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한국학 기초 낭독 29

역사회복 2026. 4. 13. 07:54

https://youtu.be/zIZD9g82Z5s

 

(5) 백제가 지배하는 환황해 해상 교역로

 

협보가 韓의 마한에서 열도까지 갔다는 것은 당시 韓에서 산동반도-요동반도-한반도-열도의 항해노선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백제가 CE 22년 이전 요동반도를 확보하였다는 것은 중국에서 한반도까지의 해상교통로를 장악하였음을 의미한다. 당시에는 연안으로 항해하였으므로 대륙에서 요동반도를 거치지 않고는 해상을 통해서 한반도로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백제는 번조선 이래 유지되었던 해상 교통로를 韓과 요동반도 확보를 통해 장악하고 강한 세력이 없었던 한반도 남부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 한반도 북부는 낙랑국이 있어 백제가 확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백제의 진평군은 광서성이다. 백제는 동아시아 유일의 해상무역세력으로, 韓을 중심으로 남쪽으로는 중국 동부 해안을 거쳐 동남아까지 동쪽으로는 요동반도 한반도 남부를 거쳐 열도까지 영토와 해상로를 확보하였다.

 

韓과 요동반도 외에 중국 동해안과 남해안도 백제 영토

고구려는 패수인 영정하 이북을 항상 확보하였고, 백제는 황하 이동을 항상 확보하였다. 낙랑군은 보정시 부근이었는데, 이 지역을 남북조 시기 고구려, 백제, 모용씨가 다투었다. 백제는 韓을 벗어나 남쪽으로 중국 동해안을 따라 영토를 확보하였다. 최치원은 당의 태사시중에게 신라 사신에 대한 당나라 내에서의 편의 보장을 요구하는 외교문서를 보냈는데, 거기에서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 시에는 강한 군사가 백만이나 되어, 남으로는 오(吳) 월(越)을 침공하였고, 북으로는 유(幽), 연(燕), 제(齊), 노(魯)를 어지럽혀 중국의 커다란 해충이 되었습니다”라고 말한다. 남조에 보낸 표문에서 백제의 지방태수가 나타나는데, 『송서』에서는 서하태수, 『남제서』에서는 광양태수, 조선태수, 대방태수, 광릉태수, 청하태수, 낙랑태수, 성양태수가 나온다. 『북사』에 의하면 북제의 後主는 571년 위덕왕을 동청주자사로 하는데, 이는 산동성에 백제의 영토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사료에 나타나지 않은 중국 동해안의 태수도 더 있었을 것이다. 강소성 연운항에서는 백제의 횡혈식 석실분이 790기 발견되었는데 6세기 말에서 백제가 망할 때까지의 것들이다. 백제는 동남아와도 무역을 했으므로 중국 동해안 남쪽으로 진평군 등 더 많은 영토와 무역기지가 있었을 것이고, 양자강과 황하의 중류 부근에도 무역을 위한 무역관을 운영하였을 것이다. 당나라 때 백제유민에게 과세할 목적으로 신라방 신라소가 설치되었는데, 이들 지역은 백제의 영토였다고 보아야 한다.

강단 유사사학은 위나라가 바다를 달리는 말을 타고 한반도로 와서 백제와 싸웠다는 놀라운 상상력을 발휘하기도 하지만, 신라가 백제의 통역이 있어야 중국인들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는 사실과 백제에는 동·서의 두 왕성이 있었다는 사실은 백제가 대륙에 있었다는 확실한 증거가 된다. 백제가 대륙에 있었고 해상무역세력이었기 때문에 신라와 중국의 통역을 할 수 있었다. 백제가 남조로부터 관작을 받았던 이유는 대륙에서 조선인과 중국인들을 동시에 통치해야 했기 때문이다. 위진남북조의 혼란기 중국 동해안 중 상당한 지역이 백제 영토였다. 북조는 강한 세력끼리 중앙을 차지하기 위해 싸워서 바닷가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으며, 남조는 북조의 침략을 걱정해야 했으므로 역시 바닷가를 다 차지할 수 없었다.

