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한국학 기초 낭독 23

역사회복 2026. 4. 12. 19:18

https://youtu.be/UpUjSI2yfd4

 

6. 고구려의 건국과 초기의 영토확장

 

(1) 고구려는 요동 오환이 건국

 

한나라의, 오환인을 이용한 국경 방어

오환과 선비는 북부여의 서쪽 주민들로서, 흉노가 점령하여 복속시킨 사람들이다. 이들은 메기장과 동장을 재배하고, 수렵과 목축을 하였다. 유철은 흉노를 쫓고 이들 오환인들을 요동외요 내부로 이주시키고 호오환교위를 설치하여 통제하였다. 『후한서』의 관련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오환은 (흉노의) 묵돌에게 격파되면서부터 고립되어 약해졌기 때문에 늘 흉노에 복속하였다. 해마다 흉노에 소·말·양의 가죽을 바쳤는데, 날짜를 넘기거나 바치지 못하면 항상 처자식을 빼앗겼다. 무제가 표기장군 곽거병을 보내 흉노의 동쪽을 격파하고, 이들 오환인들을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 5군의 새외지역에 이주시켜 漢을 위해 흉노를 정찰하도록 하였다. 이들의 대인은 해마다 한 번 황제를 알현하였다. 이때 처음으로 호오환교위를 설치하였는데, 녹봉은 이천석이었고, 부절을 지니고 오환의 무리를 감독하고 흉노와 왕래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새외의 새는 요동고새이다. 요동외요의 바깥에 놓아두면 漢의 통제가 곤란해지고 오히려 외적을 가까이 두는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5군이 새외 지역이라는 것은 요동고새 북쪽 지역이라는 것이다. 이 지역은 당시 유철이 예맥조선을 점령한 뒤 漢의 영토가 되어 있었다. 漢은 왕검성 등 예맥조선 사람들을 요동고새 내로 이주시키고 이들 오환인들로 대체하였다. 고구려와 백제가 건국할 때 걱정한 말갈은 이들 오환인들이다. 유순(선제 BCE 73년∼BCE 48년) 시기에도 오환이 漢에 귀부하여 변경지역에 정착하였다.

왕망은 흉노를 공격하기 위해, 이들을 대군(代郡)에 주둔하게 하고 전쟁준비가 완료되는 것을 기다리게 하였는데, 그 대기기간이 오래 지속되자, 이들은 도망가서 반란을 일으켰다. 『후한서』의 관련 내용은 다음과 같다.

 

왕망이 제위를 찬탈한 후 흉노를 공격하고자 하여 12부의 군대를 일으켜 동역장 엄우에게 오환과 정령의 병사들을 지휘하여 대군에 주둔하도록 하고 그 처자식은 모두 군현에 인질로 남겨두었다. 오환 사람들은 대군의 풍토에 적응하지 못하였고, 오랫동안 주둔하고 쉬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여 여러 차례 되돌아가게 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왕망이 그들을 보내주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스스로 달아나거나 반란을 일으켰고, 군현에 돌아와서는 약탈하고 도적질하였다. 그래서 여러 군에서는 인질들을 다 죽였다. 이로 말미암아 이들은 왕망에게 원한을 품게 되었다.

 

고구려는 요동 오환

그런데 오환인에게 일어난 이 사건은 고구려에게도 똑같이 일어나고 있다. 『삼국사』와 『삼국지』의 관련 내용과 국사편찬위원회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ㄱ) 『삼국사』 「고구려본기」

