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낙랑군 평양설의 날조성
낙랑군이 현재의 평양이 되는 날조의 다단계
강단·일제·중제 유사사학은 예맥조선의 왕검성에 낙랑군을 설치했다고 주장하면서 ‘왕검성=낙랑군=지금의 평양’이라 한다. 그들은 우선 요동군이 설치된 왕검성에 낙랑군이 설치되었다고 날조했다. 다음으로 고구려의 건국 시 수도인 홀본이 예맥조선 왕검성 부근이었다는 사실을 기반으로, 고구려의 수도가 하북성에서 요양으로 이동하자, 예맥조선의 왕검성까지 고구려의 새로운 수도인 요양으로 날조하였다. 이러한 날조를 정당화하기 위해 중국인들은 『후한서』 「군국지」를 날조하였다. 여기까지가 중국인들이 만든 위사이고, 조선의 사대주의 유학자와 일제는 고구려의 수도가 현재의 평양이었다는 위사를 더 첨가하여 낙랑군이 보정시에서 머나먼 길을 달려 한반도의 평양까지 오게 되었다.
침략한 예맥조선 영토에 설치한 군은 현도군 요서군 요동군이다
漢은 요동외요를 포기하고 요동고새로 후퇴하였으므로 진개가 만든 5군 중 요동고새 바로 북쪽의 어양, 우북평, 상곡만 유지하였다. 예맥조선을 침략한 후에는 진개가 만든 국경까지 진출했다. 따라서 새로 영토가 늘어난 부분은 요서군, 요동군, 현도군이다. 진개의 요서군을 요서군과 현도군으로 나누었으므로 진개 때보다 영토가 증가한 것은 없다.
漢은 예맥조선을 무너뜨리고 예맥조선의 전 영토에 대해 군현을 설치했다. 현도의 의미가 먼 북쪽 고을이고 『삼국지』와 『후한서』가 동옥저(실제는 북옥저이다)에 현도를 설치했다고 하므로 현도는 연산산맥 동쪽 부분과 동옥저, 진번은 북경 북쪽 산악지대 즉 연산산맥 서쪽 부분에, 요동은 요하 동쪽에, 임둔은 황하 동쪽 제수 북쪽의 韓 지역에 설치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예맥조선인들의 반발로 실효지배하지는 못하고 요동외요로 바로 후퇴하고, 韓 지역에서도 낙랑과 가까운 일부 지역만 지배하였다. 서류상 영토와 실질상 영토를 일치시키기 위해 BCE 82년 행정구역 정리를 하였다. 임둔군은 일부 실효지배하던 작은 지역만 낙랑군 동부도위로 낙랑군에 편입시켰다. 전혀 행정구역이 없었던 현도군을 진번군 고구려현에 위치시키고 진번군을 폐지했다. 요동군도 요동외요 내부로 축소되었다. 강단 유사사학이 漢이 예맥조선을 물리치고 설치하였다고 주장하는 낙랑 진번 임둔 현도 중에서는 실제 새로 얻은 영토에 설치된 것은 현도군과 낙랑군 동부도위 밖에는 없다.
『한서』와 『후한서』가 요동군과 요서군을 새로 설치한 군에서 제외한 것은 연나라와 진나라 때 설치되었던 두 군을 한나라가 포기하였다가 회복한 것에 불과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낙랑군은 한나라 영토 안에 설치되었지만, 왕검성 주민을 이주시켜 새로 설치한 군이므로, 『한서』와 『후한서』에서 예맥조선 정복과 관련되어 설치된 군으로서 열거되었을 것이다.
[예맥조선 침략 후 漢의 서류상 영토]

[예맥조선 침략 후 漢의 실제 영토]

낙랑군이 평양에 있을 수 없는 정치지리학적 이유
국가의 영토는 일반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밀집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정치지리학의 기본 원리이다. '밀집성'이란 영토가 뭉쳐 있는 형태를 뜻하며, 이상적인 형태는 원형에 가깝다. 이러한 영토의 연결성과 밀집성은 국방과 경제적 효율성은 물론 국민적 일체감 형성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국민적 일체감은 곧 통치의 용이성과 직결된다. 따라서 영역이 서로 연결되지 않거나 밀집되지 않은 경우에는 이러한 구조적 비효율을 상쇄할 만한 다른 전략적 동기가 반드시 존재해야만 한다. 역사상 이런 사례로는 석유나 희소 광물 등 전략 자원의 확보, 핵심 교통로의 장악, 또는 압도적인 해상력을 바탕으로 한 해양 제국의 경우 등을 들 수 있다.
일제·중제·강단 유사사학은 漢나라의 영토가 동북쪽으로 비정상적으로 길게 뻗어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주장은 어양·우북평·요서·요동·현도·낙랑이 북경에서 평양까지 하나의 선형으로 이어진 영토를 구성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영토 구조는 정치지리학적으로 불가능하다. 특히 농경 국가인 중국이 그러한 가늘고 긴 선형 영토를 기마 수렵 민족의 위협으로부터 방어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한서』 「지리지」에 기록된 어양·우북평·요서·요동·현도·낙랑 지역의 모든 인구를 국경 방어에 총동원한다고 하더라도, 그 긴 국경선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어렵다. 고대의, 방어선 길이와 필요 병력 간의 비례 관계를 고려한다면, 군사학적으로 불가능한 국경이다. 설령 일시적으로 그러한 괴상한 형태의 영토를 점령했다 하더라도, 곧 외부 세력이 중간 지역을 차단하여 뻗어나온 부분을 영토화할 것이므로 장기적인 유지는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물론 평양이 현재의 석유와 같은 핵심 전략 자원이 생산되는 지역이었다면, 중국의 왕조가 평양을 사수하기 위해 막대한 비효율과 위험을 감수하고 비정상적 영토 형태를 유지했을 가능성은 있다.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의 향료를 위해 인도네시아를, 영국이 인도의 면화와 공산품 시장을 확보하기 위해 인도를 영토화한 것은 그러한 예이다. 그러나 당시 평양 지역에는 그러한 전략적 가치를 지닌 자원이 존재하지 않았다.
