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신라의 건국과 경상도로의 이동
(1) 韓에서 건국
왜 신라는 辰韓의 유민인가?
신라는 BCE 57년 韓에서 건국하는데, 『삼국사』는 서나벌의 건국세력이 조선의 유민인 辰韓 6부라고 명시한다. 마한에 사신으로 간 호공은 조선의 유민을 辰韓의 유민이라고 구체화한다. 요동고새 북쪽은 과거 辰朝鮮이었으므로 예맥조선의 유민은 자신들을 辰韓이라 하였다. 열국시대 때 辰朝鮮 지역에는 북부여와 예맥조선이 병립하였다. 서로 辰國이라 주장했을 것이므로, 왕검성 사람들은 예맥조선이 辰韓(辰國)이라 생각하여 자신들을 辰韓의 유민이라 하였다.
강단 유사사학은 항상 그러하듯이, 근거도 없이 그들의 소설에 불부합하는 ‘辰韓의 遺民’이란 사서의 기록을 부정한다. 그들은 임나 선생님을 받들기 위해 김부식이 오해하여 유민이라고 잘못썼다고 우기면서 사로국(斯盧國)이 진한 소국들을 복속시켜 신라가 되었다고 문학을 한다. 그러나 왕검성 주민들이 번조선 지역인 韓에 망명하여 자신들을 辰韓의 유민으로 인식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辰韓 12국은 BCE 24세기에 요서와 몽골에 있었던 국가들로 신라와 직접적 관계가 없다. 辰韓을 구성하는 사로라는 소국이 辰韓을 통합하여 신라라는 고대국가를 만들었다는 강단의 주장은 사료상의 근거가 전혀 없는 소설에 불과하다.
신라 건국 세력은 고조선의 유민이 아니다
강단과 재야의 유사사학은 ‘조선의 유민’의 조선을 고조선으로 날조하여 삼한조선과 삼조선을 우리 역사에서 제외시킨다. 『삼국사』와 『삼국유사』가 편찬된 고려시대에서 보면 조선과 고조선은 전혀 다른 말이다. 『삼국유사』는 고조선과 위만조선을 명확히 다른 나라로 기술하고 있는데, 고조선에 대해선 『위서(魏書)』가 “지금으로부터 2천여 년 전에 단군왕검(壇君王儉)이 있어 아사달(阿斯達)에 도읍을 정하였다. 나라를 개창하여 조선(朝鮮)이라 했으니 요임금과 같은 시대이다”라고 기술했다고 하며, 위만조선에 대해선 『사기』를 인용하여 진번조선과 예맥조선에 관한 사항을 기술하고 있다. 이승휴도 『제왕운기』에서 우리 역사의 흐름을 단군의 전조선(前朝鮮), 기자의 후조선(後朝鮮), 위만(衛滿)의 찬탈 순으로 제시하고 있어, 고조선과 예맥조선을 달리 보고 있다. 고조선은 대부여 이전의 조선을 말하고, 신라를 건국한 세력은 열국시대 시의 예맥조선(위만조선) 유민이다. 사이비들은 고조선과 예맥조선은 전혀 다른 나라임에도 예맥조선을 고조선으로 만들어 일제의 교시에 충성한다.
秦나라의 苦役을 피하여 韓으로 이주하였던, 사람들은 망한 진번조선의 사람들이다. 이들은 상하장에서 연나라의 지배 하에 살아가다 秦나라의 苦役을 피하여 일부는 韓으로 도주했을 것이다. 그러나 신라 건국의 주축은 예맥조선이 漢에 망한 후 왕검성 사람들이 낙랑군으로 강제이주될 때 망명한 사람들이다. 망명자들은 낙랑군에 남은 사람들을 ‘남은 동포’라 불렀다. 북제 수 당은 신라왕들을 낙랑군공으로 봉한다. 중국의 나라들이나 신라 모두 신라가 낙랑군에서 도망친 사람들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고려 태조도 장녀를 경순왕과 혼인시키고 낙랑공주라 하였다.