31년(12) 漢 왕망이 우리 병력을 징발하여 호를 정벌하려 하였다. 우리가 가려고 하지 않자 협박하여 보냈다. 모두 도망하여 나가 법을 어긴 도적이 되었다. 요서대윤 전담이 그들을 추격하다 죽임을 당하니, 주군(州郡)이 잘못을 우리에게 돌렸다. 엄우가 진언하기를, “맥인이 법을 어겼으나, 주군으로 하여금 우선 저들을 위안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지금 함부로 큰 죄를 씌우면, 그들이 결국 배반할까 염려됩니다. 그러면 부여의 족속 중에 반드시 부응하는 자들이 있을 것이니, 흉노를 아직 이기지 못하였는데, 부여와 예맥이 다시 일어난다면 이는 큰 근심거리입니다.”라고 하였다. 왕망은 듣지 않고 엄우에게 명령하여 이를 공격하였다. 엄우가 우리 장수 연비를 꾀어내 그 목을 베어 머리를 경사(京師)로 보냈다. (양한서(兩漢書)와 남북사(南北史)에는 모두 “구려후(句麗侯) 추(騶)를 꾀어내 목을 베었다.”라고 하였다.) 왕망이 이를 기뻐하며 우리 왕을 하구려후라 고쳐 이름하고, 천하에 포고하여 모두 알게 하였다. 이에 漢의 변방을 침범함이 더욱 심하여졌다.

(ㄴ) 『삼국지』 「위서 동이전」

왕망 초 고구려의 병사를 징발하여 호를 정벌하게 하였다. 가지 않으려 하여 강압적으로 보냈더니, 모두 도망하여 나가 도적이 되었다. 요서대윤 전담이 그들을 추격하다가 살해되었다. 州·郡·縣이 그 책임을 句麗侯 騊에게 돌렸다. 엄우는 “맥인이 法을 어긴 것은 그 죄가 추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므로, 그를 안심시키고 위로해야 합니다. 지금 함부로 그에게 큰 罪를 씌우면 그가 마침내 반란을 일으킬까 걱정됩니다.”라고 아뢰었다. 王莽은 그 말을 듣지 않고 엄우에게 고구려를 치도록 명하였다. 엄우는 구려후 추를 유인하여 그가 도착하자 목을 베어 그 머리를 長安에 보내었다. 왕망은 크게 기뻐하면서 天下에 포고하여 高句麗란 國號를 바꾸어 下句麗라 부르게 하였다.

 

위 『삼국지』와 『삼국사』의 기사를 비교하면 『삼국지』의 기사가 문맥이 자연스럽다. 『삼국사』의 기사는 추를 연비로 바꾸기 위해 문장을 변경한 느낌을 준다. 흉노를 고구려 단독으로 공격하게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우므로, 고구려가 호를 정벌하게 하였다는 말은 오환처럼 고구려 병사를 대군에 주둔시켰다는 말이다. 가려고 하지 않자 협박하여 보냈다는 말도 오환처럼 주둔지에서 보내달라 하였는데 보내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고구려를 오환과 별도로 기술한 것은 5군에 이주시킨 오환 중 고구려만 나중에 나라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오환은 북부여와 동부여 서쪽에 거주하였던 지방민들

사마천은 진번조선 등 辰朝鮮 지역의 조선인을 동호라 기술하였고, 『삼국지』 『후한서』 모두 오환과 선비가 동호라고 기술하고 있다. 흉노가 동호를 멸하고 복속시켰다고 하는데, 이는 흉노가 북부여 서쪽을 점령하였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漢이 이주시킨 오환은 흉노에 복속된 북부여 서쪽의 지방민이다. 현도군이 고구려현에 설치되었으므로 고구려는 그 위치로 보아 진번조선의 지방세력인데, 진번조선이 망하자 북쪽으로 이주하였고 나중에 북부여를 건국하였다. 북부여가 고두막에 의해 가섭원으로 쫓겨나고, 쫓겨나서도 금와에 의해 찬탈당하는데, 추모는 동부여 즉 북부여의 왕족이었으므로, 금와가 집권한 동부여의 세력이 닿지 않는 漢으로 도망쳤다고 추측할 수 있다. 오환이나 추모나 모두 북부여인이었고, 추모는 북부여의 왕족이었으므로, 홀본 즉 요동군에서 요동군 내 오환인의 지도자로 추대되었을 것이고 漢도 오환인의 관리를 위해 추모를 요동군 내 오환인의 지도자로 인정하였을 것이다. 즉 고구려는 漢에 귀부한 오환인의 자치체에서 기원한다.

