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요동반도 백제와 신당전쟁 후의 신라 강역
요동반도가 백제 땅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백제는 초기부터 지금의 요동반도를 확보하여 멸망 시까지 유지하였다. 그에 대한 사료는 다음과 같다.
(ㄱ) 『사기정의』 하본기 주석, 『括地志』 인용 부분
괄지지에서 이르길, 백제국 서남 발해 중에 큰 섬 15 개가 있는데 모두 읍락이 있고 사람이 거주한다. 백제에 속한다고 한다.
(ㄴ) 『삼국사』 「百濟本紀」 의자왕
무후가 또한 그의 손자 경으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케 하려 했으나 그 지역이 이미 신라·발해말갈에 의하여 분할되었으므로 나라의 계통이 마침내 단절되었다.
(ㄷ) 『삼국사』 「신라본기」 문무왕 15년
그러나 백제 땅을 많이 취하였고, 마침내 고구려 남쪽 지역까지 받아 주군으로 삼았다.
(ㄹ) 『구당서』 권199 「百濟傳」
그 땅은 이로부터 신라와 발해말갈이 나누어가진 바 되었다.
(ㅁ) 『신당서』 권220 「百濟傳」
그 땅은 이미 신라와 발해말갈이 나누어가진 바 되었다.
(ㅂ) 『신당서』 권 제220 신라전
그러나 백제 땅을 많이 취하였고, 마침내 고구려 남쪽 지역까지 받았다.
(ㅅ) 『통전』 邊防一 東夷上 百濟
그 옛 땅은 新羅로 되었고, 城과 주변의 남은 무리도 후에 점차 약해져서, 突厥과 靺鞨에게 흩어져 투항하였다. 백제왕 夫餘崇은 끝내 옛 나라로 돌아갈 수 없었고, 土地는 모두 新羅와 靺鞨에 편입되었으며, 夫餘氏 왕가는 마침내 끊어지게 되었다.
(ㅇ) 『당회요(唐會要)』 권 제95 신라전
이미 백제의 땅을 모두 차지하였고 고구려 남쪽 지역까지 미쳤다. 동서 약 900리, 남북 약 1,800리이다.
『괄지지』의 기록을 개연성 있게 해석할 경우, 발해 중에 서남쪽에 큰 섬이 있는 곳은 요동반도이다. 한반도 서남부 지역을 대진이 점유하였을 가능성은 낮으므로, 『삼국사』, 『구당서』, 『신당서』, 『통전』 등의 기록은 『괄지지』의 서술을 보강하는 자료로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당회요』가 “신라가 백제의 영토를 다 차지하였다”라고 서술한 부분은, 당시 편찬자가 ‘거의 다’를 단순히 ‘다’로 표현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런데 강단 유사사학은 『당회요』를 근거로 신라가 차지한 백제의 영토를 한반도 서남부 지역으로 한정하여 이해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괄지지』 및 다른 사서의 기록은 무시하고 있다. 그러나 『당회요』의 기술만 보더라도 동서 약 900리, 남북 약 1,800리에 해당하는 영토 규모는 대동강–원산만 선에 국한된 신라 영토와는 부합하지 않는다. 제주도를 포함시키는 경우 이러한 수치를 충족시킬 수 있다고 주장할 수는 있으나, 『당회요』가 탐라를 별도로 기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억지에 불과하다.