일제·중제·강단 유사사학은 그러한 비정상적 경계를 흉노와의 치열한 전쟁 중에도 유지했고 유지할 수 있었는가에 대한 합리적 설명을 제시한 적이 없다. 漢이 흉노와 다투고, 후에 조위가 촉·오와 삼국 패권을 다투는 격변의 시대에도 한반도 평양까지 차지하고 있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명확히 밝혀야 한다. 역사는 인간의 행위에 관한 서술이므로, 비정상적이고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현상에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합리적 이유와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그러나 이들은 조선총독부가 만들어낸 소설에 부합하기만 하면 아무런 합리적 근거가 없어도 전혀 문제가 없다고 간주한다.
낙랑군 평양설은 현대 정치지리학의 관점에서 볼 때 불가능한 영토 형태를 전제로 한 허구적 주장이다. 강단 유사사학은 중국과 일본의 침략적 민족주의에 굴종하기 위해, 정치지리학적으로나 군사지리학적으로 불가능한 영토 형태를 아무런 과학적 근거 없이 역사적 사실이라 강변하고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들이 오히려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역사 연구를 민족주의에 경도된 유사학문이라고 매도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진실은 정반대이다. 강단 유사사학이야말로 중국과 일본의 침략적 민족주의에 복종하며, 과학적 방법론을 거부하는 진정한 유사학문이다.
진정한 역사학은 정치지리학, 경제학, 군사학 등 관련 학문의 성과를 종합하여,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해석을 제시해야 한다. 낙랑군 평양설은 이러한 과학적 검증을 통과하지 못하는 비학문적 주장에 불과하다.
낙랑군이 평양에 있을 수 없는 경제학적 이유
강단 유사사학은 예맥조선이 한반도 남부와 한나라가 교역하는 것을 막았다고 하나, 한반도 남부와 漢은 같은 농경사회여서 무역할 것이 많지 않다. 즉 무역의 이익이 별로 없다. 漢이 필요로 했던 말 등 무역의 이익이 있는 품목은 경제의 성격이 다른 몽골초원에 있지 한반도 남부에는 없다. 북부여는 漢으로부터 농산물을 필요로 하지만, 한반도 남부는 漢에서 농산물을 사올 필요가 없는 지역이다.
漢과의 직접적인 무역을 시도한 나라에 대해 『사기』 「조선열전」은 판본에 따라 ‘眞番旁衆國’이나 ‘眞番旁辰國’, 『한서』 「조선전」과 『資治通鑑』 「漢紀十三」은 ‘眞番·辰國’으로 기술하고 있으나, ‘眞番旁辰國’이 타당하다. 진번은 진번조선이 망한 후 하북성 북부 산악지역을 의미하는 지역명으로 추정되며, 진번 북쪽 진국인 북부여가 무역의 규모나 성격상 예맥조선의 무역이익 독점에 가장 강한 불만을 품고 漢과 교섭하려 했을 가능성이 크고, 나머지 소국은 예맥조선의 횡포를 알아도 보복이 두려워 쉽게 움직이기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漢이 예맥조선과 대동강을 마주하고 있었다면 북부여는 예맥조선의 방해 없이 자유롭게 漢과 통할 수 있다. 강단 유사사학의 주장에 따르면 『사기』 「조선열전」의 “眞番 옆의 북부여가 글을 올려 天子에게 알현하고자 하는 것도 또한 가로막고 통하지 못하게 하였다”라는 사건이 불가능하게 된다.
예맥조선이 漢과 강화하기 위해 보내려 했던 말 5000필은 한반도 남부에서 키울 수 없다. 키워도 비싸서 漢이 수입하지 않는다. 따라서 예맥조선은 예맥조선의 북동쪽에 있는 북부여와 한나라간 무역을 방해하였다고 봄이 타당하고, 왕검성이나 낙랑군이 한반도에 있는 것은 불가능하다. 강단 유사사학은 비교우위에 의해 무역이 발생한다는 기본 상식도 없이 일제의 소설을 지키기 위해 진력한다.
유사고고학으로 도망치는 강단 유사사학
강단 유사사학은 문헌근거로는 낙랑을 대동강에 유지시키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자 평양의 유물이 중국의 것이라고 날조한다. 억지의 향연이 펼쳐진다. 사이비들은 평양 말고는 다른 곳에서는 낙랑군이 발견되지 않으니 평양이 낙랑군이라는 얼토당토 않은 주장까지 한다. 유물이 파괴되었거나 아직 발견되지 않았을 수 있으므로, 학자라면 이런 말을 도저히 할 수 없다. 그들도 자신들이 주장하는 고고학적 자료가 평양이 낙랑군이었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가 되지 않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런 무리한 말을 할 것이다. 고고학은 문헌에 기록된 역사를 보완하고 검증한다. 그러나 우리의 유사사학과 유사고고학은 유사사학이 기록에 없는 소설을 쓰고 유사고고학은 소설을 옹호하기 위해 억지를 쓴다. 덤앤더머의 모범이다. 그것들은 학문이 아니라 조선총독부 소설에 충실히 복무하기 위한 유사학문에 불과하다.
① 금은제 공예품과 칠기 등 무덤의 부장품
사이비들은 평양 고분 출토 금제 띠고리 등 금은제 공예품이 모두 漢에서 낙랑의 지배계층으로 사여된 물품이라고 날조하였으나, 최근 북방 몽골의 고분이 발굴조사되면서, 평양 고분 출토품이 몽골 고분의 것과 양식이 같고 제작기법도 단조 및 타출기법으로 동일하고, 중국의 것은 양식도 다르고 주조기법으로 제작되었음이 밝혀졌다. 몽골은 진조선 지역이었고 평양은 말조선 지역이었으므로 공예품의 양식이 당연히 비슷할 것이다.