漢이 왕검성을 점령하고 고구려에 현도군 고구려현을 설치하고 북(鼓)과 管樂器와 樂工을 하사하여 고구려인들(고구려현 남아있었던 고구려인들)을 관리하였다. 추모는 요동군 성산에 도읍하고, 현도군의 동쪽 경계에 있는 책구루(幘溝漊)에서 의책을 받아갔으며 후술하듯이 여율왕 때인 CE 14년 현도군 고구려현을 점령하므로, 요동오환을 기반으로 한 세력이다. 漢은 다른 군의 오환인과 마찬가지로 고구려를 흉노, 동부여, 행인국 등의 漢 주변세력을 통제하는데 이용하였다. 엄우가 고구려를 공격하면 부여의 족속 중에 부응하는 자가 생길 수도 있다 걱정하는데, 이는 고구려가 오환인이고, 오환인이 부여인(북부여, 동부여)이었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소서노와 추모가 연합하여 건국

연타발과 소서노는 요동군내 조선인 상인이었고, 데릴사위였던 비류와 온조의 아버지(후에 우태로 표현됨)가 죽자 상업의 편의를 위해 요동군 오환인의 지도자였던 추모와 결합하였다고 추정할 수 있다. 비류 시조설은 우태가 해부루의 서손이라 하나, 북부여 해부루의 서손이 漢 땅에 정착할 이유가 없으며, 서손이라는 막연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어, 사실로 보기는 어렵다. 소서노, 비류, 온조는 추모의 건국과정을 지켜보고 배웠기 때문에, 백제를 건국할 수 있었다.

 

漢나라 사람인 치희가 왜 고구려의 왕비가 되었는가?

유리왕이 후처로 하희와 치희를 두었는데, 치희는 漢人이다. 이는 당시 고구려인들이 漢人과 섞여서 살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고구려가 초기에 현도군에서 조복과 의책을 받았고 고구려령의 관리를 받았다는 것, 왕망이 고구려의 병사에 대해 지휘권이 있었다는 것, 엄우가 고구려 왕을 부를 수 있었다는 사실 모두 고구려가 漢에 귀부한 오환인이었음을 입증한다. 강단 유사사학은 현도군에서 조복과 의책을 고구려 지방세력에게도 주었다고 날조 해석하여 고구려의 중앙권력이 약했다고 문학을 한다. 현도군에 종속되어 중앙과 지방의 구분을 할 수도 없는 부용세력 고구려를 상대로, 사이비들은 고구려 왕의 지방 통제력이 약했다는 독창적 소설을 창작한다.

 

왕망이 유리왕을 살해

엄우가 살해한 고구려왕은 유리왕이다. 『위서』는 추모-여달-여율-막래의 순으로 왕이 된다고 하며 부여를 정복한 왕을 막래라 한다. 막래가 대무신왕이므로 여달인 유리왕 사이에 여율왕이 있다. 고구려는 유리왕이 목이 잘려 죽은 수치를 감추기 위해 유리왕이 CE 12년 죽은 사실을 감추고, CE 12년에서 CE 18년까지의 여율왕의 치세를 유리왕의 치세에 포함시켜 기술하였다.

