어진다는 것도 지역에 더 적합한 표현이다. 緣河樹堰(하수가에 뚝을 만들었다)는 황하를 의미한다.

따라서 474년의 공격 시에는 개로왕이 살아남았고, 이 경험으로 인해 개로왕은 동도에서 서도로 옮겼고, 이를 알아챈 장수왕은 다시 서도를 공격하여 의 아차성에서 개로왕을 죽인 것으로 봄이 타당하다. 474년에는 신라에 도움을 요청할 수 있었으므로 동도 한성이고, 475년에는 신라가 언급되지 않으므로 서도 한성이다. 개로왕은 광개토대왕에게 뺏긴 지역 북부를 회복하기 위해 고구려와 위의 전쟁을 집요하게 유도하였다. 장수왕은 개로왕으로 인해 고구려의 안보가 위험해질 수도 있다 생각하여 개로왕을 죽였을 것이다. 문주왕은 양쪽 한성이 공격을 받자 지역의 웅진으로 천도했다.

 

고구려는 백제 무역의 핵심 기지인 지역을 공격했다

장수왕이 서도 한성을 공격하여 개로왕을 죽였다. 그러나 백제는 동성왕 때 다시 고구려를 몰아내고 위와의 전쟁에서도 승리한다. 이후 동성왕이 암살되고 무령왕이 즉위하였는데, 무령왕 시 백제는 한성은 물론 그 남쪽인 원산성까지 함락된다. 원산성은 온조왕이 8년에 마한을 병합할 때 끝까지 버티던 두 성(원산과 금현) 중 하나이다. 삼국사백제측 기록과 고구려측 기록은 다음과 같다.

 

() 무령왕 39(5039())

3년 가을 9월에 말갈이 마수책을 소각하고 고목성으로 진공하여 오자 왕이 군사 5천 명을 보내 이들을 물리쳤다.

() 무령왕 67(5067())

가을 7월에 말갈이 침입하여 고목성(高木城)을 격파하고 6백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아 갔다.

() 무령왕 7(507())

7년 여름 5월에 고목성 남쪽에 두 개의 목책을 세우고 또 장령성(長嶺城)을 쌓아 말갈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겨울 10월에 고구려 장수 고로(高老)가 말갈과 함께 한성을 치기 위하여 횡악(橫岳) 아래에 와서 진을 치니 왕이 군사를 출동시켜 그들을 물리쳤다.

() 무령왕 129(512())

가을 9월에 고구려가 가불성(加弗城)을 습격하여 빼앗고, 다시 군사를 옮겨 원산성(圓山城)을 격파하니 죽이거나 약탈하여 간 것이 매우 많았다. 왕이 용감한 기병 3천 명을 거느리고 위천(葦川) 북쪽에 나가 싸우니 고구려 병사들이 왕의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 가벼이 여겨 진을 치지 않았으므로 왕이 기발한 작전을 써서 기습을 하여 크게 무찔렀다.

() 문자명왕 13년 고구려가 위에 (백제) 침략 통보하고 위가 적극 찬성 (504())

13(504) 여름 4월에 사신을 위()에 들여보내 조공하니, 세종(世宗)이 동당(東堂)에 그 사신 예실불(芮悉弗)을 불러들여 만났다. 예실불이 나아가 말하기를 소국은 정성이 하늘 끝까지 이어지도록 여러 대에 순수한 정성으로 토산물을 왕에게 바치는 데 어김이 없었습니다. 다만 황금은 부여에서 나고, 흰 옥돌은 섭라(涉羅)에서 생산되는 것인데, 부여는 물길(勿吉)에게 쫓기고, 섭라는 백제에 병합되었습니다. 두 물품이 왕의 관부(官府)에 올라오지 못하는 것은 실로 두 도적 때문입니다.”라 하였다. 세종이 말하기를 고구려는 대대로 상국(上國)의 도움을 받아 바다 밖을 마음대로 다스려 구이(九夷)의 교활한 오랑캐들을 모두 정벌하였소. 술병이 비는 것은 술독의 수치인데, 이것은 누구의 잘못이오? 지난 번 방물을 바치는 것이 어그러진 것은 고구려 왕의 책임이니, 경은 짐의 뜻을 경의 왕에게 전하여, 위엄과 회유의 책략을 모두 사용하여 해로운 무리들을 없애 동방의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고, 두 읍으로 하여금 옛 터를 다시 찾아, 토산물을 늘 바치는 것에 빠짐이 없게 하시오.” 하였다.

() 문자명왕 1511(50611())

겨울 11월에 장수를 보내 백제를 쳤으나, 눈이 많이 내려 병졸들이 춥고 손발이 얼어 터져서 돌아왔다.

() 문자명왕 16(507())

왕이 장군 고노(高老)를 보내 말갈과 더불어 백제의 한성(漢城)을 공격하려고 횡악(橫岳) 아래에 나아가 주둔하였는데, 백제가 군사를 내어 역습하여 싸우므로 물러났다.