변진은 신라이고, 왜(석씨)가 신라에 합류한다
韓의 원 거주자인 변한이 BCE 39년 신라(辰韓의 유민)와 통합하여 변진이 되었다. 번한 12국도 BCE 24세기의 일이며, 韓의 변한은 작은 마을에 불과하다. 또 예(왜)가 합류한다. BCE 20년 마한에 사신으로 간 호공은 왜인으로 바다를 건너온 사람인데, 마한왕에게 “우리나라는 두 성인이 나라를 열고 일으킨 이래 인사가 잘 갖추어지고 천시가 조화로워 창고가 충실하고 인민은 공경하며 겸양하니, 辰韓의 유민으로부터 변한과 낙랑, 왜인에 이르기까지 경외의 마음을 갖지 않음이 없습니다.”라고 한다. 강단 유사사학은 신라가 경주의 마을국가라 하는데, 신라가 경주에서 건국했다면 평양의 낙랑이나 바다 건너의 왜가 혁거세왕을 알 수조차 없고, 멀리 강단 유사사학의 소설 속에 있는 한반도 서남부 어딘가의 마한으로 사신을 파견할 필요도 없다. CE 8년 남해왕은 탈해를 사위로 삼고 대보로 등용하여 군국(軍國)의 정사를 맡기며, CE 57년에는 탈해가 왕이 되는데, 탈해는 왜국 동북 천리에 있는 다파나국(多婆那國) 사람이다. 다파나국은 요동반도의 왜이다. 탈해왕은 CE 58년 왜인으로 어업세력인 호공을 대보로 삼았으며 CE 59년 신라에 참여하지 않은 왜와 우호관계를 맺는다. 석탈해의 昔은 뜻이 예(옛)이다. 즉 석탈해는 예(왜)의 탈해란 의미다. 『삼국사』 신라 초기에 나오는 호공과 탈해는 한 사람이 아니다. 예(왜)계 세력 중 어업세력을 호공이라 하고 제철세력을 탈해로 지칭하고 있다. 『양직공도』는 신라가 때로는 韓에 속하고, 때로는 倭에 속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신라가 弁辰(韓)과 왜가 연합한 나라였기 때문이다.
낙랑군 동부도위의 신라 침략
신라는 59년 겨울에 韓에서 경상도로 이동하기 전, BCE 28년, CE 4년, CE 14년, CE 36년 낙랑군의 공격을 받았다. 이동 전 신라가 접하는 낙랑은 낙랑 동부도위이다. CE 36년의 침입은 동부도위가 폐지된 후이지만, 그 전의 침입자들과 같았으므로 즉 침입자들이 동부도위 치하에 있었던 남옥저나 왜였으므로 신라는 동부도위로 인식하였다. CE 36년 침입 기사는 낙랑군이 북쪽에서 침입했다고 하므로 신라의 북쪽은 동부도위이며, CE 14년에 왜인이 바닷가 민가를 노략질했다 하므로 신라의 동쪽은 바다이다. 낙랑군 본군이 CE 37년 고구려에 점령되고 낙랑 사람 5천명이 의탁해 온다. 그 후에 화려와 불내가 CE 40년에 신라를 공격하자 맥국으로 표시된 고구려가 물리쳐주었다. 이때는 낙랑군이 고구려에 점령당한 때이므로 신라는 낙랑군이라 않고 화려와 불내라는 지명으로 침략자를 표시했다고 추정된다. 『한서』 「지리지」 낙랑군조에 의하면 화려(華麗)와 불이(不而)는 낙랑군 동부도위 소속이었던 현이다. 44년 유수가 반격하면서 낙랑군과 낙랑군 동부도위 지역을 다시 장악하자 동부도위 지역에 현도군을 설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당시의 신라는 바닷가의 소국이었다. 신라는 마한왕이 사신을 모욕해도, 낙랑군 동부도위가 침략해도 보복하지 못한다. 동부도위에 속했었던 마을이 공격해도 두려워하다 고구려가 구해주니 매우 고마워한다. 『隋書』에 “신라왕은 본래 백제인이다. 바다로 도망쳐 신라에 들어가면서부터 마침내 신라인이 그 나라를 통치하였다.”라 기록되어 있다. 백제인이 왕이라는 말은 韓이 마한의 세력권에서 백제의 세력권으로 바뀐 후의 상황을 기술한 말이다.
