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한국학 기초 낭독 12

역사회복 2026. 4. 12. 06:37

https://youtu.be/mQt5S2WOGBE

 

 

5. 삼조선의 변화

 

(1) 번조선 남부

 

기자는 조선으로 갔는데, 그의 무덤이 하남성 상구에 있으므로, 그가 간 조선은 번조선이다. 상이 주에 망하였을 때, 번조선(藍국)은 하남성 산동성을 포함하여 중국 동부 즉 과거 삼한조선의 번한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周가 商을 멸한 후, 여상(강태공)을 齊 영구(營丘)에 봉하였는데, 成王 시 번조선인들이 관숙과 채숙의 반란에 가담하자 주공이 영고씨(淮)와 박고씨(奄)를 진압하면서, 제나라 주변의 번조선은 제나라가 정벌하도록 하여 제나라가 번조선의 중심부를 차지하게 되었고, 번조선이 남과 북으로 갈라졌다. 번조선 남부에 대해 기술하고 있는 사료들은 다음과 같다.

 

(ㄱ) 『후한서』 「동이열전」

그 후에 서이(徐夷)가 참람되어 王號를 칭하며 九夷를 거느리고 宗周를 쳐서 서쪽으로 黃河의 上流에까지 이르렀다. 목왕(穆王)은 그 세력이 한창 떨침을 두려워하여 동방 諸侯를 분리시켜 서언왕(徐偃王)에게 命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偃王은 潢池 동쪽에 살았는데 國土가 500리였으며, 仁義를 행하니 땅을 바치며 朝會하는 나라가 36國이나 되었다. 穆王이 後에 적기·녹이(赤驥·騄耳) 등의 말을 얻어서 조보(造父)로 하여금 그 말을 몰고 楚나라에 알려서 徐國을 치게 하니, [造父는] 하룻만에 [楚나라에] 도착하였다. 이에 楚文王이 大兵을 일으켜 徐國을 멸망시켰다. 偃王이 어질기만 하고 權道가 없어서 차마 그 백성을 데리고 싸우지 못하였으므로 敗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리하여 북으로 팽성(彭城) 武原縣 東山 아래로 달아났는데, 따라간 백성이 萬名이나 되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그 산의 이름을 徐山이라고 하였다.

려왕(厲王)이 無道하자, 회이(淮夷)가 쳐들어 왔다. 王이 괵중(虢仲)에게 命하여 征伐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는데, 선왕(宣王)이 다시 소공(召公)에게 정벌하도록 명하여 그들을 평정하였다. 유왕(幽王) 代에 이르러 [王室이] 음란해지자 四夷가 번갈아 침범하여 왔는데, 제환공(齊桓公)이 패업(霸業)을 닦고서 물리쳤다. 초영왕(楚靈王)이 신(申)에서 會盟할 적에는 그들도 회맹에 참여하였다. 그 뒤 월(越)이 낭야(琅邪)로 옮기고 나서 그들과 함께 전쟁을 일으켜, 마침내 中國의 여러 나라들을 능멸하고 작은 나라들을 侵略하여 멸망시켰다. 秦나라가 六國을 합병한 후 淮水와 사수(泗水) 지방의 夷를 모두 분산시켜 秦의 백성으로 만들었다.

(ㄴ) 『한비자』 「오두편」

옛날 문왕이 풍호지간에 있으면서 나라가 100리였는데 인의로 서융을 품어 마침내 왕이 되었다. 서언왕은 한수 동쪽에 있으면서 나라가 500리였는데 인의를 행하니, 땅을 바치며 조회하는 나라가 36국이었다. 초나라 문왕은 서나라가 해칠까 두려워 군사를 일으켜 서나라를 공격하여 멸했다.