특히 『괄지지』는 638년에서 642년 사이에, 즉 백제가 존속하던 시기에 편찬된 책이다. 비록 현전하지 않지만, 『괄지지』의 위 기사는 장수절의 『사기정의』에 인용되었고, 736년에 완성된 『사기정의』는 후대에 『사기집해』⋅『사기색은』과 함께 ‘삼가주(三家注)’로 불릴 정도로 인정받고 있다. 따라서 사기정의에 보존된 『괄지지』의 백제 영토 기사는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크다고 평가할 수 있다
강단 유사사학은 사료 가치가 매우 큰 『괄지지』의 기사는 언급하지 않고, 대진과 신라가 백제 땅을 나눠 가졌다는 기사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라와 발해말갈이 나누어 가졌으므로 : 『舊唐書』 권199 百濟傳 및 『新唐書』 권220 百濟傳에도 같은 표현이 있다. 그러나 발해는 6998년에 중국 지린성[吉林省] 둔화[敦化]에서 고구려 유장(遺將)인 대조영이 건국한 나라이므로 발해가 한반도 남부의 백제 땅을 신라와 나누어 가졌다는 말은 지리적으로나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다. 따라서 백제 땅이 신라와 발해말갈=발해에게 분할되었다는 것은 한반도에 있던 백제 고지(故地)는 신라 영토가 되고, 唐나라가 옛 백제 땅에 설치하였다가 요동지역으로 옮긴 웅진도독부가 발해 영토에 포함된 것을 이렇게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通典』 권185 百濟傳에는 “그 옛 땅을 신라에게 빼앗기고 성(城)과 나머지 무리가 점점 적어지고 약해지더니 돌궐과 말갈로 흩어져 들어갔으며, 그 주인 부여숭(夫餘崇)은 마침내 옛 나라로 감히 돌아가지 못하고 땅을 모두 신라에게 빼앗기니 부여씨(夫餘氏) 왕은 마침내 끊어졌다”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에 그들의 유사사학성이 유감없이 표현되고 있다. ① 『괄지지』에 요동반도가 백제 땅이라고 기술되어 있는데, 일제가 교시한 한반도 서남부만이 백제 땅이라는 전제에서 그들은 『괄지지』의 기사를 무시하면서 『신당서』, 『구당서』의 “발해가 한반도 남부의 백제 땅을 신라와 나누어 가졌다는 말은 지리적으로나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들은 사료를 근거로 역사적 사실을 추정하지 않고, 그들의 전제 즉 백제는 한반도 서남부에만 있었다는 도그마에 따라 객관적 사료를 부정한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요동반도가 백제 영토였다는 『괄지지』는 아예 언급을 회피한다. 여기에서 객관적 사료를 부정하는 유사사학의 특성이 명명백백하게 나타난다. ② 그들은 객관적 사료를 무시하여 놓고, 唐나라가 옛 백제 땅에 설치하였다가 요동 지역으로 옮긴 웅진도독부가 발해 영토에 포함된 것을 대진과 신라가 백제 영토를 나눠 가진 것으로 사서들이 표현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의 지리 비정에 의하면 요동 지역은 고구려의 영토였으므로 당나라가 고구려 영토에 웅진도독부를 설치할 개연성은 거의 없다. 이러한 개연성이 떨어지는 사실을 주장하려면 근거를 제시해야 하는데 그들은 실증적 증거를 제시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당시의 사서 편찬자들이 백제 영토가 아닌 곳에 설치된 웅진도독부를 차지한 것을 백제 영토를 차지하였다고 기술할 정도로 무식한 사람들이라는 증거도 없다. ③ 그들은 보강 증거랍시고 『통전』을 번역하면서 “땅을 모두 신라에게 빼앗기니”라고 해석하는데, 『통전』의 원문은 “토지는 모두 신라와 말갈에 편입되었으며”라고 되어 있다. 이러한 행태는 유사사학성을 넘어 사기성이라 해야 할 것이다.
당은 한반도 백제가 신라 영토가 되자, 웅진도독부를 요동반도 백제로 옮겼고, 요동반도가 대부분 신라영토가 되자, 676년 요동반도에 있던 웅진도독부를 고구려의 영토였다가 당의 영토가 된 건안으로 다시 옮기고 백제유민들도 건안으로 이주시켰다. 건안은 하북성 중부지역으로서 중역수 부근이며, 건안을 당시에 대진이 차지하지도 않았다. 대진이 요동반도 서북쪽을 차지하였으므로 사서들은 백제를 신라와 대진이 나눠 가졌다고 하였을 것이다.
