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동옥저, 북옥저, 남옥저
옥저의 옥은 물을 의미한다
‘옥저’의 옥은 신조선 시 물이라는 의미의 말이고, 동옥저도 해안가에 거주하였고, 남옥저도 해안가에 거주한 것으로 보아 옥저도 예(왜)처럼 해안가에 거주하는 삼조선의 거수국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왜(예)가 여러 강 어귀에 분포하는 것처럼 옥저도 여러 해안가에서 거주하였다. 『삼국지』와 『후한서』가 ‘고구려 개마대산’ 동쪽을 동옥저(실제는 북옥저)라 하고, 현도군에 서개마현이라는 서류상 현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의 개마대산’은 연산산맥이며, 동옥저는 칠로도산 동쪽 해안가이다. 『삼국지』는 동옥저를 정확하게 묘사하여, 서남으로 긴 땅이라 기술하고 있다.
옥저는 북옥저 동옥저 남옥저의 셋이다
한반도 북부의 동해안은 동옥저, 『삼국지』가 동옥저라고 기술한 칠로도산 동부 해안가는 북옥저, 낙랑군 동부도위에 속한 보정시 동쪽의 옥저는 남옥저이다.
강단 유사사학은 오늘날 함경남도 함흥 일대는 동옥저, 두만강 하류 유역은 북옥저라 한다. 즉 옥저가 한반도 동해안 한 곳이라 한다. 그러나 『삼국지』와 『후한서』는 동옥저, 남·북옥저 셋을 기술하고, 『삼국지』는 동옥저는 좁지만 길이가 천리라 한다. 강단 유사사학이 말한 함흥과 두만강 하류를 하나로 합쳐도 1,000리가 되지 못하므로 강단의 주장은 거짓말이다.
또 『삼국지』 「위서 관구검전」, 『양서』 「동이전」, 『북사』 「고구려전」 모두 옥저를 지나(過) 또는 가로질러(絕) 천여리를 가서 숙신의 남계에 공을 기록하였다고 하는데, 강단 유사사학이 말한 옥저를 지나거나 가로지르면 바다속으로 천여리를 가게 되고 숙신은 동해바다에 뗏목을 뛰워놓고 사는 집단이 된다. 또한, 관구검(무구검)기공비가 집안 판석령 부근에서 발견되었으므로 관구검이 가로지른 옥저는 집안에서 서쪽으로 천여리에 있게 되는데, 이 위치는 『삼국지』가 기술한 동옥저의 위치와 같다. 『삼국사』도 『삼국지』와 『후한서』처럼 세 옥저를 기술하고 있다. 이들 사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ㄱ) 『삼국지』 「위서 동이전」 동옥저조
東沃沮는 고구려 蓋馬大山의 동쪽에 있는데, 큰 바닷가에 산다. 그 지형은 동북으로는 좁고, 서남으로는 길어서 천리 정도나 된다. 북쪽은 挹婁·夫餘와, 남쪽은 濊貊과 접한다. --- 毌丘儉이 고구려를 토벌할 때 王 궁이 옥저로 달아나, 군대를 진격시켜 그를 공격하게 되었고, 이에 沃沮의 邑落도 모조리 파괴되고, 3천여 級이 목베이거나 포로로 사로잡히니 宮은 北沃沮로 달아났다. 北沃沮는 일명 치구루라고도 하는데 南沃沮와는 8백여리 떨어져 있다. 그들의 풍속은 남·북이 서로 같으며, 挹婁와 접해 있다. --- 왕기가 별도로 군대를 파견하여 宮을 추격, 동쪽 경계의 끝까지 갔다. 그곳에 사는 노인에게, “바다의 동쪽에 또 사람이 살고 있는가?” 하고 물었다.
(ㄴ) 『후한서』 「동이열전」 동옥저조
동옥저는 高句驪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다. 동쪽은 대해에 접하고, 북쪽은 읍루·부여와, 남쪽은 濊貊과 접한다. 그 지형이 동서는 좁고 남북은 긴데, 크기는 방천리의 절반이다. ---또 北沃沮가 있으니 치구루라고도 하는데, 南沃沮와는 8백여리 떨어져 있다. 그 풍속은 모두 南沃沮와 같으며, 挹婁의 남쪽 경계와 접해 있다.