(ㄷ) 『사기』 「진본기」

서언왕이 난을 일으키자 조보가 목왕의 마부였는데 쉬지 않고 달려 주로 돌아왔다. 하루에 천 리를 달려서 난을 구했다

(ㄹ) 『사기정의』가 인용하는 『괄지지』

『괄지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후지』에 이르기를, “옹주 위에 서언왕성이 있다. 전하여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옛날 주목왕이 순수할 때, 제후들이 서언왕을 받든다는 것을 듣고 조보를 마부로 하여 좋은 말을 타고 하루에 천리를 달려 돌아와서 서언왕을 토벌하였다. 혹자는 초왕에 군사를 거느리고 토벌하라 명령하니 언왕이 이 곳에 의지하여 즉시 지켰으나 죽었다라고 한다”

 

『후한서』 「동이열전」, 『사기』 「진본기」, 『하후지』와 『괄지지』를 인용한 『사기정의』는 서언왕과 주목왕을 직접 연결시키고 있다. 초문왕에 의해 서국이 망하는 시기의 왕은 서언왕의 후손이고 서언왕이 아니다. 주목왕이 동방 제후를 서언왕이 다스리도록 하였다는 『후한서』 「동이열전」의 기술은 서언왕의 서국이 주나라와 병립하였음을 의미한다. 서국이 망할 때, 서국의 왕은 과도한 덕치주의자여서 초문왕에 의해 공격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위에 인용된 사서들 이외에도 『회남자』 『설원』 『박물지』 『순자』 등이 서언왕을 기록하고 있다. 『박물지』가 서언왕이 알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서언왕이 번조선인인 것을 증명하고 있다. 서국 등 번조선 남부 세력은 주목왕 시기 주나라 만큼 강했고, 서국이 망한 후에도 번조선 남부국들은 초영왕의 회맹에 참여하고 월과 함께 중국 남부에서 강력한 세력으로 존재하였으나, 영정(진시황) 시기에 사민 정책으로 약화되었다.

 

(2) 번조선 북부와 제의 경계

 

제장성 북쪽은 북부 번조선이다

춘추시대 제가 차지한 영역은 제장성 남부이다. 즉 북부 번조선은 제장성 북쪽을 유지하였다.

 

[산동성 박물관의 제장성 지도]

 

 

강단·중제 유사사학은 제장성의 북쪽이 제나라라고 날조하면서 번조선을 지우려 한다. 제장성은 춘추시대 때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제가 처음부터 제장성 남쪽의 황금 같은 회대지간을 포기하였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제가 장성 북부를 차지했다면 춘추오패가 될 수 없다. 당시 해수면이 높아 제장성 북부는 현재의 지도보다 훨씬 작으며 소금기 있는 땅으로 농업생산성이 낮았기 때문이다. 산동성에 번조선이 있어 장성을 쌓았다고 보아야 한다. 이는 『사기』 「사마상여열전」에 실린 자허부와 영정과 유철(한무제)의 순행 기사로 알 수 있다. 「자허부」는 춘추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문학작품이지만, 영정의 순행 기사와 대조하면 춘추시대를 사실적으로 기술한 것으로 확인된다.

 

(ㄱ) 「자허부」의 관련 내용

또 제 동쪽에는 큰 바다가 있고, 남쪽에는 낭야산이 있습니다. 성산(成山)에서 유람하고 지부(之罘)에서 활을 쏘며, 발해(勃澥)에 배를 띄우고 맹저(孟諸)에서 놀 수 있습니다. 동북으로 비스듬히 숙신과 이웃하고 있으며, 서쪽은 탕곡(陽谷)을 경계로 합니다. 가을에는 청구에서 사냥하고 호수(발해=대야택) 밖에서 돌아다닙니다. 운몽과 같은 사냥터는 여덟 개나 아홉 개쯤 삼켜도 그것이 속에서 겨자씨만큼도 늘어나지 않습니다. ----- 지금 제나라는 동쪽의 번국임에도 밖으로 숙신과 사사로이 왕래하여 나라를 떠나 국경을 건너고 호수를 넘어 사냥함은 의로운 도리가 아닙니다.

(ㄴ) 영정(진시황)의 순행

여기에 있다가 이윽고 발해(勃海)를 따라 동으로 황현(黃縣)과 수현(腄縣)을 지나 성산(成山) 끝까지 간 다음 지부산(之罘山)에 올랐다. 비석을 새워 진의 덕을 칭송한 다음 떠났다. 남으로 낭야산(琅邪山)에 올라 (그 경치를) 크게 좋아하여 석 달을 머물렀다. 이에 백성 3만호를 낭야대 아래로 이주시키고, 12년간 세금을 면제해 주었다. 낭야대를 만들고 비석을 세워 진나라의 덕과 강성함과 이득과 아름다움을 칭송하였다.

