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백제와 낙랑군
『삼국사』 관련 기사의 국사편찬위원회 번역과 기타 사서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ㄱ) 온조왕 (BCE 15년)
〔4년〕 가을 8월에 낙랑(樂浪)에 사신을 보내 우호를 닦았다.
(ㄴ) 온조왕 (BCE 11년)
〔8년〕 가을 7월에 마수성(馬首城)을 쌓고 병산책(甁山柵)을 세웠다. 낙랑태수(樂浪太守)의 사신이 다음과 같이 아뢰어 말하였다. “지난번에는 서로 예를 갖추어 방문하고, 우호를 맺어 뜻이 한 집안과 같았는데, 지금 우리의 강역을 핍박하여 성을 쌓고 목책을 세우고 있으니, 혹시 야금야금 먹어 들어올 계책이 있어서인가? 만일 옛날의 우호를 저버리지 않고 성을 허물고 목책을 부수어 버린다면 시기하고 의심할 바가 없겠지만, 혹시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청컨대 한 번 싸워서 승부를 결정짓도록 하자.”
〔이에〕 왕이 회답하였다. “요새를 설치하여 나라를 지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떳떳한 도리인데, 어찌 감히 이것 때문에 화친과 우호를 저버리는 일이 있겠는가? 마땅히 집사(執事)가 의심할 바가 아닌 것 같다. 만일 집사가 강함을 믿고 군사를 낸다면, 우리나라[小國]도 이에 대응할 뿐이다.” 이로 말미암아 낙랑과의 우호를 잃게 되었다.
(ㄷ) 온조왕 (BCE 8년)
11년 여름 4월에 낙랑이 말갈(靺鞨)을 시켜 병산책(甁山柵)을 습격하여 무너뜨리고 1백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ㄹ) 온조왕 (BCE 8년)
〔11년〕 가을 7월에 독산책(禿山柵)과 구천책(狗川柵)의 두 목책을 세워 낙랑으로 통하는 길을 막았다.
(ㅁ) 온조왕 (BCE 6년)
〔13년〕 여름 5월에 왕이 신하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나라의 동쪽에는 낙랑(樂浪)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靺鞨)이 있어 번갈아 우리 강역을 침공하므로 편안한 날이 적다. ---”
(ㅂ) 온조왕 (BCE 2년)
17년 봄에 낙랑이 쳐들어와서 위례성(慰禮城)을 불태웠다.
(ㅅ) 온조왕 (BCE 1년)
〔18년〕 11월에 왕이 낙랑의 우두산성(牛頭山城)을 습격하려고 구곡(臼谷)에 이르렀으나, 큰 눈을 만나 곧 돌아왔다.
(ㅇ) 온조왕 (23년)
〔41년〕 2월에 한수(漢水) 동북쪽의 여러 부락 사람 중 나이 15세 이상을 징발하여 위례성(慰禮城)을 수리하였다.
(ㅈ) 고이왕 (246년)
〔13년〕 가을 8월에 위(魏)나라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이 낙랑태수(樂浪太守) 유무(劉茂), 삭방(朔方)태수 왕준(王遵)과 함께 고구려를 쳤다. 왕이 빈틈을 타서 좌장(左將) 진충(眞忠)을 보내 낙랑의 변경 주민을 습격하여 빼앗으니 유무가 듣고 노하였다. 왕이 침략 당할 것을 염려하여 그 주민들을 돌려주었다.
(ㅊ) 책계왕 (286년)
〔원년〕 고구려가 대방(帶方)을 치자 대방이 우리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앞서 왕이 대방왕의 딸 보과(寶菓)에게 장가들어 부인으로 삼았으므로 말하기를, “대방과 우리는 장인과 사위의 나라이니 그 요청에 응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군사를 내어 구하니 고구려가 원망하였다. 왕은 그들이 쳐들어와 노략질할까 염려하여 아차성(阿且城)과 사성(蛇城)을 수리하며 대비하였다.