(ㄷ) 『삼국사』 「고구려본기」 동명성왕 (BCE 28년 11월)
겨울 11월에 왕이 부위염(扶尉猒)에게 명하여 북옥저를 정벌하여 멸망시키고, 그 땅을 성읍으로 삼았다.
(ㄹ) 『삼국사』 「고구려본기」 태조왕 (56년 07월)
가을 7월에 동옥저를 정벌하고 그 땅을 빼앗아 성읍으로 삼았다. 영토를 넓혀 동쪽으로 창해에 이르고 남쪽으로 살수에 이르렀다.
(ㅁ) 『삼국사』 「백제본기」 온조왕 (25년 10월)
겨울 10월에 남옥저의 구파해(仇頗解) 등 20여 가(家)가 부양으로 와서 귀순하니 왕이 이들을 받아들여 한산(漢山) 서쪽에 안치하였다.
(ㅂ) 『삼국사』 「신라본기」 혁거세 거서간 (BCE 5년)
동옥저(東沃沮)의 사신이 와서 좋은 말 20필을 바치며 말하기를, “저희 왕께서 남쪽의 한(韓)에서 성인이 나셨다는 소식을 들으셨기에 신으로 하여금 와서 선물을 드리게 하셨습니다.”라고 하였다.
(ㅅ) 『삼국지』 「위서 관구검전」
宮이 연이어 격파되어 달아났다. 儉은 마침내 말을 묶고 수레를 매달아 丸都에 올라 句驪의 도읍을 도살하니 斬하고 獲한 머리와 포로가 수천이었다. --- 6년, 다시 정벌하니 宮은 마침내 買溝로 달아났다. 儉이 玄菟太守 왕기를 보내어 이를 추격하여, 沃沮를 지나 천 여리를 가 肅慎氏 南界에 이르러 돌을 새겨 공을 기록하였다. 丸都之山을 깎아 不耐之城이라 새겼다.
(ㅇ) 『양서』 「동이전」
5년(244), 幽州刺史 毌丘儉이 만인을 거느리고 玄菟로부터 나아가 位宮을 토벌하였다. 位宮은 步騎 2만인을 거느리고 (관구검의) 군에 맞서니 沸流에서 크게 싸웠다. 位宮은 敗走하였고 儉의 군대가 추격하여 峴에 이르러 수레를 매달고 말을 묶어 丸都山에 올라 그 도읍을 도살하니 참수하고 포로로 잡은 것이 만여 급이었다--- 6년(245), 儉이 다시 토벌하자, 位宮은 재빨리 諸加를 거느리고 沃沮로 달아났다. 儉이 將軍 王頎로 하여금 이를 추격케 하여, 沃沮를 가로질러 천 여리를 가니 肅慎 南界에 이르러 돌을 새겨 공을 기록하였다. 또 환도산에 이르러 不耐城이라 새기고 돌아왔다.
(ㅈ) 『북사』 「고구려전」
5년(244), 幽州刺史 毌丘儉이 만인을 거느리고 玄菟로부터 나아가 位宮을 토벌하여 沸流에서 크게 싸웠다. (位宮이) 敗走하자, 儉은 추격하여 䚂峴에 이르러 수레를 매달고 말을 묶어 丸都山에 올라 그 도읍을 도륙하였다. --- 6년(245), 儉이 다시 토벌하니, 位宮은 재빨리 諸加를 거느리고 沃沮로 달아났다. 儉은 將軍 王頎로 하여금 이를 추격케 하여 沃沮 가로질러 천여 리를 가서 肅愼의 남쪽에 이르러 돌을 새겨 공적을 기록하였다. 또 丸都山을 깎아 不耐城이라 새기고 돌아왔다.