1세기로 추정되는 평양 석암리 9호분 부장품인 박산로는 봉황과 거북이 산을 받친 형태인데, 이러한 형태는 하북성 산서성의 것과 유사하고, 섬서성 북부의 내몽골에서 나온 것과도 유사하며, 이러한 형태는 중국의 중심부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1세기 하북성 북부는 고구려의 영토였고, 산서성 북부와 섬서성은 흉노의 영토였으므로, 평양에서 하북성 산서성 섬서성의 것과 비슷한 양식의 박산로가 발견되는 것은 당연하다.
중국제 공예품인 칠기와 한경 등은 몽골, 중앙아시아 멀리는 우크라이나에서까지 발견되어 정부의 사여품이 아닌 단순 교역품으로 밝혀졌다. 이는 당시 실크로드를 통한 광범위한 교역 네트워크의 존재를 보여주는 것으로, 칠기나 한경이 특정 지역에 한나라 군현이 설치되었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 사이비들은 우크라이나에도 漢나라의 군현이 존재했을 것이라 말할지 모른다.
② 무덤 양식
강단 유사사학은 평양의 묘제가 중국식이므로 평양이 낙랑군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증거는 없다. 강단 유사사학은 목관묘가 낙랑과 관련된 묘제 중에서는 등장 시기가 가장 빠른 형식이라 주장한다. 그런데 목관묘는 한반도 서북지역에서 BCE 3세기경에 나타났으며, 낙동강유역에서는 BCE 2세기에 등장하여 CE 2세기 중반까지 유행하다가 목곽묘로 발전된다. 평양 지역의 목관묘에 특색이 있는지도 밝혀지지 않았고, 설사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그것이 낙랑군 설치 때문인지도 입증되지 않았다. 강단 유사사학은 평양 지역의 목곽묘는 목곽을 구성하는 판재를 잇기 위한 부재로 나무쐐기가 사용되는 특징이 있으므로 낙랑군의 목곽묘라 한다. 그러나 이러한 특징이 왜 중국과 연관되는지는 제시하지 않고 있다. 묘제라는 것은 지역이나 계층마다 약간씩의 특색이 있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이 특징이 낙랑군의 설치로 인해 발생했다는 것을 입증하지 않는 한 낙랑군과는 무관한 현상일 뿐이다. 강단 유사사학은 이러한 특징을 갖는 목곽묘의 상한이 낙랑군 설치 이전으로 소급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즉 낙랑군 설치와는 전혀 연관이 없음을 자인하고 있다.
강단 유사사학은 전축분에 대해서 요동 지역의 전축분과 유사성이 높으므로 낙랑군의 묘제라 한다. 북경부터 고구려의 영토였으므로 요동 지역의 묘제와 평양 지역의 묘제가 닮았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漢나라와는 전혀 무관한 사실이다. 그리고 앞서 보았듯이 전축분의 벽돌에 새겨진 연호는 고구려의 것이다. 산동 지역의 전축분과의 유사성을 주장하기도 하는데, 산동 지역도 과거 번조선 지역으로서 백제가 일부를 영토로 하였으므로 고구려의 묘와 비슷할 것이다.
결국 평양의 묘제가 중국식이므로 평양이 낙랑군이라는 주장에는 근거가 전혀 없다. 그들의 논리에 따르면 아무 지역이나 지정하고 낙랑군이라 주장하면 된다. 어떤 지역이나 묘제에 약간의 특성은 있기 때문이며, 고구려는 압록강 주변의 산간 소국이라 거짓말 하면 평양의 묘제는 고구려의 묘제가 아니라 우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종선은 서북한 지역의 목곽묘는 묘제와 반출유물로 보아 섬서성 북부 오르도스 지역과 유사하므로 칠기나 도장 등 불충분한 증거로 낙랑유적으로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한다. 흉노계 분묘를 종합한 연구에 의하면 흉노 분묘의 유형이 강단 유사사학이 주장하는 낙랑고토에 모두 나타난다. 내몽골과 요서가 우리 민족의 중심 국가인 진국(辰國) 지역이었으므로 이들의 문화와 평양의 문화가 유사함은 당연한 현상이다.
③ 낙랑명 기와 등과 북한 발굴 무덤
사이비들은 ‘낙랑예관’ ‘낙랑부귀’가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었으므로 평양이 낙랑군이라 한다. 『삼국사』에는 낙랑왕 최리가 나타난다. 즉 낙랑국이란 나라가 있었으므로 ‘낙랑’이라 새겨진 기와가 반드시 漢 ‘낙랑군’의 유물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무서운 아이들’이란 찬사를 받는 사이비들은 북한은 낙랑군의 고분이라 한 바가 없는데도, “일제 시기에 발굴한 낙랑 지역 고분의 수는 70여기에 불과한 반면, 해방 이후 북한에서 발굴한 낙랑 고분의 수는 1900년대 중반까지 무려 3000기에 달한다.”고 하면서 이렇게 많은 낙랑군 무덤이 평양이 낙랑군임을 증명한다고 뻔한 거짓말을 한다. 그들은 학문이 아니라 거짓말 경연을 하고 있다. 대중에게는 거짓말쟁이가 되어도 사이비 괴수들에게 잘 보여야 유리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한편 천추만세(千秋萬歲)라 쓰여진 기와가 나왔고, 영수강녕(永壽康寧)이라는 길상어(吉祥語)가 새겨진 옥도장이 나왔는데, 만세나 영수강녕은 태수에게는 부적당한 표현이라는 점에서, 이들 유물은 평양이 낙랑군이 아님을 증명한다.
④ 봉니, 점제현신사비, 현별 호구부
이들은 이동이 가능한 것들이다. 이동이 가능한 유물로 지명을 비정할 수 없다는 것은 사이비들의 비조인 이병도가 이미 말한 바 있다. 따라서 더 이상 논할 필요도 없으나 사이비들이 억지를 쓸 것이므로 하나하나 더 따져본다.
봉니의 경우, 그들의 소설상 가장 변방인 평양에서 200여개의 봉니가 발견된 것부터 이상하다. 상태가 지나치게 양호하여 漢나라 때 만들어진 것인지도 의문이다. 상급 기관인 중앙 정부나 유주로부터 받은 봉니는 없으며, 속현의 봉니만 발견되는 것도 괴이하다. 수신지에서는 봉니를 파괴해야 하는데 파괴되지 않은 봉니가 발견되는 것도 괴이하다. 사이비들은 문서의 보관을 위해서 사용된 봉니라고 억지를 쓰는데, 그렇다면 봉니들은 각 18개 현에서 따로 발견되어야 할 것이다.