(ㅋ) 분서왕 (304년)
7년 봄 2월에 몰래 군사를 보내 낙랑(樂浪)의 서쪽 현(縣)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ㅌ) 분서왕 (304년)
〔7년〕 겨울 10월에 왕이 낙랑태수가 보낸 자객에게 해를 입어 돌아가셨다.
(ㅍ) 『자치통감』 「진기(晋紀) 10」 (313년)
당초에 –-- 요동의 장통이 낙랑과 대방 2군을 점거하여 고구려왕 을불리와 더불어 서로 공격한 것이 해를 이어 끊이지 않았다. 낙랑 사람 왕준(王遵)이 장통을 설득하여 그 백성 1천여 가를 이끌고 모용외에게 의탁하도록 하니, 모용외가 그들을 위하여 낙랑군을 설치하고 장통을 태수로 삼고, 왕준을 참군사로 삼았다.
(ㅎ) 『진서(晉書)』 「간문제(簡文帝)기」 (372년)
사신을 보내 백제왕 여구를 진동장군으로 삼아 낙랑태수를 거느리도록 하였다
백제 동쪽 낙랑군 동부도위 장의 명칭은 집사(執事)
韓 지역은 낙랑군 동남쪽이다. 따라서 백제의 동쪽에 낙랑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낙랑 동부도위를 의미한다. 동부도위라 명확히 표시하지 않은 것은 건국 초기의 미약함을 감추기 위한 서술이다. 백제가 BCE 11년 마수성과 병산책을 세웠는데 동부도위가 항의하자 온조왕이 집사(執事)는 상관 마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당시 동부도위의 책임자를 집사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강단 유사사학은 집사가 동부도위를 의미하면 그들의 날조소설이 허물어지므로 집사가 낙랑태수를 의미한다고 근거없이 주장한다.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동부도위나 그 주민들은 BCE 28년, CE 4년, CE 14년, CE 36년, CE 40년 신라를 공격하는데, 백제는 BCE 2년을 끝으로 공격하지 않는다. 그것은 백제가 마한을 병합하여 동부도위가 상대할 수 없는 대국이 되었기 때문이다.
강단 유사사학의 어마무시한 문학적 창의력
강단 유사사학은 CE 23년 이전에 나타나는 낙랑 동부도위를 낙랑군 본군이라 하는데, 그렇다면 백제는 서해바다로 빠지게 된다. 온조왕이 백제의 동쪽에 낙랑이 있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자 강단 유사사학은 낙랑 참칭설이라는 어마무시한 상상력을 발휘한다. 강단 유사사학에 의하면 낙랑은 손이 열 개여도 모자란다. 동부도위는 함경도로 출장을 갔기 때문에, 백제의 동쪽에 나타날 수 없어 춘천의 맥국이 낙랑을 참칭했다고 한다. 백제의 영토와 관련하여선 고이왕 때에야 비로소 춘천까지 확장된다고 했다가 급해지니 이제는 춘천까지 백제 영토가 되어 버린다. 춘천의 맥국은 어디에서 떨어졌는지도 모른다. 또 낙랑은 머나 먼 경주의 마을국가인 신라는 어느 틈에 공격하는지 모르는데, 이 부분에서 강단 유사사학은 맥국이라는 등장인물을 퇴출시키고 여러 다른 등장인물을 출연시키는 탁월한 창의성을 뽐낸다. 독창성이 뛰어나 유사사학 종사자들의 귀감이 될 수 있는 참칭설과 여러 인물설 등을 받아들여도 강단 유사사학의 소설은 완성되지 않는다. 온조왕이 말하는 북쪽의 말갈은 어디에서 왔는지가 해결되지 않는다. 그들의 소설에 의하면 백제의 북쪽에는 낙랑군이나 대방군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말갈이 북쪽에서 비행기로 백제를 공격했는가? 강단 유사사학은 역시나 그들이 날조한 동예나 영서예가 백제 북쪽으로 이사를 온다고 한다. 날조된 예도 바빠진다. 날조된 동예는 강릉에서 예성강으로 출장와야 하고 날조된 영서예도 영서 지방에서 예성강으로 달려와야 한다. 낙랑군이나 말갈이 그들에게 출장비는 잘 챙겨줬는지 모르겠다. 韓 지역의 백제를 공격하는 말갈은 우북평이나 어양의, 漢에 귀부한 오환인들이다. 백제 초기 건국지를 한반도로 비정하는 것은 공상 역사소설도 되지 못한다.
