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한국학 기초 낭독 27

역사회복 2026. 4. 12.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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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백제 도읍지, 영토, 무역

 

(1) 백제의 시조와 건국 시 도읍지

 

백제의 시조는 비류인가 온조인가?

백제의 초기 도읍지는 韓의 마한 북쪽이므로 당연히 韓 지역이다. 『삼국사』 등 사서의 관련 기사와 국사편찬위원회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ㄱ) 온조왕 (BCE 18년) [온조시조설과 비류시조설의 내용]

백제(百濟)의 시조 온조왕(溫祚王)은 그 아버지가 추모(鄒牟)인데 혹은 주몽(朱蒙)이라고도 한다. 〔주몽은〕 북부여(北扶餘)에서 난을 피하여 졸본부여(卒本扶餘)에 이르렀다. 부여왕은 아들이 없고 딸만 셋이 있었는데, 주몽을 보고는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고 둘째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여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 〔주몽은〕 두 아들을 낳았는데 맏아들은 비류(沸流), 둘째 아들은 온조(溫祚)라고 하였다. 혹은 주몽이 졸본에 이르러서 월군(越郡)의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여 두 아들을 낳았다고도 한다.

추모가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이 와서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마침내 오간(烏干)·마려(馬黎) 등 10명의 신하와 더불어 남쪽으로 갔는데 백성들이 따르는 자가 많았다. 〔그들은〕 드디어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에 올라가 살 만한 곳을 바라보았다. 비류가 해빈에 살고자 하니 10명의 신하가 간언하기를, “생각건대 이곳 강 남쪽의 땅은 북쪽으로는 한수(漢水)를 띠처럼 두르고 있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을 의지하였으며, 남쪽으로는 물댈 수 있는 못을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대해로 막혀 있습니다. 이렇게 하늘이 내려 준 험준함과 지세의 이점은 얻기 어려운 형세이니, 이곳에 도읍을 세우는 것이 〔또한〕 좋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러나〕 비류는 듣지 않고 그 백성들을 나누어 미추홀(彌鄒忽)로 돌아가 살았다. 온조는 강 남쪽의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10명의 신하를 보좌로 삼아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라 하였다. 이때가 전한(前漢) 성제(成帝) 홍가(鴻嘉) 3년(BCE 18년)이었다.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차서 편안히 살 수가 없었다. 위례성으로 돌아와서 보니, 도읍은 안정되고 백성들은 편안하고 태평하므로 마침내 부끄러워하고 후회하다가 죽었다. 그의 신하와 백성들은 모두 위례에 귀부(歸附)하였다. 그 후 올 때 백성(百姓)들이 즐거이 따랐다고 하여 국호를 백제(百濟)로 고쳤다. 그 계통은 고구려(高句麗)와 더불어 부여(扶餘)에서 함께 나왔기 때문에 부여를 씨(氏)로 삼았다.

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시조 비류왕(沸流王)은 그 아버지가 우태(優台)이니 북부여왕(北扶餘王) `해부루(解扶婁)의 서손(庶孫)이다. 어머니는 소서노(召西奴)이니 홀본(卒本) 사람 연타발(延陀勃)의 딸이다. 〔소서노가〕 처음 우태에게 시집가서 두 아들을 낳았으니, 맏이는 비류라 하고, 둘째는 온조라 하였다. 우태가 죽자 홀본에서 과부로 지냈다. 그 후 추모가 부여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자 전한(前漢) 건소(建昭) 2년(BCE 37년) 봄 2월에 남쪽으로 도망하여 홀본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국호를 고구려(高句麗)라고 하였으며, 소서노를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 나라의 기틀을 다지고 왕업을 세우는 데 자못 내조가 있었기 때문에 추모는 소서노를 총애하고 대접하는 것이 특히 후하였고, 비류 등을 자기 자식처럼 대하였다. 추모가 부여에 있을 때 예씨(禮氏)에게서 낳은 아들 유류(孺留)가 오자 그를 태자로 삼았고, 왕위를 잇기에 이르렀다. 이에 비류가 동생 온조에게 말하기를, ‘처음 대왕께서 부여의 난을 피해서 이곳으로 도망하여 왔을 때, 우리 어머니가 가산을 쏟아 나라의 위업을 세우는 것을 도와 애쓰고 노력함이 많았다. 〔그런데〕 대왕께서 돌아가시자, 나라가 유류에게 돌아가게 되었으니 우리가 공연히 여기에 있으면서 쓸모없는 사람같이 답답하고 우울하게 지내는 것보다는, 차라리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살만한 곳을 택하여 따로 나라의 도읍을 세우는 것이 낫겠다.’라고 하고, 마침내 그의 동생과 함께 무리를 거느리고 패수(浿水)와 대수(帶水)를 건너 미추홀에 와서 살았다.”