정인보에 의하면 더 괴이한 점이 있다. 관직명이 당시의 관직명과 일치하지 않는다. 즉 신나라 때는 태수를 대윤이라 하고 낙랑도 낙선이라 고쳤으므로 낙랑대윤이라는 관직은 불가능한데 낙랑대윤이 새겨진 봉니가 8개나 나왔으며, 장잠현은 작은 현이므로 현장이어야 하는데 봉니는 현령이다. 『漢書』 「예문지(藝文志)」에 동이령(東暆令) 연년(延年)이라는 사람이 부(賦) 칠편을 지었다고 한다. 즉 동이(東暆)현은 령(令)을 붙여야 하는데, 봉니는 장(長)이다. 이 외에도 무수히 많은 조작의 증거가 있다.
점제현신사비는 발견 경위에 여러 의문점이 있으며, 북한의 연구에 의하면 비석의 기초에 시멘트가 사용되었고, 돌 생성연대나 성분이 주위의 돌과 다르다고 하며, 비에는 각석한다고 쓰여 있는데, 문성재에 의하면, 각석이란 단어는 자연적인 바위나 절벽에 글자를 새기는 것을 뜻하지 비석에 글자를 쓰는 것을 말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1993년 정백동 고분에서 출토된 ‘낙랑군 호구부’는 사이비들이 유력한 증거로 제시하나, 문성재는, 출토된 유물에 귀족이나 누릴 수 있는 위세품과 농민들이 사용하는 농기구가 섞여 있어 신빙성이 의심된다는 점, 보안 문서인 호구부가 개인의 무덤에 부장되었다는 것이 이상하다는 점, 결정적으로 현별의 ‘별’이라는 말은 19-20세기에 일본에서만 쓰던 ‘일본식’ 한자라는 점 등을 이유로 현별 호구부는 위조된 자료일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고구려 백제 신라와 낙랑군의 위치 모순
강단 유사사학의 위치 비정에 의하면 백제는 경기도, 신라는 경상도, 낙랑군은 평안도, 낙랑군 동부도위는 함경도, 대방군은 황해도이다. 이러한 위치 비정은 『삼국사』와 『삼국지』의 기사와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삼국사』에 의하면, 온조왕은 백제 동쪽에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다고 말하며, 신라는 BCE 28년, CE 4년, CE 14년, CE 36년 네 차례나 낙랑군의 공격을 받는다. 『삼국지』에 의하면 공손강은 군대를 일으켜 倭와 韓을 공격하여 帶方에 복속시켰고, 조위는 공손씨를 멸하고, 246년 공손씨에게 복속되어 있었던 辰韓 팔국을 낙랑군에 귀속시키려 하였는데 이들이 거부하자, 진한 팔국을 멸하였다.
백제 동쪽에 낙랑이 없으므로, 강단 유사사학은 춘천에 맥국이 있었고, 이들이 낙랑을 참칭했다고 하며, 백제 북쪽의 말갈에 대해선 동예설, 고구려 내 말갈설, 영서예설, 마한의 소국인 신분고국설 등을 별다른 근거 없이 주장한다. 황해도의 대방군과 다채로운 그들의 말갈과는 어떻게 관련되는지도 알 수 없다. 낙랑군이 평안도, 낙랑 동부도위가 함경도이면, 낙랑과 경주 사이를 낙랑군이 점령하지 않는 한 경주에 있는 신라가 낙랑군의 공격을 받을 이유가 없다. 강단 유사사학은 낙랑의 신라 침략 기사에 대해 날조기사설, 상인집단설, 북진한설, 시기 혼동설, 낙랑 참칭 옥저설, 최리 낙랑국설, 편찬자 실수설 등을 주장하나 모두 근거는 전혀 없다. 무려 4차례의 침략이 기록되어 있어 신라를 침략한 세력은 낙랑군이나 낙랑군 동부도위가 아닌 다른 세력이라 볼 수는 없다. 진한이 경상도라면 조위는 경상도를 정복하여 영토로 만들었어야 한다.
이러한 위치 비정의 모순은 보정시를 낙랑군으로 보고 韓을 황하 동쪽 제수 북쪽으로 보면 모두 해결된다. 이 경우 韓 지역은 낙랑군 동남쪽이고, 낙랑 동부도위는 낙랑군 동쪽 즉 韓 지역 북동쪽이 된다. 백제 동쪽은 낙랑 동부도위이며, 신라를 공격하는 낙랑도 낙랑 동부도위이다. 백제 북쪽의 말갈은 요동고새와 패수 사이에 있는 우북평과 어양의, 오환인들이다. 유철은 흉노의 지배 하에 있던 오환인들을 상하장(요동고새와 요동외요 사이의 지역으로 보정시 북쪽부터 북경까지이다)으로 이주시켜 흉노에 대비하였는데, 이들은 흉노에 지배당하게 된 북부여인들로서 이인자란 뜻의 말갈(마한)을 국호로 사용하였다. 황하 하류의 수류 변동은 CE 11년 경에 있었다. 황하가 동쪽으로 이동하자, 백제에서 분리된 지역이 발생하였다. 이 지역은 낙랑군에 붙은 땅이 되어 물이 어느 정도 마르자, 공손씨가 대방군으로 편입하였고, 조위는 진한을 자처한 이들을 멸하여 영토로 만들었다. 이 지역은 황하 하구로서 어업집단인 왜(예)도 살았기 때문에 공손씨가 왜도 복속시켰다. 보정시를 낙랑군으로 보고 韓을 황하 동쪽 제수 북쪽으로 보면, 강단 유사사학처럼 가지가지 근거가 전혀 없는 소설을 쓰지 않아도 『삼국사』 『삼국지』 『후한서』 등의 신뢰성 있는 사료가 개연성 있게 설명된다.