비류의 위례성(첫 수도)은 온조 위례성(두번째 수도)의 동북쪽
BCE 2년에 동부도위가 불태운 위례성은 한수 동북쪽의 주민을 징발하여 수리한 것으로 보아 비류의 첫 위례성이고, 이로부터 미추홀이 낙랑 동부도위와 더 가까운 위치에 있었으며 비류의 위례성이 온조의 위례성 동북쪽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강단 유사사학이 인천을 비류, 온조를 서울이라 하여 한반도에 비정하는 것은 두 위례성의 위치관계 확인만으로도 날조임이 드러난다.
백제도 근초고왕 시 일시적으로 낙랑군을 영토화했다
246년 이후 등장하는 낙랑은 당연히 낙랑군 본군이다. 韓 지역 즉 백제는 낙랑군 동남쪽이다. 286년 책계왕이 대방왕과 혼인으로 동맹관계를 맺고 고구려에 대항한 것은 황하 항해의 안전을 위해서이다. 304년 분서왕이 낙랑 서쪽 현을 취하였다는 것은 오류로 보인다. 『삼국사』 편찬자들이 온조왕의 동쪽에 낙랑군이 있다는 언급을 본군으로 착각하고 낙랑 동쪽 현을 취하였다는 기사를 낙랑 서쪽 현을 취하였다고 개작한 것으로 추측된다.
고이왕과 분서왕이 낙랑군을 공격한 것은 황하 항해의 안전을 위해 황하 서쪽인 낙랑군 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려 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서진 말 ‘흉노’ 선비 등 중국 북부의 조선인들이 중국으로 남하하여 중국 북부를 통치하는 소위 북조시대가 시작되었는데, 그 혼란기를 이용하여 고구려와 백제가 낙랑군을 차지하려 하였다. 그러나 장통이 모용외에 귀부하여 모용외의 땅이 되었다. 당시 모용외는 서진의 유주도독 왕준(王浚)에 예속되어 있었다. 372년 동진은 근초고왕을 진동장군으로 삼고 낙랑태수를 거느리도록 하여 백제가 낙랑군을 지배하고 있음을 보여주는데, 이는 모용씨의 전연이 망하자 백제가 낙랑군을 영토로 하였음을 의미한다.
강단·일제 유사사학은 고구려가 313년 한반도에서 낙랑군을 점령했다고 하나, 낙랑군은 요동고새 남쪽으로 원래 漢나라 땅이며 한반도 북부는 고구려의 영토였다. 전술하였듯이 CE 37년부터 CE 44년까지 대무신왕이 낙랑군을 점령했으며, 미천왕은 낙랑군을 공격하였지만 영토화하지는 못하였고, 백제가 근초고왕 시에 낙랑군을 점령하였다. 백제가 후연에게 낙랑군을 뺏긴 후, 광개토대왕이 후연을 점령하면서 낙랑군을 포함한 서진의 유주 평주 지역은 고구려의 영토가 되어 고구려의 멸망 시까지 유지된다.
(4) 백제와 말갈
『삼국사』의 관련 기록과 국사편찬위원회 번역은 다음과 같다.