CE 8년 황룡국왕이 보낸 활을 해명이 부러뜨리자 왕이 화를 냈다는 기사와 황룡국왕이 해명을 죽이지 못했다는 기사, CE 9년 해명이 여진(礪津)에서 자결했다는 기사에서 황룡국은 漢과 新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이며, 이 기사들은 유리왕이 독립파 해명태자를 숙청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CE 18년 왕자 여진(如津)이 익사하였다는 기사는 여율왕의 사망을 상징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대무신왕의 이름은 무휼이고, 11살인 CE 14년에 태자가 되었다가 CE 18년에 즉위한다. 여율왕을 부인하면, 왕자 무휼은 6살인 CE 9년 동부여를 꾸짖고, 10살인 CE 13년에는 동부여의 침략을 물리친다는 것이 된다. 이러한 불합리는 부여를 꾸짖는 왕자를 여율왕자로 보고, 부여의 침략을 물리친 사람을 무휼왕자가 아닌 여율왕으로 보면 해결된다.

 

여율왕의 복수와 고구려의 독립

고구려는 홀본 즉 요동군에서 BCE 37년 건국하여 동쪽과 북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였다. 이것은 漢 주변 세력을 고구려를 통해 제어하려는 漢의 의중과도 일치하였다. BCE 36년 요동외요 동북쪽으로 추정되는 비류국을 점령하고, BCE 32년 당산지역의 소국으로 추정되는 행인국을 점령하고, BCE 28년 북옥저를 점령라고, BCE 9년 홀본 북쪽의 선비를 복속시켰다. 그런데 구려후 추가 죽은 CE 12년 이후 고구려는 갑자기 서쪽과 남쪽으로 진격한다. CE 14년 서쪽으로 양맥을 치고 新의 고구려현 즉 현도군을 점령하고 CE 14년에서 CE 18년 사이에 요동고새까지 점령한다. 양맥은 요동군 내의 북쪽지역으로 추정되고 현도군은 대요하(조백하)와 소요하(온유하) 사이 지역이다. 구려후 즉 유리왕이 살해당한 후 고구려는 독립하고 新에 적대적인 세력으로 변화한다. 新에 대한 복수가 바로 新의 영토였던 상하장 지역의 점령이다.

또한 CE 12년을 전후로 『삼국사』에 기재된 유리왕의 성격이 크게 변화한다. CE 12년 이전의 유리왕은 수세적이고, 선비의 소집단을 복속시킨 것 이외에는 대외적인 치적이 전무하며, 漢인 첩을 그리워하고 협보가 유리왕의 정치에 실망하여 韓 지역으로 떠날 정도로 무능하다. 그러나 CE 13년에는 동부여를 크게 물리치고, CE 14년부터 CE 18년 사이에 新의 영토였던 상하장을 점령한다. 따라서 CE 12년에 유리왕이 엄우에 의해 살해당하고 여율왕이 즉위하여 新으로부터 벗어나 新에게 복수하는 것으로 보야야 한다.

 

황하 수류 변경이 증명하는 『삼국사』와 『태백일사』의 신뢰성

그런데 강단 유사사학은 살해당한 구려후 추를 유리왕이 아닌 추모왕으로 본다. 『삼국사』의 기년을 못 믿겠다는 것이다. 근거는 일제 유사사학에 대한 충성일 뿐 다른 이유는 없다. 고자 묘지명은 고구려가 망할 때까지 708년이라고 하여 삼국사의 BCE 37년보다 더 이른 BCE 40년을 고구려 건국 시기로 기술하고 있다.

