Ⅴ. 대부여 (BCE 425∼BCE 232)
1. 대부여의 건국
대부여의 실재
기존의 견해는 대부여의 존재를 부정하지만, 조선 이후 대부여가 있었다. 북부여 동부여 졸본부여 왜부여 남부여 등 열국이 국호를 부여라 하였고, 백제는 왕의 성까지 부여라 하였다. 즉 대부여가 중심국이었던 시기가 있었으므로 열국이 부여로부터의 정통성 승계를 주장하여 국호를 부여라 하였다. 조선과 예맥조선(위만조선)이 대부여로 분리되므로 일연은 조선을 고조선이라 하였다.
제환공(BCE 685 ~ BCE 643)은 제장성 북부의 번조선과 싸웠지만 번조선을 정복하지는 못했고 말조선의 모피를 번조선을 통해 수입하였다. 제장성 북부에서는 번조선의 원절식 칼돈(소위 제도)이 발견되고 방절식이 등장하지 않는다. 따라서 제나라는 경공(BCE 547 ~ BCE 490) 시 번조선을 정복하였다고 추정된다. 중국의 사서는 제장성 북쪽의 번조선을 모르고, 제장성 북쪽을 제나라 영역이라 하여서, 경공의 번조선 정복을 기록할 수 없었다. 제가 번조선을 정복하자, 번조선 농경민들 일부가 신조선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이들이 신조선을 정복하고 대부여를 건국하였다.
중국 동부 농경민들은 난생설화를 만들었다. 은나라 시조인 설은 간적(簡狄)이 현조(玄鳥)의 알을 삼키고 낳은 사람이다. 주목왕 시 주나라와 병립한 서국의 서언왕도 궁녀가 낳은 알에서 태어났다. 또한 이들은 홍수가 무서워 하백(河伯)의 신부라 하여 처녀를 강에 빠트리는 풍습이 있었다. 중국 동부 동이족 농경민들이 만든 난생설화와 하백설화는 번조선 농경민의 대부여 건국으로 신조선 지역으로 전래되었다.
『爾雅(이아)』 「釋地(석지)」편에서 사해(四海)의 하나로 구이(九夷)를 언급하고 있는데, 곽박(郭璞)은 그 주석에서 구이는 동쪽에 있다고 하고, 鳧臾(부유)가 東方의 나라 이름이라 하였다. 이로부터 鳧臾(부유)가 구이의 일원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부유가 북쪽으로 이주하여 (대)부여를 건국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대부여는 BCE 425년 신조선 영역에 건국한다. 『단군세기』는 대부여 건국을 백민성 욕살이었던 구물의 집권과 국호의 변경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가 단군의 수명을 1908세라 하므로 신조선이 망하고 새로운 왕조가 들어섰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단군세기』가 정통성의 단절을 회피하기 위해 대부여를 진조선과 연결시켜 기술하는 부분은 사실과 다르지만, 다른 사서에 기술되지 않은 대부여를 기술하고 있고, 그것이 대부여의 건국설화에 의해 입증된다는 점에서 『단군세기』의 모든 내용을 위서로 볼 수는 없다.
대부여의 건국설화
대부여의 건국과 관련된 설화는 다음과 같다.
(ㄱ) 『응제시주』
단군이 비서갑 하백의 딸을 취하여 부루를 낳았는데 이가 동부여왕이 되었다.
(ㄴ) 『세종실록』 「지리지」에 인용된 『단군고기』
단군이 비서갑(非西岬) 하백(河伯)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으니, 부루(夫婁)이다. 이를 동부여(東扶餘) 왕(王)이라고 이른다.