(ㄱ) 온조왕 (BCE 17년)
2년 봄 정월에 왕이 여러 신하에게 말하기를, “말갈(靺鞨)은 우리의 북쪽 경계와 잇대고 있는데, 그 사람들이 용감하고 속임수가 많으니, 마땅히 병장기를 수선하고 양곡을 쌓아두어 막아 지킬 계획을 세워야 한다.”라고 하였다.
(ㄴ) 온조왕 (BCE 16년)
3년 가을 9월에 말갈이 북쪽 경계를 침범하였다. 왕은 굳센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급히 쳐서 크게 이겼다. 적은 살아서 돌아간 자가 열에 한둘이었다.
(ㄷ) 온조왕 (BCE 11년)
8년 봄 2월에 말갈의 적병 3,000명이 와서 위례성(慰禮城)을 포위하자 왕이 성문을 닫고 나가 싸우지 않았다. 열흘이 지나자 적은 양식이 떨어져 돌아갔다. 〔이에〕 왕이 날랜 군사를 뽑아 대부현(大斧峴)까지 쫓아가서 한 번에 싸워 이겼는데, 죽이거나 사로잡은 자가 5백여 명이었다.
(ㄹ) 온조왕 (BCE 9년)
〔10년〕 겨울 10월에 말갈이 북쪽 경계를 노략질하였다. 왕이 군사 200명을 보내 곤미천(昆彌川) 가에서 막아 싸우게 하였다. 우리 군사가 거듭 패배하여 청목산(靑木山)에 의지해서 스스로를 지켰다. 왕이 친히 정예 기병 100명을 이끌고 봉현(烽峴)으로 나가서 구원하니 적들이 보고서 곧 물러갔다.
(ㅁ) 온조왕 (BCE 8년)
11년 여름 4월에 낙랑이 말갈(靺鞨)을 시켜 병산책(甁山柵)을 습격하여 무너뜨리고 1백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ㅂ) 온조왕 (BCE 1년)
18년 겨울 10월에 말갈이 갑작스레 습격해왔다. 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칠중하(七重河)에서 맞서 싸워서 추장 소모(素牟)를 사로잡아 마한(馬韓)에 보내고, 나머지 적들은 모두 구덩이에 묻어버렸다.
(ㅅ) 온조왕 (CE 4년)
〔22년〕 9월에 왕이 기병 1,000명을 거느리고 부현(斧縣) 동쪽에서 사냥하다가 말갈의 적병을 만나 한 번 싸워 격파하고, 생구(生口)를 사로잡아 장수와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ㅇ) 온조왕 (CE 22년)
40년 가을 9월에 말갈이 술천성(述川城)을 쳐들어왔다. 또 겨울 11월에 부현성(斧峴城)을 습격하여 1백여 명을 죽이고 약탈하니, 왕이 날랜 기병 200명에게 명하여 이를 막아 치게 하였다.
(ㅈ) 다루왕 (CE 30년)
3년 겨울 10월에 동부(東部)의 흘우(屹于)가 말갈과 마수산(馬首山) 서쪽에서 싸워 이겼는데, 죽이고 사로잡은 자가 매우 많았다. 왕이 기뻐하여 흘우에게 말 10필과 조(租) 500석을 상으로 주었다.
(ㅈ) 다루왕 (CE 31년)
4년 가을 8월에 고목성(高木城)의 곤우(昆優)가 말갈과 싸워 크게 이기고, 2백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ㅊ) 다루왕 (CE 34년)
〔7년〕 가을 9월에 말갈이 마수성(馬首城)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불을 질러 백성들의 집을 태웠다. 겨울 10월에 〔말갈이〕 또 병산책(甁山柵)을 습격하였다.
(ㅋ) 다루왕 (CE 55년)
〔28년〕 가을 8월에 말갈이 북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ㅌ) 다루왕 (CE 56년)
29년 봄 2월에 왕이 동부(東部)에 명하여 우곡성(牛谷城)을 쌓아 말갈에 대비하게 하였다.
