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초기 수도 이전
수도 이전의 필요성
고구려는 홀본에서 현도군의 관리 하에 있었다. 고구려가 동부여에 대항할 정도의 힘을 갖춘 후에는, 현도군의 의심을 받지 않으면서 요동외요 밖으로 나가서 독립해야 했다.
협보는 왜 韓으로 떠났는가?
『태백일사』는 고구려가 BCE 32년 행인국, BCE 28년 북옥저를 멸한 후인 BCE 26년 도읍을 눌견(訥見)으로 옮겼다고 한다. 『삼국사』에는 BCE 26년 천도는 기술되어 있지 않다. 『삼국사』는 고구려가 CE 3년에 도읍을 국내(國內)로 옮기고 위나암성을 쌓았다고 한다. 이기동은 訥見과 國內 모두 ‘나라+해+아침’을 의미하며 고구려의 수도 이름이라 하면서 초기에 두 번의 천도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기동의 견해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國內는 나라들이란 의미이다. 눌현(訥見)의 訥의 옛 발음은 날과 가까웠다. 見은 드러날현이다. 즉 눌현도 나라들이란 의미이다. 국내와 눌현 모두 수도의 의미가 아니다. 현도군이 감시하고 있는데 공공연하게 수도를 옮긴다고 말할 수 없다. 현도군의 감시 하에서 수도 이전 즉 실질적 독립은 한 번에 이루어져야 하므로 수도 이전은 한 번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추모왕은 행인국과 북옥저를 점령했으므로 새 점령지를 관리할 장소가 필요하다고 하며 BCE 26년 눌현을 설치하였지만, 수도를 옮기면서 독립하지는 못했다. 고구려는 CE 3년에 눌현 즉 국내 부근에 성(위나암성)을 쌓으면서 수도를 실질적으로 이전할 준비를 하였다.
CE 2년 3월에 설지가 천도를 건의하였고, CE 2년 9월에 유리왕이 국내에 직접 가서 지세를 살폈고, CE 3년 10월에 위나암성이 완성되었고, 협보가 CE 3년 12월에 간언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좌천되자 韓으로 떠났다. 고구려 지배층은 CE 2년 무렵 漢으로부터 독립할 기회가 되었다고 판단하여 추모왕이 정해 둔 눌현=국내 부근에 도성을 쌓을 것을 유리왕에게 건의하여 유리왕이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위나암성이 완성되었음에도 유리왕이 실질적 독립 즉 홀본에서 모든 인구와 재산 등을 위나암성으로 이전하는 것을 미루고 사냥이나 다니니 협보가 답답하여 간언하였다가 韓으로 가버렸다. 유리왕은 독립할 마음이 없었다. 설지가 천도를 건의한 후 6개월이나 있다가 국내로 갔다. 유리왕은 CE 9년 독립파인 해명태자를 숙청하였다. 유리왕은 독립했다가 漢이나 동부여의 공격을 받을까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협보가 CE 3년 12월에 간언하였고, 유리왕이 新의 부용세력인 채로 죽었으므로, 유리왕은 천도한다고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위나암성으로의 천도는 유리왕이 죽은 CE 12년으로 보아야 한다.
