Ⅵ. 열국시대
1. 북부여의 건국과 열국시대의 시작
BCE 3세기 말 북부여의 건국으로 열국시대 시작
윤내현은 위만이 前漢에서의 체험을 토대로 중앙집권화된 영역국가를 성립시켰고, 위만이 고조선의 서부를 잠식하는 과정에서 철기가 일반화되고 고조선의 거수국들이 읍제국가에서 영역국가로 이행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예맥조선(소위 위만조선)이 漢에 의해 침략당해 망한 BCE 108년을 열국시대의 시작으로 본다. 그러나 한 개인의 체험이 국가형태를 결정한다는 것은 일어나기 어려운 일이며, 예맥조선과 같은 시기에, 북부여와 지금 평양의 낙랑국이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함이 확인된다. 또한 漢에 망한 예맥조선은 당시 우리 민족의 거주지 전체로 보면 서쪽 변방에 위치한 국가에 불과하였다. 따라서 위만의 예맥조선 멸망을 열국시대의 시작으로 보는 주장의 타당성을 인정하기는 어렵다.
고구려(고리국)는 나중에 현도군 고구려현이 설치되는 북경 북쪽으로 진번조선의 영역이었다. 진번조선이 망하면서 대부여로 이주하였던 고구려인들이 대부여가 약화되자 부여의 왕권을 탈취하였다. 이들은 국호를 바꾸지 않았지만 후세인들이 탈취당한 부여를 대부여, 고구려인들의 부여를 북부여라 칭한 것으로 추측된다. 대부여는 조선인들의 중심국으로 인정받았지만, 북부여는 열국의 하나로 취급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국호가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상징적으로나마 중심국 역할을 하였던 대부여가 망한 후를 열국시대의 시작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북부여가 위만과 대립했다는 것은 예맥조선이 북부여의 통제에 있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최씨 낙랑국은 말조선의 서울 왕검성에 BCE 195년 건국했다. 이는 최씨집단이 말조선의 수도 지역을 점령하여 낙랑국을 건국한 것을 의미하는데 북부여가 이러한 변란에 어떤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했다는 것은 북부여가 중심국이 아니었음을 알려준다. 무역망의 파괴로 대부여의 중심국 지위는 이미 허울뿐이었으므로, 대부여를 멸하고 건국한 북부여가 중심국 지위를 갖출 수는 없었다.
고구려계와 부여계의 연합
고구려계는 부여의 왕권을 차지하면서 기존 부여계를 완전히 몰아내지는 않았다. 이규보의 「동명왕편」에 의하면, 해모수로 표현되는 고구려계는 하백으로 표현되는 부여계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후, 부여계를 왕비족으로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해모수(동명)와 하백 모두 부여계의 설화이지만, 고구려계는 지배자인 해모수를 차지하고, 부여계를 하백으로 격하시켰다.
고구려 건국설화에서 해모수가 유화부인을 떠나 돌아오지 않거나 하늘로 가는 것은 당시 북부여 왕이 고두막(고두막도 해모수라 자칭한다)에 의해 살해당하기 때문이다. 북부여는 고두막에 의해 동쪽으로 쫓겨나 동부여가 된다.
『동국이상국집』 「동명왕편」에 인용된 『구삼국사』에 의하면 유화부인은 추모에게 오곡의 종자를 전해준다. 이는 부여계가 번조선의 농업세력임을 입증한다. 『삼국사』가 인용한 『북사(北史)』에 의하면 고구려는 고등신인 추모와 부여신인 유화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고등신은 고구려계이고 부여신은 부여계이다.
북부여와 고구려의 관계
고구려를 건국한 추모는 북부여의 왕족이다. 동부여는 북부여가 쫓겨나서 세운 나라이기 때문이다. 광개토대왕릉비의 ‘17세손’은 북부여를 건국한 해모수부터 세수를 계산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가언충은 668년 이치(당고종)에게 “高麗의 秘記에 ‘9백년이 못되어 80의 대장에게 멸망한다’고 하였는데, 高氏가 漢나라 때부터 나라가 있은 지 올해 9백년이 되고, 이적의 나이가 또 80입니다”라고 말하는데, 이는 고구려(북부여)가 BCE 232년에 건국했음을 의미한다. 당시 당은 이세민을 죽게 만든 고구려를 정복하는 것이 나라의 가장 중대한 사업이었고, 고구려의 비기까지 수집할 정도로 고구려를 연구하였으므로, 가언충이 고구려의 건국 연대를 잘못 알았을 가능성은 없다. 漢이 중간에 新이 있어 분리되는 것처럼, 고구려(북부여)는 중간에 고두막국과 금와국(동부여)으로 분리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옛날에 東明이 氣를 느끼고 㴲川(사천)을 넘어 나라를 열었고, 朱蒙은 해를 품고 浿水에 臨해 수도를 열었다”고 하는 연남생 묘비명에 의해서도 이러한 사실이 입증된다.
고구려는 중국의 동북 모퉁이 즉 북경 부근에 있었다
김부식은 가언충이 말한 900년을 잘못이라고 하는데, 이는 그가 북부여와 고구려가 같은 왕계로 이어짐을 몰랐기 때문이다. 김부식은 『삼국사』 「고구려본기」 끝 부분 사론에서 “髙句麗自秦漢之後, 介在中國東北隅(고구려는 秦漢 이후부터 중국의 동북 모퉁이에 끼어 있다)”라고 한다. 김부식의 언급은 900년이 잘못이라는 연표의 언급과 모순되는데, 고구려가 秦과 漢 이후부터 중국의 동북쪽에 있었다고 하면 900년이 맞기 때문이다. 그의 생각과 다른 언급이 나타난 이유는 그가 다른 사료로부터 이 문장을 인용하였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김부식이 『삼국사』를 편찬하는 당시에 고구려의 역사를 900년으로 기록한 사서가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추모의 건국 연도가 BCE 37년임은 『삼국사』에 의해 확실하므로, 고구려의 역사가 900년이라는 사실은 북부여가 BCE 232년에 건국되었음을 의미한다. 광개토대왕릉비문, 연남생묘비명, 가언충의 언급, 김부식이 인용한 것으로 추측되는 사료 등에 의해서 북부여의 BCE 232년 건국이 입증되며, BCE 232년 북부여 건국의 전후상황을 기술하는 『북부여기』와 『단군세기』의 정확성도 입증된다.
강단 유사사학은 부여가 BCE 3세기부터 494년까지 존재했다고 한다. BCE 3세기 후반에 있었던 부여는 북부여이고, 금와가 찬탈한 부여는 동부여이고, 494년에 망하는 부여는 왜(예)부여이다. 강단 유사사학은 초탈문헌주의에 근거하여 대부여, 북부여, 동부여, 왜부여의 구별을 무시하고 모든 부여는 하나라는 소설을 창작하면서 비학문성을 과시한다.
[BCE 2세기 열국의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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