강단 유사사학은 낙랑의 신라 침략 기사에 대해 날조기사설, 상인집단설, 북진한설, 시기 혼동설, 낙랑 참칭 옥저설, 최리 낙랑국설, 편찬자 실수설 등을 주장하나 모두 설득력은 없다. 무려 4차례의 침략이 기록되어 있어 신라를 침략한 세력은 낙랑군이나 낙랑군 동부도위가 아닌 다른 세력이라 볼 수는 없다.
박혁거세는 고두막의 외손
『태백일사』는 부여 황실의 딸 파소가 진한의 나을촌으로 가 그 아들이 신라의 임금이 되었다고 한다. 고두막국이 BCE 58년 동부여 금와에 의해 멸망당하므로 그 일족이 韓으로 도망와서 BCE 57년 辰韓 6부의 임금이 되었다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辰韓 6부는 여섯 마을에 불과하여, 강하지 않은 세력으로도 이들의 왕이 될 수 있었으며, 辰韓 6부는 韓의 마한으로부터 망명자들이라 무시당하고 있었으므로, 일시적으로라도 辰國의 지배자였던 고두막의 혈족을 구심점으로 삼아 나라를 만들어 마한과 맞서보려는 욕구가 있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2) 신라의 경주로의 이동
탈해왕(석씨, 왜계)이 백제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이동
대무신왕과 유수의 낙랑군 공방 후 『삼국사』의 신라 기록엔 낙랑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신라가 경상도로 이동하였음을 의미한다. 신라의 경상도 이동을 기술하는 사료는 다음과 같다.
(ㄱ) 『三國史』 「新羅本紀」 탈해(脫解) 이사금(尼師今) (57년 11월 (음))
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이 왕이 되었다. 일설에는 토해(吐解)라고도 한다. 이때 나이가 62세였다. 왕비는 아효(阿孝) 부인이다. 탈해는 본래 다파나국(多婆那國)에서 태어났다. 그 나라는 왜국(倭國)의 동북 1,000리에 있다. 처음에 그 나라 왕이 여국(女國) 왕의 딸을 맞아 아내로 삼았는데, 임신한 지 7년 만에 큰 알을 낳았다. 왕이 말하기를, “사람이 알을 낳은 것은 상서롭지 않다. 마땅히 버려야겠다.”라고 하니, 그 여자가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고 비단으로 알을 싸서 보물과 더불어 궤짝에 넣어 바다에 띄워 가는 대로 가게 하였다. 처음에 금관국(金官國) 해변에 닿았는데, 금관국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겨 취하지 않았다. 다시 진한(辰韓)의 아진포구(阿珍浦口)에 이르니, 바로 시조 혁거세(赫居世) 재위 39년(BCE 19년)의 일이었다. 이때 바닷가의 할멈이 줄로 끌어서 바닷가에 매어두고 궤짝을 열어서 보니 어린아이 한 명이 들어 있었다. 할멈이 거두어 길렀다. 장성하니 신장이 9척이나 되었고, 풍채가 빼어나며 지식이 남달랐다. 혹자가 말하기를, “이 아이는 성씨를 알지 못하는데, 처음 궤짝이 왔을 때 까치 한 마리가 날아와 울며 따라 다녔으므로, 까치 ‘작(鵲)’의 글자를 줄여서 ‘석(昔)’으로 씨(氏)를 삼고, 또 궤짝을 열고 나왔으므로 이름을 탈해(脫解)라고 하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하였다.
(ㄴ) 『삼국유사』 「기이」 탈해왕
탈해치질금 (한편 토해니사금(吐解尼師今)이라고도 한다). 남해왕(南解王) 때 (고본에 임인년(壬寅年)에 도착하였다는 것은 오류이다. 가깝게는 노례왕의 즉위 이후이므로 양위를 놓고 다투던 일이 없게 되며, 그 이전에는 혁거세의 재위기이므로 임인년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가락국의 바다에 어떤 배가 와서 닿았다. 가락국의 수로왕이 신하 및 백성들과 더불어 북을 치고 환호하며 맞이해 장차 가락국에 머무르게 하려 했으나 배가 급히 나는 듯이 달려 계림의 동쪽 하서지촌 아진포 (지금도 상서지와 하서지촌명이 있다)에 이르렀다.