웅진도독부가 설치된 곳은 과거의 백제 영토라 보는 것이 개연성이 있고, 사료를 문언 그대로 해석하는 것이 개연성이 있다. 추측에 의해 사료의 문언을 무시하고 변개하는 것은 개연성이 없다. 사료의 문언을 무시하기 위해선 문언보다 더 개연성이 있고 실증적인 증거에 의해야 함에도 강단 유사사학은 그냥 자신들의 추측만을 근거로 제시한다. 그것은 유사사학에 불과하다.
사이비들이 아무리 많은 사료를 무시하고 오독하여도, 신라가 백제 땅을 많이 취하였다고 말하는 기사는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대진이 웅진도독부가 있던 곳을 차지한 것을 백제 땅을 차지했다손 치더라도, 왜 신라는 백제 땅을 다 차지하였다고 하지 않고 많이 차지하였다고 했는지 그들은 설명할 수 없다. 모든 사료를 정합성 있게 해석하지 않고, 모든 사료를 무시하고 왜곡하여 가공의 사실을 주장하는 것은 유사사학의 행태일 뿐이다.
신당전쟁의 전장은 요양-개주 선
한반도 백제에서의 부흥전쟁은 풍의 군대가 662년 7월에 백강전투에서 패배하여, 부여풍은 달아나고, 부여충승 등이 항복하여 실패로 끝났다. 홀로 지수신만이 임존성에서 항복하지 않았지만, 당군은 항복한 흑치상지와 사타상여를 시켜 임존성을 점령하도록 하여 한반도 백제는 모두 평정되었다. 665년 당나라는 한반도 백제의 당군을 철군시켰고, 당군이 철수하자 부여융도 당나라로 도망갔다. 즉 한반도 백제는 완전하게 신라의 영토가 되었다. 신라와 당은 한반도 백제는 신라가 차지하기로 협의했을 것이며, 그들의 최종 목표인 고구려가 남아있기 때문에 한반도 백제를 가지고 당이 다툴 상황은 아니었다.
그 후 669년 이전에 한반도 백제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기사는 전혀 없다. 고구려와 싸워야 하는데 한반도 백제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면 후방이 불안하므로 고구려와의 전투 이전에 진압해야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강단 유사사학은 669년 이후의 웅진도독부나 백제 관련 전투를 한반도 백제의 전투라 한다. 한반도에 당군도 없고 부여융도 도망갔는데 웅진도독부가 어떻게 있을 수 있는가?
백제와 당군이 다시 등장하고 그 부근으로 보이는 평양(지금의 요양) 일대에서 신라와 당이 전쟁을 하는 669년 이후 기사를 보면 더 명확해진다.
(ㄱ) 문무왕 10년 1월 (670년 01월 (음))
10년(670) 봄 정월에, 고종(髙宗)이 흠순(欽純)의 귀국을 허락하였으나 양도(良圖)는 억류하여 감옥에 가두었는데, 결국 감옥에서 사망하였다. 왕이 마음대로 백제의 땅과 유민을 취하였기 때문에 황제가 노하여 책망하며 다시 사자를 억류한 것이다.