 

 

 

 

 

 

[백제의 중국 동해안 행정구역 추정]

 

 

『수서』는 대만이 백제 영토라 명시

『수서』 「동이열전」 백제조는 “陳을 평정한 해에 어떤 戰船 한척이 표류하여 바다 동쪽의 타모라국(𨈭牟羅國)에 닿았다. 그 배가 돌아올 적에 百濟를 경유하니, 昌이 필수품을 매우 후하게 주어 보냈다. 아울러 使臣을 보내어 表文을 올려 陳을 평정한 것을 축하하였다”라 하며, “그 나라의 남쪽에서 바다로 석달을 가면 타모라국(𨈭牟羅國)이 있는데, 남북으로는 천여리이고 동서로는 수백리이며, 토산물로는 노루와 사슴이 많다. 百濟에 附庸되어 있다.”라 하는데 여기의 타모라국은 대만이다. 대만의 남북 직선거리가 965리(386㎞)에 이르며 동서 폭은 360여리(144㎞)인데다 현재도 녹항(鹿港), 곧 사슴항이라 일컫는 항구도시가 있을 정도이므로 대만이 백제의 영토였음은 확실하다. 대만의 백제유민은 백제라는 국호를 유지하다가 1267년 원나라에 사신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타모라라는 말은 담로이다. 백제가 대만에 담로를 두고 지배했으며 자치를 어느 정도 인정하였을 것이다. 강단 유사사학은 『수서』가 말하는 타모라도 제주도라 억지를 쓴다. 물론 제주도도 백제는 담로를 두어 지배했다.

 

동남아 각지의 무역 거점을 지배

담로는 하나가 아니다. 담로는 담 울타리라는 뜻으로, 현지인 지배와 무역 거점의 기능을 한 장소이다. 동남아 해안에 남아있는 담로 비슷한 지명은 백제가 진출하여 무역을 독점했던 지역이다. 백제의 사신이 곤륜의 사신을 바다에 던졌다는 사실, 성왕이 왜왕에게 부남(扶南)의 보물과 노예 2인을 하사하였다는 사실, 의자왕이 하사한 상아와 자단나무가 재료인 바둑판과 바둑판에 그려진 열대문양은 백제의 무역 영역과 원주민에 대한 백제의 지배력을 시사한다. 동남아 해안 지역에서 발견되는 굽다리 토기도 백제의 영역을 증명한다.

 

(6) 동서(東西) 양도제(兩都制)

 

김부식은 韓을 몰라 韓백제 관련 사료를 대거 불채택

신라는 『삼국사』에서 건국 시(BCE 57년)부터 660년까지, 한 해에 한 건의 기사도 없는 해를 세어보면, 278년이다. 신라가 韓 지역의 소국이었던 BCE 57년부터 CE 60년 경까지 117년 중 71년이나 기사가 없다. 소국 상태였으므로 기록이 없는 것이 당연하다. 이 소국 기간을 제외하면 600년 중 207년간 기사가 없다. 『삼국사』에서 고구려는 건국시(BCE 37년)부터 660년까지, 한 건의 기사도 없는 해가 351년이고 백제는 건국시(BCE 18년)부터 660년까지 369년이다. 韓 지역 부근에 있었던 고구려와 백제의 기사가 신라보다 많아야 함에도 『삼국사』에서는 그렇지 않다. 백제에 관한 기사는 매우 짧은 경우가 많아, 기사의 길이를 고려하면 백제의 기사 누락은 고구려보다 훨씬 더 심하다. 김부식은 낙랑군이 고려의 서경(=고구려 평양)에 있었다고 생각했다. 즉 낙랑군은 지금의 요양이고 패수가 태자하라고 생각하였다. 그 결과 고구려와 백제의 기사 중 김부식의 오해와 일치한 기사만 채택되었고 나머지는 버려졌다. 고구려의 경우 북경 부근에서 있었던 사실에 관한 기사도 요양에서 말을 타고 갈 수 있었던 곳의 이야기이므로 많이 버려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백제의 경우 한반도 백제와 중국 동해안의 韓백제는 바다로 분리되어 있어, 김부식이 韓백제 관련 기사를 오류라고 보아 채택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또 김부식이 채택한 기사조차도 김부식의 오해에 의해 왜곡되거나 축약되었을 것이다. 백제와 위나라와의 전쟁처럼 중국 사서에 의해 명백한 것은 기술했지만 김부식은 잘 이해할 수 없어 한 문장만을 기술하였다.