(ㄴ) 온조왕 13년 5월 (BCE 6년 05월 (음))

〔13년〕 여름 5월에 왕이 신하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나라의 동쪽에는 낙랑(樂浪)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靺鞨)이 있어 번갈아 우리 강역을 침공하므로 편안한 날이 적다. 하물며 요사이 요망한 징조가 자주 나타나고, 국모(國母)께서 돌아가셨다. 형세가 스스로 편안치가 않으니, 장차 반드시 도읍을 옮겨야겠다. 내가 어제 순행을 나가 한수의 남쪽을 보니, 땅이 기름지므로 마땅히 그곳에 도읍을 정하여 오래도록 편안한 계책을 도모해야 하겠다.”

(ㄷ) 온조왕 13년 7월 (BCE 6년 7월 (음))

〔13년〕 가을 7월에 한산(漢山) 아래로 나아가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慰禮城)의 민호(民戶)들을 옮겼다.

(ㄹ) 온조왕 13년 8월 (BCE 6년 8월 (음))

〔13년〕 8월에 마한(馬韓)에 사신을 보내 도읍을 옮긴다는 것[遷都]을 알리고, 마침내 강역을 구획하여 정하였다. 북쪽으로는 패하(浿河)에 이르고, 남쪽은 웅천(熊川)을 경계로 삼으며, 서쪽으로는 대해에 닿고, 동쪽으로는 주양(走壤)에 이르렀다.

(ㅁ) 온조왕 14년 1월 (BCE 5년 1월 (음))

14년 봄 정월에 도읍을 옮겼다.

(ㅂ)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추모가 유리를 태자로 하겠다고 하자 소서노가) 경인년(BCE 42년) 3월에 패대의 땅이 기름지고 물자가 풍부하다는 말을 듣고 남으로 도망갔다. 신한과 번한 사이 바다가 가까운 벽지에 10년 동안 살며 밭을 사서 장원을 두어 수만 석에 이르는 부를 쌓자 멀고 가까운 곳에서 소문을 듣고 찾아와 의탁하는 자가 많았다. 남으로는 대수에 닿고 동으로는 대해에 이르니 반천리의 땅이 모두 그의 소유였다. 주몽제에게 편지를 보내 섬기기를 원한다고 하니 주몽열제가 매우 기뻐 격려하면서 어하라라는 호를 내려 책봉했다. 13년(BCE 19년)에 소서노가 세상을 떠나자 태자 비류가 즉위하였으나 따르는 자가 없었다.

 

백제의 시조는 소서노이고 첫 도읍지는 미추홀이다

온조 시조설에 의하면 BCE 5년의 천도가 설명되지 않는다. 온조 시조설에서 기술하는 도읍지는 한산 부근 한수 남쪽이다. 그런데 온조가 천도한 도읍지도 한산 부근 한수 남쪽이다. 따라서 비류 시조설의 미추홀이 첫 도읍지(위례성)이고 온조의 한수 남쪽 위례성은 두 번째 도읍지(위례성)라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런데 소서노로 추정되는 국모가 죽은 후에 온조가 한수 남쪽으로 천도하기로 한다는 것은, 소서노의 죽음 당시 소서노 비류 온조 모두 미추홀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로부터, 비류는 소서노의 결정으로 왕위에 올랐는데, 소서노가 죽자 온조가 정변을 일으켜 왕위를 찬탈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삼국사』 BCE 6년 소서노 사망 이전 백제 기록은 소서노왕 시의 일이다.

 

『태백일사』는 위서인가?