위나암성은 국내(나라들, 현재의 천안평야) 북쪽의 도산 자락
『한서』 「지리지」는 마자수가 서북쪽으로 염난수에 들어가, 서남쪽으로 흘러 서안평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한다. 이는 漢이 당산 지역을 일시적으로 지배했던 시기를 기술한 것으로 보인다. 마자수는 북경 북동쪽 산악지역에서 북서쪽으로 흐르는 柳河이고, 염난수는 난하를 지칭한다. 연산산맥 동부에 진번군을 설치했다가 현도군으로 바꾸었으므로 류하의 위치를 서개마현에 기술하였다. 전술하였듯이 현도군에서 실효지배했던 지역은 요동외요 내의 고구려현이고 상은태현 서개마현은 실효지배하지 못했다. 고구려의 국내성은 342년 축성되는데 『신당서』 「동이열전」 고구려조는 마자수가 국내성 서쪽을 지나, 염난수와 합해진다고 한다. 『신당서』에 의하면 마자수가 난하이고, 염난수는 청룡(青龍)강이며 국내성은 지금의 천안시(遷安市)로 추측된다. 천안시 주변은 평야지대이며 난하와 청룡강의 퇴적토로 비옥하여 당시 고구려의 대표적 곡창지대였을 것이므로 나라들이라는 명칭이 부여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위나암성은 국내지방의 넓은 평야 주변에 있으며, 대무신왕 11년(CE 28년) 漢의 침략 시 “한나라 사람들은 우리들이 있는 암석의 땅에는 샘이 없으리라 생각하여, 오랫동안 포위하여 우리가 피로해지기를 기다기고 있습니다”라는 말로 보아 바위산에 축성된 도성이다. 천안평야 북쪽의 도산(都山) 자락에 위나암성이 있었으리라 추측된다. 천안평야에 가깝고, 북쪽이 가파르고, 바위산이며, 물이 많이 흐르고 있으며, 지명이 과거에 도읍이었음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5) 초기의 영토 확장
요동고새까지 진출
고구려는 BCE 36년 요동외요 동북쪽으로 추정되는 비류국, BCE 32년 당산지역의 소국으로 추정되는 행인국, BCE 28년 북옥저, BCE 9년 홀본 북쪽의 선비를 복속시켰고, 여율왕이 CE 12년 新으로부터 독립한 후, CE 14년 양맥과 新의 고구려현을 점령하였다. CE 14년과 CE 18년 사이에 고구려는 요동고새까지 진출하였다. 이는 패수와 대수 사이의 백제인들이 흉년으로 고구려로 도망갔다는 기사에 의해 알 수 있다. 패수와 대수는 낙랑군을 흘렀던 강들이다. 거주지를 흐르는 강은 조선인들은 패수라고 하였다. 낙랑군으로 강제이주된 조선인들은 낙랑군의 거주지로 흘렀던 강을 패수라고 하였다. 비류 일행이 나라를 세우기 위해 건넜던 패수와 대수도 낙랑군의 강이다. 패수와 대수 사이의 백제인들이 CE 19년에 고구려로 갔다는 것은 그 이전에 고구려가 요동고새까지 차지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요동고새 북쪽의 주민 상당수가 오환인 즉 조선인이었고, 新의 상황이 혼란하였으므로 고구려는 쉽게 상하장 지역을 점령할 수 있었을 것이다. 즉 고구려는 CE 44년까지로 일시적이긴 하지만, 여율왕 때 이미 예맥조선과 韓의 경계였던 영정하를 지나 진번조선과 燕의 경계였던 요동고새까지 회복하였던 것이다.
요동과 한반도 북부 영토화
고구려는 요동고새까지 차지한 후 대무신왕 때는 다시 방향을 동쪽으로 돌려, CE 22년 동부여, CE 26년 개마국과 구다국, CE 32년 낙랑국을 정복하였다. 낙랑국은 평양에 있던 국가이다. 『북부여기』는 “BCE 195년 최숭이 낙랑산에서 진귀한 보물을 산처럼 가득 싣고 바다를 건너 마한에 이르러 왕검성에 도읍하였다”라고 한다. 배를 타고 떠난 것으로 보아, 秦漢교체기와 전한 초의 혼란기에 번조선의 해상무역세력이 근거지를 옮긴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서 마한은 말조선이고, 왕검성은 한반도 평양이다. 평양은 대동강 유역의 평야지역이고 대동강을 통해 해상무역이 가능한 곳이어서 최숭집단에게 적절한 이주지로 여겨졌을 것이다. 최숭집단은 해양무역세력으로 이미 평양 등 한반도 서해안과 무역을 하여 평양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토착세력을 어떤 방식으로든 제압하고 낙랑국을 세웠을 것이다.