(ㄴ) 문무왕 10년 7월 (670년 07월 (음))
〔10년(670)〕 가을 7월에 왕은 백제의 남은 무리들이 배반할까 의심하여, 대아찬 유돈(儒敦)을 웅진도독부에 보내어 화친을 청하였으나, 〔도독부는〕 따르지 않고 곧 사마(司馬) 예군(禰軍)을 보내어 엿보게 하였다. 왕은 우리를 도모하려는 것임을 알고, 예군을 붙잡고 보내지 않은 채, 군사를 일으켜 백제를 쳤다. 품일(品日)·문충(文忠)·중신(衆臣)·의관(義官)·천관(天冠) 등이 63곳의 성(城)을 공격해서 빼앗고, 그곳의 사람들을 신라로 이주시켰다. 천존(天存)과 죽지(竹旨) 등은 일곱 성을 빼앗았으며, 목 베어 죽인 것이 2,000급이었다. 군관(軍官)과 문영(文穎)은 열두 성을 빼앗고 말갈병을 쳐서 7,000급을 베었다. 전마(戰馬)와 병기를 빼앗은 것도 매우 많았다. 왕은 돌아와서 중신(衆臣)·의관(義寬)·달관(達官)·흥원(興元) 등은 ▨▨▨사(寺) 군영에서 퇴각하였으므로 죄가 사형에 해당하지만, 사면하여 관직에서 물러나게 하였다. 창길우(倉吉于) ▨▨▨▨일(一) 등에게는 각각 급찬(級湌)의 관등을 주고 조(租)를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ㄷ) 문무왕의 설인귀에 대한 답서 (671년 07월26일(음))
함형(咸亨) 원년(670) 6월에 이르러 고구려가 반역을 꾀하여 중국 관리를 모두 죽였습니다. 신라는 곧 군사를 일으키려고 하여 먼저 웅진에 ‘고구려가 이미 반란을 일으켰으니 정벌하지 않을 수 없다. 그쪽과 우리쪽은 모두 황제의 신하이니 이치로 보아 마땅히 함께 흉악한 적을 토벌하여야 할 것이다. 군사를 일으키는 일은 모름지기 함께 의논하여 처리하여야 할 것이므로, 바라건대 관리를 이곳에 보내 함께 계획을 세우자’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백제의 사마(司馬) 예군(禰軍)이 이곳에 와서 함께 의논하여 ‘군사를 일으킨 뒤에는 그쪽과 우리쪽은 서로 의심할까 걱정되니 마땅히 두 곳의 관인(官人)을 서로 바꾸어서 인질로 삼자’고 하였으므로, 곧 김유돈(金儒敦)과 부성(府城)백제의 주부(主簿) 수미(首彌)와 장귀(長貴) 등을 부성으로 보내 인질 교환을 의논하게 하였습니다. 백제가 비록 인질 교환을 허락하였지만 성 안에서는 군사와 말을 모아 그 성 아래 도착하면 밤에 와서 공격하였습니다. 7월에 이르러 당나라 조정에 사신으로 갔던 김흠순(金欽純) 등이 땅의 경계를 그린 것을 가지고 돌아왔는데, 지도를 살펴보니 백제의 옛 땅을 모두 돌려주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황하(黃河)가 아직 띠와 같이 가늘어지지 않았고 태산(泰山)이 아직 숫돌처럼 닳지 않았는데, 3~4년 사이에 주었다 뺏었다 하니 신라 백성은 모두 본래의 희망을 잃었습니다. 모두 ‘신라와 백제는 여러 대에 걸친 깊은 원수인데, 지금 백제의 상황을 보자면 따로 한 나라를 세우고 있으니, 백년 뒤에는 자손들이 반드시 그들에게 먹혀 없어지고 말 것이다. 신라는 이미 중국의 한 주(州)이므로 두 나라로 나누는 것은 합당치 않다. 바라건대 하나의 나라로 만들어 길이 뒷날의 근심이 없게 하자’고 하였습니다.
(ㄹ) 문무왕 12년 9월 (672년 (음))
왕이 앞서 백제가 당나라에 가서 하소연하고 군사를 요청해 우리를 공격했을 때, 일의 형세가 급하게 되어 황제에게 사실을 아뢰지 못하고 군사를 일으켜 그들을 쳤다. 이 때문에 당나라 조정에 죄를 얻게 되었다. 마침내 급찬(級湌) 원천(原川)과 나마(奈麻) 변산(邊山), 붙잡아 머물게 하였던 〔당나라〕 병선(兵船) 낭장(郎將) 겸이대후(鉗耳大侯), 내주(萊州) 사마(司馬) 왕예(王藝), 본열주(本烈州) 장사(長史) 왕익(王益),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 사마(司馬) 예군(禰軍), 증산(曾山) 사마(司馬) 법총(法聰), 그리고 군사 170명을 보냈다. 다음과 같은 표(表)를 올려 죄를 빌었다.