(ㄷ) 『삼국유사』 「기이」 가락국기
이때 갑자기 완하국(琓夏國) 함달왕(含達王)의 부인(夫人)이 임신을 하여 달이 차서 알을 낳았고, 그 알이 화하여 사람이 되어 이름을 탈해(脫解)라고 하였다. 이 탈해가 바다를 따라 가락국에 왔다. 키가 3척이고 머리 둘레가 1척이었다. 기꺼이 대궐로 나가서 왕에게 말하기를, “나는 왕의 자리를 빼앗고자 왔다”라고 하니 왕이 대답하였다. “하늘이 나에게 명해서 왕위에 오르게 한 것은 장차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려 함이니, 감히 하늘의 명을 어기고 왕위를 남에게 줄 수도 없고, 또한 우리나라와 백성을 너에게 맡길 수도 없다.” 탈해가 말하기를 “그러면 술법(術法)으로 겨루어 보겠는가”라고 하니 왕이 좋다고 하였다. 잠깐 사이에 탈해가 변해서 매가 되니 왕은 변해서 독수리가 되었고, 또 탈해가 변해서 참새가 되니 왕은 변해서 새매가 되었다. 이때에 조금도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탈해가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자 왕도 역시 전 모양이 되었다. 탈해가 이에 엎드려 항복하고 말하기를 “내가 술법을 겨루는 곳에서 매가 독수리에게, 참새가 새매에게 잡히기를 면하였는데, 이는 대개 성인(聖人)이 죽이기를 미워하는 어진 마음을 가져서 그러한 것입니다. 내가 왕과 더불어 왕위를 다툼은 진실로 어렵습니다.” 곧 왕에게 절을 하고 하직하고 나가서 인교 변두리의 나루에 이르러 중국에서 온 배가 와서 정박하는 뱃길로 나아가서 떠났다. 왕은 마음속으로 머물러 있으면서 난을 꾀할까 염려하여 급히 수군(水軍) 500척을 보내서 쫓게 하니 탈해가 계림(鷄林)의 국경으로 달아나므로 수군은 모두 돌아왔다. 여기에 실린 기사(記事)는 신라의 것과는 많이 다르다.
(ㄹ) 『북사』 「신라열전」
신라는 고구려 동남쪽에 있는데, 漢나라 때는 낙랑땅을 차지하였다(낙랑땅에 있었다). --- 그 나라 사람은 중국·고려·백제의 족속들이 뒤섞여 있으며, 沃沮·不耐·韓·濊의 땅을 차지하고 있다. 그 나라의 王은 본래 百濟 사람이었는데, 바다로 도망쳐 신라로 들어가면서 마침내 독립하였다(그 나라를 통치하였다).
『삼국사』는 탈해가 금관국 해변에 닿았는데 금관국 사람들이 취하지 않았다고 한다. 『삼국유사』는 신라측 기록과 가야측 기록을 모두 전해 주는데, 신라측 기록은 수로왕이 환영하며 머무르게 하려 하였으나 배가 급히 달려 계림의 동쪽에 이르렀다고 하며, 가야측 기록은 탈해와 수로왕이 대결하여 탈해가 패배하였고, 수로왕은 이겼어도 안심이 안 되어 죽이려 하였으나 탈해가 도망갔다고 한다. 『삼국유사』의 가야측 기록이 가장 사실과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수로왕이 자신의 권력을 내놓으면서 신라 세력을 받아 줄 리 없으므로, 당연히 어떤 형태로든 양자간 갈등이 있었을 것이다. 탈해가 가야를 떠나기로 결정된 후 ‘중국에서 온 배가 정박하는 뱃길’로 나아간 후 떠났다는 것은 신라 세력이 대륙(韓)에서 가야로 왔음을 말해준다.
백제는 韓의 마한을 CE 9년에 정복하고, 『수서』의 기록대로 신라를 속국으로 만들었다. 『삼국사』에 온조왕이 CE 7년에 辰韓과 마한을 병탄할 결심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라는 독립하기 위해 한반도 남부에 정착지를 찾다, 가야에 발을 붙이려 하였으나 가야의 저항으로 실패하고 한반도 동해안 경주 부근에 상륙하였다. 한반도 서부는 이미 백제의 영역이어서 상륙할 수 없었다. 신라가 처음부터 경주에 있었다면 수로왕이 탈해를 환영하며 머무르게 할 이유도 없고, 탈해가 중국에서 온 배가 정박하는 뱃길로 갈 이유도 없다.