평양의 낙랑국 기습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설화는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혼인 이야기가 오가면서 대무신왕이 기습을 한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호동이 (북)옥저에 놀러갔다는 말은 당시 낙랑국 북쪽의 개마와 구다국이 고구려에 복속한 상태이므로 호동이 다음 정복 대상인 낙랑국을 살피러 간 것을 의미한다. 이에 대해 최리는 정략혼을 통해 나라를 보전하려 하였다. 자명고가 찢어졌음은 대무신왕이 혼인을 빌미로 경계심을 약화시킨 후 기습하였음을 의미한다. 이 설화는 낙랑국이 다른 소국과는 달리 강력하여 최리가 혼인을 통해 고구려와 병립을 추구할 정도의 국력이 있었음을 알려 준다. 동천왕 때 조위가 낙랑까지 군사를 보내 동천왕은 낙랑으로 피신하지 못하고 동옥저의 남쪽까지 쫓겼다가 유유의 희생으로 반격할 수 있었는데, 이때 나오는 낙랑이 대무신왕이 점령한 평양의 낙랑국이다.
익왕 때, CE 56년 한반도 동해안의 동옥저를 정벌하였고, CE 68년에는 갈사국이 항복하고, CE 72년에는 조나를, CE 74년에는 주나를 정벌하였다. 갈사 조나 주나를 제외한 이들 지역의 추정 위치는 다음과 같다.
[고구려 초기 동북으로의 영토 확장]
(6) 고구려 초기 후한과의 관계
37년 낙랑군 점령과 44년 낙랑군 상실
고구려는 新으로부터 벗어나 CE 18년 이전에 요동고새까지 회복하고, CE 22년 동부여를 복속시키고 CE 32년 낙랑국을 정벌하여 동북방을 평정하였다. 新이 망한 후 혼란기인 CE 28년 요동태수가 고구려를 공격하였으나 피해는 없었다. 고구려가 요동고새까지 영토로 하였으므로, 이 때의 요동군은 중역수 하류의 남쪽이다. 대무신왕은 CE 37년에 요동고새를 넘어 낙랑군을 점령하였다. 유수가 중국을 평정한 후 CE 44년 낙랑군을 고구려로부터 회복하고 살수 이남까지 차지하였다. CE 49년에 모본왕이 (우)북평 어양과 고개 넘어 상곡과 태원을 공격하므로 살수는 어양과 우북평 북쪽에 있는 예맥조선의 패수 즉 영정하이다. 대무신왕과 유수의 낙랑군에서의 1승 1패 후 국경은 과거 예맥조선과 漢의 국경으로 돌아갔다.