(ㅊ) 『삼국사』 「고구려본기」 동천왕 (246년)
20년(246) 가을 8월, 魏가 幽州刺史 毌丘儉을 보내어 만인을 거느리고 玄菟로부터 나와 내침하였다. 왕이 步騎 2만인을 거느리고 沸流水 상에서 逆戰하여 패퇴시키고 3천여 급을 참수하였다. 또 군사를 이끌고 梁貊之谷에서 재차 전투를 벌여, 다시 패퇴시키고 3천여 인을 참획하였다. 왕이 諸將에게 일러 말하기를, “魏의 大兵이 거꾸로 나의 小兵만 못하다. 毌丘儉이란 자는 魏의 名將으로 금일 목숨이 나의 손바닥 안에 있구나.”라고 하였다. 곧 鐵騎 5천을 거느리고 나아가 공격하였다. 儉이 方陣을 세워 決死로 싸우니, 我軍이 크게 무너져 죽은 자가 1만8천여 인이었다. 왕이 1천여 기를 거느리고 鴨淥原으로 도주하였다. 겨울 10월, 儉이 丸都城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도륙하였다. 곧 將軍 왕기를 보내 왕을 추격하였다. 왕은 南沃沮로 도주하다가 竹嶺에 이르니 軍士가 흩어지고 거의 없어, ---- 왕은 사잇길을 전전하며 南沃沮에 이르렀는데, 魏軍의 추격이 그치지 않았다. 왕은 계책도 다하고 세가 꺾이어 어찌할 바를 몰랐다. --- 유유가 목숨을 바쳐 조위의 추격부대장을 죽임 --- 魏軍이 마침내 혼란에 빠지자 왕은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급히 공격하니 魏軍은 혼란 속에 진을 갖추지 못하고, 마침내 樂浪으로부터 퇴각하였다.
옥저가 증명하는 환도성의 위치와 고구려의 강역
『삼국지』 「위서 관구검전」에 의하면 조위군은 먼저 환도성을 점령하였다. 『양서』 『북사』 『삼국사』도 같은 내용을 기술한다, 동천왕이 옥저로 도망가자, 『삼국지』 「위서 동이전」 동옥저조에 의하면 위군이 옥저를 침략하여 점령하고 동천왕은 다시 북옥저로 달아난다. 『삼국지』 「위서 관구검전」과 『양서』 『북사』에 의하면 관구검은 왕기를 시켜 옥저를 지나 천여리를 추격하도록 하여 이들은 숙신의 남계(관구검기공비를 세운 집안)에 이른다. 『삼국사』에 의하면 왕기의 추격을 받은 동천왕은 남옥저로 도망갔는데, 계책이 다하였다고 하므로 동천왕이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는 신라와의 경계 고구려의 끝 바닷가 즉 한반도 동해안까지 갔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여기의 남옥저는 보정시 동쪽의 남옥저가 아니라 동옥저의 남쪽을 가리킨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동옥조조에 의하면, 왕기가 보낸 추격군도 바닷가까지 와서 노인에게 바다 건너에 대해 물었는데, 이는 추격군이 동옥저까지 왔음을 의미한다. 동천왕이 다 죽었다고 생각할 무렵 유유가 목숨을 바쳐 조위의 추격부대장을 죽이고 고구려군이 반격에 성공한다.