(ㅍ) 기루왕 (108년)
〔32년〕 가을 7월에 말갈이 우곡(牛谷)에 들어와서 백성들을 약탈하고 돌아갔다.
(ㅎ) 초고왕 (210년)
〔45년〕 겨울 10월에 말갈이 사도성(沙道城)을 공격해왔으나 이기지 못하자 성문을 불태우고 달아났다.
(a) 초고왕 (214년)
49년 가을 9월에 북부(北部)의 진과(眞果)에게 명하여 군사 1,000명을 거느리고 말갈의 석문성(石門城)을 습격하여 빼앗도록 하였다. 겨울 10월에 말갈이 날쌘 기병으로 쳐들어와서 술천(述川)에 이르렀다.
(b) 구수왕 (216년)
3년 가을 8월에 말갈이 와서 적현성(赤峴城)을 에워쌌다. 성주가 굳게 막으니 적이 물러나 돌아갔다. 왕이 굳센 기병 800명을 이끌고 뒤쫓아가 사도성(沙道城) 아래에서 싸워 쳐부수었는데, 죽이거나 사로잡은 자가 매우 많았다.
(c) 구수왕 (220년)
7년 겨울 10월에 왕성(王城) 서문이 불탔다.말갈이 북쪽 변경을 노략질하므로 군사를 보내 막았다.
(d) 구수왕 (229년)
〔16년〕 11월에 전염병이 크게 번졌다. 말갈이 우곡(牛谷) 경계에 들어와 사람과 재물을 약탈하였다. 왕이 정예 군사 300명을 보내 막았는데, 적의 복병이 양쪽에서 쳐서 우리 군사가 크게 졌다.
(e) 진사왕 (387년)
〔3년〕 가을 9월에 말갈(靺鞨)과 관미령(關彌嶺)에서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f) 진사왕 (391년)
〔7년〕 여름 4월에 말갈이 북쪽 변경의 적현성(赤峴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g) 동성왕 (482년)
〔4년〕 가을 9월에 말갈이 한산성(漢山城)을 습격하여 깨뜨리고 3백여 호를 사로잡아 돌아갔다.
(h) 무령왕 (503년)
3년 가을 9월에 말갈이 마수책을 불사르고 나아가 고목성을 공격하였다. 왕이 군사 5,000명을 보내 이들을 공격하여 물러나게 하였다.
(i) 무령왕 (506년)
〔6년〕 가을 7월에 말갈이 쳐들어 와서 고목성을 깨뜨리고 6백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j) 무령왕 (507년)
7년 여름 5월에 고목성 남쪽에 두 개의 목책을 세우고, 또 장령성(長嶺城)을 쌓아 말갈에 대비하였다. 겨울 10월에 고구려 장수 고로(高老)가 말갈과 더불어 한성을 치려고 꾀하여 횡악(橫岳) 아래로 나아가 주둔하였다. 왕이 군사를 내어 싸워 그들을 물리쳤다.
말갈은 고구려에 복속한 소국들
말조선이 최씨 낙랑국에 의해 무너진 후, 소국들이 저마다 좌현왕(慕韓=말한=마한=말갈)을 자칭하였다. 좌현왕 즉 말갈이란 말은 辰國 즉 천자국은 아니지만 辰國 이외에는 어느 국가에 대해서도 종속적이 아님을 주장하는 말이다. 이들 소국의 대다수가 신조선과 북부 말조선에 있어 농업의 비중이 작아, 나중에는 말갈이 비농업집단을 의미하는 용어로도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가 신조선과 북부 말조선 대부분을 차지하여 조선의 천자국이 된 후에는 말갈은 고구려에 복속한 소국의 의미가 되었다.