(ㅁ) 문무왕 15년 (675년 (음))
2월에 유인궤(劉仁軌)가 칠중성(七重城)에서 우리 군사를 깨뜨렸다. 인궤는 병사를 이끌고 돌아가고, 조서(詔書)로 이근행(李謹行)을 안동진무대사(安東鎭撫大使)로 삼아 다스리게 하였다. 왕은 사신을 보내 특산물을 바치고 또한 사죄하였다. 황제는 용서하고 왕의 관작을 회복시켰다. 김인문(金仁問)은 오는 길에 [당으로] 되돌아갔는데, 그를 임해군공(臨海郡公)으로 고쳐서 봉하였다. 그러나 백제 땅을 많이 취하였고, 마침내 고구려 남쪽 지역까지 받아 주(州)와 군(郡)으로 삼았다.
(ㄴ) 기사에서 보이듯이, 670년 7월 신라가 82곳의 백제 성을 공격하여 취하는데, 이 82곳의 성은 669년 요동반도 백제의 대부분을 점령하고 남아있던 성 중에서 추가로 획득한 성이다. 기사에서 백제의 남은 무리라 명시하고 있으며, (ㄱ) 기사에서 보이듯이 669년에 있었던 신라의 요동반도 백제의 사실상 점령에 대해 670년 1월에 벌써 당나라가 반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반도 서남부의 대부분을 백제가 다시 수복하였다면, 그러한 지역을 백제가 다시 점령했다는 증거 즉 대규모의 전투와 조직적인 세력이 있었어야 한다. 강단 유사사학은 이렇게 대규모의 지역이 다시 신라의 지배에서 이탈된 근거를 전혀 제시하지 않고 있다. 말갈병도 등장하는데 그들이 한반도 남부까지 어떻게 보급을 할 것인가? 만약 한반도 백제가 대부분의 지역을 회복했다면 어떻게 마음 놓고 고구려를 공격할 수 있었겠는가? 사이비들은 일제의 소설을 유지하기 위해 전혀 개연성이 없는 사실을 주장한다. 이 기사들을 요동반도 백제에 당이 웅진도독부를 설치하였고, 신라가 요동반도 백제를 영토화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킨 것으로 보면 이상한 점이 없다. 말갈병이 개입하는 것도 자연스럽다.
또 670년 3월 설오유와 고연무는 각각 정예병 1만명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당나라를 공격하여 대승하는데, 만약 한반도 백제와 한반도 내의 웅진도독부가 평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정예병을 1만명이나 강단 유사사학이 주장하는 전장인 임진강을 훨씬 더 지나쳐 보낸다는 것은 아주 개연성이 없는 작전이다. 한반도 백제가 경주를 공격할 가능성이 있으며 그러한 작전은 먼저 한반도 백제를 완전히 평정한 후에 해도 늦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압록강을 넘어가서 대승했는데, 이후에는 임진강까지 후퇴하여 싸운다는 것도 극히 개연성이 없다. 신라가 요동반도를 대부분 점령한 상태에서 당을 공격한 것이고, 당병이 도착하자 백성으로 물러났다고 하였으므로 여기의 압록강은 요하로 추정된다. 요동반도 백제를 인정하면, 요하를 건너 공격한 신라의 작전도 개연성이 있게 되며, 신당전쟁의 전장도 요양-개주 선으로 자연스럽게 추정할 수 있다.
(ㄷ) 기사도 요동반도 백제를 상정하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렵다. 강단 유사사학은 신라와 당나라가 임진강에서 싸웠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신라는 고구려 멸망 시 고구려 영토를 하나도 얻지 못하거나 기존의 신라 영토를 뺏겼다는 말이 된다. 거기다가 한반도 백제까지 당나라가 가져갔으면 신라는 도대체 왜 당나라의 고구려 공격에 협력했는지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신라인들이 바보였는가? 당은 고구려 공격 전 667년이나 668년, 신라에게 평양(지금의 요양) 이남 고구려와 요동반도 백제를 주기로 한 이세민의 약속을 재확인했을 것이다. 이는 문무왕의 답서에 나타난, 3∼4년 사이에 줬다 뺏었다 한다는 말에서 알 수 있다. 한반도 백제를 완전히 제압한 후, 요동반도 백제는 당 웅진도독부의 점령하에 있었다. 당은 고구려 공격에 신라를 동원하기 위해 요동반도 백제와 요양 이남을 신라에게 주기로 하였다가, 고구려가 망하자, 요동반도 백제를 신라에게 주지 않았다. 그러자 신라는 669년부터 요동반도 백제를 공격하였고 (ㄱ) 기사에서 보여지듯이 당나라가 반발하였다고 보는 것이 개연적이다. 한반도 백제는 신라의 땅이 된 지 오래이므로 당나라가 한반도 백제를 준다고 할 수도 없다.
