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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 기초 낭독 13

역사회복 2026. 4. 12. 0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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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화폐가 증명하는 삼조선의 강역과 경제

 

칼돈은 삼조선의 화폐

강단·중제 유사사학은 날조된 연나라와 제나라의 영역에서 나오는 칼돈이 각각 연나라와 제나라의 화폐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강단 유사사학이 만든 도폐의 분포는 위에서 논증한 조선의 영역과 일치하므로 조선의 강역을 증명해주고 있다. 왕육봉이 분류한 을·병형 칼돈 분포는 신·말조선의 강역과, 갑형 칼돈의 분포는 삼조선의 강역과 일치한다.

포전은 농기구 모양을 본뜬 화폐로 춘추전국시대 중국의 화폐이다. 신조선과 말조선 지역에서도 출토되는데 조선인들이 중국과 교역하면서 보조적으로 사용한 화폐로 추측된다. 조선에서는 단독으로 출토되는 경우는 드물고 매납유적에서 출토되고 있어 교역의 주도적 역할을 하지 못한 것으로 보이며, 잘해야 대릉하 유역과 요동반도에서 미약한 유통력을 갖고 있었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도폐의 문양은 明이 아니라 아사달=朝鮮이다

도폐(소위 연명도 제명도 등)의 문양은 아사달 문양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아사달 문양이 朝鮮이므로 이 문양은 明이 아닌 朝鮮이다. 동그라미는 해이고, 해 밑의 선(도폐)과 그림(아사달 문양)은 지평선 바로 위의 구름이다. 땅 바로 위에 해가 있어 아침이다. 아사는 아침이다. 세모 표시(도폐)와 뾰족뾰족한 그림(아사달 문양)은 언덕, 작은 산이다. 달은 언덕이다. 즉 도폐의 문양과 아사달 문양은 갑골문 이전의 문자로 ‘아사달’을 적은 글씨이다. 도폐의 문양이 연나라나 제나라의 화폐가 아닌 조선의 화폐임을 명백히 표시하고 있다.

 

 

 

 

 

[도폐의 문양과 아사달 문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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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제 유사사학이 그린 삼조선 화폐 분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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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돈 분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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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제 유사사학이 그린 포전 분포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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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조선의 화폐는 도폐이다. 중국은 농업에 의존하는 비중이 커서 농기구 모양의 화폐를 만들었고, 조선은 농업보다는 수렵 목축과 상업의 비중이 커서 칼 모양의 화폐를 만들었다. 칼돈은 첨수도가 가장 이른 형태이고 침수도, ‘제명도’, ‘연명도’ 등의 유형이 있으나 모두 조선의 화폐이다. 신조선과 말조선은 공통의 화폐를 사용하여 더 밀접한 관계에 있었고, 번조선은 제명도라는 독자적 화폐와 연명도를 공통으로 사용하여, 신·말조선과의 연계는 있었지만, 독자성도 있었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첨수도와 연명도는 흉노가 신조선인(辰朝鮮人)이었음을 입증한다

첨수도의 분포와 소위 연명도의 분포로부터, 신조선의 서남쪽 강역이 첨수도 사용 시기엔 산서성 중부보다 더 남쪽까지였고, 연명도 사용 시기엔 산서성 중부 태원 정도까지였음도 알 수 있다. 이는 사마천의 융적(흉노)에 관한 다음 기술로도 입증된다.

 

그런데 주양왕의 계모 혜후(惠后)에게 아들 자대가 있었다. 혜후는 자대를 왕으로 앉히려고 적후(狄后), 자대와 함께 융적과 내통하여 성문을 열어주었다. 융적은 도성으로 들어와 주양왕을 내쫓고 자대를 왕으로 세웠다. 이때부터 일부 융적은 육혼(陸渾)에서 살고 혹은 동쪽으로 위(衛)나라에 이르러 중원 나라들을 침략하여 혹독하게 약탈했다. 중원 사람들은 그들을 싫어하여 시인들은 시에서 말하길, “융적이 다스려졌다” “험윤을 정벌하여 태원(大原)에 당도했다” “숱한 수레를 내어, 저 삭방에 성을 쌓았다”라고 하였다.

 

소위 융적이 주의 도성에서 거주하다, BCE 5세기에 조나라가 태원에서 대까지 점령하는데, 강단·중제 유사사학이 조도라 날조하는 것은 신조선의 후국인 흉노가 산서성 남부에서 대까지 후퇴한 사실을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즉 소위 조도는 조나라의 것이 아니라 신조선이 산서성 남부까지 지배하고 있었을 때 남긴 유물이다. 그리고 이 산서성의 신조선은 사마천이 흉노라 부른 신조선의 후국(거수국)이다. 중국인들이 첨수도 일부를 흉노도라고 하는데, 이는 신조선의 산서성 후국의 칼돈을 의미한다. 흉노도 독자세력화하기 전까지는 신조선의 거수국이었다.