 

근초고왕은 한성(서도)에서 한성(동도)으로 천도했다

한반도와 중국 동해안을 동시에 통치해야 했던 백제는 한반도에 별도를 두는 것이 당연히 필요하였다. 김부식은 동서양성을 기술하는 『구당서』를 단순히 인용하기만 한다. 『구당서』는 그 왕은 거주하는 곳이 동서 두 성이 있다고 명시한다. 『신당서』도 동서 두 성이 있다고 한다. 웅진과 사비를 동서양성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바로 붙어 있는 성을 동서양성으로 하면 국가 경영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온조의 위례성은 한산(漢山) 부근 한수(漢水) 남쪽이다. 그런데 김부식은 「백제본기」에서는 한산, 『고전기』를 인용하는 부분에서는 한성으로 371년 천도했다고 기술한다. 일연도 371년 북한성으로 옮겼다고 기술한다. 김부식과 일연 모두 고전기』를 인용하고 있다. 관련 기사와 국사편찬위원회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ㄱ) 근초고왕 26년 (371년 (음))

〔26년(371)〕 도읍을 한산(漢山)으로 옮겼다

(ㄴ) 『삼국사』의 『고전기』 인용

『고전기(古典記)』를 살피건데 동명왕의 셋째 아들인 온조가 전한 홍가 3년 계묘년에 홀본부여(卒本扶餘)에서 위례성(慰禮城)에 이르러 도읍을 정하고 왕이라 칭하였다. 389년이 지나 13세 근초고왕에 이르러 고구려 남평양을 취하고 한성에 도읍했다. 105년이 지나 22세 문주왕이 도읍을 웅천으로 옮겼다. 63년이 지나고 26세 성왕이 도읍을 소부리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로 하였다. 31세 의자왕에 이름에 122년이 지나고 당 현경(顯慶) 5년에 이르러 의자왕 재위 20년 때에 신라 유신(金庾信)과 당(唐)의 소정방(蘇定方)이 함께 토벌해 평정하였다.

(ㄷ) 『삼국유사』의 『고전기』 인용

『고전기(古典記)』에 이런 말이 있다. 동명왕(東明王)의 셋째 아들 온조는 전한 홍가 3년 계유에 홀본부여로부터 위례성(慰禮城)에 이르러 도읍을 정하고 왕이라 칭하였다. 14년 병진(丙辰)에 도읍을 한산(漢山) 지금의 광주(廣州)로 옮겨 389년을 지냈으며, 13대 근초고왕(近肖古王) 때인 함안(咸安) 원년(371년)에 이르러 고구려의 남평양(南平壤)을 빼앗아 도읍을 북한성(北漢城) 지금의 양주(楊州)로 옮겨 105년을 지냈다. 22대 문주왕(文周王)이 즉위하던 원휘(元徽) 3년 을묘에는 도읍을 웅천(熊川) 지금의 공주(公州)로 옮겨 63년을 지내고, 26대 성왕(聖王) 때에 도읍을 소부리(所夫里)로 옮기고 나라 이름을 남부여(南扶餘)라 하여 31대 의자왕(義慈王)에 이르기까지 120년을 지냈다.

 

아마 『고전기』에는 김부식이 인용한 것처럼 한성이라 표현되었을 것이다. 일연은 구 국도도 한산이고 신 국도도 한성이라 하니 신 국도는 근초고왕의 북진으로 더 북쪽에 있을 것이라 추측하여 북한성이라 표현하였을 것이다. 근거 없이 사료를 부정하거나 마음대로 해석하는 강단 유사사학은 강남에서 강북으로 옮겼다고 하거나 강남에서 더 강남으로 옮겼다고 하여 『삼국사』와 『삼국유사』의 천도 기사를 실질적으로 부인한다.