(ㄷ) 유철(한무제)의 순행

그 이듬해 겨울, 상이 남쪽 고을을 순시하였다. 강릉(江陵)에 이른 다음 동쪽으로 갔다. 잠현(潛縣)의 천주산(天柱山)에 올라 제사 지내고, 그 산을 남악(南嶽)이라 하였다. 장강에 배를 띄워 심양(尋陽)에서 종양(樅陽)으로 갔다. 팽려(彭蠡)를 지나며 그 명산대천에 제사 지냈다. 북쪽으로 낭야(琅邪)에 이르러 대야택을 따라 북상하였다.

(ㄹ) 『사기』 「소진열전」

이어서 동쪽으로 제선왕을 설득하여 말하길 “제 남쪽에는 태산이, 동쪽에는 낭야가, 서쪽에는 청하가, 북쪽에는 발해가 있어 분리되니 소위 사면이 요새인 나라입니다. 제의 땅은 방이천리이고, 갑옷입은 병사가 수십만이고, 양곡은 산처럼 많습니다. 삼군의 정예병과 오가의 병사(관중이 창시한 일종의 예비군 제도)는 뾰족한 화살처럼 진격하고, 우레처럼 싸우며, (적들을) 풍우처럼 흩어버립니다. 군역을 부과해도 태산을 등지게 하거나 청하나 발해를 건너게 한 적이 없습니다. 이것은 임치 안에 칠만호가 있다는 것입니다. 신이 대략 헤아려도 호당 남자가 셋 이상이니 21만입니다. 먼곳의 현에서 징발하는 것을 기다리지 않아도 임치에 있는 병졸만으로도 이미 확실하게 21만명입니다.--”

(ㅁ) 『산해경』 「해내북경」

朝鮮在列陽 東海北山南 列陽屬燕 (조선은 열양 즉 동해=대야택의 북쪽 갈석산의 남쪽에 있다. 열양은 연에 속한다)

 

위 영정에 대한 인용문은 영정이 추역산에 진의 공덕비를 세우고, 태산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양보에서 산천에 제사를 지낸 후의 움직임이다. 양보는 태산 아래의 작은 산이다. 봉선 후 태산에서 발해(바다)와 나란히 갈 수는 없다. 여기서 발해는 고대의 큰 호수인 대야택(거야택)이다. 대야택이 한나로 초까지 발해나 동해로 불리었고 조위·진 시대엔 동해로 불리었으며 현재의 동평호와 남양호 등이 연결될 정도로 컸다. 『산해경신탐』의 논거 중 『한서』 「무제기」의 “유철 원광 3년 하수가 움직여 무너진 언덕 때문에 동남으로 흘러 발해로 흘러들었다”는 기사는 확실한 증거가 된다. 황하가 동남으로 흘러서 발해(바다)로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맹저는 늪이나 연못이다. 따라서 자허부의 발해도 호수이다. 바다에서 연못이나 늪을 찾아서 놀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자허부가 제나라의 영역을 사실적으로 나타냈음을 알 수 있다.

 

낭야대는 바닷가 외진 곳이 될 수 없다

영정은 남으로 낭야산에 가서 경치가 좋아 석 달을 머물렀다. 낭야대에 대해 『사기집해』는 월왕 구천이 낭야대관을 세웠다 하고, 『사기정의』도 『괄지지』와 『오월춘추』를 인용하여 월왕 구천이 도읍을 낭야로 옮기고 관대를 세워 동해를 바라보았다고 하며, 『사기색은』은 『산해경』을 인용하여 낭야대는 발해 사이에 있다고 한다. 여기서 발해와 동해는 모두 대야택을 의미한다. 제나라의 남부에 낭야산이 있어야 월이 강성해졌을 때 낭야와 그 주변을 차지하여 낭야를 수도로 정할 수 있다. 영정이 태산에서 봉선 후 동으로 갔다가 남으로 내려와 낭야산에 오는 경로는 제나라의 팔신 제사지이다. 팔신제는 제나라 영토의 확장과정에서 확립된 제의로 각 지역의 정치적 통합을 목적으로 하며 낭야 사시제가 마지막으로서 제나라 영토의 완성을 의미한다. 따라서 황현 수현 성산 지부산 모두 제나라 초기 영토의 지명이다. 만약 제장성 북쪽이 제의 영토라면 영정은 동쪽으로 갔다가 북쪽으로 가야 한다. 영정이 남쪽으로 갔다는 것은 제장성 남쪽이 제의 영토였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또 팔신 제사지의 두번째 제사지인 태산(양보)은 제장성 남쪽에 있음이 명백하다.