 

연나라와 연명도는 무관

연과 연명도는 무관하다. 보정시에서 출토된 연명도의 출토 위치가 요동고새 북쪽이라면 신조선의 영역이고, 요동고새 남쪽이라면 신조선과의 무역에 사용된 화폐일 것이다. 석가장의 연명도는 중산국의 것이다. 중산국이 중국의 열국에 둘러쌓여있을 때도 조선과 상업으로 연계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강단·중제 유사사학은 연명도의 고식(古式)이 하북성에서 발견되었고, 거푸집이 역현(소위 연하도)과 승덕에서 출토되므로 연나라가 주조한 화폐라고 주장하지만, 연소왕 이전 역현은 요동고새 북쪽으로 한후의 땅이고, 승덕도 당연히 신조선의 땅이다. 이 지역이 연명도의 발상지라는 사실은 역현 북경 승덕 지역이 신·말조선과 중국 인구밀집 지역을 연결하는 통로로서 조선 서부의 주된 무역로상에 있었음을 의미하며, 이로부터 적봉-승덕-북경-역현-상곡-대-태원-중국 서부지역으로 연결되는 길로 무역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압록강 상류에서 조나라에서 제작된 인상여과(藺相如戈)와 안양군검(安陽郡劍) 등이 발견되는데, 이것들은 이 무역로의 존재를 증명한다고 할 것이다.

 

소위 제명도도 제나라와는 무관

주활(朱活)은 소위 ‘제명도’(번조선 화폐)가 출토된 지점에 근거하여 齊(실제는 번조선)의 상업 교통망의 윤곽을 東西 횡단선 1개, 沿海 교통선 2개, 南北 종단선 3개의 총 6개의 교통선으로 추정하였다. 이를 토대로 박봉주가 그린 지도는 아래 그림과 같다. 주활이 설명한 대로 번조선은 상업이 발달하였으므로, 말조선과 번조선은 요동반도에서 산동반도로 늘어선 섬을 따라 항해하여 거래하고, 번조선은 말조선의 상품을 중국 동부에 유통하였을 것이다. 이 길은 조선의 동부 무역로라 할 수 있다.

 

[번조선의 상업교통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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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조선의 주요 수출품은 당시 최고급품으로 인정되었던 모피이고, 말조선은 신조선과 번조선 즉 동부 무역로와 서부 무역로를 통해 이를 공급하였을 것이다. 신조선은 말조선 모피의 중계무역 외에도 자체 생산한 모피와 말을 수출했다. 우거왕이 漢과 강화하기 위해 말 5천 필을 보내려 했다는 것은 전한 시기에도 예맥조선의 수출품이 말이었음을 의미한다. 춘추전국 시 말은 중국에서 처음에는 전차의 동력원으로서 후에는 기병의 필수품으로서 꼭 필요한 물품이었으며, 중국은 농산물 생산에서 비교우위가 있고, 신조선은 말 생산에서 비교우위가 있으므로, 신조선이 말을 수출하고 중국이 농산물을 수출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한반도 남부는 농산물 자급자족이 가능하고 모피와 같은 고가품을 소비할 수 있는 수요자가 적어 한반도 북부와 상거래가 미약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칼돈이 열도와 오키나와에서도 출토된다는 점에서 한반도 남부에서도 소규모로 사용되었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장박천은 칼등 부분이 각을 지고 꺾어지면 방절식, 부드럽게 꺾어지면 원절식이라 분류하고, 방절식은 연의 화폐이고, 원절식은 앞서 언급한 대릉하 유역에서 발견되는 청동예기를 근거로 기자조선 즉 중국이 많이 관련된 나라의 화폐라고 근거없이 주장한다. 기자조선이 실체가 없으며, 원절 방절의 구분은 유행의 변화로서 주조된 시기의 차이에 불과하며(방절식이 후기의 것이다) 방절식이 신·말조선의 모든 영역에서 발굴되므로 그의 주장은 소설에 불과하다.

 

(4) 『사기』는 조선을 숨기고 있다

 

흉노는 신조선의 제후국

사마천은 「흉노열전」에서 조선의 제후국들을 산융, 동호, 융적으로 기술하여 조선을 숨기고 있다. 산융은 제장성 북부의 번조선이다. 동호는 전술한 바와 같이 진번조선이고, 융적은 흉노이다. 동호와 융적(흉노)은 진조선의 제후국이었다.