『태백일사』는 백제의 초대왕은 소서노라 명시한다. 『태백일사』는 소서노가 추모왕에 내속했다고 기술하나, 백제가 건국한 韓 지역의 위례성과 고구려 사이에 漢이 있어 漢人과 漢에 귀부한 오환인(말갈인)이 살고 있으며, 당시 고구려는 漢에 예속된 상태로 소서노가 고구려에 내부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태백일사』의 기술은 고구려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한 거짓이라 볼 수 있다. 『태백일사』가 신한과 번한 사이 바닷가 땅에서 백제가 기원한다고 기술하는데, 이는 『태백일사』가 위서가 아닌 결정적 증거이고 韓 지역이 한반도가 아닌 본고의 주장과 같이 발해만에 있었음을 밝히는 명백한 증거가 된다. 본고가 韓 지역의 위치를 입증하고 韓의 마한을 규명하기 전까지, 辰韓과 번한 사이 바닷가 땅에서 백제가 건국했다는 기술은 백제가 경상도 김해 부근에서 건국했다는 말과 같았으므로 말도 안 되는 헛소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삼국사』 비류시조설의 내용이 타당하다

온조시조설이 정설로 된 이유는 온조와 백제의 정통성 확보를 위해서이다. 비류와 온조가 나누어서 도읍했는데 비류 세력은 좋지 않은 곳에 도읍해서 망했다고 하는 것이 부담이 적다. 건국 초기에서 소서노와 비류를 지우기 위해 첫 도읍지를 한수 남쪽 위례성으로 기술한 것이다. 따라서 비류시조설 즉 소서노 시조설이 타당하고, 비류와 온조도 비류시조설이 기술하듯이 우태의 아들로 보아야 한다. 고구려와 가야는 물론 신라도 시조의 건국 설화가 있는데, 백제에는 없는 것은 연타발-소서노가 상업 세력이어서 현실적이었고, 한편으로는 건국 초기의 정변 때문이라 추측할 수 있다. 온조시조설 중 비류와 온조가 추모왕의 아들이라는 것은 사실 고구려 정통론을 위한 거짓이다. 중국인들이 주변 모든 나라를 그들이 생각하는 중국인의 후손이라 하는 것처럼, 고구려 정통론도 백제가 고구려로부터 나온 나라라 한 것이다. 어머니가 왕 옆에 있는 왕자와 어머니가 없는 왕자가 있는 경우 어머니가 있는 왕자가 태자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 겨레의 나라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소서노 같은 유능한 어머니가 자기 아들을 다음 왕으로 만들지 못했다는 것은 비류와 온조가 추모왕의 아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백제의 건국지는 한반도가 아닌 韓이다

강단 유사사학은 漢水를 한강이라 하나, 낙랑군 남쪽에도 한수가 있었고 이 한수가 백제의 한수이다. 『산해경』 「해내서경」은 “맥국이 漢水 동북에 있었다. 燕에 가까워 연이 멸했다”고 하는데, 여기서 맥국은 진번조선이다. 『산해경』이 말하는 한수가 백제가 도읍한 한수이다. 강단 유사사학은 ‘북쪽으로는 패하(浿河)에 이르고, 남쪽은 웅천(熊川)을 경계로 삼으며, 서쪽으로는 대해에 닿고, 동쪽으로는 주양(走壤)에 이르렀다’는 BCE 6년의 기사 중, ‘서쪽으로는 대해에 닿고’를 이유삼아 지금의 서울이나 하남을 백제의 첫 도읍지로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마한왕이 백제에게 동북쪽 백리의 땅을 주었다는 말과 모순된다. 백리를 주었다는 말은 사실은 백리가 안된다는 말이다. 설사 백리라고 하더라도, 그들이 백제의 중심지라 주장하는 송파구나 하남에서 인천 해안까지 직선거리가 각각 44km, 53km이므로 100리의 땅과는 맞지 않는다. 대해는 지금의 백양정이나 당시의 황하를 의미한다. 당시 발해만은 육지로 더 들어간 상태였고, 당시의 황하는 발해만으로 들어오면서 넓게 퍼져 바다 같았다. 거기에 백양정까지 고려하면 백제의 서쪽을 대해라 표현했더라도 틀린 말이 아니다. 『사기집해』는 서광(徐廣)이 海는 河의 뜻도 있다 말하였다고 기술한다. 河는 보통명사이기도 하고 황하라는 고유명사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의 강단 유사사학 종사자들을 제외하고 모든 사람들은 자기 나라의 역사를 그럴듯하고 멋있게 기술한다. 대해라는 표현은 그러한 표현이다. 강단 유사사학이 말하는 주양은 춘천인데 송파구에서 춘천까지 직선거리로 약 68km이다. 강단 유사사학은 패수가 예성강이고 대수는 임진강이라 하는데 예성강가의 금천군에서 송파구까지 직선거리로 90km이다. 강단 유사사학은 웅천이 안성천이라 주장하는데 안성천에서 송파구까지 직선거리로 58km이다. 마한왕이 주었다는 백제 땅 백리와 강단 유사사학의 위치 비정은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이때 그들의 특기가 등장한다. 그들은 어떠한 근거도 없이 김부식이 온조왕 시 백제의 영토를 거짓으로 기술했다고 주장하면서 韓 지역의 백제는 없고 백제는 한강 유역의 소국이라고 창작한다. 물론 이는 야마토가야 선생님의 강림을 위한 필수적 배경이다.

