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한국학 기초 낭독 10

역사회복 2026. 4. 12. 06:30

https://youtu.be/GTkhP2nBvR0

 

(2) 연나라의 위치

 

(가) 연소왕 이전 연나라의 위치

 

연의 위치 사기치기는 한국사 날조의 기초

한국사를 날조하기 위해 가장 심하게 날조된 것은 연나라 위치이다. 연나라를 날조해야 조선의 영역을 축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연나라를 날조해서 대륙조선을 지우고 평양의 유물이 중국식이라고 하면서 낙랑군이 평양이라 날조한다. 대륙은 辰조선의 영역이고, 평양은 말조선의 영역이어서 대륙과 평양 모두 조선이므로 강단 유사사학이 말하는 중국식 유물이 평양에서도 나올 것이다. 연나라 위치가 왜곡되어 조선에 관한 모든 연구는 엉뚱하게 진행되고 있다. 중제 유사사학은 과거에 천진이 계라고 주장하였으나 당시에 천진의 상당부분이 바닷속이라는 사실이 알려진 후, 지금은 북경이 계라 주장한다.

 

『사기』가 말하는 연나라의 위치

연나라 위치는 『사기』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연은 약소국이었다. 연의 전성기는 연소왕 시기뿐이다. 연 전성기 직전 연의 영역은 조나라 무령왕과 소진의 말로 확인된다.

『사기』 「조세가」에 의하면, 무령왕 19년(BCE 307년경) 무령왕이 조의 국경을 말하면서 누완에게는 “북으로는 연이 있고, 동으로는 호가 있으며, 서쪽은 임호, 누번, 진, 한의 변경이다”라고 했고, 공자 성에게는 “우리나라는 동으로 황하와 박락수가 있어 제 중산과 그것을 함께 사용하고 있으나 배와 노의 사용은 없다. 상산에서 대 상당에 이르기까지 동으로 연과 동호의 변경이 있고, 서쪽으로 누번과 진, 한의 변경이 있다”라 말했다. 한편, 『사기』 「소진열전」에 의하면, 소진은 BCE 334년 연문후에게 “연나라는 동쪽으로 조선(朝鮮)과 요동(遼東)이, 북쪽으로는 임호(林胡)와 누번(樓煩)이, 서쪽으로는 운중(雲中)과 구원(九原)이, 남쪽으로는 호타하(嘑沱河)와 역수(易水)가 있습니다”라고 하고, “남으로 갈석(碣石)과 안문(雁門)의 풍요로움이 있고”라 하며, “조나라가 연을 공격한다면 출병의 명령을 발한 지 열흘이 안 되어 수십 만 대군이 동쪽 성벽쪽에 진을 치게 될 것입니다. 호타하와 역수를 건너 4, 5일 안에 도성에 이를 것입니다”라 한다.