 

고구려 평양은 요양이다

근초고왕의 천도를 살피기 위해 고구려의 평양과 한성의 위치를 비정할 필요가 있다. 고구려 평양은 고려 서경인데 지금의 요양이다. 김부식이 묘청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서경으로 가는 과정을 기술한 사료와 국사편찬위원회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ㄱ) 『고려사』 「김부식 열전」

〈김부식이〉 드디어 병사를 이끌고 평주(平州)를 경유하여 관산역(管山驛)에 당도하였으며 좌군(左軍)과 우군(右軍)이 모두 모이자 나란히 차례대로 행군하였다. 김부식(金富軾)은 사암역(射岩驛)과 신성부곡(新城部曲)을 거쳐 지름길로 성주(成州)에 도착하였고, 하루 동안 병사를 쉬게 하면서 여러 성에 급히 격문을 보내어 명을 받들어 적을 토벌한다는 뜻을 알렸다. 군리(軍吏) 노인해(盧仁諧)를 보내어 서경(西京)을 타이르게 하고 또 성 안의 허실을 엿보게 하였다. 모든 군사를 이끌고 연주(漣州)로 길을 잡아 안북대도호부(安北大都護府)에 이르니 진숙(陳淑)과 이주연(李周衍) 등이 동계(東界)로부터 와서 모였다. 이보다 앞서 녹사(錄事) 김자호(金子浩) 등을 보내어 칙서(勅書)를 가지고 샛길로 다니면서 양계(兩界)의 성(城)과 진(鎭)을 돌면서 서경 사람들이 모반한 상황을 알렸는데, 인심(人心)은 오히려 형세를 관망하려는 생각을 품었다. 대군이 이르니 여러 성들이 떨고 두려워하며 나와서 관군을 맞이하였다.

(ㄴ) 『고려사절요』 인종 13년 1월 21일(음)

을축. 중군(中軍)이 군사를 인솔하고 평주를 거쳐 관산역(管山驛)으로 향하고 좌우군(左右軍)이 모두 서로 차례로 갔다. 중군이 사암역(射嵓驛) 신성부곡(新城部曲)을 경유하여 지름길로 성주(成州)에 이르러 하루 동안 군사를 쉬게 하고 여러 성에 격문을 보내[馳檄] 적을 토벌하겠다는 뜻을 담은 말로써 깨우쳤다. (중략) 김부식이 군리(軍吏) 노인해(盧仁諧)로 하여금 서경을 초유(招諭)하도록 하고 또 성 안의 허실(虛實)을 엿보게 하여 마침내 군사를 이끌고 연주(漣州)로 길을 잡아 안북부(安北府)에 이르니 진숙(陳淑)과 이주연(李周衍) 등이 동계(東界)로부터 와서 합세하였다. 〈이보다〉 앞서 녹사(錄事) 김자호(金子浩) 등을 보내 칙서를 품고 사잇길로 가서 양계(兩界)의 성과 진을 경유하며 서경의 반란군[西賊]이 반역을 일으킨 상황을 알렸는데[告諭] 인심은 오히려 관망하고 있다가 대군이 비로소 이르게 됨에 미쳐서는 여러 성이 두려워하고 떨며 관군을 맞이하였다.

(ㄷ) 『고려사』 「김부식 열전」

조광(趙匡) 등은 윤첨(尹瞻) 등이 하옥되었다는 일을 듣고서 반드시 〈처벌을〉 면하지 못하리라고 여겨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중략) 김부식(金富軾)이 서경(西京)은 북으로는 산과 언덕을 등지고 삼면은 물로 막혔으며, 성이 또 높고 험하여 서둘러 함락하기는 쉽지 않으므로 성을 둘러싸고 진영을 펼쳐서 그들을 압박해야 한다고 여겼다.

 