 

(2) 중국 사서가 기술하는 백제의 요서 진평

 

요서와 진평에 대해 기술하고 있는 사서와 국사편찬위원회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ㄱ) 『송서(宋書)』 「동이열전」

百濟國은 본래 고려와 더불어 遼東의 동쪽 1천여리 밖에 있었다. 그후 고려는 요동을, 백제는 遼西를 점령하여 소유하였다. 백제가 통치한 곳을 晋平郡 晋平縣이라 한다.

(ㄴ) 『남제서(南齊書)』: 긁어서 지움.

(ㄷ) 『양서(梁書)』 「동이열전」

百濟는 그 시초가 東夷의 三韓國인데 하나는 馬韓이요, 다른 하나는 辰韓이요, 또 하나는 弁韓이었다. --- 그 나라는 본래 句驪와 더불어 遼東의 동쪽에 있었다. 晋나라 때에 이르러 句驪가 이미 遼東을 점령하여 소유하자, 百濟 역시 遼西·晋平 2郡의 땅을 점거하여 소유하고 스스로 百濟郡을 설치하였다.

(ㄹ) 『양직공도』

백제는 옛날에 래이 마한에 속하였다. 西晉 말 구려가 요동 낙랑을 점령하여 소유하자, 백제도 요서 진평현을 소유하였다. 東晉 이후로 조공을 했는데, 의희 중에 여전이, 송 원가 중에 여비가, 남제 영명 중에 여태가 중국 관작을 받았다. 양 초기 여태를 정동장군으로 삼았다. 얼마 뒤 고구려에 격파되었다. 보통 2년 여륭이 사신을 보내 여러 번 고려를 무찔렀다고 표를 올렸다. 도성을 고마라 하고, 읍을 담로라 하는데 중국의 군현과 같은 것이다. 22담로가 있는데, 왕족들에게 나누어 주어 다스렸다. 주변 소국인, 반파·탁·다라·전라·사라·지미·마련·상사문·하침라 등이 백제에 부속되어 있다. 말과 옷은 대체로 고구려와 같고, 걸을 때 두 팔을 벌리지 않고, 절 할 때 다리를 펴지 않는다. 모자를 冠(관)이라 부르고, 저고리를 複衫(복삼), 바지를 褌(곤)이라 한다. 그 나라 말에는 중국의 말이 뒤섞여 있으니, 이것 또한 秦과 韓의 유속이라 한다.

(ㅁ) 『위서(魏書)』 「백제전」

百濟國은 그 선조가 夫餘로부터 나왔다. 그 나라는 북쪽으로 高句麗와 천여리가 떨어져 있고, 小海의 남쪽에 위치하였다.

(ㅂ) 『주서(周書)』 「백제전」

百濟는 그 先代가 대체로 馬韓의 속국이며 夫餘의 별종이다. 仇台란 사람이 처음으로 帶方에 나라를 세웠다.

(ㅅ) 『남사(南史)』 「동이전」: 『양서』와 동일

(ㅇ) 『북사(北史)』 「백제전」

東明의 후손에 仇台가 있으니, 어질고 信義가 두터웠다. 처음으로 帶方의 옛 땅에 나라를 세웠다. 漢의 遼東太守 公孫度는 딸을 시집보냈는데, 마침내 東夷 중에서 强國이 되었다.