(5) 낙랑군 평양설의 날조성
낙랑군이 현재의 평양이 되는 날조의 다단계
강단·일제·중제 유사사학은 예맥조선의 왕검성에 낙랑군을 설치했다고 주장하면서 ‘왕검성=낙랑군=지금의 평양’이라 한다. 그들은 우선 요동군이 설치된 왕검성에 낙랑군이 설치되었다고 날조했다. 다음으로 고구려의 건국 시 수도인 홀본이 예맥조선 왕검성 부근이었다는 사실을 기반으로, 고구려의 수도가 하북성에서 요양으로 이동하자, 예맥조선의 왕검성까지 고구려의 새로운 수도인 요양으로 날조하였다. 이러한 날조를 정당화하기 위해 중국인들은 『후한서』 「군국지」를 날조하였다. 여기까지가 중국인들이 만든 위사이고, 조선의 사대주의 유학자와 일제는 고구려의 수도가 현재의 평양이었다는 위사를 더 첨가하여 낙랑군이 보정시에서 머나먼 길을 달려 한반도의 평양까지 오게 되었다.
침략한 예맥조선 영토에 설치한 군은 현도군 요서군 요동군이다
漢은 요동외요를 포기하고 요동고새로 후퇴하였으므로 진개가 만든 5군 중 요동고새 바로 북쪽의 어양, 우북평, 상곡만 유지하였다. 예맥조선을 침략한 후에는 진개가 만든 국경까지 진출했다. 따라서 새로 영토가 늘어난 부분은 요서군, 요동군, 현도군이다. 진개의 요서군을 요서군과 현도군으로 나누었으므로 진개 때보다 영토가 증가한 것은 없다.
漢은 예맥조선을 무너뜨리고 예맥조선의 전 영토에 대해 군현을 설치했다. 현도의 의미가 먼 북쪽 고을이고 『삼국지』와 『후한서』가 동옥저(실제는 북옥저이다)에 현도를 설치했다고 하므로 현도는 연산산맥 동쪽 부분과 동옥저, 진번은 북경 북쪽 산악지대 즉 연산산맥 서쪽 부분에, 요동은 요하 동쪽에, 임둔은 황하 동쪽 제수 북쪽의 韓 지역에 설치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예맥조선인들의 반발로 실효지배하지는 못하고 요동외요로 바로 후퇴하고, 韓 지역에서도 낙랑과 가까운 일부 지역만 지배하였다. 서류상 영토와 실질상 영토를 일치시키기 위해 BCE 82년 행정구역 정리를 하였다. 임둔군은 일부 실효지배하던 작은 지역만 낙랑군 동부도위로 낙랑군에 편입시켰다. 전혀 행정구역이 없었던 현도군을 진번군 고구려현에 위치시키고 진번군을 폐지했다. 요동군도 요동외요 내부로 축소되었다. 강단 유사사학이 漢이 예맥조선을 물리치고 설치하였다고 주장하는 낙랑 진번 임둔 현도 중에서는 실제 새로 얻은 영토에 설치된 것은 현도군과 낙랑군 동부도위 밖에는 없다.
『한서』와 『후한서』가 요동군과 요서군을 새로 설치한 군에서 제외한 것은 연나라와 진나라 때 설치되었던 두 군을 한나라가 포기하였다가 회복한 것에 불과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낙랑군은 한나라 영토 안에 설치되었지만, 왕검성 주민을 이주시켜 새로 설치한 군이므로, 『한서』와 『후한서』에서 예맥조선 정복과 관련되어 설치된 군으로서 열거되었을 것이다.
[예맥조선 침략 후 漢의 서류상 영토]

[예맥조선 침략 후 漢의 실제 영토]

낙랑군이 평양에 있을 수 없는 정치지리학적 이유
국가의 영토는 일반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밀집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정치지리학의 기본 원리이다. '밀집성'이란 영토가 뭉쳐 있는 형태를 뜻하며, 이상적인 형태는 원형에 가깝다. 이러한 영토의 연결성과 밀집성은 국방과 경제적 효율성은 물론 국민적 일체감 형성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국민적 일체감은 곧 통치의 용이성과 직결된다. 따라서 영역이 서로 연결되지 않거나 밀집되지 않은 경우에는 이러한 구조적 비효율을 상쇄할 만한 다른 전략적 동기가 반드시 존재해야만 한다. 역사상 이런 사례로는 석유나 희소 광물 등 전략 자원의 확보, 핵심 교통로의 장악, 또는 압도적인 해상력을 바탕으로 한 해양 제국의 경우 등을 들 수 있다.
일제·중제·강단 유사사학은 漢나라의 영토가 동북쪽으로 비정상적으로 길게 뻗어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주장은 어양·우북평·요서·요동·현도·낙랑이 북경에서 평양까지 하나의 선형으로 이어진 영토를 구성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영토 구조는 정치지리학적으로 불가능하다. 특히 농경 국가인 중국이 그러한 가늘고 긴 선형 영토를 기마 수렵 민족의 위협으로부터 방어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한서』 「지리지」에 기록된 어양·우북평·요서·요동·현도·낙랑 지역의 모든 인구를 국경 방어에 총동원한다고 하더라도, 그 긴 국경선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어렵다. 고대의, 방어선 길이와 필요 병력 간의 비례 관계를 고려한다면, 군사학적으로 불가능한 국경이다. 설령 일시적으로 그러한 괴상한 형태의 영토를 점령했다 하더라도, 곧 외부 세력이 중간 지역을 차단하여 뻗어나온 부분을 영토화할 것이므로 장기적인 유지는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물론 평양이 현재의 석유와 같은 핵심 전략 자원이 생산되는 지역이었다면, 중국의 왕조가 평양을 사수하기 위해 막대한 비효율과 위험을 감수하고 비정상적 영토 형태를 유지했을 가능성은 있다.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의 향료를 위해 인도네시아를, 영국이 인도의 면화와 공산품 시장을 확보하기 위해 인도를 영토화한 것은 그러한 예이다. 그러나 당시 평양 지역에는 그러한 전략적 가치를 지닌 자원이 존재하지 않았다.