안북대도호부는 서경(요양)을 공격하기 위해 진을 친 곳이므로 서경(요양)에서 가까운 곳이다. 강단 유사사학은 안북대도호부가 영주(寧州)이고 영주는 지금의 안주라고 한다. 강단 유사사학의 말대로 서경을 지금의 평양이라 하면 모든 토벌군이 서경으로부터 북쪽으로 직선거리 70km까지 간 것이 된다. 병력이 집중된 양계의 성주들이 형세를 관망할 정도이면 반란군도 상당한 규모이고, 고려 정부도 동원 가능한 군대를 다 동원하였을 것이다. 동원된 군대가 대규모인 것을 보고 양계의 성주들이 김부식을 맞이하였다면 반란군을 제외한 고려의 모든 병력의 지휘권이 안북대도호부에 모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서경이 평양이라면 반란군은 바로 개경으로 남하하여 임금을 모시면 순식간에 반란군과 토벌군의 위치가 바뀌게 된다. 김부식이 바보가 아닌 이상 이런 상황을 만들 리가 없다. 김부식은 평양성 토벌에 1년이 넘게 걸릴 정도로 신중하였는데 토벌 대상 북쪽으로 직선거리 70km까지 갈 리가 없다. 반란군은 평양성만 점거하고 있는데 왜 70km 북쪽으로 가야 하는가? 만약 평양 북쪽의 성도 반란군의 수중에 있었다면 평양성의 반란군이 개경을 점령하는 것은 더욱 더 쉬워진다. 고려의 서경이 지금의 평양이라는 주장은 고려는 지금의 압록강을 넘지 못했다는 일제의 교시를 떠받들기 위한 충성의 극치를 보여주는 갸륵한 조작일 뿐이다. 서경이라는 것은 국토의 서쪽 중심지라는 것이므로 강단 유사사학처럼 고려가 압록강 이남에 있었다면 평양은 북경은 될 수 있어도 서경은 될 수 없다. 신라와 당간의 전쟁은 지금의 요하 부근에서의 전쟁이고, 이 전쟁에서 신라가 이겨 신라는 평양(지금의 요양) 이남의 고구려와 요동반도백제를 그 강역으로 만들었다. 신라와 대진을 계승한 고려의 강역에 요양도 당연히 포함되었고 고려는 북진정책을 위해 요양을 중시하여 서경으로 삼았으므로 현재의 평양은 서경이 될 수 없다.

역도원이 6세기 초에 쓴 『수경주』에서, 고구려 사신으로부터 들었다 하면서 패수는 서쪽으로 흘러 고구려 수도를 경과하고 이후 서북으로 흐른다고 주장했는데, 태자하는 요양을 서쪽으로 지난 후 서북으로 흐른다. 김부식도 “평양(요양)은 지금의 서경인 것 같다”고 하였다. 따라서 동천왕과 장수왕이 수도로 삼은 평양은 지금의 요양이다. 강단 유사사학은 고구려 평양이 지금의 평양이라 하는데 대동강은 평양을 지나 남서로 흘러가므로, 예맥조선의 패수와 고구려의 패수도 구분 못하는 역도원의 말과도 맞지 않는다. 강단 유사사학의 소설 속 낙랑군은 313년까지는 지금의 평양에 존재해야 하므로 427년의 장수왕은 지금의 평양에 천도했다고 날조를 해도 되지만 동천왕의 평양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동천왕이 조위에 쫓겨서 조위 영토인 낙랑군 바로 코앞인 대동강 북쪽으로 수도를 옮긴다고 한다. 강단 유사사학의 경이스런 소설적 상상력에 고개가 절로 수그러진다. 그들의 소설에서 낙랑군은 대동강 남쪽에 있다. 강단 유사사학 종사자들도 이러한 소설에는 낯이 뜨거웠는지 동천왕의 평양은 지금의 평양과 다른 곳이라는 새로운 소설을 창작하기도 하고, 동천왕은 천도를 아예 하지 않았다는, 그들의 주특기인, 소설에 불부합하는 사료 부정하기를 시전하기도 한다. 일제 유사사학을 향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실된 충정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근초고왕이 점령한 고구려 한성(남평양)의 위치

근초고왕의 천도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근초고왕의 한성 천도를 알기 위해 먼저 남평양의 위치를 알아야 한다. 『고전기』는 백제가 고구려 남평양을 취하고 한성에 도읍했다고 한다. 남평양은 고려 이후의 기록에서만 나타난다. 수서(隋書)에서 고구려의 三京으로 평양성 국내성 한성이 언급되고 있는데 고구려의 한성을 백제의 한성과 구별하기 위해, 후세인들이 고구려의 한성을 고구려의 남쪽 중심지라는 의미를 가지는 남평양으로 칭하였을 것이다. 지금의 평양에서 출토된 각자성석(刻字城石)에 漢城이라 기록되어 있어 고구려의 한성(남평양)은 지금의 평양임을 알 수 있다. 각자성석의 문구는 다음과 같다.