강단 유사사학의 날조 역사 유지를 위한 소설
강단 유사사학은 대무신왕과 유수 간 1승 1패의 두 기사를 무시한다. 강단 유사사학의 소설에 의하면 漢 군현이 꼼짝없이 고구려를 억압해야 하는데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아, 고구려가 진번조선과 燕의 경계였던 요동고새보다 더 전진한 사실이 드러나면 낙랑군 사기질이 명백해지기 때문이다. 이 두 기사에 대한 그들의 반응은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에 이 두 기사에 대한 주로 요약되어 있다. 전혀 근거도 없고 타당성도 없고 논리도 없는 말을 장황하게 늘어놓으면서, 신뢰성 있는 사료를 부정할 때 사용하는 상투적 표현인 ‘전승’을 운운하며 횡설수설하다가, 결국 이 두 기사를 믿을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의 주된 논리는 중국 사서에 유수의 낙랑 침략을 기록한 기사가 없기 때문에 『삼국사』에 나와도 못 믿겠다는 것이다. 이 두 기사에 근거한 상식적인 사고는 漢의 국경을 침략할 수 있을 정도로 고구려의 국력이 강했었다는 것인데, 이들은 오히려 낙랑군의 영향력이 한반도 중·남부로 확대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춘추필법 속의 진실
중국 측 사서에 위 두 기사가 전해지지 않는 것은 춘추필법 때문이다. 춘추필법상 대무신왕이 낙랑을 점령한 것을 기록할 수 없다. 그래서 유수의 낙랑 침략 성공도 기록할 수 없다. 고구려에게 낙랑을 뺏긴 일이 없던 것처럼 위장했다. 그러한 위장을 암시하는 기록이 존재한다. 『후한서』에 CE 44년 뜬금없이 동이 한국인이 무리를 이끌고 낙랑에 이르러 내부하였다는 기사가 나온다. CE 47년에는 고구려가 무리를 이끌고 낙랑에 이르러 내속하였다고 한다. 즉 『후한서』는 고구려에 패한 기록을 감추면서 낙랑을 실효지배하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는 CE 47년에 일어난 일도 정확히 기록하고 있고, 낙랑군이 CE 37년 고구려에 점령되자 낙랑 사람 5천명이 신라로 의탁해 왔다는 사실도 기록하고 있다. 또 CE 40년 낙랑 동부도위의 잔당인 화려현과 불내현 사람들이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범하였는데 고구려가 이들을 물리쳐주어 신라사람들이 좋아하였는데, 이 사건은 고구려가 낙랑군을 점령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후한서』가 기술하듯이 CE 44년에는 신라로 왔던 피난민들이 다시 낙랑군으로 되돌아갔다. 따라서 『삼국사』의 대무신왕과 유수의 낙랑에서의 1승 1패는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낙랑군을 난하 동부로 보는 윤내현은 대무신왕의 낙랑 점령으로 낙랑인들이 신라에 의탁하였다는 『삼국사』의 기사를 근거로 대무신왕이 멸한 낙랑은 지금의 평양에 있었던 낙랑국이라 하나 이는 당시 신라 위치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견해이다. 위에서 살핀 바와 같이 당시 신라는 韓에 있었으므로 윤내현의 견해는 옳지 않다. 이러한 오해에 기반하여 그는 유수가 漢의 군인 낙랑군을 침략할 수는 없으므로 유수가 침략한 낙랑은 지금의 평양이고, 평양을 침략한 이유는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서라 주장한다. 당시 漢의 해군력이 평양을 점령할 수 있을지도 의문시되며, 설사 평양을 점령했더라도 그것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을지도 의심된다. 낙랑군이 바닷가에 있으니 유수가 요동고새 남쪽인 낙랑 지역을 해군으로 공격하였다 하여도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당시 중국인의 세계에서 하북성 조백하가 땅끝이다. 한반도의 평양을 알 수도 없다. 유수가 평양에 군기지를 두고 유지할 정도였다면 한반도 전체를 다 점령했을 것이다.
고구려는 모본왕 때부터 후한의 조공을 받았다
CE 49년 『삼국사』 고구려 모본왕의 공격 기록은 『후한서』 「광무제기」와 「동이열전」 고구려조에 동시에 나오므로 부인하지 못하자, 강단 유사사학은, 그들이 거짓말할 때 하는 상투적 표현인 ‘면밀하게 검토할 필요’ 운운하면서, 여기의 고구려는 고구려가 아니라는 억지를 비롯한 여러 재미없는 소설을 창작한다. 그들의 조작소설에 어긋나면 중국의 정사도 쓰레기가 된다. 낙랑군이 한반도 평양이고 고구려의 중심지가 현재의 압록강 부근이라는 일제·중제 유사사학의 교시는, 모본왕의 상곡 태원 공격 기사 하나만으로도 날아간다.