(ㄷ) 『논형』 「길험」
북이(北夷) 자리국(橐離國) 왕의 시녀가 임신을 하니, 왕이 그녀를 죽이려 하였다. 시녀가 대답하기를, “계란만한 크기의 기운이 하늘에서 저에게 내려와 이로 인해 임신하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후에 아들을 낳았다. 왕이 돼지우리에 버렸으나 돼지들이 입김을 불어넣어 주어 죽지 않았다. 다시 마구간으로 옮겨 말이 밟아죽이게 하려 했으나, 말들도 입김을 불어넣어 주어 죽지 않았다. 왕이 이를 이상히 여겨 하늘의 아들이라 생각하고, 그 어머니에게 거두어 기르게 하였다. 이름을 '동명(東明)'이라 하고 소와 말을 기르게 하였다. 동명이 활을 아주 잘 쏘자 왕은 나라를 빼앗길까 두려워하여 그를 죽이려 하였다. 동명이 달아나 남쪽으로 엄호수에 이르러 활로 물을 치자, 물고기와 자라들이 떠올라 다리가 되어 동명이 건널 수 있었다. 물고기와 자라들이 흩어져 버려 추격병들은 건널 수 없었다. 그리하여 북이에 '부여국(夫餘國)'이 있게 되었다.
『응제시주』와 『세종실록』의 설화는 하백이 등장하고 단군과 하백 딸 사이에 태어난 부루가 동부여의 왕이 된다고 한다. 즉 대부여는 나오지 않는다. 신조선인들은 외부세력인 번조선인들이 신조선을 정복한 것을 숨기려 하였다. 그들은 신조선 즉 단군세력이 정복당한 것을 숨기려고 번조선인들을 하백의 딸 즉 부수적인 위치로 만들었으며, 대부여-북부여-동부여-고구려로 이어지는 역사에서 대부여와 북부여를 생략하고 고구려로 이어지기 위해 꼭 설명이 필요한 동부여와 바로 연결시켰다. 부루가 국호를 부여가 아닌 동부여로 하였다는 것은 이 설화들이 사실을 숨기고 있음을 드러낸다. 건국설화의 주인공이 만드는 나라의 국호는 동쪽의 부여라는 의미의 동부여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동부여는 고두막이 북부여를 정복하자, 잔존 북부여 세력이 동쪽으로 도망가서 만든 나라이다. 조선에서 부여로 국호가 바뀌었다면 부여 건국 세력이 주도하는 설화가 있어야 한다.
대부여의 건국은 『논형』의 부여 건국설화로 알 수 있다. 그러나 동명이 달아나는 부분부터는 고구려 건국설화가 덧붙여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고구려가 북부여를 계승하였고, 고구려 초기 홀본부여라 칭하여졌으므로 고구려 건국설화와 부여 건국설화 사이에 혼동이 생겼을 것이다. 배송지가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주로 인용한 『위략』과, 『후한서』에 기록된 부여의 건국설화는 동명이 시엄수나 엄사수를 건너 부여에 이르러 왕이 되었다고 한다. 이는 추모가 동부여에 쫓겨서 漢의 부용세력으로서 漢 영토 내에서 건국한 것과 유사하다. 반면에 『논형』의 동명은 엄호수를 건넜지만, 자신이 태어났던 북이에 부여를 세웠다. 따라서 동명이 남쪽으로 도망가서 강을 건너는 부분은 부여의 원래 건국설화에는 없던 이야기로 봄이 타당하다. 북상한 번조선 세력은 부여라는 새로운 나라를 건국하였다. 번조선 세력은 무력으로 신조선 지역을 점령하고 나라를 세웠다. 따라서 부여를 세운 동명은 도망갈 필요가 없었다.
대부여의 건국자인 東明(해모수)은 계란 같은 하늘의 기운에 의해 잉태된다. 따라서 東明(해모수)은 햇빛이나 해를 의미한다. 중국 동부의 농경세력은 햇빛이 농사의 근본임을 알았을 것이다. 민도가 높아짐에 따라 하늘에서 지배자가 내려올 수 없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지배자는 햇빛의 기운을 받아 태어난 사람이나 해를 상징하는 알에서 태어난 사람으로 구체화되었다. 따라서 부여 건국설화는 번조선 농경세력이었던 부유(鳧臾)국의 북상을 증명하고 있다.
대부여의 지배층이 스스로를 망명해 온 사람이라 말했다는 것도 대부여가 제나라에 쫓긴 번조선 사람들이 진조선 지역에 세운 나라라는 본고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비류백제가 국호를 부여라고 하였고, 백제도 나중에 남부여라 하였는데, 산동성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부유(鳧臾)가 백제와 비류백제의 영역에서 가까웠기 때문이라 추정된다.