강단·중제 유사사학은 제장성의 북쪽이 제나라 영토이고, 낭야가 제장성의 동쪽 끝 바닷가, 지금의 청도라고 한다. 그들은 제나라 바로 앞의 가장 구석진 곳이 월왕 구천의 도읍지라 한다. 그들은 이 위치는 남쪽의 강국인 월이나 초가 북상하는 과정에서 제와 충돌할 수밖에 없는 위치라고 아무렇게나 소리친다. 낭야가 청도라면 대야택 사이에 있을 수도 없고, 지금의 발해 바다나, 과거의 발해 호수 사이에 있을 수도 없다.

 

낭야는 안휘성 저주시

영정이 간 낭야산은 안휘성 저주시(滁州市)의 낭야산이다. 청도 해안가는 3개월 있을 정도의 경치가 아니다. 안휘성의 낭야산은 구양수와 소동파도 시를 지을 정도로 그 풍광이 아름답다. 지금도 주변에 호수가 많다. 제나라 초기의 남쪽 끝이라는 말도 타당하다. 제가 제장성에서 낭야산 정도까지의 강역을 가져야 강국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안휘성의 낭야는 남방의 초나 월이 북방으로 오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위치에 있다. 따라서 월이 강성했을 때 수도로 하였다는 것도 충분히 수긍되는 장소이다. 낭야가 저주시임은 유철의 순행 경로에 의해 명명백백히 확인된다. 유철이 원봉 5년 즉 BCE 106년 남쪽 고을을 순행하였는데, 유철은 양자강을 건너 종양과 팽려로 갔다가, 다시 양자강 북쪽의 낭야로 와서 대야택을 따라 북상하였기 때문이다. 태산 양보 낭야 등 제나라의 팔신 제사지의 위치로 보아, 초기 제나라의 강역은 제장성 에서 양자강까지라 보아야 한다.

제장성의 남쪽이 제라면 당연히 북쪽은 번조선이다. 자허부에서 기술된 제가 조선과 이웃하고 있다라는 말은 사실이고 제가 조선과 무역을 하였다는 말도 사실이다. 결국 제나라가 번조선을 남북으로 나눈 후, 북부 번조선의 강역은 제장성 북쪽의 산동성과 황하 동쪽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산해경』에 의해 재확인된다. 발해 즉 대야택의 북쪽부터 갈석산 남쪽까지가 번조선이다. 『산해경』이 東海北山南이라고 간략히 표현하지만 東海는 대야택=발해이고, 산은 갈석산이다.

낭야를 청도로 보는 견해는 소진의 말을 근거로 제시하기도 하는데, 소진의 말도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 그들이 날조한 제의 위치는 소진의 말과 절대로 일치할 수 없다. 소진은 태산이 제의 남쪽이라 했는데 태산은 제장성의 서북쪽 끝부분에 있어 그들이 비정한 제나라 영역의 남쪽이 될 수가 없다. 그들이 말하는 가짜 낭야는 제장성의 동남쪽 끝이어서 그들이 비정한 제나라의 남쪽이라 할 수는 있어도 제나라의 동쪽이 될 수는 없다. 제의 중심부가 제장성 남쪽이어야 소진의 말은 이해될 수 있다. 태산은 낭야보다 남쪽의 산으로 초나라와의 경계 부근이라고 보아야 한다. 낭야가 동쪽이라는 말은 초나라가 월을 멸하고 차지한 중국 동해안 지방에 있는 초의 영토와의 경계에 낭야가 있다는 말로 보아야 한다. 강단 유사사학의 주장대로 제장성 남쪽이 초 땅이고 제가 제장성 북쪽이라면 초와 제는 상대가 될 수 없고 소진이 말한 제나라의 방이천리 영토가 있을 수 없으며 진이 아니라 초가 통일해야 타당하다. 제의 중심지역이 제장성 남쪽이어야 방이천리가 될 수 있고, 초와 대등한 국력을 가질 수 있다. 물론 소진이 말한 시기는 전국시대 말이므로 번조선이 밀려나 제수 이북을 제외하고 제장성 북쪽 산동성도 제의 영토로 되었을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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