이동 시기
신라의 경주 이전 시기는 CE 59년 겨울이다. 농업집단이므로 가을에 수확하고 봄에 파종해야 하므로 겨울에 이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CE 59년 5월 탈해왕이 왜와 우호관계를 맺었다는 것은 이 때는 韓에서 떠날 생각이 없었거나, 이주 시 어업세력인 왜의 방해를 막고 협력을 얻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CE 60년 8월에는 김알지 집단과 협상을 한반도에서 하며, CE 61년에 마한의 장수 맹소가 복암성을 들어 신라에 항복하는데, 이 마한은 한반도 경상도의 마한이다. 맹소의 마한도 2인자로 자칭한 소국이다. 강단 유사사학은 경상도에 辰韓이 있었다고 날조하나 辰韓은 경상도에 없었다는 것도 맹소의 항복에서 알 수 있다.
강단 유사사학의 번역 사기질
강단 유사사학은 초기 신라의 실체를 숨기고 낙랑군을 평양이라고 하기 위해, 항상 그렇듯이 고의로 오역을 한다. 『북사』와 『수서』는 동일한 내용으로 “地在高麗東南 居漢時樂浪地”(북사), “新羅國,在高麗東南,居漢時樂浪之地”(수서)라 쓰고 있는데, 강단 유사사학은 이를 각각 “그 땅은 高[句]麗 동남쪽에 있는데, 漢나라 때의 樂浪 지역이다.” “新羅國은 高[句]麗의 동남쪽에 있는데, 漢代의 樂浪 땅으로서 斯羅라고도 한다.”라고 번역한다. 이는 명백한 날조이다. 居가 ‘이다’란 뜻은 없다. 居는 ‘살다, 거주하다(居住--), 있다, 차지하다, (처지에)놓여 있다, (벼슬을)하지 않다, 자리 잡다’ 등의 뜻이 있다. 따라서 “신라는 고려 동남에 있다. 漢나라 때는 낙랑 지역을 차지하였다(낙랑에 있었다)”로 번역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는 어려운 문장이 아니므로 강단 유사사학처럼 이해할 사람은 없다. 강단 유사사학의 해석은 ‘고구려 동남=漢나라 때의 낙랑 지역’이라는 것으로, 신라의 이동은 없었고 漢나라 때는 경상도까지 낙랑군이었다는 의미이다. 혹시나 뒤에 “其王本百濟人,自海逃入新羅,遂王其國”(수서 북사 공통)이란 구절이 없으면 몰라도, 뒤에 신라의 이동을 설명하는 문장이 나오므로 居를 ‘이다’로 번역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중국에 충성하기 위해 사서를 오역하여 경상도까지 낙랑군으로 만드는 그들의 가공할 문해력과 용기에 감탄을 금하지 않을 수 없다. 낙랑군 평양설을 지키기 위해선 경상도까지 낙랑군에 내주어도 좋다는 그들의 과감한 결단력은 진정한 유사사학의 귀감이라 할 것이다. 중국은 이들에게 개똥이라도 주면서 이들의 지극한 충성심에 보답해야 할 것이다.
강단 유사사학이 이렇게 고의로 오역하는 것은 그들의 소설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신라가 이동한 사실을 없애야, 韓 지역의 우리 역사와 보정시의 낙랑군을 은폐할 수 있으며,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고 한반도 남부가 삼한이라는 그들의 소설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위기의 순간 그들은 항상 억지를 쓰는데 여기선 고의로 오역을 하였다. 본고가 이 부분을 지적하였으므로 그들은 다음부터는 『북사』와 『수서』가 오류라고 주장할 것이다.
漢나라 때 신라가 낙랑 땅에 있었다는 것은 본고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있다. 韓과 낙랑군과 낙랑군 동부도위, 신라의 위치를 본고와 같이 설명하지 않는 한 이 문장은 설명될 수 없다. 또한 『북사』와 『수서』의 “其人雜有華夏、高麗、百濟之屬,兼有沃沮、不耐、韓、獩之地. (그 주민들은 화하·고려·백제 계통이 섞여 있으며, 옥저·불내·한·예 지역 출신들도 포함되어 있다.)”는 문장도 본고의 위치비정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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