(ㅈ) 『수서(隋書)』 「동이전」: 『북사』와 동일

(ㅊ) 『구당서』 「동이전」

百濟國도 본래는 扶餘의 別種이다. 일찍이 馬韓의 옛 땅에 있었다. 京師에서 동으로 6,200리 밖에 있으며, 大海의 북쪽, 小海의 남쪽에 위치한다. 동북으로는 新羅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越州에 이르며, 남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倭國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高麗에 이른다. 또 王이 사는 곳에는 동·서로 두 城이 있다.

(ㅋ) 『신당서』 「동이전」

百濟는 扶餘의 別種이다. 京師에서 동쪽으로 6천리이고 영빈해(贏濱海)의 북쪽에 위치해 있다. 서쪽은 越州, 남쪽은 倭, 북쪽은 高麗와 경계를 이루고 있으니, 모두 바다를 건너야 간다. 그 나라의 동쪽은 新羅이다. 王은 東·西의 2城에 산다.

(ㅌ) 『통전』 변방 百濟

晋代에 고구려가 遼東을 점령하여 소유하자, 百濟 역시 遼西와 晋平 2군을 占據하여 소유하였다. 지금의 柳城과 北平 사이이다. 晋代 이후로 諸國을 병탄하였으며 馬韓故地를 점령하여 소유하였다. 그 나라는 동서로 4백리요, 남북으로 9백리이며, 남쪽으로 신라와 접하고, 북쪽으로 고구려와 천여리 대치한다. 서쪽으로 대해까지이고, 소해의 남쪽에 위치한다.

 

 

(가) 백제의 요서

 

백제의 요서는 황하 하류의 서쪽

『송서』 요서, 『양서』와 『남사』의 요서, 『양직공도』 요서, 『통전』의 요서, 『주서』 대방, 『북사』와 『수서』의 대방고지, 『신당서』 영빈해의 북쪽, 『구당서』와 『통전』의 마한고지는 모두 같은 곳을 가리키고 있다. 백제는 마한의 동북쪽에서 건국했는데, 백제 건국 시에는 황하가 대방고지의 서쪽으로 흘러 이 지역도 황하 동쪽으로 韓 지역이었다. 1세기 초 황하가 동쪽으로 옮겨 가면서 이 지역은 황하의 서북쪽이 되었다. 중국인들은 황하 하류를 요수라 하고 그 서쪽을 요서 그 동쪽을 요동이라 지칭하기도 하였다. 『수경주』는 갈석산이 요서 임유현 남쪽 물 속에 있다고 하며, 장수절도 영주가 요서와 요동이라고 한다. 서진 말 중국의 혼란기 고구려가 요동(중역수 하류)을 점령하자, 백제도 황하 서쪽을 점령하였는데 중국인은 이를 요서라 하였다. 고구려 요동의 요는 중역수를 말하고, 백제 요서의 요는 황하 하류를 말한다. 『신당서』가 영빈해(贏濱海)의 북쪽이라 하는데 『우적도』에서 瀛과 濱 지역이 황하 하류에 표시되어 있다. 영빈해의 해는 황하를 말하는 것으로 영빈해는 영과 빈 지역에 위치한 황하 하류를 의미한다. 즉 영빈해의 서북쪽은 요서이다.

 

[우적도에서 瀛과 濱의 위치]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위서』 소해의 남쪽, 『구당서』 대해의 북쪽 소해의 남쪽은, 韓 지역을 포함한 황하 하류 지역을 의미한다. 韓 지역이 소해의 남쪽인 것은 발해를 소해라 하였기 때문이다. 『구당서』가 대해의 북쪽이라 하는데, 이 때 대해는 황해이고, 대해의 북쪽은 산동성과 韓 지역을 포함한 황하 하류 지역을 의미한다. 백제가 강성했을 때는 산동성을 차지하였으므로 백제의 영토를 대해의 북쪽이라 할 수 있다. 강단·일제 유사사학은 소해를 아산만이나 경기만 일대라 하고, 대해는 제주해협이나 서해라고 한다. 아산만이 소해이면 서울 백제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제주해협이 큰 바다이면 황해는 큰큰바다가 되어야 하는가? 중국인이 무슨 볼 일이 있다고 제주해협을 대해라고 명명하였겠는가? 이들 강단·일제 유사사학은 한반도를 미리 상정하고, 소해나 대해를 어떤 근거도 없이 자의적으로 규정하여, 백제를 한반도에 가두려고만 한다. 그들의 중제 유사사학에 대한 충성과 우정은 관포지교를 능가할 것이다.