(ㄹ) 기사와 (ㅁ) 기사는 672년부터 신라가 현상유지 정책을 취하는 것을 나타낸다. 신라는 요동반도 백제의 대부분과 요양 남쪽을 확보하여 당나라와 더이상 싸우려 않고 방어만 한다. 만약 한반도 백제를 전부 확보하지 않은 상태에서 신라가 현상유지 정책을 취하였다면 한반도에 당나라나 대진의 영토가 남아 있어야 한다. 신라는 672년 2월 백제 가림성을 공격하였지만 이기지 못하였다. 그 이후 신라가 가림성을 취하였다는 기사는 없다. 즉 가림성은 신라가 취하지 못하고 나중에 대진이 취한 요동반도 서북부에 있는 성이라 보아야 한다. 신라는 675년 9월 매소성에서는 이기나 석현성은 탈취 당한다. 강단 유사사학은 매소성과 석현성을 임진강 부근으로 보는데, 그렇다면 신라가 언제 대동강까지 전진했는지를 알 수 없다.
패강 이남의 땅
『삼국사』에 의하면 당나라는 735년 패강 이남의 땅을 신라 영토로 승인한다. 강단 유사사학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패강(浿江) 이남의 땅: 패강은 대동강을 이른다. 패강 이남의 땅은 예성강에서 대동강 사이의 황해도지역을 가리킨다. 신라는 나당전쟁 이후 임진강 이북과 예성강 이남의 옛 고구려지역을 한산주(漢山州)의 군·현으로 편제하였을 뿐이고, 예성강 이북지역으로 더 이상 진출하지 않았다. 백제 고지(故地)에 대한 지배를 확고히 하는 것이 더 시급하였을 뿐만 아니라 당나라가 평양 이남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공식적으로 승인해주지 않았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강단 유사사학에 의하면 예성강과 대동강 사이의 평야 지역이 무주공산이었다는 말이 되는데, 이는 아주 개연성이 없는 소설에 불과하다. 그러나 강단 유사사학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신라와 당은 임진강 예성강 부근에서 싸웠으므로 예성강 이북은 당나라의 영토여야 하기 때문이다. 당나라는 대진이 강해진 후에는 예성강 대동강 사이의 지역을 영유하기 어려울 것이다. 당나라가 이 지역을 차지할 수 없다면 대진이나 신라가 이미 차지했어야 한다. 675년부터 735년까지 이 지역이 어느 나라에도 속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의 소설 속에서나 가능하다.
강단 유사사학 내에서도 이러한 소설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경우도 있다.
신라가 한반도로부터 수만의 당병을 패퇴시켰을 때 신라의 北境은 임진강에서 함경남도 德源에 이르렀다. 문무왕 8년(668)에 比列忽州를 다시 설치하고 15년에는 현재의 덕원으로 비정되는 鐵關城을 축조했던 데서 알 수 있다. 이렇게 東北境은 크게 북상해 있었고 서북경은 통일 이후 점차 북쪽으로 확대하던 중 발해를 견제시키려는 당이 신라에게 平壤 이남의 영유권을 공인함으로써 聖德王 34년(735)부터 대동강에서 원산만을 연결하는 북경이 설정되었다.