() 문자명왕 219(5129())

가을 9월에 백제를 침략하여 가불(加弗원산(圓山) 두 성을 함락하고, 남녀 1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 양원왕 10(554())

10년 겨울에 백제 웅천성(熊川城)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503년 말갈이 소각한 마수책과 온조왕이 BCE 11년 낙랑 동부도위를 방비하기 위해 설치한 마수성은 같은 위치의 것이다. 다루왕 3(CE 30)에 홀우가 마수산 서쪽에서 말갈에 대승을 하였고 다루왕 7(CE 34)에는 말갈이 마수성을 함락시켰다. 고목성은 온조왕이 CE 4년 설치한 성이고 CE 31년 곤우가 말갈에 승리한 곳이다. 횡악은 CE 31년 다루왕이 사냥한 곳이다. 원산은 위에서 말했듯이 백제가 마한을 정복할 때 끝까지 저항했던 두 성중 한 성인데, CE 9년에 항복하였다. 따라서 위 기사는 6세기 초 지역 백제에서 이루어진 고구려와 백제의 전쟁이다. 원사료에는 더 풍부한 내용이 있었겠지만 김부식은 낙랑군이 요양이라 생각했고 따라서 백제는 한반도 서남부에만 있다고 전제하였으므로 중국 하북성 산동성의 지명이 나오는 사료들은 삼국사에 싣지 않고, 모르거나 한반도에도 지명이 있는 기사만 실었을 것이다. 또 한성 함락 기사도 있었을 텐데 한반도 백제의 한성이 나중에 나오므로 오류라 보아 싣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위 기사만으로도 백제가 패한 것을 명백히 알 수 있다. 512년에 함락된 원산성이 백제가 멸한 마한의 성이므로 원산성은 한성 남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백제측 기록은 512년에도 왕이 기발한 작전으로 승리했다고 하지만 이것도 백제 입장에서의 춘추필법일 뿐이다. 554년 고구려가 웅천성을 공격하는데 웅천성은 온조왕 시의 백제의 남쪽 경계이다. 즉 이 때 지역의 웅천성 북쪽에서 고구려와 백제가 국경을 접하게 되었다. 강단 유사사학은 여기의 웅천성을 공산성이나 안성천 유역의 한 성으로 추측하나 근거 없는 소설에 불과하다. 강단 유사사학은 당시 한강 남부도 신라 영토라 소설을 쓰므로, 고구려의 웅천성 공격과의 모순을 피하기 위해 수군설, 신라 협조설, 해안가 고구려 영토설 등 탁월한 소설적 상상력을 발휘한다.

 

무령왕 시 에서의 후퇴

위에서 기술한 백제의 패배는 다른 사료에도 기록되어 있다. 양서(梁書)남사(南史)는 백제가 고구려에 크게 패한 후 여러 해 쇠약해지더니 남한으로 옮겨 머물렀다고 하며, 삼국사도 무령왕이 양에 국서를 보낼 때의 상황을 설명하면서 이보다 앞서 고구려에 격파되어 쇠약해진 지가 여러 해 되었는데, 이 때에 와서라 기술하고 있다. 또 양 나라의 답신이 백제왕(百濟王) 여륭(餘隆)은 해외에서 번방을 지키며 멀리 와서 조공을 바치니 그의 정성이 지극하여라 하는 것으로 보아 무령왕이 한반도에서 국서를 보낸 것을 알 수 있다. 고구려에 패한 후 남한으로 옮겨 갔다는 말은 에서 고구려에 크게 져서 한반도로 옮겨 갔다는 말이다.

무령왕 때 에서 패배하여 수도를 의 웅진에서 한반도 공주로 이전하였고, 그 이후로는 왕이 대륙으로 거의 가지 않았다. 고구려의 남하정책은 한반도가 아닌 에서 행해진 것이다. 백제가 상실한 서도 한성은 백제가 건국한 곳이고 환황해 무역에서 핵심 기지 역할을 하던 곳이었다. 607년 고구려가 송산성과 석두성을 공격하는 것으로 보아 백제는 그 이전 서도 한성과 송산성 석두성까지 회복한 것으로 보인다. 석두성은 고목성 부근이고 송산성은 석두성 부근이다. 강단 유사사학은 이 공격 기사도 한반도의 일로 오해하여 소설을 쓰고 있다.

 

장수왕의 한반도 남진은 소설이다

장수왕과 그 이후 고구려 왕들은 한반도에서 남하하는 정책을 취하지 않았다. 대륙에서의 남하정책을 채택하여, 지역 백제를 약화시키고, 백제의 무역을 방해하였다. 476년과 484 백제가 남조에 보내는 사신이 고구려가 길을 막아 되돌아왔는데, 이는 환황해 항로의 백제 지배가 깨졌음을 의미한다. 백제의 약화는 해양 지배의 약화에서 시작되었다. 고구려가 지역을 점령해야 백제의 해상교통을 더 쉽게 방해할 수 있었으므로 고구려의 남하는 지역에서 있었다. 환황해 해상교통의 핵심기지인 의 한성에 백제왕이 있을 수 없도록 공격하였다는 것은 해상 교역로의 봉쇄를 통해 백제를 약화시키려는 고구려의 전략이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진흥왕 이후에는 한반도에서는 신라가 한강 북부를 점령하여 고구려가 백제로 남하할 수도 없었다.

 

충주고구려비의 과학적 해독도 부정하는 강단 유사사학

특히 20193차원 스캐닝으로 충주고구려비 전면 상단의 글자가 永樂七年歲在丁酉397년으로 판독되었다. 비문에 있는 신라토내당주(新羅土內幢主)라는 구절과 신라 왕을 충주로 불렀다는 구절을, 391년 고구려가 신라로부터 볼모를 받았다는 삼국사의 기사와 함께 고려하면, 고구려는 3911월 이전 신라를 굴복시켜 실성을 인질로 받았으며, 고구려군을 신라에 주둔시켜 신라의 통제와 백제의 공격에 활용하였고, 397년 이전에 백제 영토였던 충주를 점령하고 신라 왕을 충주로 불렀다고 추측할 수 있다. 즉 고국양왕 시에 이미 신라로 남하했다. 강단 유사사학은 충주고구려비의 397년이 그들의 장수왕 남하설과 부합하지 않으며 신라가 고구려의 속민이었다는 광개토대왕릉비문의 사실성을 입증하므로, 충주고구려비의 과학적 판독결과조차 부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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