「흉노열전」의 처음에 주나라와 견융의 관계를 기술하는데 견융은 당시 수도였던 풍호의 위치상 섬서성이나 그 서쪽의 동이족을 말한다. 이들은 신조선의 제후국이 아니며 흉노도 아니다. 사마천은 BCE 635년 융적이 주나라의 낙읍을 침입하였다고 한다. 이 융적은 위에서 언급한 자대를 주왕으로 세운 산서성의 신조선 후국으로 흉노이다. 진개의 진번조선 침략으로 무역로가 붕괴되자 흉노는 독립한다.

사마천은 『흉노열전』 처음에 견융, 산융, 융적(흉노), 동호 넷을 말하고 난 다음, 흉노의 두만과 묵돌, 묵돌이 BCE 3세기 말 동쪽의 동호를 멸하고 서쪽의 월지를 공격하고 연과 대를 침입한 사실, 흉노가 두만 이전 천여년의 역사를 가진 정치체라는 사실, 흉노가 한왕 한신을 BCE 201년 대에서 물리치고 태원까지 진출한 사실, 유방이 흉노에게 죽을 뻔한 사실과 흉노에 물품으로 평화를 구걸한 사실 등을 기술한다. 사마천은 흉노가 두만 이전 천 몇 백년(千有餘歲) 전부터 강약과 이합집산을 반복하였다고 기술하는데 이는 신조선 지역의 기후변화로 인해 신조선인이 남하하여 중국으로 들어온 시기와 일치한다. 신조선 서남쪽으로 남하하여 산서성에서 상업과 수렵과 목축으로 생활한 신조선 후국을 사마천은 흉노라 하면서 철저히 신조선과 분리하여 기술하고 있다. 사마천은 ‘흉노’도 조선에서 비롯되었음을 알았지만 이를 숨기기 위해, ‘흉노’가 조선과 관련된 국호가 있었을 것임에도 흉노로 기술하고 있다. ‘흉노’도 신조선의 거수국이었으므 좌현왕과 우현왕을 두었으며, 한이나 칸을 왕과 국가의 명칭으로 하였다.

 

산융=북융은 산동성 북부의 번조선

사마천은 「흉노열전」에서 BCE 707년 산융이 연나라를 넘어 제나라로 침입하였고, BCE 663년 다시 연나라를 침입하여 제나라와 산융이 싸웠다고 한다. 산융이 BCE 707년 제를 침입한 사실을 「제태공세가」에서는 북융이 제나라를 침공했다고 하여 북융이라 기술하고 있다. 『춘추좌전』도 북융이라 하여 이를 기록하고 있다. 「흉노열전」에 기록된 BCE 663년의 연 침입에 대해서도 『춘추좌전』에 산융이 연나라를 쳐서 노와 제가 의논했다고 동일하게 기술되어 있다. 사마천의, 산융이 BCE 707년 연나라를 넘어 제나라를 침입하였다는 말 중 연나라를 넘어 침입하였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산융이 연나라 북쪽의 나라라면 연나라를 멸망 시켜야 제나라를 침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BCE 707년과 663년 제나 연을 침입하는 나라는 산동성 북부의 번조선이다. 산융=북융이 산동성 북부여야 제나라를 공격하는 것이 가능하고, 연나라를 공격할 때 제나라와 노나라가 의논하는 것이 필요하다. 번조선이 연나라 남쪽을 치니까, 제와 노가 자기들도 위험해질까봐 번조선을 협공하는 것에 대해 논의했을 것이다.

사마천은 산동성 북부의 번조선을 지우기 위해 연나라 북쪽의 나라가 연나라를 거쳐 제나라를 공격했다고 사기치고 있다. 중국 동부의 번조선을 지웠기 때문에 제나라와 번조선의 전쟁을 연나라 북쪽에서 싸운 것으로 날조하여야 했다. 중국사는 우리나라와 관련하여선 대부분 거짓말이다. 번조선이 없었다면 제나라는 조선과 싸울 가능성이 없다. 제나라 북쪽 연나라 남쪽에 번조선이 있었기 때분에 제와 연은 번조선과 싸웠다.

사마천은 「제태공세가」에서 BCE 663년의 사건을 기록하면서 “제 환공이 연을 구하고 마침내 산융을 쳐 고죽에 이른 뒤 돌아왔다”고 하는데 여기서 고죽은 『한서』 「지리지」에서 영지현에 있었다 하므로 북경 남쪽 즉 연나라 북쪽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제환공이 고죽에 이르렀다는 「제태공세가」의 기술은 거짓이다. 이 거짓 기사를 근거로 고죽이 제환공의 침입 시 망했다는 견해도 있으나, 진개의 침입 전 연과 한후국의 경계가 보정시의 요동고새였으므로 전혀 근거 없는 주장에 불과하다. 고죽이 『한서』 「지리지」의 기술대로 영지현에 있었다면, 고죽국은 진개의 침입 시 망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신용하도 고죽국은 진개의 침입 시 망한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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