이러한 주장도 개연성 없는 소설이라는 점에서 큰 차이는 없다. 이 유사사학은 “서북경은 통일 이후 점차 북쪽으로 확대하던 중”이었다고 하는데, 전혀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다. 위의 (ㄹ)과 (ㅁ) 기사에서 보여지듯이 신라는 당시 전투 선에서 당과의 전쟁을 끝내자는 입장이었으므로 점차 북쪽으로 확대하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이 주장도, 대동강-원산만 선과 날조된 전장을 일치시키기 위한, 근거 없는 설명에 불과할 뿐이다. 패강은 요양 남쪽을 흐르는 태자하를 의미하며, 신당전쟁 시 당과의 전쟁을 끝내기 위해 신라가 요양을 고집하지 않고 방어가 쉬운 태자하 남쪽 산맥까지만 점유하고 있다가, 나중에 대진이 태자하 북쪽을 영역화하자, 신라는 대진을 태자하선에서 방어하기로 결정하고, 혹시 당이 트집 잡을까 봐 당으로부터 태자하까지의 진출을 승인 받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태자하와 태자하 남쪽의 산지 사이는 아주 좁은 지역이며, 당나라의 실효 지배가 불가능한 지역이므로 당나라는 이를 당연히 승인하였을 것이다. 신당전쟁의 전장을 요양-개주 선으로 보고, 패강을 태자하로 보면 ‘패강 이남의 땅’ 기사도 이처럼 개연성 있게 설명된다.
신라의 한주 삭주 명주
신라는 이전의 고구려 남쪽 영토 내에 3주를 설치하였는데, 서쪽 제일 첫 번째를 한주(漢州), 그 다음 동북쪽을 삭주(朔州), 그 다음 동북쪽을 명주(溟州)라고 하였다. 따라서 요동반도 지역이 한주, 압록강 부근이 삭주, 두만강 부근이 명주가 된다. 강단 유사사학의 대동강 원산만 설에 의하면 한주 삭주 명주는 땅이 없게 된다. 이미 진흥왕이 서쪽으로는 한강 이북에서 최소 예성강선까지 영토로 하였고, 동쪽으로는 원산만을 훨씬 넘어 황초령비 마운령비가 있는 곳까지 영토로 하였기 때문이다. 조선족 여진집단인 금나라의 시조가 신라인 또는 고려인이라는 사실은 신라 고려의 영토 내에 여진집단의 거주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진집단은 신라와 고려의 주민이었다. 신라 말 여진집단으로 간 신라왕족은 남의 나라로 간 것이 아니라 고려 중앙권력의 힘이 약한 신라 즉 고려의 변방으로 간 것이다.
요동반도에서의 전쟁들
백제는 CE 22년 이전에 요동반도를 백제의 영토로 편입하였고 고구려의 침입을 방어하여 백제 멸망시까지 유지하였다. CE 22년 9월 술천성을 침범한 말갈은 요동반도 북부에 인접한 고구려의 지방자치단체이다.
214년 9월 백제가 북부의 진과에게 명해 말갈 즉 고구려의 석문성을 공격하여 빼앗자 10월에 말갈이 술천까지 왔다. 따라서 석문성과 술천성이 지근거리임을 알 수 있다. 신당전쟁 시 당은 석문에 진을 치고 신라는 대방의 들판에 진을 쳤는데, 당은 평양(요양)을 거쳐 대방으로 쳐들어왔다. 광개토대왕릉비문으로 404년 왜가 대방 지역을 침입하여 석성을 공격하였고 고구려는 평양에서 나와 왜를 공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석문성은 신당전쟁 시 석성이라 불리고 석문과 대방 모두 요동반도 북부의 지명임을 알 수 있다.
387년 관미령의 싸움도 요동반도에서의 사건이다. 광개토대왕은 391년 백제 관미성을 빼앗고, 392년 석현성 등 10여성을 함락시켰다. 393년 아신왕은 관미성이 요충지인데 고구려에 빼앗겨 원통하다 하면서 진무에게 이를 되찾으라 명령하자, 진무는 석현성 등 다섯 성을 되찾기 위해 관미성을 공격하였으나 군량 보급로가 끊겨 돌아왔다. 따라서 관미성은 요동반도 서북쪽 해안가 어느 지점에 있으며 석현성 등 다섯 성은 관미성보다 북쪽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고구려가 관미성을 점령한 후 부근 10여성을 함락시키고, 관미성보다 북쪽의 다섯 성을 점령하였다. 백제는 관미성과 그 북쪽 다섯 성을 되찾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 다섯 성 중 석현성이 가장 중요한 성이고 요동반도 백제의 서쪽이므로 신라와 당은 석현성을 확보하기 위해 싸웠다. 신라가 처음에 석현성을 점령하였으나 675년에 당에게 빼앗겼다.