BCE 1년 이전에 백제를 공격하는 말갈은, 漢에 귀부한 우북평이나 어양의 오환인이다. 그래서 BCE 8년처럼 낙랑 동부도위의 사주를 받아 백제를 침략하는 것이 가능했다. CE 30년 31년 34년 백제를 공격하는 말갈은, 고구려가 18년 이전에 요동고새까지 점령하므로, 고구려에 속하게 된 어양과 우북평의 말갈이다.
고구려의 백제 술천성 공격
CE 22년 9월 술천성을 침범한 말갈은 요동반도 북부에 인접한, 고구려의 지방자치단체이다. 고구려가 CE 22년 7월 동부여를, CE 26년 개마국과 구다국을, CE 32년 낙랑국을 영토로 편입하는데, 그 도정에 있는 요동반도를 영토로 하지는 못하였다. 개마국과 구다국을 침공하기에 앞서 고구려는 요동반도를 침범하였는데, 그것이 CE 22년 9월의 술천성 침공이다. 즉 백제는 CE 22년 이전에 요동반도를 백제의 영토로 편입하였고 고구려의 침입을 방어하여 백제 멸망시까지 유지하였다. 214년 9월에 진과가 말갈의 석문성을 빼앗은 후 10월에 말갈이 술천까지 왔던 사실에서 석문성과 술천성이 지근거리임을 알 수 있고, 석문성은 신라와 당이 요동반도에서 싸울 때의 전투지역이므로 술천성은 요동반도의 성이다. 387년 관미령의 싸움도 요동반도에서의 사건이다.
한반도에서 고구려와 국경 획정
말갈이 CE 55년 북쪽 변경을 침범하고, 백제는 CE 56년 동부에 명하여 우곡성을 쌓는데 이는 한반도의 일이다. 한반도에서 고구려와 뚜렷한 경계가 형성되기 전이어서 CE 55년 말갈이 침입할 때 정확한 지명 없이 변경이라 하였고, CE 56년 우곡성을 쌓아 북쪽 방어선을 확립한 것으로 보인다. 백제는 CE 22년 이전 요동반도를 영토화하여 한반도 항해로를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CE 22년 이후로 추정되는 김수로와 김알지의 한반도 이주도 백제의 관여 하에 행해졌을 것이다. 백제는 연타발-소서노의 상업집단이 나라를 만들었으므로, 마한을 점령한 후에는 기존의 해상무역망을 활용하고 개선하여 환황해 무역을 시작했을 것이다. 한반도에서는 신라가 경상도로 옮기면서 백제에의 복속을 거부하자 CE 64년부터 신라와 싸우는데, 가야는 CE 42년 건국한 이후 백제와 싸우지 않는 것으로 보아, 가야 건국도 백제의 양해 아래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어 CE 42년 이전에 이미 한반도 남부도 백제의 세력권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CE 48년의 김수로와 허황옥의 결합도 해상무역세력인 백제의 주선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백제가 아니면 중국과 한반도의 정보를 동시에 알 수 있는 나라가 없고, 백제가 환황해의 항해로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CE 55년과 CE 56년의 말갈과의 접촉은 한반도 내에서의 고구려와의 국경 확정과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3세기의 말갈 침입은 214년의 것을 제외하고는 한반도에서 있었던 일이다. 사도성과 적현성이 분쟁의 중심지인데, 216년 왕이 직접 전쟁에 참여하고 220년에는 왕성 서문이 불에 탔다. 백제는 동서 양도가 있었는데, 220년 당시 수도는 서도 한성이었으므로 동도의 수도를 한성이 아닌 왕성이라 표현하였다. 당시 韓 지역의 백제 영토 주변은 공손씨가 차지하여 고구려와 백제가 직접 국경을 맞대지 않았으므로 서도에서 말갈이 침입할 수는 없다. 229년의 전투는 우곡에서 있었는데 이는 CE 56년에 쌓은 우곡성 부근이다. 391년의 침입도 적현성에 대한 것이므로 한반도의 사건이다. 482년 이후의 사건은 韓 지역에서 있었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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