소진이 말하는 갈석은 『사기색은』이 인용하는 『전국책』에 의하면 상산에 있는 산이다. 갈석이 상산에 있고 안문이 대 옆에 있으므로 무령왕이 말하는 국경과 소진이 말하는 국경이 일치한다. 즉 연의 남쪽과 서쪽 경계는 호타하이다. 소진은 서쪽으로 조나라가 아니라 먼 지역인 운중 구원을 말했는데 운중 구원은 조나라의 서쪽 변경이다. 소진은 북으로 임호 누번을 말했는데 「조세가」에선 무령왕이 임호 누번이 조나라의 서쪽 변경이라고 말하므로 임호 누번 역시 연에 접하지 않는 먼 나라를 가리키는 표현에 불과하다. 소진이 연의 경계도 아닌, 운중 구원, 임호 누번을 언급하는 것은 주변 강대국을 언급하는 것을 피하면서 연이 그곳에까지 어떤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측면도 있을 수 있다고 암시하거나 막연한 기대감을 주어 문후의 기분을 좋게 하려는 의도의 행위이고, 연의 실제 국경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연의 실질적 서쪽 경계는 태행산맥이다. 태행산맥 너머 안문까지 산악지역은 연의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에 불과하다. 연의 북쪽 경계는 갈석산과 나중에 漢이 수리하여 지킨 요동고새이다. 연의 수도는 소진의 말에 의하면 조나라가 침략시 호타와와 역수를 넘어야 수도에 온다고 했으므로 남역수 북쪽 요동고새 남쪽으로 추정되고 이는 호타하와 역수를 넘어 4-5일도 되지 않아 조나라가 수도에 올 수 있다는 소진의 말과 일치한다. 연의 동쪽 경계는 고대 황하이다. 소진이 말하였듯이 황하 동쪽은 조선이다. 연의 요동고새 북쪽도 조선이다. 여기의 조선은 진번조선이다. 사마천이 「조선열전」에서 “연이 강성해지기 시작하면서 일찍이 진번조선을 복속시겼다. 관리를 두고 장새를 쌓으려 하였다.”라고 하기 때문이다. 연의 북쪽이 요동고새를 넘어가지 못하는 것은 『한비자』 「유도편」과 『시경』 「대아」 한혁편으로 입증된다. 물론 한혁편의 내용은 서주 시기의 일이지만, 연은 연소왕 이전까지 제나라의 도움으로 나라를 유지하는데 급급했으므로, 서주 이후 연소왕 이전에 북쪽 경계를 확대시켰을 가능성은 없다. 또한 한혁편의 내용은 『한비자』 「유도편」이 직접 언급하는 경계와 일치한다. 고고학적으로도 연나라의 중심지역이라 날조되어 온 북경과 보정을 잇는 선 일대로부터 천진을 포함하는 지역에서조차 연나라 유적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한비자』 「유도편」은 연 양왕이 황하를 경계로 하였고, 계(薊)를 수도로 삼았고, 탁과 방성을 공격하였고, 제를 없애고, 중산을 평정했다고 한다. 『讀史方輿紀要』는 「順天府」 固安縣 동남 17리에 있고 이목이 연에서 탈취한(『괄지지』 인용) 方城舊城이 연소왕이 공격한(『한비자』 인용) 방성이라 한다. 『시경』 한혁편은 추족과 맥족을 다스리는 한후를 위해 연나라 백성이 韓城을 쌓았다고 한다. 후한 사람인 왕부의 『잠부론』도 주선왕 시 한후의 나라 부근에 연이 있었다고 한다. 『水經注』 「聖水 巨馬水」편은 거마하의 북쪽 지류인 聖水가 방성구성과 한성을 지나는데, 방성구성이 이목이 연에서 탈취한 방성이고 성수 옆 한성이 『시경』 한혁편의 한성이라 한다. 즉 요동고새 바로 위에 진번조선의 방성과 한후의 韓城이 있으므로 연소왕 이전 연의 북쪽은 요동고새일 수밖에 없다.

 

 

[연의 전성기 직전 영토]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나) 『시경』 한혁편의 韓城과 한후

 

한혁편의 한성이 고안현이 아니라거나 서주의 희성 제후라 하는 견해가 있어 이를 검토한다. 한혁편의 관련 내용은 다음과 같다.

 

溥彼韓城 燕師所完 以先祖受命 因時百蠻 王韓侯 其追其貊 奄受北國 因以其伯 實墉實壑 實畝實籍 獻其貔皮 赤豹黃羆

(저 큰 韓城은, 연나라 백성들이 완성시킨 것, 선조의 명을 받아, 이어서 百蠻을 다스리네, 왕은 韓侯에게 추와 맥을 주어, 북쪽 나라들을 다 받아, 그곳 제후로서, 성을 쌓고 해자를 파며, 논밭을 재고 세금을 정하였다, 왕에게 비휴가죽과, 붉은 표범 누런 말곰 가죽 바쳤다)

 

한혁편의 韓을 섬서성 한성현에 위치하였다가 춘추 초 晉에 멸망당한 희성 제후국 韓으로 보는 후한의 정현은 ‘燕師所完’의 燕을 安으로 보나, 이는 억지이다. 최근 한성현 지역의 고고학 발굴에서도 서주말 춘추초로 추정되는 묘지에서 芮國을 입증하는 예공(芮公) 예태자(芮太子) 등의 명문이 주조된 청동기들이 발견되어 정현의 억지를 입증하고 있다.

양관(楊寬)과 주서찬(周書燦)은 연을 남연으로 파악하고 희성 제후의 韓城을 河東郡 즉, 오늘날의 山西省 서남부 예성현(芮城縣)으로 보는데, 남연의 위치로 추정되는 하남성 동북부와 그들이 주장하는 韓의 위치인 芮城縣의 거리가 수백 킬로미터는 되어 억지일 뿐이다.