 

백제는 왜 요서(황하 하류 서쪽)를 차지하려 하였는가?

백제가 황하 서북쪽을 항상 확보하려 했던 것은 백제의 고토이고 백제가 무역세력이기 때문이다. 황하를 거슬러 올라가야 사치품의 최대 소비시장이 있으므로 황하 어귀는 백제에게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황하 동남쪽은 韓 지역으로 항상 확보하고 있었지만 항해의 안전을 위해선 서북쪽도 확보해야 했을 것이다. 중국 사서들이 백제의 황하 서쪽 영토를 주로 언급하는 것은 황하 동쪽 영토 즉 韓 지역은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섬과 같이 격리되어 중국인의 사고에서 제외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오죽했으면 남려가 漢에 속하겠다고 해도 漢이 받아줄 수 없는 지역이었다. 광개토대왕이 韓 지역을 수군으로 점령하기 전까지 韓은 천혜의 요새였다. 『구당서』는 백제가 京師에서 6200리 떨어져 있다 하고, 『신당서』는 6000리 떨어져 있다 하고, 『통전』은 백제의 서쪽이 대해이고 백제는 동서 4백리 남북 9백리라 하나, 이러한 말들은 韓이 아닌, 한반도 백제에 관한 기술이다.

 

 

 

 

(나) 백제의 진평

 

백제의 진평은 광서성

『송서』, 『양서』, 『양직공도』, 『남사』, 『통전』의 진평과 『구당서』와 『신당서』의 백제 서부 지역인 월주는 광서성(廣西省) 장족자치구이다. 『송서』에 의하면, 광주(廣州) 울림군(鬱林郡)에 진평현이 있었으며, 『中國地圖集』(1995년판)에는 宋나라가 설치했던 진평현 경내에 지금까지 ‘백제향’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지금도 장족자치구의 현지인들은 백제향의 중심지인 백제허를 대백제(大百濟)라고 읽으며, 전라도에서 사용되었던 외다리방아와 맷돌을 사용하고 있다. 『中國古今地名大辭典』도 진평현이 광서성에 있다고 한다. 진평이 북조의 사서에서 언급되지 않는 것은 진평이 중국 남쪽 즉 남조 영역의 남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흑치상지는 백제 서부(광서성) 출신

흑치상지 묘지명에 ‘그 조상은 부여씨로부터 나왔는데 흑치지역에 봉해지면서 흑치를 성으로 삼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양자강 하류 이남의 지역에서는 사람들이 빈랑(檳榔)이라는 나무 열매를 항상 씹어 이가 검게 된다고 한다. 『삼국사』, 『구당서』, 『신당서』 모두 “黑齒常之 百濟西部人(흑치상지는 백제의 서부인이다)”이라 하는데, 『구당서』와 『신당서』는 월주가 백제의 서부 지역이라고 한다. 『구당서』와 『신당서』의 월주는 전술하였듯이 진평을 의미한다. 『중국장수전전(中國將帥全傳)』도 흑치상지의 출신지인 백제 서부가 지금의 광동성 흠현 서북이라고 하는데, 흠현이 광서성 남령시(南市) 동남쪽이므로 흠현 서북은 백제향 즉 진평이다. 진평=흑치는 백제의 동남아 무역을 위한 전진기지 역할을 했을 것이다. 백제가 광서성까지 진출하였다는 사실에서, 백제가 타밀인들로부터 동남아와 중국 사이의 무역권을 빼앗은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중제 유사사학은 광서성의 백제향을 지우기 위해 ‘백제’가 쟁기 주둥이와 같은 지형에서 유래한 지명이라 날조하는데, 이러한 해석은 壯族이 백제허의 墟자나 대백제의 大자의 뜻을 모를 가능성이 없으므로 억지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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