후한은 오환 선비 흉노에 대처하기 위해 漢에 귀부하고 漢에 적대적인 세력의 수급을 가져오면 상을 주었는데, 이 일을 요동태수 제융이 하였고, 그 재원으로 해마다 청주와 서주로부터 2억 7천만전을 받았다. 고구려도 제융으로부터 금원을 받고 CE 49년 점령한 우북평 어양 상곡 태원을 반환하였다. 『삼국사』에 기재된 은혜와 신의로 대우하므로 화친을 맺었다는 말이 그 의미이다. CE 55년 익왕은 요서에 열 개의 성을 쌓았는데 여기의 요서는 후한과의 국경인 영정하 상류로 추정된다. 후한의 조공은 후한이 중기에 접어들며 초기 시행했던 북방예산을 조달하지 못하자 중단되었고, 고구려는 후한의 조공이 중단되자 105년부터 후한을 침입하기 시작하였다.
(7) 후한의 요동군, 요서군, 현도군, 낙랑군
요동·요서·현도군은 전한과 후한이 다르다
여율왕이 요동고새까지 회복하면서 요수가 변화하였다. 왕검성을 점령한 후의 요수는 조백하이고, 후한의 요수는 중역수이다. 영정하 이북에 현도 요동 요서군이 있었는데, 후한에서도 이들 세 군이 있고 제융 등 태수도 임명된다는 것은 이들이 이동하였음을 의미한다. 후한은 요동고새 남쪽의 중역수 하류로 요동군과 현도군을 이동시키고, 요서군은 중역수의 상류지역으로 이동시켰다. 1세기 초 황하의 수류가 크게 변동하였다. 황하 하류는 바다 같이 넓었는데 그것이 서쪽으로 이동하여 낙랑군 동쪽에 거주 가능한 땅이 새로 생겼고, 발해만은 삼각주 지역으로 계속하여 육지가 늘어나고 있었으므로 요동 현도 두 군을 설치할 수 있었다.
이현이 본 변조되지 않은 『후한서』 「군국지」에는 서안평현과 대방현이 요동군이라 하므로 후한의 요동군은 낙랑군 동남쪽이다. 고구려가 서안평을 공격하여 도중에서 대방령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포로로 잡는다는 것은 요동군과 낙랑군이 붙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다. 후한의 현도군은 과거 낙랑군 동부도위 지역이다. 118년 고구려가 현도군 화려성을 공격하였다. 화려현은 낙랑군 동부도위가 관할하는 현이었던 곳으로 현도군이 되었다. 미천왕은 302년 현도군을 공격하고, 311년 서안평을 점령하고, 313년 낙랑군을 공격하고, 314년 대방군을 공격하고, 315년 현도군을 공격하고, 320년 요동을 공격하는데, 이는 현도군, 요동군 서안평현, 낙랑군 대방군 요동군이 모두 부근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후한의 요동군, 현도군, 낙랑군(대방군)은 407년까지 유지된다
강단·일제 유사사학은 漢이 예맥조선을 침략하고 평양에 낙랑군을 설치한 후 313년까지 낙랑군이 한반도에 있었다가, 이후 그들 소설상의 어딘가로 이동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前漢은 왕검성을 점령한 후, 왕검성 주민을 원래의 漢나라 영토에 이주시켜 낙랑군을 설치하였다. 『진서(晉書)』 「지리지」는 낙랑 대방 현토 요동 창려를 평주라 하며 후한 말 공손도 이래 평주의 위치가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고구려는 407년 후연을 정복하고 이들 군을 점령하여 멸망 시까지 유지하였다. 후연이 정복되면서 이들 군은 북연 지역으로 교치되었다.
[후한 요동군 요서군 현도군의 위치]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한국학 기초 낭독 26 (0) | 2026.04.12 |
|---|---|
| 한국학 기초 낭독 25 (0) | 2026.04.12 |
| 한국학 기초 낭독 23 (1) | 2026.04.12 |
| 한국학 기초 낭독 22 (1) | 2026.04.12 |
| 한국학 기초 낭독 21 (1) | 2026.04.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