청대의 진환(陳奐)은 『춘추좌전』이 韓에 대해 희공(僖公) 24년과 양공(襄公) 29년의 두 언급이 각각 다른 두 희성 제후라 하면서, 양공(襄公) 29년의 韓이 하북성 고안현의 한이라 주장하나 『사기』가 「한세가」를 하나만 썼다는 점에서 억지일 뿐이다. 또 희성 제후국 韓이 섬서성이나 산서성에서 하북성으로 이동했거나 그 반대로 이동했다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으나 근거 없는 억지일 뿐이다. 즉 한혁편의 한성은 고안현의 한성이고, 희성 제후와는 무관하다.

한후는 辰朝鮮 남쪽 거수국의 왕이다. ‘其追其貊’의 추에 대해 까마귀 토템씨족이라 하는 견해와 예족을 의미한다는 견해가 있다. 追는 당산 지역의 예를 의미한다고 생각되나, 어느 견해에 의하든지 하북성 요동고새 부근의 朝鮮人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다) 연나라 위치의 날조

 

역현은 연소왕이 수도로 한 계이고 연하도는 호타하 남쪽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진개 침략 전 연나라의 수도는 남역수와 요동고새 사이이다. 한비자는 연소왕이 계(薊)를 수도로 삼았다고 했는데, 강단 유사사학은 薊를 북경이나 천진 부근이라 하고, 현재의 역현을 武陽 즉 연하도라 주장한다. 역현은 소왕의 영토확장 전 국경인 요동고새의 북쪽인, 중역수와 북역수 사이이다. 진개의 침략으로 북경까지 영토로 하자 연소왕은 수도를 요동고새 북쪽인 역현으로 옮겨 계라 하였다. 따라서 역현의 초기 유물은 진번조선의 유물이다. 역현 신장두 30호묘에서 한국식 꺽창과 흉노계통의 금장식이 출토되었다. 조선의 화폐인 칼돈의 고식(古式)이 하북성에서 발견되었고, 그 거푸집이 역현과 승덕에서 출토된다. 역현의 연나라 유물은 연소왕 이후의 것만 출토된다. 북경이나 천진 부근에 연나라의 수도는 없음에도 역현을 연나라의 하도로 사기 치기 위해 중제·강단 유사사학은 북경 부근을 계라 주장하고 있으나 근거나 유물은 없다.

연소왕이 남쪽으로 제와 중산을 평정하고 황하까지 경계로 하였다면 하도는 남쪽에 만들어야 한다. 북쪽으로 영토를 넓혔어도 약간 넓혔을 뿐이고 전국시대의 혼란기에 집중해야 할 곳은 제 조 등이 있는 남쪽이므로 원래 수도인 남역수와 요동고새 사이보다 북쪽에 하도를 만들었을 수는 없다. 강단 유사사학은 『水經注』 「역수」편의 “역수는 다시 동으로 무양성 남쪽을 지나간다. 역수가 관중에서부터 무부관을 지나 동쪽으로 흘러서 무수라고도 불린 것 같다. 그래서 연하도가 무양이라는 이름을 차지하게 되었다.”라는 문장을 근거로 역현이 연하도라 주장하나, 같은 「역수」편 뒤에 나오는 무양에 대한 설명으로 보아 이 주장은 오류임이 확실하다. 『水經注』 「역수」편은 『사기』 「조세가」의 “효성왕 19년(BCE 247년) 조와 연은 땅을 바꾸었다. 조는 연에게 용태(龍兌)와 분문(汾門)을 주고, 연은 조에게 갈성(葛城)과 무양(武陽)을 주었다.”라는 문장을 인용하면서 “즉 이곳이다.”라 하고 있다. 역현이 무양이라면 조는 무양을 받아도 아무 쓸모가 없는 땅이다. 연이 호타하를 경계로 조와 접하고 있다가 연소왕 때 남쪽으로 황하까지 영토를 더 넓혔는데, 연 영토의 북쪽에 있는 무양을 어떻게 실효지배할 수 있겠는가? 대로부터 상곡을 넘어 역현을 점유할 수도 없다. 태행산맥이 가로막고 있으며, 소진도 秦이 대와 상곡을 넘어 연을 공격하여 이기더라도 지킬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다. 연하도는 연소왕이 새로 넓힌 남부의 땅에 있어야 한다.