『삼국사』에 의하면 백제는 건국 이후 韓의 마한에 충성한다. CE 6년에도 남쪽에 웅천책을 설치했다가 마한왕이 나무라자 부끄러워하며 목책을 헐어버린다. 그런데 CE 8년에 마한을 병합하여 버린다. 이는 백제의 국력이 급격하게 강해진 때문이 아니다. 마한이 홍수로 약해졌기 때문이다. 황하 하류의 수류 변동은 CE 11년 또는 CE 15년에 있었다. 수류 변동이 하루 아침의 사건은 아니었을 것이다. 원래의 하도가 퇴적으로 높아지면서 물의 흐름이 원활하지 않게 되고, 홍수 시 수류가 아니었던 곳으로 강물이 넘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수류가 변경되었을 것이다. 韓의 마한은 수류 변경 전 황하의 동쪽에 있었는데, 마한으로 수류 변경이 되었고, 수류 변경이 완료되기 전에 큰 홍수로 커다란 피해를 입었다. CE 7년과 CE 8년 무렵 홍수로 마한이 국가 존립이 위태로울 정도의 피해가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온조왕은 “마한이 점점 약해지고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마음이 갈리어 그 형세가 오래 갈 수 없을 것 같다.”라고 말할 정도가 되었다. 백제의 역사 기록자가 홍수로 거의 망한 마한을 병합하기로 하였다고 쓰지 않았을 뿐이다. 백제의 『삼국사』 초기기년의 사실성이 황하 하류의 수류 변경에 의해서도 입증되므로 강단 유사사학의 『삼국사』 고구려 초기 기년의 의심은 전혀 근거가 없다.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의 협보에 관한 기록도 『삼국사』의 기술과 시기와 내용 모두 일치한다. 『태백일사』는 협보가 남한으로 와서 마한산에 기거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거듭 흉년이 들었고, 이에 협보는 변란이 있을 것 같아, 배로 구야한국을 거쳐 열도에 도착하여 다파라국을 세웠다고 한다. CE 3년 협보가 올 당시 韓 지역은 마한이 지배하고 있었으므로 협보 일행은 마한산에 기거하였고, 몇 년 지나지 않아 흉년이 계속되었다는 것은 황하 하류의 수류변경 전 韓 지역에 홍수가 있었다는 말이며, 협보가 예측한 변란은 백제가 마한을 정복한 것이다. 여기에서도 『태백일사』가 위서가 아님이 입증된다.

강단 유사사학은 구려후 ‘추’를 근거로 기년을 의심하나 추모가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있어 고구려 초기 왕의 호칭이 추였을 가능성도 있으므로, 추라는 미약한 근거로 『삼국사』 초기기록을 의심하는 것은 그저 강단 유사사학의 야마토가야에 대한 충성일 뿐이다. 백번 양보하여 강단 유사사학의 의심을 인정하더라도 추가 추모왕이 될 수 없는 것은 협보가 “만일 (왕께서) 허물을 고쳐 스스로 새로워지지 않으신다면, 신은 정치가 문란해지고 백성들이 흩어져 선왕의 위업이 땅에 떨어질까 두렵사옵니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협보는 유리왕이 사냥이나 하고 국정에 신경쓰지 않아 추모왕이 쌓아 놓은 고구려의 기틀이 무너질까 걱정하여 유리왕에게 말했다. 따라서 협보가 韓 지역으로 간 후에 발생한 구려후 추의 살해 대상은 추모왕이 될 수 없다.

물론 강단 유사사학은 일제의 침략적 민족주의 날조역사의 핵심인 야마토가야설에 반하는 모든 사서의 기록을 부정하기 때문에, 이러한 논리도 그들에게는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강단 유사사학이 근거없이 漢에 살해당한 추를 추모왕으로 모는 것은 우리 역사를 우습게 만들기 위한 즉 고구려의 시조가 漢에 목이 잘려 죽었다고 날조하기 위한 책략에 지나지 않으므로 학문적으로 논의할 가치는 전혀 없다.

강단 유사사학은 동호는 조선과는 전혀 별개의 정치체라고 날조하면서, 조선의 것을 모두 동호(오환 선비)의 것이라 하여 삼한조선과 삼조선을 부정하는데, 그들의 주장은 진번조선과 고구려가 소위 동호(오환)라는 사실에 의해 명백한 허위로 드러난다.