 

∙판독: 丙戌十二月中, 漢城下後卩小兄文達節, 自此西北行涉之.

∙해석: 병술년 12월 중, 한성 하후부 소형(小兄) 문달(文達)이 맡아, 여기서부터 서북쪽 방향으로 나아갔다.

 

371년 고구려의 수도는 지금의 집안인 황성이었고, 평양은 지금의 요양이었다. 삼경이라면 그 지역의 중심지이고 변경은 아니다. 『수서』는 삼경이 도회지라 한다. 따라서 남평양(고구려의 한성)을 지금의 평양으로 보더라도 모순되는 점은 없고, 오히려 남쪽 중심지인 지금의 평양에 삼경의 하나인 한성을 두는 것이 매우 자연스럽다. 강단 유사사학은 남평양을 서울 북한산성이라 하거나 황해도 재령이라 한다. 이들 견해는 현 평양이 고구려 평양이라는 전제에서 도출된 견해인데, 전술한 바와 같이 고구려의 평양은 요양임이 입증되므로 무의미한 주장이다. 이들 견해는 명백한 증거인 각자성석에도 반한다. 고구려 평양은 요양임이 입증되므로 이 각자성석은 지금의 평양은 고구려의 한성임을 말한다고 보아야 한다. 강단 유사사학은 역역을 다른 지방에서 동원하여 현 평양에서 한성이라는 지명이 나온다고 억지를 부린다. 그들이 말하는 북한산성이나 재령은 평양에서 멀고, 역역을 동원하더라도 성을 쌓는 책임자인 소형은 그 지역의 관리가 맡을 것이므로, 그들의 주장은 억지에 불과하다.

 

근초고왕이 동도 한성으로 천도한 배경

근초고왕은 371년 태자(근구수왕)와 함께 당시 평양(요양)을 공격하였다. 백제의 평양성(요양) 공격은 한반도와 요동반도에서 모두 가능한데, 371년의 공격은 한반도 백제에서 행해졌다. 369년 9월 고구려가 치양을 공격하였는데, 495년 고구려의 치양 공격시 신라가 도와주었으므로 치양은 한반도의 지명이다. 369년 11월 근초고왕은 한수 남쪽에서 군사를 사열하였고, 371년 패강 상류에서 고구려와 싸우며, 371년 10월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근초고왕은 369년부터 계속하여 한반도에서 고구려와 싸웠고 371년 한성(남평양)을 점령하고 청천강이나 압록강을 경계로 한반도 북쪽 영토를 확대시킨 후 한반도의 한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고구려의 한성(지금의 평양)을 점령하여 한반도의 땅이 크게 늘었으니 한반도 경략을 강화하기 위해 지금의 서울인 한성을 수도로 삼은 것이다. 근초고왕이 도읍을 옮겼다는 것은 그 이전에는 韓의 서도 한성이 도읍이었음을 의미한다.

대동강 하류 황해도 북부 황주 토성리 주거지(현 평양에서 남쪽으로 직선거리 약 35km 지점)에서 백제계 토기가 출토되었는데, 이는 근초고왕이 평양(한성)을 점령했을 시기의 유물로 추측된다. 그러나 백제는 고구려 한성을 잠깐만 유지한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동도 한성이 수도였던 시기도 제한적인 것으로 추측된다. 남평양(고구려 한성)을 점령한 2년 후인 373년 청목령에 성을 쌓았고 386년에는 청목령 일대에 관방을 쌓았는데, 395년 패수 전투의 패배를 보복하기 위해 청목령 아래에 진을 쳤다가 날씨가 추워 군대를 돌려 한산성에 이르렀다고 하며, 469년에는 청목령에 목책을 세우고 북한산성의 군사들을 나누어 지키게 하였다고 하므로 청목령이 북한산성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고구려는 소수림왕 때 바로 남평양을 회복한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 「고구려본기」나 「백제본기」에 관련 기사가 전해지지 않는 것은 고구려는 뺏긴 사실을 기록하지 않기 위해 회복한 사실도 기록하지 않은 것이고 백제도 점령한 것만 기록하고 한성(남평양)을 빼앗긴 것은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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