韓 지역을 논하면서, 낙랑군 동부도위가 설치된 보정시 동쪽의 옥저는 남옥저임을 살펴 보았다. 남옥저는 동천왕이 조위와 싸워 도망갈 곳이 절대 아니다. 그곳은 조위가 238년 공손씨를 점령하면서 조위의 영토이거나 바닷가의 조그만 마을로 조위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이고 환도성에서 남옥저로 간다는 것은 조위 영토를 거쳐 가는 것이므로 항복하려 하지 않는 한 갈 수 없는 곳이다. 환도성에서 동천왕이 동쪽으로 도망가면 칠로도산 동쪽 해안의 옥저로 도망갔어야 한다. 『삼국지』와 『후한서』는 그곳을 동옥저라 하나, 『삼국사』에 의하면 북옥저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고구려는 하북성 북부 홀본에서 건국하여 한반도 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였는데, 『삼국사』가 고구려가 BCE 28년에 북옥저를, 32년에 낙랑국을, 56년에 동옥저를 점령하였다 하므로, 북옥저는 『삼국지』와 『후한서』가 말하는 동옥저, 낙랑국은 평양, 동옥저는 한반도 동해안의 옥저여야 영토 확장의 일관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삼국지』와 『후한서』가 남옥저와 북옥저의 거리가 800리라 하였는데 남옥저로부터 800리의 거리에 있는 것은 칠로도산 동쪽의 옥저이기 때문이다. 북옥저와 동옥저 사이는 직선거리로 2천리이다. 진수와 범엽이, 관구검이 고구려에서 탈취한 사료를 해석하면서 고구려의 지리를 몰라 북옥저와 동옥저를 혼동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즉 북옥저가 동쪽 바닷가이므로 동옥저라 생각하였고, 남옥저와 북옥저가 어디인지는 모르고 둘 사이의 거리가 800리인 것만 말하고 있다. 그래서 조위의 추격군이 한반도 동해안에 이르렀음에도 그곳이 옥저인 줄도 몰라 동옥저까지 갔다고 기록하지 않았다. 북옥저를 치구루(置溝婁)라고도 한다는데, 구루를 城으로 置를 역참으로 보면 치구루는 역(말)이 있는 성으로 볼 수 있다. 고구려는 영토가 넓어 중간 지역인 북옥저에는 역참이 반드시 있었어 한다. 북옥저는 길이가 오백리 정도 되므로, 『후한서』가 동옥저가 오백리라 한 것은 북옥저에 대한 언급이고, 『삼국지』가 동옥저가 천리라 한 것은 한반도 동해안의 동옥저에 대한 언급이다.
위 사서들에 의하면 조위군은 옥저를 지나 천여리를 추격하였다. 따라서 지나간 옥저는 북옥저(중국 사서에 의하면 동옥저)이고, 천여리 간 곳이 관구검기공비를 세운 집안 판석령이다. 동천왕은 동옥저의 남쪽 끝까지 몰렸다가 유유의 충성으로 조위군을 쫓아낼 수 있었다. 동천왕이 해안가로 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조위군이 평양 쪽도 점령했기 때문이다. 조위군이 패하고 낙랑에서 후퇴했다고 하는 것은 평양이 낙랑이었기 때문이고 이는 보정시의 낙랑군과는 전혀 다른 곳이다. 그리고 환도성은 결코 집안이 될 수 없다. 환도성은 북옥저 서쪽에 있어야, 동천왕이 환도성으로부터 북옥저로 도망칠 수 있으므로 환도성은 하북성에 있을 수밖에 없다. 환도성은 북경 동쪽의 옥전현(玉田縣)에 있었던 성이다. 조위군이 환도성에 불내성이라 새긴 것은 이 당시의 사람들이 진수처럼 낙랑 동부도위가 있었던 곳을 착각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신라의 자존심
『삼국사』에 나타나는, 신라에 사신을 보낸 동옥저는 남옥저이다. 남옥저가 이웃 신라에 사신을 보냈는데, 신라는 신라 동쪽에 있어 동옥저라 한 것이다. 신라는 마한도 서한이라 하여 자기 위치에서 본 방위를 붙이고 있다. 백제에 귀순한 구파해도 남옥저 사람이다.
『삼국사』의 사료가치와 강단 유사사학의 묵언수행
『삼국사』는 고구려의 대패와 영토 끝까지 내몰린 동천왕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 있다. 강단 유사사학의 『삼국사』 초기기록 불신론의 허구성을 동천왕 기사에서 알 수 있다. 강단 유사사학은 모든 사서가 옥저가 세 개라 하며, 중국의 사서들이 하나같이 옥저를 지나 천여리를 와서 집안에 이르렀다고 해도 한반도 동해안에만 옥저가 있다고 사기를 친다. 환도성이 집안에 있었다는 주장은 중국의 사서들과 관구검기공비에 의하면 도저히 설명히 불가능함에도 입 닫고 아무 문제가 없는 척 어거지를 쓴다. 이러한 침묵을 그들은 묵언수행이라고 할지 모른다.
난하설의 문제
우리의 역사 강역을 아무런 근거 없이 난하로 제한하는 견해도 유사사학이다. 관구검기공비와 북옥저가 난하 서쪽에 환도성이 있었고 그 지역이 고구려의 영토였음을 명확히 증명함에도 난하설은 이를 무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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