일제·중제·강단 유사사학은 그러한 비정상적 경계를 흉노와의 치열한 전쟁 중에도 유지했고 유지할 수 있었는가에 대한 합리적 설명을 제시한 적이 없다. 漢이 흉노와 다투고, 후에 조위가 촉·오와 삼국 패권을 다투는 격변의 시대에도 한반도 평양까지 차지하고 있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명확히 밝혀야 한다. 역사는 인간의 행위에 관한 서술이므로, 비정상적이고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현상에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합리적 이유와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그러나 이들은 조선총독부가 만들어낸 소설에 부합하기만 하면 아무런 합리적 근거가 없어도 전혀 문제가 없다고 간주한다.
낙랑군 평양설은 현대 정치지리학의 관점에서 볼 때 불가능한 영토 형태를 전제로 한 허구적 주장이다. 강단 유사사학은 중국과 일본의 침략적 민족주의에 굴종하기 위해, 정치지리학적으로나 군사지리학적으로 불가능한 영토 형태를 아무런 과학적 근거 없이 역사적 사실이라 강변하고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들이 오히려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역사 연구를 민족주의에 경도된 유사학문이라고 매도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진실은 정반대이다. 강단 유사사학이야말로 중국과 일본의 침략적 민족주의에 복종하며, 과학적 방법론을 거부하는 진정한 유사학문이다.
진정한 역사학은 정치지리학, 경제학, 군사학 등 관련 학문의 성과를 종합하여,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해석을 제시해야 한다. 낙랑군 평양설은 이러한 과학적 검증을 통과하지 못하는 비학문적 주장에 불과하다.
낙랑군이 평양에 있을 수 없는 경제학적 이유
강단 유사사학은 예맥조선이 한반도 남부와 한나라가 교역하는 것을 막았다고 하나, 한반도 남부와 漢은 같은 농경사회여서 무역할 것이 많지 않다. 즉 무역의 이익이 별로 없다. 漢이 필요로 했던 말 등 무역의 이익이 있는 품목은 경제의 성격이 다른 몽골초원에 있지 한반도 남부에는 없다. 북부여는 漢으로부터 농산물을 필요로 하지만, 한반도 남부는 漢에서 농산물을 사올 필요가 없는 지역이다.
漢과의 직접적인 무역을 시도한 나라에 대해 『사기』 「조선열전」은 판본에 따라 ‘眞番旁衆國’이나 ‘眞番旁辰國’, 『한서』 「조선전」과 『資治通鑑』 「漢紀十三」은 ‘眞番·辰國’으로 기술하고 있으나, ‘眞番旁辰國’이 타당하다. 진번은 진번조선이 망한 후 하북성 북부 산악지역을 의미하는 지역명으로 추정되며, 진번 북쪽 진국인 북부여가 무역의 규모나 성격상 예맥조선의 무역이익 독점에 가장 강한 불만을 품고 漢과 교섭하려 했을 가능성이 크고, 나머지 소국은 예맥조선의 횡포를 알아도 보복이 두려워 쉽게 움직이기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漢이 예맥조선과 대동강을 마주하고 있었다면 북부여는 예맥조선의 방해 없이 자유롭게 漢과 통할 수 있다. 강단 유사사학의 주장에 따르면 『사기』 「조선열전」의 “眞番 옆의 북부여가 글을 올려 天子에게 알현하고자 하는 것도 또한 가로막고 통하지 못하게 하였다”라는 사건이 불가능하게 된다.
예맥조선이 漢과 강화하기 위해 보내려 했던 말 5000필은 한반도 남부에서 키울 수 없다. 키워도 비싸서 漢이 수입하지 않는다. 따라서 예맥조선은 예맥조선의 북동쪽에 있는 북부여와 한나라간 무역을 방해하였다고 봄이 타당하고, 왕검성이나 낙랑군이 한반도에 있는 것은 불가능하다. 강단 유사사학은 비교우위에 의해 무역이 발생한다는 기본 상식도 없이 일제의 소설을 지키기 위해 진력한다.
유사고고학으로 도망치는 강단 유사사학
강단 유사사학은 문헌근거로는 낙랑을 대동강에 유지시키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자 평양의 유물이 중국의 것이라고 날조한다. 억지의 향연이 펼쳐진다. 사이비들은 평양 말고는 다른 곳에서는 낙랑군이 발견되지 않으니 평양이 낙랑군이라는 얼토당토 않은 주장까지 한다. 유물이 파괴되었거나 아직 발견되지 않았을 수 있으므로, 학자라면 이런 말을 도저히 할 수 없다. 그들도 자신들이 주장하는 고고학적 자료가 평양이 낙랑군이었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가 되지 않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런 무리한 말을 할 것이다. 고고학은 문헌에 기록된 역사를 보완하고 검증한다. 그러나 우리의 유사사학과 유사고고학은 유사사학이 기록에 없는 소설을 쓰고 유사고고학은 소설을 옹호하기 위해 억지를 쓴다. 덤앤더머의 모범이다. 그것들은 학문이 아니라 조선총독부 소설에 충실히 복무하기 위한 유사학문에 불과하다.
① 금은제 공예품과 칠기 등 무덤의 부장품
사이비들은 평양 고분 출토 금제 띠고리 등 금은제 공예품이 모두 漢에서 낙랑의 지배계층으로 사여된 물품이라고 날조하였으나, 최근 북방 몽골의 고분이 발굴조사되면서, 평양 고분 출토품이 몽골 고분의 것과 양식이 같고 제작기법도 단조 및 타출기법으로 동일하고, 중국의 것은 양식도 다르고 주조기법으로 제작되었음이 밝혀졌다. 몽골은 진조선 지역이었고 평양은 말조선 지역이었으므로 공예품의 양식이 당연히 비슷할 것이다.