연소왕 이후 수도(연상도)인 계는 역현 즉 중제·강단 유사사학이 말하는 소위 ‘연하도’이고 북경이나 천진 부근이 아니다. 계(현재의 역현)의 옛 지명은 탁군이다. 역현(탁)은 하북성에서 상곡 대를 거쳐 중국 중심으로 가는 길의 입구인 요충지이므로 한비자가 탁과 방성을 대표로 말했을 것이다. 연소왕은 상곡을 확보하여 역현으로 수도를 옮겨도 된다는 자신감을 가졌고 점령지를 확실히 장악하기 위해 역현으로 수도를 옮겼으리라 추측된다.

 

진개의 동호침략과 조선침략은 동일한 사건이다

진개의 침략 후에도 연의 북쪽 영토는 크게 확대되지 않았다. 「흉노열전」의 진개 동호침략과 『위략』의 진개 조선침략은 같은 사건이다. 「흉노열전」이 밝힌 동호로부터 얻은 땅에 설치한 장성의 위치와 『위략』이 말한 조선을 공격하고 얻은 경계가 일치한다. 만번한이 요동이기 때문이다. 신채호도 『사기』 「조선열전」은 위만이 차지한 불조선만을 조선이라 쓰고, 신조선은 동호라 일컬어서 흉노전에 넣었다고 한다. 사마천은 진번조선을 동호라고 날조했다가 양심에 찔렸는지 「조선열전」에서 연이 진번조선을 침략했음을 인정하고 있다. 사마천은 진번조선의 열전을 써야 했는데, 이를 회피하기 위해 진번조선을 동호라 날조했다. 진번조선의 열전을 쓰면 서주의 한후에 대한 굴욕적 외교, 연이 조선의 속국으로서 성까지 쌓아준 역사 등 중국의 굴욕적 역사가 드러나야 하기 때문이다.

 

진개가 진출한 지역은 북경 부근까지

진개 침략 후 연이 쌓으려 한 장성을 몽염이 완성하였다. 「흉노열전」에서 연이 조양에서 양평까지(自造陽至襄平) 장성을 쌓았다고 하는데, 이는 163쪽 지도의 B-C를 말한다. 造陽은 상곡군의 조양(沮陽)을 말한다. 양평은 요동군의 양평을 말한다. 양평(襄平)은 요동군의 치소이고 조양(沮陽)은 상곡군의 치소이다. 따라서 연은 진개 침략 이후에도 조백하를 약간 넘어 요동군을 설치한 정도이다. 요동고새로부터, 5군을 방어하기 위한 장새까지의 거리는 아무리 과장해도 『위략』이 말한 이천여리가 될 수 없으나 연 동쪽의 조선을 고려하면 『위략』의 이천여리 표현이 가능하다. 연나라는 황하가 BCE 600년경 동쪽으로 약간 이동하여, 연 영토와 연결된 황하 서쪽의 좁고 긴, 연나라 동쪽 부분을 점령하였는데, 이 부분과 연나라 북쪽 북경까지 진출한 부분을 합하면, 『위략』의 이천여리도 설명이 된다. 『사기』의 천여리는 연나라 동쪽 부분을 고려하지 않은 표현이다. 조선이 북쪽과 동쪽에 있었으므로 「흉노열전」의 북쪽의 동호를 공격했다는 말도 가능하고, 『위략』의 조선의 서쪽을 공격했다는 말도 가능하다.

『기주협우갈석도』에는 요동을 제외한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가 기재되어 있다. 『기주협우갈석도』를 현대 지도와 비교하면 대요수는 조백하, 소요수는 온유하, 고수와 탁수가 합치는 강은 영정하, 역수에서 갈라지는 북쪽 강은 거마하로 볼 수 있다. 상곡은 지금의 래원현(涞源縣)으로 산골짜기이며 거마하 상류가 바로 남쪽을 지난다. 소진이 진이 연을 치기 위해선 대군(안문관)과 상곡을 지나야 한다고 했는데, 안문관에서 연으로 오기 위해선 涞源縣을 지나야 한다. 하북에서 중국 중앙으로 갈 때도 마찬가지이다. 즉 涞源縣은 산골짜기여도 전략적 가치가 있기 때문에 상곡군을 설치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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