 

(2) 고구려는 홀본(=북경 平谷區)에서 건국

 

광개토대왕릉비는 건국 도읍지를 “於沸流谷忽本西城山上而建都焉,”라고 기술한다. 이 문구를 “비류곡 홀본 서쪽에서 산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웠다”라 해석하는 경우도 있으나, 그러한 의미가 되기 위해선 ‘於沸流谷忽本西城山上’이 아니라 ‘城於沸流谷忽本西山上’이 되어야 하므로 옳지 않다. 무엇보다도 고구려가 漢의 부용 세력으로서 漢의 영토인 요동군 내에서 건국하여, 원천적으로 성을 쌓을 수 없는 지위에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해석은 불가능하다. 문자 그대로의 올바른 해석은 “비류곡 홀본 서쪽 성산 위에 의거하여 도읍을 세웠다” 이다. 당토명승도회(唐土名勝圖會) 순천부총도(順天府總圖)에 성산(城山)이 구수(泃水) 서쪽에 표기되어 있다. 따라서 비류수는 구하이고, 비류곡 즉 홀본은 금해호(金海湖) 서쪽 구하 유역(지금의 平谷區)임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도 고구려는 홀본부여이고 홀본은 요동의 가장자리에 있다고 하여 홀본이 요동군 내라 하고 있다. 『삼국사』도 추모왕이 비류수 가에 도읍을 정하였는데, 궁실을 짓지 않았다고 한다. 궁실을 짓지 않았고 산을 도읍으로 생각했다는 것도 독립된 세력이 아니었음을 의미한다. 열도의 도성은 710년의 평성경이 최초인데, 700년 이전까지 열도에는 독립한 고대국가가 없었기 때문이다. 『삼국사』 백제 비류 시조설에 의하면, 비류가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자고 했으며, 패수와 대수를 건너 미추홀에 정착했다고 한다. 백제가 도읍한 韓 지역과 위에서 비정한 홀본은 남북으로 있으므로 비류 시조설의 비류 이동과 일치한다.

 

[성산과 홀본의 위치]

 

(3) 고구려는 북부여를 승계

 

추모왕이 나라를 세울 때 동부여에서 왔고 자신에게 북부여의 정통성이 있다고 생각하여 처음에는 국호를 부여라 하였을 것이다. 『삼국유사』도 고구려는 졸본부여라고 한다. 그러나 동부여가 북부여의 영토를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추모왕 또는 초기의 왕이, 부여와 구별되도록 고구려를 국호로 정하였을 것이다. 고구려 왕들은 북부여를 세운 조상이 고리국(고구려)에서 온 것을 알았으므로, 고구려의 건국은 건국이 아닌 북부여의 승계이며, 국호변경은 원래의 국호로 돌아가는 것에 불과하였을 것이다.

광개토대왕릉비는 추모왕은 북부여에서 나왔다고 한다. 추모의 어머니 유화부인은 동부여에서 사망한다. 고두막에게 쫓겨난 해부루의 동부여가 원 북부여이므로 추모왕이 동부여에서 도망쳤더라도 북부여에서 온 것이 된다. 금와가 동부여의 정권을 탈취하면서 동부여의 왕족들은 대부분 죽었을 것이다. 추모는 어린애여서 살아남았지만 성인이 되자 생명의 위협을 느껴 漢으로 도망쳤을 것이다.

연남생 묘비명에 옛날에 東明이 氣를 느끼고 㴲川(사천)을 넘어 나라를 열었고, 朱蒙은 해를 품고 浿水에 臨해 수도를 열었다고 적혀 있다. 여기서 東明은 북부여를 건국한 해모수이다. 광개토대왕릉비의 ‘17세손’은 대왕이 북부여를 건국한 해모수부터 17세손임을 의미한다. 추모왕을 동명왕이라 하는 것은 추모왕도 나라를 개국한 것과 같은 정도의 업적을 이루었으므로 해모수(동명)라는 것이지, 대부여의 건국자나 고두막과의 관련성을 말하기 위함은 아니다. 추모왕이 송양의 비류국을 다물도라 한 것은 북부여의 옛 땅을 회복하고 북부여처럼 조선의 중심국이 되려는 의도가 있음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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