1세기로 추정되는 평양 석암리 9호분 부장품인 박산로는 봉황과 거북이 산을 받친 형태인데, 이러한 형태는 하북성 산서성의 것과 유사하고, 섬서성 북부의 내몽골에서 나온 것과도 유사하며, 이러한 형태는 중국의 중심부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1세기 하북성 북부는 고구려의 영토였고, 산서성 북부와 섬서성은 흉노의 영토였으므로, 평양에서 하북성 산서성 섬서성의 것과 비슷한 양식의 박산로가 발견되는 것은 당연하다.
중국제 공예품인 칠기와 한경 등은 몽골, 중앙아시아 멀리는 우크라이나에서까지 발견되어 정부의 사여품이 아닌 단순 교역품으로 밝혀졌다. 이는 당시 실크로드를 통한 광범위한 교역 네트워크의 존재를 보여주는 것으로, 칠기나 한경이 특정 지역에 한나라 군현이 설치되었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 사이비들은 우크라이나에도 漢나라의 군현이 존재했을 것이라 말할지 모른다.
② 무덤 양식
강단 유사사학은 평양의 묘제가 중국식이므로 평양이 낙랑군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증거는 없다. 강단 유사사학은 목관묘가 낙랑과 관련된 묘제 중에서는 등장 시기가 가장 빠른 형식이라 주장한다. 그런데 목관묘는 한반도 서북지역에서 BCE 3세기경에 나타났으며, 낙동강유역에서는 BCE 2세기에 등장하여 CE 2세기 중반까지 유행하다가 목곽묘로 발전된다. 평양 지역의 목관묘에 특색이 있는지도 밝혀지지 않았고, 설사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그것이 낙랑군 설치 때문인지도 입증되지 않았다. 강단 유사사학은 평양 지역의 목곽묘는 목곽을 구성하는 판재를 잇기 위한 부재로 나무쐐기가 사용되는 특징이 있으므로 낙랑군의 목곽묘라 한다. 그러나 이러한 특징이 왜 중국과 연관되는지는 제시하지 않고 있다. 묘제라는 것은 지역이나 계층마다 약간씩의 특색이 있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이 특징이 낙랑군의 설치로 인해 발생했다는 것을 입증하지 않는 한 낙랑군과는 무관한 현상일 뿐이다. 강단 유사사학은 이러한 특징을 갖는 목곽묘의 상한이 낙랑군 설치 이전으로 소급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즉 낙랑군 설치와는 전혀 연관이 없음을 자인하고 있다.
강단 유사사학은 전축분에 대해서 요동 지역의 전축분과 유사성이 높으므로 낙랑군의 묘제라 한다. 북경부터 고구려의 영토였으므로 요동 지역의 묘제와 평양 지역의 묘제가 닮았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漢나라와는 전혀 무관한 사실이다. 그리고 앞서 보았듯이 전축분의 벽돌에 새겨진 연호는 고구려의 것이다. 산동 지역의 전축분과의 유사성을 주장하기도 하는데, 산동 지역도 과거 번조선 지역으로서 백제가 일부를 영토로 하였으므로 고구려의 묘와 비슷할 것이다.
결국 평양의 묘제가 중국식이므로 평양이 낙랑군이라는 주장에는 근거가 전혀 없다. 그들의 논리에 따르면 아무 지역이나 지정하고 낙랑군이라 주장하면 된다. 어떤 지역이나 묘제에 약간의 특성은 있기 때문이며, 고구려는 압록강 주변의 산간 소국이라 거짓말 하면 평양의 묘제는 고구려의 묘제가 아니라 우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종선은 서북한 지역의 목곽묘는 묘제와 반출유물로 보아 섬서성 북부 오르도스 지역과 유사하므로 칠기나 도장 등 불충분한 증거로 낙랑유적으로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한다. 흉노계 분묘를 종합한 연구에 의하면 흉노 분묘의 유형이 강단 유사사학이 주장하는 낙랑고토에 모두 나타난다. 내몽골과 요서가 우리 민족의 중심 국가인 진국(辰國) 지역이었으므로 이들의 문화와 평양의 문화가 유사함은 당연한 현상이다.
③ 낙랑명 기와 등과 북한 발굴 무덤
사이비들은 ‘낙랑예관’ ‘낙랑부귀’가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었으므로 평양이 낙랑군이라 한다. 『삼국사』에는 낙랑왕 최리가 나타난다. 즉 낙랑국이란 나라가 있었으므로 ‘낙랑’이라 새겨진 기와가 반드시 漢 ‘낙랑군’의 유물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무서운 아이들’이란 찬사를 받는 사이비들은 북한은 낙랑군의 고분이라 한 바가 없는데도, “일제 시기에 발굴한 낙랑 지역 고분의 수는 70여기에 불과한 반면, 해방 이후 북한에서 발굴한 낙랑 고분의 수는 1900년대 중반까지 무려 3000기에 달한다.”고 하면서 이렇게 많은 낙랑군 무덤이 평양이 낙랑군임을 증명한다고 뻔한 거짓말을 한다. 그들은 학문이 아니라 거짓말 경연을 하고 있다. 대중에게는 거짓말쟁이가 되어도 사이비 괴수들에게 잘 보여야 유리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한편 천추만세(千秋萬歲)라 쓰여진 기와가 나왔고, 영수강녕(永壽康寧)이라는 길상어(吉祥語)가 새겨진 옥도장이 나왔는데, 만세나 영수강녕은 태수에게는 부적당한 표현이라는 점에서, 이들 유물은 평양이 낙랑군이 아님을 증명한다.
④ 봉니, 점제현신사비, 현별 호구부
이들은 이동이 가능한 것들이다. 이동이 가능한 유물로 지명을 비정할 수 없다는 것은 사이비들의 비조인 이병도가 이미 말한 바 있다. 따라서 더 이상 논할 필요도 없으나 사이비들이 억지를 쓸 것이므로 하나하나 더 따져본다.
봉니의 경우, 그들의 소설상 가장 변방인 평양에서 200여개의 봉니가 발견된 것부터 이상하다. 상태가 지나치게 양호하여 漢나라 때 만들어진 것인지도 의문이다. 상급 기관인 중앙 정부나 유주로부터 받은 봉니는 없으며, 속현의 봉니만 발견되는 것도 괴이하다. 수신지에서는 봉니를 파괴해야 하는데 파괴되지 않은 봉니가 발견되는 것도 괴이하다. 사이비들은 문서의 보관을 위해서 사용된 봉니라고 억지를 쓰는데, 그렇다면 봉니들은 각 18개 현에서 따로 발견되어야 할 것이다.