신당전쟁 시 설인귀가 해군을 이끌고 온 천성은 『삼국사』 「도미열전」의 도미부부가 배를 타고 온 천성도이다. 도미부부는 백제의 韓 지역과 요동반도간 자주 있었던 배를 타고 요동반도의 천성도로 도망갔을 것이다. 요동반도에서도 고구려로 쉽게 갈 수 있으므로 도미부부가 고구려로 갔다는 열전의 내용과도 일치한다.
673년 신당전쟁 시 당은 신라를 침략하였다가 호로(瓠瀘)와 왕봉(王逢) 두 강에 많은 군사들이 빠져 죽었다. 백제의 한씨 미녀가 안장왕을 맞이한 곳도 왕봉현이다. 따라서 한씨 미녀와 안장왕은 요동반도의 고구려 백제 국경 부근에서 만났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삼국사』 신당전쟁 기사에서 등장하는 가림성, 웅진, 소부리주, 기벌포, 대방, 설구성, 옹포, 고성성, 석문, 석성, 천성, 석현성 등 대부분의 지명은 요동반도의 지명이다. 물론 이들 지명이 한반도나 韓에도 있는데, 이는 한성 웅천 한수 등이 韓과 한반도에서 공통적으로 사용된 것과 같다. 가림성의 경우 『삼국사』 동성왕 기사에 처음 등장한다. 동성왕은 501년 가림성을 쌓고 위사좌평 백가를 보냈다 백가가 가림성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키자 무령왕은 502년 우두성으로 가서 해명을 시켜 백가를 죽였다. 무령왕이 간 우두성은 온조왕이 BCE 1년 공격한 낙랑의 우두산성이다. 5세기 말엽에 백제는 韓을 회복한 상태였다. 백가의 제거가 중한 사안이었으므로 무령왕은 요동반도백제에 가까운 韓백제 북쪽까지 가서 지휘하였다. 662년 백제 부흥세력이 일어났을 때 신당연합군은 한반도의 가림성과 한반도의 주류성 중 어느 곳을 공격할 것인가에 대해 논의하다, 유인궤가 주류성으로 결정하였는데 이는 한반도에도 가림성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강단 유사사학은 신당전쟁 시의 가림성이 한반도의 성이라 주장하지만 이는 억지일 뿐이다. 한 성만이 671년까지 홀로 버틸 수는 없다. 또 신당전쟁 시의 기사에 의하면 가림성 주변 지역까지 신라에 합병되지 않고 당이 장악한 상태로 되어 있는데, 한반도 백제에서는 당군이 철수한 지 오래이므로 이는 결코 발생할 수 없는 일이다.
요동반도 동쪽에서 있었던 전투는 광개토대왕이 백제를 이긴 394년의 수곡성 전투이다. 백제는 371년 고구려를 공격하는데, 이는 한반도 백제에서 행해졌다. 369년 9월 고구려가 치양을 공격하였는데, 495년 고구려의 치양 공격시 신라가 도와주었으므로 치양은 한반도의 지명이다. 369년 11월 근초고왕은 한수 남쪽에서 군사를 사열하였고, 371년 패강 상류에서 고구려와 싸우며, 371년 10월 고구려를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근초고왕은 369년부터 계속하여 한반도에서 고구려와 싸웠다. 당시 태자(근구수왕)가 한반도 백제에서 북진하여 한성(현 평양)을 점령하고, 더 나아가 수곡성 서북쪽에 이르러 “오늘 이후에 누가 다시 이곳에 올 수 있겠는가”라 하면서 자부했다. 따라서 수곡성은 요동반도 동쪽의 고구려 백제 국경에 있는 성으로 지금의 단동(丹東)시 부근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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