2. 무역의 붕괴로 인한 대부여의 변화
대부여 건국 전 동부무역로의 상실
연명도는 원절식에서 방절식으로 변화한다. 제명도는 원절식 단계에서 중지되고 연명도도 번조선 영역에선 원절식만 출토되는데, 이는 제나라가 제수 남쪽의 산동반도를 대부분 점령한 결과이다. 삼조선 시 산동반도의 상실로 말조선 북부-요동반도-산동반도-중국 동부로 이어지는 동부무역로가 폐쇄되었다.
대부여 시 서부무역로와 황하무역로의 상실
요동고새부터 북경까지와 韓을 점유하고 있던 진번조선은 진개의 침략으로 요동고새에서 북경까지의 영역을 잃고 ‘흉노’에 의해 멸망된다. BCE 300년 경, 무역의 중추적 역할을 하던 진번조선의 멸망으로, 말조선 북부-적봉-승덕-북경-역현-상곡-대-태원-중국 서부로 이어지는 대부여의 서부무역로와 황화무역로도 폐쇄된다. 부족한 농업생산성을 무역으로 보완하였던 대부여와, 말조선 북부 지역은 큰 타격을 받았을 것이다. 대부여의 제후국이었던 소위 ‘흉노’도 이 때 독립하여 유목집단화한 것으로 보인다. 그 전에는 산서성에서 중국 서부까지의 구간은 ‘흉노’에 일부 권한이 있었는데 무역로가 없어져 이들도 상업으로부터의 수익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대부여의 멸망
진개 침략이 대부여의 영토를 탈취하였다기보다는 무역망을 파괴시켰다는 점에서 대부여에 큰 타격을 주었다. 무역로의 중심에 있어 중심국 역할을 할 수 있었지만, 무역이 사라지자 중심국 지위도 없어지고 국력도 쇠퇴하여, 열국이 자립하였고, 내부의 반란으로 대부여는 멸망하였다. 대부여 붕괴 후 열국시대가 시작된다.
무역로의 상실로 인한 경제력의 후퇴는 이 시기에 발행된 화폐인 명화전, 명사전, 일화전에 의하여 입증된다. 이들 화폐는 주조와 유통기간이 매우 짧고 출토량과 유적수도 적은 편으로, 연산 이북의 대부여와 말조선 강역에서 다른 화폐와 함께 소량 출토된다. 칼돈을 계승한 화폐이므로 진개 침입 후인 BCE 3세기에 주조된 것으로 추측된다. 아래 그림에서 알 수 있듯이 칼돈과 비교하여 유통범위가 크게 줄었다. 즉 이들 화폐는 하북성 중부, 산서성 중부, 산동성에선 유통되지 않는다. 이는 중국과의 무역거래가 단절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박선미는 연의 위치에 대한 오해로 이들 화폐도 연의 화폐로 보는데, 일화전 거푸집이 발견된 장소가 내몽고자치구 동남부의 객라심기 대서구문촌이므로 대부여나 북부여가 주조한 화폐이다. 북한 학계도 조선의 화폐로 본다.
중제 유사사학은 연나라의 화폐라고 주장하기 위해 연 희왕이 BCE 226년 진나라에 쫓겨 계를 떠나 요동으로 이동했을 때부터 망할 때인 BCE 222년 사이에 일화전을 발행했다는 해괴망측한 주장을 한다. 중제·강단 유사사학은 자기 아들 목을 잘라서 영정에게 바치면서 목숨을 구걸하려 했던 희왕이 그 틈에도 화폐를 발행했고, 겨우 4년 동안 발행한 화폐가 타국의 영역에서 광범위하게 발견될 정도로 유통되었다고 주장한다. 개연성이 없는 주장을 강변하는 것은 연나라 영역을 사기치기 위함이다. 이러한 사기는 중제·강단 유사사학 일부가 중국 동부 번조선을 지우기 위해 제명도가 연소왕이 제를 정복한 지역에 5년 동안 유통시킨 화폐라고 주장하는 사기와 자웅을 겨룬다.
[명화전, 명사전, 일화전의 분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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