정인보에 의하면 더 괴이한 점이 있다. 관직명이 당시의 관직명과 일치하지 않는다. 즉 신나라 때는 태수를 대윤이라 하고 낙랑도 낙선이라 고쳤으므로 낙랑대윤이라는 관직은 불가능한데 낙랑대윤이 새겨진 봉니가 8개나 나왔으며, 장잠현은 작은 현이므로 현장이어야 하는데 봉니는 현령이다. 『漢書』 「예문지(藝文志)」에 동이령(東暆令) 연년(延年)이라는 사람이 부(賦) 칠편을 지었다고 한다. 즉 동이(東暆)현은 령(令)을 붙여야 하는데, 봉니는 장(長)이다. 이 외에도 무수히 많은 조작의 증거가 있다.
점제현신사비는 발견 경위에 여러 의문점이 있으며, 북한의 연구에 의하면 비석의 기초에 시멘트가 사용되었고, 돌 생성연대나 성분이 주위의 돌과 다르다고 하며, 비에는 각석한다고 쓰여 있는데, 문성재에 의하면, 각석이란 단어는 자연적인 바위나 절벽에 글자를 새기는 것을 뜻하지 비석에 글자를 쓰는 것을 말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1993년 정백동 고분에서 출토된 ‘낙랑군 호구부’는 사이비들이 유력한 증거로 제시하나, 문성재는, 출토된 유물에 귀족이나 누릴 수 있는 위세품과 농민들이 사용하는 농기구가 섞여 있어 신빙성이 의심된다는 점, 보안 문서인 호구부가 개인의 무덤에 부장되었다는 것이 이상하다는 점, 결정적으로 현별의 ‘별’이라는 말은 19-20세기에 일본에서만 쓰던 ‘일본식’ 한자라는 점 등을 이유로 현별 호구부는 위조된 자료일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고구려 백제 신라와 낙랑군의 위치 모순
강단 유사사학의 위치 비정에 의하면 백제는 경기도, 신라는 경상도, 낙랑군은 평안도, 낙랑군 동부도위는 함경도, 대방군은 황해도이다. 이러한 위치 비정은 『삼국사』와 『삼국지』의 기사와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삼국사』에 의하면, 온조왕은 백제 동쪽에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다고 말하며, 신라는 BCE 28년, CE 4년, CE 14년, CE 36년 네 차례나 낙랑군의 공격을 받는다. 『삼국지』에 의하면 공손강은 군대를 일으켜 倭와 韓을 공격하여 帶方에 복속시켰고, 조위는 공손씨를 멸하고, 246년 공손씨에게 복속되어 있었던 辰韓 팔국을 낙랑군에 귀속시키려 하였는데 이들이 거부하자, 진한 팔국을 멸하였다.
백제 동쪽에 낙랑이 없으므로, 강단 유사사학은 춘천에 맥국이 있었고, 이들이 낙랑을 참칭했다고 하며, 백제 북쪽의 말갈에 대해선 동예설, 고구려 내 말갈설, 영서예설, 마한의 소국인 신분고국설 등을 별다른 근거 없이 주장한다. 황해도의 대방군과 다채로운 그들의 말갈과는 어떻게 관련되는지도 알 수 없다. 낙랑군이 평안도, 낙랑 동부도위가 함경도이면, 낙랑과 경주 사이를 낙랑군이 점령하지 않는 한 경주에 있는 신라가 낙랑군의 공격을 받을 이유가 없다. 강단 유사사학은 낙랑의 신라 침략 기사에 대해 날조기사설, 상인집단설, 북진한설, 시기 혼동설, 낙랑 참칭 옥저설, 최리 낙랑국설, 편찬자 실수설 등을 주장하나 모두 근거는 전혀 없다. 무려 4차례의 침략이 기록되어 있어 신라를 침략한 세력은 낙랑군이나 낙랑군 동부도위가 아닌 다른 세력이라 볼 수는 없다. 진한이 경상도라면 조위는 경상도를 정복하여 영토로 만들었어야 한다.
이러한 위치 비정의 모순은 보정시를 낙랑군으로 보고 韓을 황하 동쪽 제수 북쪽으로 보면 모두 해결된다. 이 경우 韓 지역은 낙랑군 동남쪽이고, 낙랑 동부도위는 낙랑군 동쪽 즉 韓 지역 북동쪽이 된다. 백제 동쪽은 낙랑 동부도위이며, 신라를 공격하는 낙랑도 낙랑 동부도위이다. 백제 북쪽의 말갈은 요동고새와 패수 사이에 있는 우북평과 어양의, 오환인들이다. 유철은 흉노의 지배 하에 있던 오환인들을 상하장(요동고새와 요동외요 사이의 지역으로 보정시 북쪽부터 북경까지이다)으로 이주시켜 흉노에 대비하였는데, 이들은 흉노에 지배당하게 된 북부여인들로서 이인자란 뜻의 말갈(마한)을 국호로 사용하였다. 황하 하류의 수류 변동은 CE 11년 경에 있었다. 황하가 동쪽으로 이동하자, 백제에서 분리된 지역이 발생하였다. 이 지역은 낙랑군에 붙은 땅이 되어 물이 어느 정도 마르자, 공손씨가 대방군으로 편입하였고, 조위는 진한을 자처한 이들을 멸하여 영토로 만들었다. 이 지역은 황하 하구로서 어업집단인 왜(예)도 살았기 때문에 공손씨가 왜도 복속시켰다. 보정시를 낙랑군으로 보고 韓을 황하 동쪽 제수 북쪽으로 보면, 강단 유사사학처럼 가지가지 근거가 전혀 없는 소설을 쓰지 않아도 『삼국사』 『삼국지』 『후한서』 등의 신뢰성 있는 사료가 개연성 있게 설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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