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김알지의 계림국이 신라에 합류
신라와 계림국 통합
신라는 김알지의 계림국과 통합한다. 그 시기에 대해 『삼국사』는 CE 65년, 『삼국유사』는 CE 60년이라고 한다. 관련 부분과 국사편찬위원회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ㄱ) 『三國史』 「新羅本紀」 탈해(脫解) 이사금(尼師今) 9년 03월 (65년 03월(음))
탈해왕 9년(65년) 봄 3월에 왕이 밤에 금성(金城)의 서쪽 시림(始林)의 나무 사이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들었다. 날이 밝자 호공(瓠公)을 보내 살피게 하니 금빛의 작은 궤짝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흰 닭이 그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 보고하니, 왕이 사람을 시켜 궤짝을 가져다가 열어보았다. 작은 사내아이가 그 속에 들어 있었는데, 모습이 뛰어나고 훌륭하였다. 왕이 기뻐하며 좌우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이 아이는 어찌 하늘이 나에게 좋은 후계를 보낸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고, 거두어 길렀다. 장성하자 총명하고 지략이 많았다. 이에 이름을 알지(閼智)라고 하고, 금궤에서 나왔기에 성을 김(金)씨라고 하였다. 시림의 이름을 계림(雞林)이라고 바꾸었는데, 이로 인해 계림이 국호가 되었다.
(ㄴ) 『삼국유사』 「기이」 김알지 탈해왕대(金閼智 脫解王代)
영평(永平) 3년(60년) 경신(庚申) [한편으로 중원(中元) 6년(61년)이라 하나 잘못이다. 중원은 총 2년으로 끝났다] 8월 4일 호공(瓠公)이 밤에 월성(月城) 서리(西里)를 가는데 시림(始林) (구림(鳩林)이라고도 한다)의 가운데 크고 밝은 빛이 있으며, 자색 구름이 하늘로부터 땅에 뻗쳐 내려온 것을 보았다. 구름 속에 황금 상자가 있는데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빛은 상자로부터 나오며 흰 닭이 나무 밑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그대로 이것을 왕에게 아뢰었다. [왕이] 친히 숲에 나가서 그 상자를 열어 보니 사내아이가 있었는데, 누워있던 [아이가] 바로 일어났다. 이것은 마치 혁거세의 고사와 같으므로 그 아이 이름을 알지(閼智)라 하였다. 알지는 우리 말[鄕言]로 아이[小兒]를 일컫는 말이다. [왕이 그 아이를] 안고 궁으로 돌아오니 새와 짐승들이 서로 따르며 기뻐하면서 춤추고 뛰어 놀았다. 왕이 길일을 택하여 태자로 책봉했으나 후에 [알지는 그 자리를] 파사(婆娑)에게 물려주고 왕위에 오르지 않았다.
「문무대왕릉비문」과 「대당고김씨부인묘명」은 투후 김일제를 신라 김씨의 중시조로 명시하고 있다. 『삼국사』 「김유신열전」은 김수로왕과 신라 김씨가 같은 성이라 하며, 『삼국유사』는 문무왕이 김수로왕도 자신의 15대 시조라며 종묘에 합하여 제사 지내게 하였다 한다. 즉 김수로왕과 김알지(신라 김씨)는 성이 같다. 김일제가 투후에 봉해져 산동성이 김씨의 근거지였는데, 왕망을 중심으로 김씨들이 新을 건국하였다가 新이 무너지자 김수로와 김알지는 함께 한반도로 도피하였다. 「대당고김씨부인묘명」에서는 한반도로의 도피를 “漢나라가 덕을 드러내 보이지 않고 난리가 나서 괴로움을 겪게 되었다. 곡식을 싸들고 나라를 떠나 어려운 때를 피해 멀리까지 갔다. 그리하여 우리 집안은 요동에서 서로 떨어지게 되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김수로가 CE 42년에 가야를 건국한다는 것을 고려하면, 김수로와 김알지는 빠르면 20년대 중반 늦어도 30년대 초반에는 한반도로 건너왔다고 보아야 한다. 新이 23년 이후 혼란스러워지고 유수가 36년에 중국을 평정하므로 30년대 이후 중국에 남아 있으면 위험하며, 한반도에 와서 토착세력과 협상이나 전쟁을 통해 나라를 세우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삼국사』와 『삼국유사』는 호공이 김알지와 탈해왕 사이를 오간다고 하는데 이는 두 집단간의 관계 정립을 위한 협상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통합 협상은 『삼국유사』가 말하는 60년에 시작되었다고 봄이 타당하다. 금궤 즉 김알지 집단은 계림(鷄林)의 나무에 걸려 있었고 나무 아래 닭이 울고 있었는데, 이는 김알지 집단이 달구벌 즉 닭벌판인 대구에 이미 와 있었고 국호가 계림이었음을 의미한다. 『삼국유사』도 탈해가 계림의 국경으로 달아났다고 기술한다. 『삼국유사』 「가락국기」가 “중국은 여러 대를 지났지만, 동국(東國)은 도읍을 나누어 계림(鷄林)이 먼저 정해지고, 가락국(駕洛國)이 뒤에 경영되었다”라 하는데 여기의 계림이 김알지의 계림국이다.
두 집단간 통합협상은 지지부진하다가, CE 64년 백제가 신라를 두 차례나 공격하자 신라가 다음 왕위와 국호까지 양보하면서 서둘러 65년에 통합하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두 집단이 통합하여 백제로부터 독립이 가능했을 것이다. 탈해왕은 국호는 계림국으로 고쳤지만 다음 왕위는 김씨에게 양보하지 않았다.
(4) 백제로부터 독립을 위한 전쟁
CE 63년에 백제가 신라에 사신을 보낸다. 백제는 신라가 경상도로 이전하자 백제에 복속할 것을 종용하기 위해 사신을 보냈다. 당시 한반도 남부는 백제의 영토이거나 백제의 영향 하에 있었다. 가야나 다른 소국이 물론 있었겠지만 이들은 백제의 우월적 지위를 인정하고 복속된 상태였으므로 전쟁은 없었다. 백제는 신라도 백제에 복속하길 요구했으나 신라는 만남조차 거부했다. 신라가 거부하자 백제는 바로 64년부터 66년, 70년, 73년(전라도왜를 시켜서 신라를 공격), 74년, 75년 신라를 공격했으나 크게 이기지 못하였고, 신라가 76년 당시 전쟁의 쟁탈지였던 와산성을 되찾은 후 전쟁은 일단락되었다. 77년에는 가야가 침입하였는데 이 전쟁도 백제의 사주에 의한 것일 수 있다. 신라는 탈해왕 때 김알지의 계림국과 연합하여 백제로부터 독립한 고대국가로 자리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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